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빌린은 에드워드가 거실 의자에 앉아서 창밖으로 정문까지 이어지는 길을 볼 수 있게 해 주었어요. 시계는 에드워드의 왼쪽 다리 위에 떨어지지 않게 균형 맞춰 올려놓았고요. 그리고 에드워드의 귀 끝에 살짝입을 맞추고는 학교로 떠났어요. 에드워드는 낮 동안 이집트 거리를 내다보고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를 들으며 애빌린을 기다렸죠.
에드워드는 사계절 중에서 겨울을 가장 좋아했어요. 해가 일찍 지고 거실 창문들이 어두워지면 자기 모습이 유리에 비쳤거든요. 그 모습이얼마나 멋졌는지 몰라요. 얼마나 우아한 자태였는지! 에드워드는 자신의멋진 모습에 끊임없이 감탄을 했답니다.
 저녁이 되면 에드워드는 툴레인 집안의 식구들과 함께 거실 식탁에앉았어요. 애빌린과 애빌린의 엄마 아빠, 그리고 할머니가 있었어요. 할머니의 이름은 펠리그리나였죠. 사실, 에드워드의 큰 귀마저도 식탁에 채닿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식사 시간 내내 밝고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식탁보만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어요. 하지만 식탁에 함께 앉기는 했어요.
그냥 앉아 있는 토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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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 멀리 던지기 대회‘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난쟁이‘라 불리는 작은 사람을 들어 올려 
매트리스 위로 패대기치는 대회다. 
멀리 던질수록 점수가 높다. 
관중은 사람 몸뚱어리가 던져질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한다. 
1995년프랑스 대법원은 이 대회를 금지했다. 소인권리협회등은 소인을 희화화하고 인격을 침해하는 놀이가 중단되었다고 환영했다. 그런데 정작 이 결정에 분노한 이가 있었다.
던져지는 당사자였던 바켄하임이었다.
 ‘난쟁이인 내가 달리 먹고살 길이 없으니 내가 선택한 일을 계속하게 해달라.‘
그는 이렇게 주장하며 법원 결정을 뒤집으려고 유럽인권위원회와 유엔에 진정했다. 그러나 두 기관 모두 그의 요청을기각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로 유명한 작가 페터 비에리는 여행중에 이 경기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의 책 `삶의 격`에 당시 상황이 담겨있다. 비에리가 거부감이 든다고 하자 곁에 있던 관중이 반문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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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우리가 말과 행위를 바꿀 이유가 된다. 오늘날 인간을 존중하고 있다고 여길 만한 태도와제도가 있다면, 그런 것들은 모두 어떤 가치를 추구한 결과로 과거와 달라진 것들이다. 구주와 킹의 시대와는 달라진변화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노력으로만들어진 결과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인권이라는 가치를 통해 인간됨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에 맞서는 공통 감각을 만든다. 그리고 그런 공통 감각에 기초해서 어떤 가치를추구하는 실천이 사회의 제도들을 조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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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단지 좋은 원칙과 규범을 준수하는 것만이아니라 상상력의 힘을 움직여서 아직 있지 않은 것을존재하게 해왔다. 상상력은 사람의 다채로운 이야기에귀를 기울이고 타자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역량이다.
삶에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이슈들의 복잡한 배후를상상할 줄 아는 역량이다. 타인의 관점, 특히 사회에서그저 다른 관점이 아니라 열등하고 무시해도 좋다고,
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있는역량이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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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아직은 어린 저의 네 자녀들
언젠가 자신들의 피부색이 아니라 자신들의 인격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이…."
한국인도 잘 알고 있고 미국 역사에서 위대한 연설 중에
선두로 꼽힌다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연설(1963년 직업과 자유를향한 워싱턴 대행진 연설)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서 말하는 피부색은 ‘무엇‘에 해당하고, 인격은 ‘어떠어떠한 사람‘에해당한다.
 킹 목사는 검은 피부색이라는 ‘무엇‘을 구실로 누군가가 
어떠어떠한 사람으로 사회관계에 등장하는 것을 훼방 놓고
 왜곡하는 불평등과 차별을 고발했다. 
반대로 그가 요구한 자유와 평등은 누구든 두려움 없이 
사회관계에 등장해 자신을 어떠어떠한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고 또 그것을 다듬어가고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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