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프랑스어의 실종 을유세계문학전집 95
아시아 제바르 지음, 장진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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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광장을 바라보는 사이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오르는데, 뭐랄까, 집단 기억이라고나 할까? 소위 난공불락이라던 우리 도시가 유린되었던 날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는 현재의 인간이다. 꿈속에서 헤매는 나와는 다르다. 그가 부언한다.

나는 가장 좁은 길, 간선 도로, 작은 광장, 막다른 골목에서 그리고 분수, 작은 사원, 교차로의 작은 예배당에서까지 예전의 나의 왕국을 찾으려 했소

작열하는 태양 아래 모든 장소가 모습을 드러냈고, 거의 쓸쓸한 회전목마의 이미지로 내게 다가왔다오! 하지만 나는 확인했소. 그곳은 거의 살아갈 수 없는 장소로, 유기되고 헐벗은 지역으로 그리고 치명적 파괴의 흔적이 남은 공간으로 변해 버렸소!

무너져 쌓인 돌 더미 구역의 건물들, 붕괴된 낡은 집들과 그 잔해들이 쓰레기 아래, 왕왕 불가피하게 쌓인 피라미드 형태의 폐기물과 짐승 똥 아래 잠들기 시작하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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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프랑스어의 실종 을유세계문학전집 95
아시아 제바르 지음, 장진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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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대화는 시골 사람들의 이야기를,격랑의 시대 이후 인근 마을에서 사라진 공포를 내가 청취하는 것으로 바뀌어 갔었소.

상실된 수많은 단어들과 부활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언어의 춤 같은 것을 다시 발견했다는 흥분에 싸여서 말이오.

애정에 찬 상냥한 말들, 시냇물 속의 하얀 원석 같은 말, 내가 하나하나 탈곡해 내는 당신의 말, 다시 되풀이되는 말, 뿐만 아니라 내 어린 시절의 말, 내 어머니의 말이.

당신은 이제 여기에 없고 짝을 이루었던 우리의 어법은 희미해지고 있는데, 당신이 이곳, 이 해변 앞 냉기 도는 집으로 나를 찾아온다면, 나는 과연 북역에서처럼 다시 달콤한 말로 당신을 감쌀 수 있을까?

20년간의 망명 생활이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자신의 뒤로 사라져 가는 어두운 흐름으로 보이게 될까? 그리고 잃어버렸던 예전의 장소들이 다시 가까워질까?

옛 알제,자지라트 엘 바흐자*,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오랫동안 난공불락이었던솔방울 모양의 그의 도시,내 전설적인 해적의 도시의 명암 속에서 그 길을, 오늘 아침 여정(旅程) 중에 추억에 잠기는 역사의 편린을 그는 다시 보러 간다.

다양한 신분은 반대편 세상에서 밤을 보내는 베르칸, 되돌아올 생각을 하지 못하는 망명자에게 끊임없이 찾아들었다. 그 한없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유일한 기항지는 북역의 호텔에서 보내는 주말 저녁이었는데, 애인의 팔에 안긴 채 떠나온 도시 알제에 대해 말할 때면, 즉각 그 후미진 장소는 잊히고 말과 애무가 남았고, 종국에는 쾌락이 대체했다.

어린아이였던 그는 이 굼뜬 사람들 무리 속에 잡다하게 뒤섞인 과일 향과 석쇠에 고기를 굽는 냄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고함과 애가(哀歌), 끝없이 고뇌하는 이집트인의 사랑 노래들 속에 빠져들고 싶었던 적이 수없이 많았다

이어서 망명 생활 중에도 그는 이 과거 세계의 소우주는 영원히 그 현실을 간직할 거라 생각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곳이 어디인가?

귀향 이후 그는 자신이 잠에서 덜 깬 것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이 뒤섞이고, 게다가 머나먼 과거, 그의 유년 시절 혹은 프랑스 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과거가 흔들리고,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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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황야의 이리 을유세계문학전집 104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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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 한가운데 있으면서 모든 감정과 사고에서는 이방인이었다.

처절한 경험을 할 때마다 내 자아는 산산조각 났고, 그때마다 심연의 힘들이 나의 자아를 뒤흔들고 파괴했다. 그럴 때면 각별한 애정을 쏟으며 돌봐 왔던 내 삶의 부분이 나를 배반하고는 사라져 갔다

이 황야의 이리는 죽어야 했고, 혐오스러운 자신의 실존을 자기 손으로 직접 끝장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새롭게 자기성찰이라는 치명적인 불길에 용해되어 자신을 변화시켜야 했고, 가면을 찢어 버리고 새로운 단계의 자아 형성의 길을 가야 했다.

