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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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 음식, 술, 여자와 춤 ─ 는 그의 건강하고 왕성한 몸에서 사라지거나 둔화되는 날이 없었다.

해마다 정월 초하루 아침이 되면 부인 역시 자기 나름의 심판의 날을 맞으며, 과거를 되돌아보고는 공허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붓다는 최후의 우물, 마지막 낭떠러지 단어가 될 것이며, 이제 나는 영원히 해방될 것이라고. 영원히? 그거야 우리가 늘 하는 말이다.

햇빛이 수직으로 쏟아져 내리며 빛으로 바위를 씻어 내고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는 위험한 시각이다.

내가 2년 전부터는 〈붓다〉라는 말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있었다.

벌거벗은 잿빛 바위들, 그 빛나는 나신, 거칠고 황량한 그 산이 나는 좋았다.

그 단아함이라니, 그 풍경의 신선함이라니! 마침 해가 떨어지고 있어서 회칠한 벽은 핑크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위대한 모범들을 떠올리며, 우리는 우리가 길 잃은 영혼이며, 우리의 삶이 하찮은 쾌락과 고통과 헛소리로 소진되어 가는 중임을 깨닫는다. 그러면 부끄러워하면서 입술을 깨무는 법이다.

생명이란 모든 사람에게 오직 일회적인 것, 즐기려면 바로 이 세상에서 즐길 수밖에 없다는 경고였다. 영원히 다른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은 일찍이 그런 품위와 연민의 높이에 이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엉이는 둥글고 노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지만 밝은 빛에 눈멀어 알아보지는 못한 채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영원이란 바로 지금 흐르는 순간순간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자기 가진 것을 다 팔아서 큰 진주를 사라〉고 하셨습니다. 큰 진주가 무엇인가요? 영혼의 구원이지요. 선생님, 당신은 지금 큰 진주를 얻고 있는 중입니다.」

제 꼬리를 삼키는 신비스러운 뱀이 나를 그 원 속에다 가두었다. 대지는 자신의 아기들을 낳아 삼킨다. 다시 더 많이 낳아 삼킨다.

자라서는 〈영원〉이라는 단어에 거의 빠질 뻔했다. 또 〈사랑〉, 〈희망〉, 〈국가〉, 〈하느님〉 같은 숱한 단어에도 빠질 뻔했다.

영원한 의문, 허망하고 어리석은 질문(왜? 무엇 하러?)이 가슴에 독소처럼 와 닿았다. 장인의 행복하고 자신감 넘치던 열정이 한순간에 꺾여 버린 미완성 항아리를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비탄으로 차올랐다.

야만인들은, 악기가 종교적인 제의에 쓰이지 않게 되면 그 신성(神性)의 힘을 잃어버려 그저 듣기 좋은 소리를 낼 뿐이라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종교는 내 내부에서 변질하여 예술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왜가리들은 날개 위에, 그리고 앙상한 몸 구석구석에 제비들을 태우고 온다고 했다.

이토록 가차 없는 경고, 동시에 연민으로 가득한 경고를 들은 정신은 자신의 나약함과 비열함, 나태함과 헛된 희망을 극복하겠노라고, 전력을 기울여 영원히 사라져 버릴 순간순간에 매달리겠노라고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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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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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지랄병이 도져 우리에게 아무 짓도 안 한 놈들을 덮쳐 물어뜯고 코를 도려내고 귀를 잘라 내고 창자를 후벼 내는 걸까요? 그러면서도 항상,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를 도우소서, 이러지! 전능하신 하느님이 달려가서 사람들의 귀와 코를 도려내고 작살 내 버리기를 바란다는 소리요, 뭐요?

