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에 잠긴 내 몸. 난 자살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다고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바뀌느냐 말이다. 이 시간, 내가 원한 건 아예 내 존재가 사라지는 거였다!
면역 혈청 덕분에. 난 한나에게 왜 통계를 믿지 않고 대신 운명이나 그따위를 믿느냐고 물었다.
한나는 다른 나이 든 여자들과 사뭇 달랐지만, 그녀의 처진 피부와 눈물주머니, 잔주름 진 관자놀이가 눈에 띄었다. 주름이 나한테는 별문제 되지 않았지만 유독 눈에 들어왔다.
한나가 애만 바라보며 살고 있고, 애가 언제 돌아오나 노심초사했으며, 무남독녀를 난생처음 세계여행 보내는 게 엄마 입장에서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건 당연했다
자기한테는 백 명의 딸이 아니라 딸이 하나다(다 아는 사실). 그리고 그 딸은 다른 사람들처럼 단 하나의 삶을 갖고 있다(그 역시 아는 사실). 그녀 자신도 망쳐 버리긴 했지만, 단 하나의 삶을 가질 뿐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항상 실행에 옮겼는데, 여자로서 상당한 일 아닌가.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
인생을 다시 살 수 있거나 그래야 한다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남자들을 사랑할 거란다.
남자는 (그녀 말로는) 여자를 비밀스러운 존재로 원하는데, 자신의 몰이해에 열광하고 흥분하기 위해서란다.
바닷가에는 벌거벗은 사내아이들이 있고 그들의 젖은 피부 위로 태양이 내리쬔다. 열기가 피어오른다. 난 앉아서 시가를 피운다. 하얀 도시 위로 검보랏빛 먹구름이 끼고 빌딩 위로 마지막 햇살이 꽂힌다.
그들의 건강은 거짓이고 젊음도 거짓이다. 자신들이 늙어 간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그들의 여자들. 시체에도 화장을 하고 어디서나 죽음과도 외설적인 관계를 맺는다.
난 휘파람을 분다. 미국에 대해 분노한다! 오슬오슬 한기를 느끼며 그네를 탄다. 미국식 생활방식이라니! 난 다르게 살기로 결심한다.
엘프라도 거리. 푸르스름한 여명. 아이스크림을 파는 상인들. 가로등 아래, 담장 위에 무리 지어 앉은 여자애들의 웃음소리. 타말레. 바나나 껍질에 싼 옥수수다. 길거리에서 파는 간식이다. 걸어가면서 먹으니 시간이 절약된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지만 산 자들의 행렬 속에서 송장보다 못한 꼴이었던 난 호텔로 돌아가 수면제를 먹을 참이었다.
풍화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치아는 내게 늘 골칫거리였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전체적인 구성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재료는 졸작이다. 육신은 재료가 아니라 저주다.
바람을 동반한 갑작스러운 폭우다. 거리는 경보라도 울린 듯 순식간에 사람들이 사라지고 차양 막에서는 폭격 맞은 소리가 난다. 밖에서는 아스팔트 위로 빗물이 튄다. 마치 수선화 화단이 갑자기 생겨난 것처럼 하얗다. 특히 가로등 아래가. 그네를 타며 세상을 바라본다. 지금, 여기가 좋다.
엘프라도 거리를 걷는다. 늙은 플라타너스가 늘어선 구시가는 바르셀로나의 람블라 거리와 비슷하다. 저녁의 산책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멋진 사람들로 넘쳐나는 가로수길. 난 걷고 또 걷는다. 달리 할 일도 없잖은가.
취할 때까지는 꾸밈이 없고 인류의 보호자로서 어깨를 툭툭 치며 낙관적이다. 그러다가 취하면 발작적으로 울부짖고 백인종을 다 팔아 먹고 엉덩이들 사이가 텅 빈다. 나 자신에게 분노가 인다! (다시 한번 삶을 살 수만 있다면.)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난 행복했다. 지금 보고 있는 모든 것을 떠나게 될 테지만 잊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안다. 그네를 타며 아케이드의 밤을 보고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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