삶은 내가 세상을 헤집고 다니는 거칠고 힘겨운 여정에 다시 나서게 했고, 새로운 고통과 죄악의 탑은 높아만 갔다.

시민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의 삶은 그렇게 뒤흔들릴 때마다 지속적으로 하강곡선을 그렸고, 정상적인 것, 허용된 것, 건강한 것에서 더욱 멀어져 갔다

노련한 주식 투기꾼이 투기, 이윤 획득, 확신 상실, 동요, 파산의 단계를 잘 알고 있듯이, 나는 그것들을 잘 알았다. 나는 이제 정말 이 모든 과정을 한 번 더 맛봐야 한단 말인가?

그 모든 고통, 그 모든 엄청난 곤경, 자아의 저속함과 무가치함에 대한 그 모든 통찰, 실패에 대한 그 끔찍한 불안, 그 모든 죽음의 공포를? 그 많은 고통이 반복되는 것을 피하고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는 것이 더 현명하고 간단하지 않을까?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더 간단하고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 누구도 내가 석탄 가스나 면도칼 또는 권총의 도움으로 삶을 끝장내고 이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정말 자주 그리고 심하게 맛보아야 했던 쓰라린 고통의 과정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기쁨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자살이라는 것은 어리석고 비겁하며 초라한 것일 수도 있고,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비상구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출구가 있다면 가장 초라한 비상구라고 해도 간절히 바랄 것이다

하나의 가면이 벗겨지고 하나의 이상이 붕괴할 때마다 이에 앞서 소름 끼치는 공허감과 적막감, 이 끔찍한 옥죄기와 고독, 관계의 단절, 사랑과 소망이라고는 없는 황량한 지옥이 엄습해 왔는데, 나는 지금 이런 것을 다시 겪어야 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직업을 잃고, 가정을 잃고, 고향까지 잃고, 모든 사회 집단에서 국외자로서 혼자가 되었고, 그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많은 의혹의 눈길만 받으면서 일반 대중의 견해나 도덕과 언제나 혹독한 갈등을 빚었다.

죽고자 하는 결심은 한순간의 기분이 아니라 잘 익어 있는 단단한 과일이었다. 그동안 서서히 자라나 이제 무거워진 그 과일은 운명의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고, 다음 운명의 돌풍이 불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도시, 이 세상 어딘가에 죽음으로써 나에게 상실감을 안겨 줄 그런 사람이 살고 있을까? 내 죽음을 조금이라도 애도할 사람이 어딘가에 살고 있을까?

삶은 지독하게 쓴맛이었다. 내 안에서 오래전부터 자라 온 역겨움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생각, 삶이 나를 마구 튕겨 내고 내던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굶주린 개처럼 한 조각의 온정, 한 모금의 애정, 한 방울의 인정을 즐겼다

황야의 이리 하리는 감격해서 슬쩍 미소를 지었고, 건조한 목구멍에는 침이 고였으며, 자신의 의지와 반대로 감상성에 굴복했다.

나는 2분 전까지만 해도 이 저주스러운 세상을 향해 분노의 이빨을 드러냈으나, 지금은 존경할 만한 속물 하나가 이름을 한 번 불러 주고 악의 없는 인사를 건네자 금방 감동하고 들떠 그가 말하는 모든 것에 맞장구를 쳤고 새끼 돼지처럼 뒹굴면서 한 줌의 호의와 존경, 우정이라는 먹이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학문적인 수다를 떨고 타인의 행복한 가정생활을 바라봐야 하는 의무감을 수반하는 교수의 저녁 초대가 성가신 부담으로 다가왔다

지금 내가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서 교수 집을 방문해 다소 가식적인 덕담을 함께 나누는 등 본래 원치 않는 이 모든 일을 하듯, 대부분의 사람은 매일, 매시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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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호모 파버 을유세계문학전집 113
막스 프리슈 지음, 정미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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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생각없이 선택했던 책에서 이런 재미를 느낄줄이야
읽으면서 뭔가 오이디푸스가 연상되더라니..
역자해설에서 그 내용이 나오니 내심 반가워 거봐했다
이책 술술 잘읽힌다

을유문화사의 책을 이제 파야하나..
아주편안한 죽음도 좋았고 황야의 이리도 괜찮으니..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은 아직도 진짜 작가들의 이야긴가
아닌가 하며 읽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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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호모 파버 을유세계문학전집 113
막스 프리슈 지음, 정미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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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 잠긴 내 몸.
난 자살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다고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바뀌느냐 말이다. 이 시간, 내가 원한 건 아예 내 존재가 사라지는 거였다!

