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맥파이 살인 사건
앤서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뒷자리에 실린 어머니가 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그도 익히 아는 태도를 보이며 전혀 반가워하지 않았고 모든 감정을 강철 뚜껑으로 꾹 누른 채 냉랭하게 겉으로만 예의를 갖추었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레인지 위에 달린 전등 이야기였다. 그냥 평범한 전구인데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는 1주일 전에 고쳐 주겠다고 했다. 그는 요즘도 문제가 생기면 종종 로지 하우스를 들여다보았다.

사람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시골 유지와 할리우드 여배우라고나 할까. 산초 판자와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고나 할까. 작위가 있는 쪽은 그였지만 사실 그녀에게 더 잘 어울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녀의 면상을 견딜 수가 없었어. 그 아들 녀석도 그렇고. 늘 느끼던 거였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괴팍한 구석이 있었어. 종종거리면서 다니던 거하며……. 나는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을 하고서 말이야.」

프랜시스는 신기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고 경멸과 혐오 사이 어디쯤에 해당하는 표정이 언뜻 그녀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망자들 을유세계문학전집 101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김태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녀는 밤이면 손끝이 피가 나고 갈라 터져 맨살이 드러날 지경이 되도록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어, 낮에는 어떻게든 그 흔적을 가리려고 애쓰는 것이다

지독한 실패 뒤에 서글프게 박수갈채를 구걸하는 서커스 광대 같은 모습이었죠. 불쌍한 인간 같으니.

그녀의 눈앞에는 해변 사건에 이어지는 어떤 극적 장면이 갑자기 기억의 섬광 속에 포착되어 나타난다. 바다가 보이는, 더 자세히 특정할 수는 없는 어떤 호텔 방 침대의 위. 뜻하지 않게 그 장면이 나타나자 그녀는 네겔리가 심히 부끄럽게 느껴진다. 그는 그녀 속으로 고통스럽게 밀고 들어왔고, 짧고 둔탁한 신음소리와 함께 침 두 방울이 그의 입에서 떨어지며 그녀의 등을 찰싹 때렸다

앗, 이제 정말. 차가 도착하는 소리. 쿵 하고 차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 자갈길의 저벅저벅 소리. 맑은 초인종 소리. 한 번, 두 번, 세 번(예전에 스위스에서 늘 그랬듯이 세 번). 여행 가방이 티크재 바닥에 떨어지며 내는 편안하고 둔탁한 소리.이다! 하고 외치는 친숙한 소리. 바로 이것. 젠체하는, 목구멍에서 살짝 길게 끄는 스위스식 ‘ㅣ’ 음. 세상에, 그가 정말 왔다. 그녀는 생각한다. 이제 그가 안으로 들어올 것이고 손목 돌리기로 모자를 소파에 던질 것이다.

구두는 마치 제 나름의 독자적 삶을 살기라도 하듯이 차례차례 소파 탁자 아래로 사라진다.

그 옆에는 좌판을 전부 스코틀랜드의 다양한 씨족 상징 문양으로 씌워 놓은 신고딕 양식의 의자들이 있다. 약간 으스스하기까지 하다. 집이 마치 영화 세트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잠깐만. 그는 그의 애인을 위해 뭘 가져왔다. 그는 진짜 얼마나 기쁜지 어쩌고저쩌고.

그는 그녀에게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마치 잃어버린 둘만의 시간을 속성으로, 퀵모션으로라도 만회해야 한다는 듯이, 쉴 새 없이 얘기를 늘어놓는다

그냥 서로 무시하고 지내게 마련이다. 윤회의 길은 다른 동류의 인간과 함께 나누기에는 너무 고되고 끔찍한 것이다. 망자들은 끝없이 고독한 피조물이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유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혼자 태어나서 죽고, 또 혼자서 다시 태어난다.

카메라는 다다미 바닥에 맞는 높이로 내려와 있다. 일본의 공간 감각에 의자와 침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더 높은 관찰자 시점, 그러니까 카메라 일인칭 눈의 시점은 전적으로 서양식 시각이라는 것.

그는 몸을 뒤로 젖혀 등받이에 기대고 천재적인 것을 볼 때 늘 그러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아마카스가 <풍차>를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은밀하게, 프로테스탄트적 태도로 기뻐한다.

아마카스는 영화관 맨 뒤 구석에서 자기를 향해 혀를 내밀어 신호를 보내는 나신에 붉은 물감을 칠한 젊은 여자를 못 본 척했다.

