항일 독립투사 박열
김일면 지음, 김종화 편역 / 국학자료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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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항일 독립투사 박열에 대한 영화를 보게 되었다. 평소에는 박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는데 영화를 보면서 박열이라는 독립투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어서 나에게는 새로웠다. 영화는 1920년대 일본에서 재일조선인 권익신장과 친일파 응징에 앞장선 그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박열18세에 일본으로 가서 흑우회 등 항일 단체를 이끌었고 1923년 일본 왕세자 폭살혐의로 투옥된 후 22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세계 최장의 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이 책은 1970년대부터 일본에서 위안부 논의 환경을 조성했고, 이후 한국의 위안부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재일한국인 평론가이자 철학자인 김일면 저자가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가서 살면서 박열의 애국적 희생과 항일투쟁을 감내하는 모습을 직접보고 많은 감명과 깨달음을 받고, 박열의 애국정신을 후세에 전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쓴 것이다.

 

박열은 190223일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에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9세 때 함창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서는 조선어 사용을 금지시켰고, 조선의 역사는 가르치지 못하게 하여 일본의 역사를 가르쳤다. 일제의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찬 교육은 소년 박열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했다. 15세에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입학했다. 당시 수재들만 모인다는 이 학교에서 박열은 우수한 성적을 보이기도 했으나 일본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공부한다는 것이 창피하기도 하던 차에, 사상이 건전치 못하다는 이유로 3학년 때 퇴학당했다. 19193·1혁명이 일어나자 시위에 나선 것은 물론, 지하신문을 발행하고 격문을 살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이 퇴학의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다.

 

1923, 관동대지진 이후 퍼진 괴소문으로 6천여 명의 무고한 조선인이 학살되었으며,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일본내각은 불령사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 청년 박열을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했다. “그들이 원하는 영웅이 돼줘야지일본의 계략을 눈치 채고 박열은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사형을 무릅쓰고 재판을 받는다. 박열은 사랑하던 아내이자 동지의 죽음을 가슴에 묻은 채 몇 차례 감옥을 옮기며 23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19451027일 복역 중이던 아키다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이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장문의 그의 글들과 일본인이 행하는 법정에서도 민족을 대표 할 만큼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했던 그의 기개는 왜 이제까지 몰라보았을까 싶을 만큼 당찬 울림의 소리들이었다. 2차 세계 대전의 끝과 함께 일본이 항복하면서 한국은 독립을 되찾았고, 이 날을 기념한 것이 오늘 날의 광복절이다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행한 악랄한 행위들을 자세히 알지 못했는데 이 책은 너무나도 상세하게 전해준다. 나라를 빼앗긴 결과가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지 배우게 되었다. 독립투사들의 노력과 국민들의 단결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독립의 기초가 되었다. 이 시기의 역사는 우리에게 희망과 저항의 정신을 가르쳐준다. 그의 감옥에서의 심문조서 내용, 법정 내용 등 어렵지 않은 내용이라 본문을 읽어 가는데 쉽게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던 책이기도 하다. 부록으로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의 박열 의사 기념관 홈페이지에 기록된 박열 연대표를 수록하였다.

 

'이 글은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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