면역 혈청 덕분에. 난 한나에게 왜 통계를 믿지 않고 대신 운명이나 그따위를 믿느냐고 물었다.

한나는 다른 나이 든 여자들과 사뭇 달랐지만, 그녀의 처진 피부와 눈물주머니, 잔주름 진 관자놀이가 눈에 띄었다. 주름이 나한테는 별문제 되지 않았지만 유독 눈에 들어왔다.

한나가 애만 바라보며 살고 있고, 애가 언제 돌아오나 노심초사했으며, 무남독녀를 난생처음 세계여행 보내는 게 엄마 입장에서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건 당연했다

자기한테는 백 명의 딸이 아니라 딸이 하나다(다 아는 사실). 그리고 그 딸은 다른 사람들처럼 단 하나의 삶을 갖고 있다(그 역시 아는 사실). 그녀 자신도 망쳐 버리긴 했지만, 단 하나의 삶을 가질 뿐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항상 실행에 옮겼는데, 여자로서 상당한 일 아닌가.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

인생을 다시 살 수 있거나 그래야 한다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남자들을 사랑할 거란다.

남자는 (그녀 말로는) 여자를 비밀스러운 존재로 원하는데, 자신의 몰이해에 열광하고 흥분하기 위해서란다.

바닷가에는 벌거벗은 사내아이들이 있고 그들의 젖은 피부 위로 태양이 내리쬔다. 열기가 피어오른다. 난 앉아서 시가를 피운다. 하얀 도시 위로 검보랏빛 먹구름이 끼고 빌딩 위로 마지막 햇살이 꽂힌다.

그들의 건강은 거짓이고 젊음도 거짓이다. 자신들이 늙어 간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그들의 여자들. 시체에도 화장을 하고 어디서나 죽음과도 외설적인 관계를 맺는다.

난 휘파람을 분다.
미국에 대해 분노한다!
오슬오슬 한기를 느끼며 그네를 탄다.
미국식 생활방식이라니!
난 다르게 살기로 결심한다.

엘프라도 거리.
푸르스름한 여명. 아이스크림을 파는 상인들. 가로등 아래, 담장 위에 무리 지어 앉은 여자애들의 웃음소리.
타말레.
바나나 껍질에 싼 옥수수다. 길거리에서 파는 간식이다. 걸어가면서 먹으니 시간이 절약된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지만 산 자들의 행렬 속에서 송장보다 못한 꼴이었던 난 호텔로 돌아가 수면제를 먹을 참이었다.

풍화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치아는 내게 늘 골칫거리였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전체적인 구성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재료는 졸작이다. 육신은 재료가 아니라 저주다.

바람을 동반한 갑작스러운 폭우다. 거리는 경보라도 울린 듯 순식간에 사람들이 사라지고 차양 막에서는 폭격 맞은 소리가 난다. 밖에서는 아스팔트 위로 빗물이 튄다. 마치 수선화 화단이 갑자기 생겨난 것처럼 하얗다. 특히 가로등 아래가.
그네를 타며 세상을 바라본다.
지금, 여기가 좋다.

엘프라도 거리를 걷는다.
늙은 플라타너스가 늘어선 구시가는 바르셀로나의 람블라 거리와 비슷하다. 저녁의 산책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멋진 사람들로 넘쳐나는 가로수길. 난 걷고 또 걷는다. 달리 할 일도 없잖은가.

취할 때까지는 꾸밈이 없고 인류의 보호자로서 어깨를 툭툭 치며 낙관적이다. 그러다가 취하면 발작적으로 울부짖고 백인종을 다 팔아 먹고 엉덩이들 사이가 텅 빈다. 나 자신에게 분노가 인다!
(다시 한번 삶을 살 수만 있다면.)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난 행복했다. 지금 보고 있는 모든 것을 떠나게 될 테지만 잊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안다. 그네를 타며 아케이드의 밤을 보고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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