그녀가 밤 화장을 끝냈을 때, 그는 가터를 풀지도 않고 코를 골면서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있다. 게으른 금발의 파충류 같은 모습. 가발은 그의 옆에 화장 자국이 묻은 베개 위에 놓여 있다. 그녀는 그 부숭부숭한 물건을 들어 올렸다가 손가락 사이로 털이 미끄러져 내리게 한다

그녀는 실수로 벽의 발목 높이에 튀어나와 있는 먼지흡입 장치 헤드를 차서 집 전체의 중앙 진공청소 시스템을 가동시킨다. 신경을 건드리는 기계음이 집의 지하층에서 올라오면서 네겔리의 드르렁 소리와 합쳐져, 정말 못 참겠다. 꼬박 두 시간의 잠을 빼앗아간다.

그는 두 사람 사이에서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파인더에서 (그냥 삶 속에서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약혼녀와 일본인 사이에 오가는 내밀한 감정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가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담뱃불을 붙여 주는 모습이라니.

클럽은 가볍게 오른쪽으로 올리고, 하늘은 예쁜 구름으로 구획되어 있는데. 그렇게 그는 그녀를 뒤에서 느슨하게 안고 그녀의 손을 골프채 그립 주위로 이끈다. 믿기지가 않네. 네겔리는 생각한다.

그냥 카메라를 내리고,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한쪽 엄지손톱을 물어뜯지만 초승달 같은 손톱 끝은, 제기랄, 뜯길 생각이 없다.

아직 추측의 영역에 있는 문제가 여기서 지금 빨리 둘 사이에 해명될 수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그는 바닥없는, 노란, 떨리는 무기력의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아마카스가 다가오자 바로 그에게서 손을 뺀다. 네겔리는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손 안쪽이 완전히 축축하고 끈끈하다.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 침대 위에 벌거벗은 몸을 뻗고 누워 있는 마사히코와 이다의 기괴한 환상극을 관찰한다. 그는 보고 보고 또 본다. 이다의 굴종적 비명 속에서 ? 입 속에 쑤셔 넣은 하얀 아마포 조각이 그 소리를 억제한다 ? 마사히코가 마침내 그녀 위에 올라간다.

그들이 함께 내는 이 뻔뻔하고 구역질 나는 신음소리,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이 굴욕. 구멍에 대고 있는 그의 눈 속 담청색 홍채에 방 안의 광경이 비쳐, 마치 그의 시선 자체가 이 혐오스러운 장면을 만들어 내는 영사기인 것만 같다.

그는 셔터를 당기고 필름 카트리지가 슬랩스틱과 비극이 뒤엉킨 이 조야한 혼합물로 꽉 채워질 때까지 기다린다. 마사히코와 이다의 비명을 재생할 수 있는 사운드트랙이 없는 것에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끔찍한 상상이 그렇지 않아도 이미 타격을 입어 쇠약해진 신경에 극도의 고통을 가한다. 마치 신경이 산(酸) 속에 푹 담긴 느낌이다.

그는 잊어버리고 모자를 빌라에 두고 왔다. 저런, 기막히게 상징적이네.

네겔리는 고개를 들고, 침을 꿀꺽 삼킨다. 여린 눈물 두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주인 여자는 공개적인 감정의 분출에 민망해하며 바닥을 내려다본다. 마음씨 좋은 작가는 식탁에 앉아서 안경을 벗고, 주인 여자에게 사케와 잔 두 개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다.

신의 저편에서 울리는 그 커다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요지부동의 농밀한 남성적 정력으로 자살에 대한 굳은 결의를 품고 이를 신념으로 삼은 자뿐이다.

네겔리는 노래하는 피의 합창이 귀에 쟁쟁히 울리는 가운데, 주먹을 움켜쥐고 의자에서 일어나 주인 남자를 거칠게 밀친다. 그러고는 입구에 가만히 놓여 있는 짐을 집어 들고, 잠겨 있지 않은 미닫이문을 격하게 열어젖히며 거리로 나간다. 나가자. 무조건 여기서 떠나자.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태평양은 평화롭다. 증기선의 스크루가 대양 속에서 단조롭게 돌아간다. 마치 수족관 속에 들어 있는 거품기 같다.