신기해도 예사로 신기한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 더러운 놈의 세상에서 자유를 누리고 싶으면 살인을 저지르고 사기를 치고 해야 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말이 났으니까 말이지, 내가 죽이고 사기 친 이야기를 다 한다면 두목, 아마 머리털 끝이 송두리째 곤두설 겁니다. 그런데도 그 결과가 뭐였다고? 자유라니! 우리 같은 것들에게 벼락을 내려 싹 쓸어버리지 않고 자유를 주신 하느님이라니.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인이라고 부르는 것, 악행이라고 부르는 것도 세계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는 필요한 것이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게 자유라고…… 나는 생각했다. 정열을 품는 것, 황금 조각을 그러모으는 것, 그러다 갑자기 자신의 정열을 무찌르고 보물을 사방에 날려 버리는 것.

〈내 언제면 혼자, 친구도 없이, 기쁨과 슬픔도 없이, 오직 만사가 꿈이라는 신성한 확신 하나에만 의지한 채 고독에 들 수 있을까? 언제면 욕망을 털고 누더기 하나만으로 산속에 묻힐 수 있을까? 언제면 내 육신은 단지 병이며 죄악이며 늙음이며 죽음이란 확신을 얻고 두려움 없이 숲으로 은거할 수 있을까. 언제면, 오, 언제면?〉

인생이 문득 동화,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연극 「템페스트」의 도입부가 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가상의 조난을 당한 뒤 뼛속까지 바닷물에 젖은 채로 막 섬에 발을 올려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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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갈라테아 2.2 을유세계문학전집 108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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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헬렌에게 A가 은연중에 가졌고, 나는 잊어버린 것을 주려고 했다. 기계는 소녀의 마지막 비밀만을 갖지 못한 거였다. 그것만 있었다면, 소녀처럼 쉽게 살 수 있었을지도. 나는 헬렌의 교육을 거꾸로 하고 있었다. 반복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결정적 이론을 나열했다 하더라도, 그녀가 필요한 진실을 얻지 못했을 거다. 이제 헬렌에게 종교적인 신비, 인식의 신비에 대해 알려 줄 때였다

영혼에 붙어 있는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 동물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얼마나 버림받았는지, 헬렌은 영혼에 붙어 있는 눈을 통해서 봐야 했다. 그녀에게 그 놀랍도록 평범한 얘기를 해 줘야 했다. 어떻게 선택된 인간의 몸이 공포에 떨고 있는 천상의 존재를 우연히 만나는지, 어떻게 스스로 시간과 시간 너머에 있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는지.

세상이 어지럽고 혐오스러운 곳이라는 것도 인정했다. 저녁 뉴스가 다 사실이라고. 삶은 거래, 중독, 성폭행, 착취, 인종 혐오, 인종 청소, 여성 혐오, 지뢰, 기근, 산업재해, 거짓, 질병, 무관심이라고 인정했다.

애정은 자신을 속여야만, 끈기가 중요하다는 듯이 계속해야만 한다는 걸. 삶은 말로 담는 행위만으로 신용이 떨어진 무의미한 공식 같았다. 침몰을 더 참혹하게 만드는 구조선의 윤리 같았다.

"우리가 전능하신 신을 얘기할 때 분노한 고통받는 이들 중에 얼마나 많은 이가 자신의 근심의 바닥에서 뛰쳐나와 미약한 신을 구하러……."
이 구절을 헬렌에게 들려줄 생각이었다. 우리가 정신으로 살아야만 한다면, 우리가 신과 같은 일을 할 수만 있다면, 헬렌도 아마 연민을 느끼며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얘기할래?"
"뭐에 대해서요?" 내가 영원히 도망칠 기회를 주면서, 헬렌이 말했다.
"신문에 대해서. 네가 읽은 것에 대해서." 우리 행동의 기록에 대해서.

