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문기담 - 추리편 김내성 걸작 시리즈
김내성 지음 / 페이퍼하우스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나는 김내성의 작품을 좋아한다.  

몇 해 전에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추리소설 코너를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보게 된 '비밀의 문', 명지사에서 나온 헌책 포스를 짱짱하게 풍기는 새 책이었었다. 김내성과의 첫만남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지만 뒷표지 문구를 본 순간, 호기심이 동했다.  

'한국추리소설사에 있어 김내성의 존재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위대하다. 그가 남긴 업적은 그 시대적 상황과 비춰볼 때 가히 독보적인 개척자라 할 만큼 이 땅 위에 알찬 열매를 맺어놓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일본의 '에도가와 람뽀'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에 '에도가와 람뽀'가 있다면 우리 한국에는 김내성이 있다는 말 아닌가. 당장 책을 샀다. 하지만 한 번도 읽지 않았다. 아까와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내 깜냥으로 구할 수 있는 김내성의 작품은 명지사에서 나온 비밀의 문이 다인데, 이걸 읽고 나면 아쉬워서 어쩌나 싶어서 자꾸 책읽기를 미루게 되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페이퍼 하우스에서 김내성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멋지구리한 마인을 내놓았고, 마인 삽화본도 나왔다. 유불란과의 랑데뷰를 기대하며 마인과 마인 삽화본을 냉큼 샀지만 이번에도 책을 읽지는 않았다. 자꾸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만큼은 아니더라도 신작이 계속 나올 상황도 아니고, 고 김내성의 미발표 추리소설이 가득 든 괘짝이 발견된 것도 아닌데, 읽기가 너무 아깝다 이말이다.  

얼마 전에 연문기담을 도서관에서 빌렸다. 이번에야 말로 꼭 읽고야 말겠다며 책을 펼쳤는데, 첫 번째 작품의 첫 문장을 읽고 나는 깔깔거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도회의 가을은 빌딩가에서 하염없이 신음하고 있는 가로수의 낙엽소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니, 페이브먼트에 울리는 수심 많은 숫처녀들의 하이힐 소리에서부터 시작된다.'

국사 성적이 형편없었던 나로서는 일제 강점기라면 (단발령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상투를 틀고 치마 저고리를 입은 사람들이 연상되는데, 이 문장 하나로 그 옛날 경성의 분위기는 숫처녀들의 킬힐이 페이브먼트를 또각또각 울리며 지나가는 빌딩숲으로 바뀌고 말았다. 문체를 현대식으로 고치지 않고 당시 표현을 그대로 살려서 처음에는 잘 읽히지 않았지만, 읽다보니 왠걸, 글에서 운율이 느껴지는 것 같다... 사랑방 손님의 옥희가 옆에서 낭독을 해 주는 것 처럼 귀에 와서 착착 감긴다.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영어도 재미있다. 

'오라이 노 댕큐'를 본 순간 나와 신랑은 박장대소를 했다. 

이 문장은 또 어떤가.  

'이런 것들이 서로 얽히고 사리어서 조금 과장하게 표현한다면 마치 종로 네거리의 교통과 같은 일대 혼잡을 이루고 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마침 광화문을 지나던 참이라, 더 웃음이 터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순간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일제강점기의 현실은 너무나 암울하지만 한편으로는 '빌딩'이 들어서고 자동차가 다니고 양장을 하고 빠마를 한 숫처녀들과 빽구두를 신은 모던 보이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활기찬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문체와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재미있는 표현들이 코믹하지만 추리소설로서는 무척 훌륭하다.  

다섯 작품 모두 반전과 아이디어가 뛰어나다. 나는 특히 표제작인 연문기담이 좋았다. 말 그대로 연애편지에 얽힌 미스터리를 다룬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 아니라 콩트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타원형의 거울은 사건이 술술 해결되는 것 같지만 마지막 반전이 읽는 이의 허를 찌른다. 가상범인은 명탐정 유불란이 등장하는 것 만으로도 좋지만, 탐정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남는다... 벌처기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알리바이가 무너저버린 어떤 남편의 이야기이다. 마지막 작품인 비밀의 문은 살인광선을 개발한 강박사가 가장 소중한 것을 훔쳐가겠다는 도둑의 예고장을 받고 광선무기를 열심히 지키지만 정작 딸을 도둑맞는다는 이야기이다. 다섯 작품 모두 짧아도 스토리가 탄탄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책의 해설에는 요즘 나오는 한국 추리소설이 대부분 하드보일드나 역사추리소설에 국한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팩션은 좋아하지 않아 외국작품이든 한국작품이든 잘 읽지 않아 모르겠지만 '하드보일드'한 추리소설에 대해서는 정말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읽은 몇 편의 현대 하드보일드 한국추리소설은 추리소설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도 되나 싶을 정도로, 추리는 없고 폭력과 욕설만 난무했다. 하드보일드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을 읽고 있으면, 제대로 된 트릭이나 추리를 만들어 낼 수 없어 하드보일드를 쓴 게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 '설홍주와 왕도손' 명콤비의 활약이 기대된다. (이야기가 또 엉뚱한 곳으로...) 후속작은 언제 나올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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