공은 벌써 쌩하고 총알처럼 창공으로 날아가고, 결국에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게 되어 아무 의미도 없이 저 멀리 바닷속에 빠져 버린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멜랑콜리한 증기선의 고동 소리가 출발을 알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망자들 을유세계문학전집 101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김태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모두 너무나 무서워, 우린 모두 너무 외로워, 우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보증해 줄 우리 바깥의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사라져 버린다. 반드시 사라져 버린다. 마치 그림자들이 해시계를 지나가듯이.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진실이다.

- 포드 매독스 포드

아스팔트의 움푹 팬 자리에 물이 가득했고, 그런 물구덩이마다 저녁때면 식당의 화려한 조명 간판과 초롱들이 고집스럽게 비치고 있었다. 박자도 없이 철벅이는 끝없는 소낙비 줄기에 부서지고 쪼개진 인공의 빛.

하얗고 고운 뱃살을 살짝 째자마자, 칼날은 벌써 사내의 부드러운 피부 조직을 통과하여 내장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 한 줄기 핏물이 옆쪽에 무한히 섬세한 붓질로 그려진 족자, 가케지쿠 위로 날았다.

그는 긴장과 초조 속에서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곧 현실이 될 것만 같은 파국적 재앙이 닥쳐오고 있음을 감지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손끝을 빨고 물어뜯었다. 피부에 생채기가 나고 빨개져 가는 동안, 그는 비행기가 갑자기 하늘에서 번쩍하면서 터져 버리는 것을 거듭 상상했다.

눈 속에서 먹이를 찾으며 스스로에 대한 어떤 의식도 없이 우아하게 납빛 하늘을 떠다니는 까마귀들을.

그는 섬세하고 주의 깊었으며, 신경이 말하자면 피부 바깥에 나와 있는 타입이라서, 얼굴이 빨리 빨개졌다. 확고한 세계상에 대한 건강한 회의는 그의 천성이었다.

그는 몸이 전반적으로 처지고, 둔중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정없이 닥쳐오는 덧없음의 공격 앞에서 무언의 멜랑콜리는 계속 늘어만 갔다.

그 손은 그를 안심시키고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고, 그가 그렇게 원하던 느낌, 잘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을 주었다.

아버지는 평생 동안 그를필립이라고 불렀다. 45년 동안 아버지는 유머로 서툴게 위장된 잔인함을 그에게 투사한 것이다

그는 낄낄거리며 말하기를, 자기가 이미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 닦기를 거부했고, 삶의 마지막 1년 동안은 오로지 초콜릿과 설탕을 탄 따뜻한 우유만을 마셨기 때문에 구강은 푹푹 썩어들어 가는 중인데 이제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것, 최종적인 말을 속삭이고자 한다는 것이다.

중화 제국에서 한 범법자가능지처참의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죄수는 야만적이게도 칼로 이리저리 저며졌고, 그렇게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성 세바스찬처럼 황홀경 속에서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아마카스는 마치 만지면 죽는 독이 그 사진에 발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경악하며 사진들을 떨어뜨렸다. 재현하고 복사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어떤 사건은 우리가 그 일이 재현된 것을 보기만 해도 스스로 거기에 연루된 것 같은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네겔리의 카메라는 때때로 석탄 아궁이에, 장작더미 위에, 동그랗게 머리를 땋은 하녀의 뒤통수에, 금빛 솜털이 먼지처럼 앉은 뒷목에 오랫동안 별 이유 없이 머물러 있다가, 열려 있는 창을 통해 마법처럼 전나무 숲 쪽으로, 눈 덮인 산정으로 미끄러져 나아갔다.

지금 그가 눈앞에 둔 것은 저 혐오스러운 자살 영화였다. 실제 죽음의 기록. 아마카스는 손을 까딱하여 영사기를 끄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탁상용 선풍기의 눅눅한 바람 속에 앉아 필름을 독일에 보내지 않고 차라리 정부 지하 문서 보관소에 처박아 두고 잠가 버린 다음 영영 잊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영화 속 장교의 고통은 매혹적인 동시에 참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끔찍한 것이 뭔가 더 높은 것, 신적인 것으로 거룩하게 변용되는 것. 흠 없는 죽음의 동경을 지닌 독일인들은 이를 잘 이해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1984년 열린책들 세계문학 17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유는 예속

그런 뒤 계속해서 그 밑에 적었다.

둘 더하기 둘은 다섯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과거는 바꿀 수 있다. 과거는 결코 바뀐 적이 없었다.