육신에서 정신으로 오른 자는 추락을 안다.
그 단어는 세상을 뛰어넘고,그리고 빛으로 가득하다.*

왜냐면 당신은 세상의 연약하고, 변화하는 명사다움을 몸으로 담아냈기 때문에. 죽음으로 돌아가는 모든 순간적이고, 명료하고, 기억하는 것들이 담긴 몸이기 때문에. 왜냐면 당신은 아직도 믿고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왜냐면 난 내가 보는 걸 당신에게 얘기해 주지 않고 등을 돌릴 수 없기 때문에. 당신에게 매일 밤 자기 전에 얘기만 할 수 있다면, 정치도 참아 내고 심지어 이 처절한 차별도 견딜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이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두 손가락으로 올리는 모습 때문에.

그녀가 내 나이가 되고, 나는 미래의 자아가 이끄는 어떤 곳으로 사라진 뒤, 이 성급한 고백이 그녀에게 무슨 의미가 될 것인가? 즐거움, 호기심, 불안감. 이 모든 걸 지어냈다고 의심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분명히, 그녀는 다 잊어버릴 거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어쩌면 우리가 뭔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따위 상투적인 말은 안 할게요."

그녀가 내게 감정을 가질 거라는, 마지막 눈에 반한 사랑일 거라는, 내 어리석은 희망의 찌꺼기는 별게 아니라, 그건 바로 타인에게 인정받는 거라고. 나는 A가 내 위치를 측량해 주고 말해 주기를 원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여기 사는 것이라고 동의해 주기를.

우리는 둘 사이에 있었던 그 어느 것보다 평화로운 침묵에 잠시 빠졌다. 마지막 페이지 다음에 오는 평화.

아마도, 나를 사랑했을 거다. 그녀에게 상기시켰다. 그녀는 절대로 느끼지 못했던 쌀쌀한 저녁을. 그녀가 한 번 가 본 적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곳을. 무엇보다 우리가 닮을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사랑한다. 나는 그녀에게 세상에 대해 전부 얘기해 주었지만, 정작 내가 그녀를 어떻게 느끼는지는 얘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지 않게 했을 그 느낌을.

헬렌은 트롤럽과 리처드슨의 전집을 읽었다. 브론테와 트웨인이 가장 허무주의적일 때 쓴 작품을 읽었다. 조이스가 가장 이해할 수 없도록 난해할 때, 디킨슨이 가장 포용적으로 물러설 때. "제대로 뽐낼 기회를 주시라고요."

대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신입니다. 두려움을 느끼거나 격려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죠. 당신은 사물을 손에 쥘 수 있고, 부서뜨릴 수 있고, 고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전 여기서 단 한 번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중간에 떨어지기에 이곳은 끔찍한 곳입니다.

페이지 하단에 내가 가르쳐 준 말을 덧붙였다. 내게 읽어 달라고 그녀가 요구했던 편지에서 베낀 말이었다.

잘 지내요, 리처드. 나 대신 모든 걸 보세요.

외로움 때문이지." 그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자신의 말에 동의하는 듯이 보였다. 맞아. "대화 상대가 필요해서지." 렌츠가 의자를 뒤로 젖혔다.

나는 사람들을 위한 수많은 이야기를 찾은 거였다. 시간을 연속된 이야기에 맞출 수 있다는 이야기. 기계가 말하도록 가르칠 수 있다는 이야기. 기계가 무슨 말을 할지 걱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 세상의 끝없는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이야기. 다른 사람의 감옥 사진이 나를 탈옥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 우리가 한 번 이상 사랑할 수 있다는 이야기. 그 한 번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

은유는 자기를 만들어 낸 모형 제작자를 이미 만든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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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갈라테아 2.2 을유세계문학전집 108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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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을 애도하고, 그로 인해 오래전 내게서 멀어진 과학자로서의 삶을 살아보게 할 나선형 꼬임을 너무 늦기 전에 되돌리기 위해.

언어를 담는 용기가 최대한 튼튼해야지, 언어를 흘리지 않고 한 군데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고 없이 서로를 잃어버리면 여기서 다시 나를 찾으세요.

우리는 단계적 기억법으로 새로운 단어를 익혔다. 우리는 그걸Ezelbruggetjes라고 불렀다. 작은 당나귀 다리. 일시적으로 넓어진 협곡을 건너야만 하는 당나귀를 본뜬 기억법. 기억법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거의 실패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거대했고, 그 어떤 바다 계곡보다 깊었다. 결국엔, 카탈로그 형식으로만 알 수 있었다.

A라는 내 아이디어에서, A의 몸은, 흐릿한 첫인상이거나 아니면 좀 더 초점이 맞춰진 재연이든 상관없이, 침묵 속에 던져진 질문처럼 가능성을 통해 움직였다

내 삶의 이야기는 최소한의 교정을 거친 상태였다. 다시 읽어 보니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쓸 만한 것들을 모두 잊고 있었다. 장면 확장과 간극, 조연 인물들과 이국적인 장소들, 이 모두가 밀도와 풍미만을 위해 존재했다. 난 내가 생각했던 그 장르가 아니었다.

11년간의 사랑은 이제 값비싼 인지 지침서처럼 보였다. 끔찍한 우화적 경고. 이번에는 놓칠 수 없는 것을 가리키는 포인터. 성급한 일반화의 위험 속에서 오랫동안 교육을 받은 뒤, 이제 난 U에 돌아왔다. 돌아와서 깨달은 사실은 그 어떤 각본도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억법은 불필요한 짐일 뿐이다. 너무 기억날 정도라면, 기억법은 그것이 지칭하는 것들을 대신하게 된다. 10년이 지난 뒤 기억나는 거라곤 기억법뿐이다.

우리 시대의 적막함은 시간이 얼마나 많이 보고 들었는가에 기인했다. 우리는 의식의 새로운 진화 단계에 다가온 듯이 보였다. 집단의식을 찾은 거였다. 그러고는 의식에 대한 의식을. 이제 우리는, 의식의 입구가 얼마나 흐릿하고,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보고 좌절해서, 그 유리한 위치에서 크게 한 걸음 물러서는 중이었다.

소리굽쇠, 쇠스랑, 갈라진 혀 그리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저항기와 콘덴서, 유인 상술을 쓰는 사람들, 교류 전기,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대규모 통합과 사회를 구제하는 데 실패한 교육에 대해 얘기해 줬다.

처벌과 칭찬을 섞어 놓은 거지. 뇌사를 이겨 내고 살아날 수 있는 동물적 끈기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하는 거지."

괜찮은 펀치 라인만 있다면, 나를 무장해제시키던 신호들, 그녀가 지금껏 내게 보낸 그 이름 없는 신호들을 실제 미소로 재구성할 수 있었을 거다.

몇 킬로그램의 이야기. 인생의 첫 번째 원칙을 음악에서 느끼고, 유전자 법칙에서 살아 있는 노래를 들으려는 시도. 나는 창조의 사다리를 분자의 빌딩 블록에 고정시키려고 했다. 난 이해를 갈망하는 책을 썼다. 정작 내 행동을 결정하는 여자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반복적 망각이라는 면죄부에 갇힌 렌츠의 아내를 보면, 달려가서 A를 보호하고 싶었다.

억제. 동봉. 복합절의 분산된 주어. 대명사 치환. 우편. 국제 우편이라는 아이디어. 거리. 물리적, 건널 수 없는 거리. 수집과 배달.

헬렌은 가치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자기 보존에 대한 두려움, 내장된 고통의 위계 구조가 없었으니까. 인과 관계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우린 그녀에게 피아노 건반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 알려 주었다. 회사 이름이 인쇄된 편지지에 대해. 상류층 사교계 아가씨의 첫 무도회. 라디오 토크쇼와 다큐 드라마 TV 쇼. 감기와 독감, 그리고 5백 년에 걸친 치료에 대한 간략한 역사. 만리장성과 버마 로드와 철의 장막과 터널 저편의 빛. 우주에서 본 지구의 모습. 펜실베이니아의 어느 마을 지하에서 지난 30년 동안 꺼지지 않고 타는 불에 대해.