오세아니아는 이스트아시아와 전쟁을 했다. 오세아니아는 항상 이스트아시아와 전쟁을 했다. 존스, 아론슨, 루더포드는 죄를 지어 처벌되었다. 그는 그들의 죄를 부인할 만한 사진을 결코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아무리 애써 헤엄쳐 봐도 뒤로 계속 밀려나, 갑자기 마음을 바꿔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헤엄치려고 마음먹는 것과 같았다.

어떤 경우에도 예정된 일은 일어났다. 그는 왜 자신이 반항해 왔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쉬웠다

〈그가 마루 위를 떠다닌다고 《생각하고》 동시에 나 또한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난다.〉

어떻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신을 통하지 않고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사건은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고 잘 해결되었다. 더 이상의 고통도, 공포도 없었다. 그의 몸은 건강하고 튼튼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1984년 열린책들 세계문학 17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윈스턴은 그 교회가 몇 세기에 지어진 것인지 궁금했다. 런던에 있는 건물들이 언제 세워졌는지 안다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책을 통해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건축물로부터도 역사를 배울 수 없었다. 동상, 비명, 기념비, 거리의 이름, 과거에 빛을 비춰 주는 것은 무엇이든 체계적으로 날조되었다.

그 여자가 그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이곳까지 그를 미행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당원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부터 수킬로미터나 떨어진 인적이 드문 뒷골목을 걷다가 그와 우연히 마주친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고통과 공포의 생물학적 무용성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항상 얼어붙어 무기력하게 되어 버리는 인간 육체의 배신행위에 대해 일종의 경악감이 들었다

끝은 항상 똑같은데 왜 그런 고통을 견뎌야 하는가? 왜 며칠 혹은 몇 주 안에 생명을 거둘 수 없는가? 수색을 피하거나 자백을 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일단 사상죄의 올가미에 걸려들면 주어진 날짜에 처형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공포가 무엇 때문에 미래를 가로막고 있는가?

그에게 〈우리는 어둠이 없는 곳에서 만날 거요〉라고 말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둠이 없는 장소는 볼 수는 없고 단지 예지(豫智)에 의해 신비롭게 참여할 수 있는 상상 속의 미래였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운 나쁘게도 빌어먹을 파슨스가 옆에 털썩 앉아 깡통 냄새가 나는 스튜보다 더 지독한 땀 냄새를 풍기며 증오 주간 준비에 대해 한바탕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너무 지루해서 정신이 흐릿했지만 공회당 저녁 집회에서 게으름 피우겠다는 충동은 한 번도 일지 않았다.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을 보고 살아남고 싶은 욕망이 그의 마음속에서 용솟음쳤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위험한 짓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였다.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 23시 ─ 어둠 속에서 조용히만 하면 텔레스크린으로부터도 안전했다 ─ 가 되어서야 그는 이런 생각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머리는 거짓과 증오로, 배 속에는 얼음 덩어리로 가득 차 있는 멍청이라고 생각했었다.

거절하는 것은 위험했다. 윌셔가 오라고 했는데도 가지 않고 혼자 앉아 있는 여자 옆에 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이었다. 그는 반갑게 웃으며 앉았다. 그 멍청한 금발의 얼굴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윈스턴은 그 얼굴의 한가운데를 곡괭이로 정확히 내리찍고 싶은 망상에 사로잡혔다.

기차를 30분 탄 후, 역을 나와 왼쪽 길을 따라 2킬로미터쯤 가면 문설주가 없는 문이 있으며, 들판을 가로질러 길을 따라가면 풀이 자란 좁은 길이 나오고, 관목 숲 사이로 오솔길이 있으며, 거기에 이끼 낀 고목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는 것 같았다.

손바닥, 손목 아래의 부드러운 살을 만졌다. 그냥 만지기만 했는데도 눈으로 보는 것처럼 훤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당과 당의 모든 것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며 썩은 건초 냄새를 맡은 말이 재채기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건강한 것처럼 보였다.

새는 자신의 재주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결코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지 않고 음을 바꿔 가며 몇 분 동안 계속 노래를 했다. 때때로 몇 초 동안 노래를 멈추고 날갯짓을 한 다음 얼룩진 가슴을 부풀려 다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저 새는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 보고 있는 친구도 적도 없다. 무엇 때문에 저 새는 외로운 나뭇가지 끝에 앉아 허공에 대고 노래를 쏟아 내고 있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