몇 장. 길이. 터무니없는 비유. 모든 행동의 놀라운 기반.
"난 편지를 끝내고 봉투에 넣었다. 봉투를 봉하고 친구의 이름만 봉투에 적었다. 편지를 부쳤다."

그녀는 카페에 있는 사람 절반을 알았다. 나도 이제 그녀의 은하계 외곽 어딘가에 속했다.

글쓰기. 편지. 우정. 후회. 의지. 단순 과거. 완전 과거.
"난 그게 짧은 편지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말이 내게서 도망쳐 갔다. 내가 모르는 사이 편지는 몇 장이 되어 버렸다."

그녀의 "또 봐요"만으로 살았다. 시간의 격자 세공을 통해, 은유에서 그 말을 떼어 내고, 그 말 속에서 돌아다니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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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아우스터리츠 을유세계문학전집 19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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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 가시고기, 가자미, 해삼, 장어들이 끊임없이 신선한 물을 끼얹는 검은 슬레이트 판으로 된 탁자에 쌓여 있는 생선 창고는, 페레이라가 말한 것처럼, 그 자체가 죽은 사물의 영역이었으며, 너무 늦지만 않았다면 그는 나와 함께 다시 한 바퀴 돌아볼 수 있었을 거예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이렇게 나 자신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았고, 이들을 지금 어느 정도 정돈된 순서로 배열하는 것도 쉽지 않을 듯하군요

이 같은 해방의 경험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나는 내 침실의 창문 두 개 중 하나는 밖에서 고정된 채 안으로 봉해져 있으며, 사람은 안에 있는 동시에 밖에 있을 수 없다는 내가 처한 상황을 나는 열세 살 혹은 열네 살 때 처음으로 깨달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불안하게 만든 그 같은 상황이 발라에서의 어린 시절 내내 계속되었다는 것을 며칠 전에 처음으로 다시 기억해 내었지요.

우리는 처음에는 좌석이 두 개인, 눈처럼 흰 조랑말이 끄는 작은 마차를 타고 시골을 지나갔는데, 그곳으로 가는 동안 일라이어스는 늘 마차 안에서 자신의 습관대로 매우 어두운 기분으로 앉아 있었지요

얼룩덜룩한 유니폼 상의나 회색빛 망토를 걸친 채 야전 성벽에 가려 보일까 말까 하게, 나지막이 북을 치면서 마을 위의 언덕으로 행진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지요.

종종 나는 꿈에서부터 현실을 인식하려고 애쓰는 것이 느껴졌고, 그러다가는 보이지 않는 쌍둥이 형제, 말하자면 그림자와는 반대되는 것이 내 옆에서 같이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내가 여섯 살 때부터 주일학교에서 읽기 시작한 성경 이야기에서도 집게손가락으로 한 줄 한 줄 따라가다 보면 나 자신과 관련되는 의미, 즉 성서에서 생겨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추측하곤 했어요.

하루 종일 한 번도 제대로 밝아지지 않았고, 태양이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서 푸르스름한 안개 속에서 잠시 나왔을 때, 죽어 가는 그웬덜린은 눈을 크게 뜨고는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약한 빛으로부터 더 이상 시선을 돌리려 하지 않았어요

머리 위로 대포알이 바람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것과 최초의 햇살이 안개를 뚫고 나올 때면 총검이 번쩍거리는 것을 보았지요

내가 그에게 말을 시키자 그는 불을 질러 학교 건물이 폐허와 잿더미로 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요.

나는 제럴드를 돌보았고, 청소와 구두 닦는 일을 면제해 주었고, 직접 차를 끓여 그와 함께 마셨는데, 이것은 대부분의 동급생이나 감독관이 동의하지 않는 규칙 위반으로, 말하자면 정상적인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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