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지금 외치는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은빛 날개를 펴고 새해의 눈부신 하늘로 날아오르는 경쾌한 비상의 시작! 벼랑 끝에서 날게 하소서.
빨강색 연필로 토끼를 그린 톨스토이의 그림을 보고 어른들이 놀렸다. "얘야, 세상에 빨간 토끼가 어디 있니?" 그러자 톨스토이는 이렇게 답했다. "세상에는 없지만 그림 속에는 있어요." 세상에는 없지만 그림 속에는 존재하는 것
이어령은 "고정관념은 상상력의 적"이라고 경고한다.
학교는 배움을 주는 기본 공간이지만 학교의 가르침이 편견과 고정관념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사람은 원래 백지 상태의 ‘생것’인데 학교가 이 순연한 존재를 틀에 가두고 상상력의 날개를 꺾어버린다는 것이다.
"기러기들처럼 날고 싶습니다. 온 국민이 그렇게 날았으면 싶습니다. 소리 내어 서로 격려하고 대열을 이끌어가는 저 신비하고 오묘한 기러기처럼 날고 싶습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은빛 날개를 펴고 눈부신 하늘로 날아오르는 경쾌한 비상의 시작, 이 절망의 벼랑 끝에서 모든 사람이 함께 살아갈 날개 하나씩을 달아주소서.
아직도 우리 교육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생각이나 능력을 밖으로 캐내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어떤 이념들을 머리와 가슴속에 주입시키는 경우가 많다. 교육이 아니라 세뇌 작용이다.
벽을 넘는 방법, 360도 열린 초원에서 자유롭게 달릴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어두운 지하 갱으로 들어가 남들이 지금껏 보지 못한 빛의 원석을 캐내는 연장
에티오피아의 흙은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형제다. 우리는 그대들을 환대했으며 귀한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흙을 단 한 알갱이도 줄 수 없다.
양들은 제각기 높낮이가 서로 다른 방울 소리들을 냈다. 그것이 한데 어우러져 공기가 되고, 바람이 되고, 물방울이 되고, 수정 구슬이 되어 굴렀다. 풀 냄새처럼 향기로운 음악이었다.
그래서 존 던은 말했다.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에 모래 한 알과 작은 흙덩어리가 바다에 휩쓸려 가면 그만큼 대지는 가벼워지고 작아진다"고….
사람들은 그것이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인가를 궁금해했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죽은 자를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고개를 숙여 슬픔을 표시했다.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내 대륙 안의 모래가, 흙이 바다로 휩쓸려 떨어져 간다는 의미다. 그의 고통은 나와 무관하지 않고, 그의 생명은 나와 똑같은 샘물에서 흘러온 것이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왜 미국의 젊은 청년 로버트 조던은 그와 관계도 없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죽어야만 했는가. 그 제목이 소설의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아니, 종처럼 울리게 한다.
무엇인가가 내 몸을 흔들어주지 않고는, 누가 밖에서 공이로 때려주지 않고는 내 안에 고여 있는 생각의 소리를 울릴 수 없다.
같은 통나무인데도 자르는 방식에 따라 이렇게 전연 다른 무늬가 생겨나는 것처럼 우리네 삶의 무늬도 그와 같이 변한다. 슬픔이 즐거움이 되기도 하고, 가난이 풍요로 바뀌기도 한다.
새로운 방식으로 내 삶의 통나무를 잘라보고 찍어보고 깎아보면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나라로 들어가는 통과사증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의 몸은 아주 놀라울 정도로 적은 영양분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이미 용도가 폐기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한 번도 쓰지 않은 것들이 쓰레기나 다름없이 보관되어 있다. 그중에는 아주 오래전에 잊힌 물건들이 치매에 걸린 노인처럼 누워 있기도 한다.
버려야 한다. 우리도 아이처럼 매일 자란다. 그러니 조금 전까지 통했던 상식과 지식들이 쓸모없는 것으로 변한다.
우리를 괴롭히던 고정관념들, 집념이나 원한도 모두 버려야 한다.
샘물은 퍼 써야만 새 물이 고인다. 고여 있는 지식도 퍼내야 새로운 생각이 새 살처럼 돋는다.
사람들이 자신을 매장하기 위해 던진 비방과 모함과 굴욕의 흙이 오히려 자신을 살린다. 남이 진흙을 던질 때 그것을 털어버려 자신이 더 성장하고 높아질 수 있는 영혼의 발판으로 만든다.
뒤집어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삶에는 거꾸로 된 거울 뒤 같은 세상이 있다. 불행이 행이 되고, 행이 불행이 되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의 변화가 있다. 우물 속같이 절망의 극한 속에서 불행을 이용하여 행운으로 바꾸는 놀라운 역전의 기회가 있다.
착오가 1930년대에 밝혀져 수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뽀빠이 신화가 오늘날까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점이다. 시금치를 과도하게 먹으면 근육이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신장에 결석증이 생긴다는 의학적 진실 앞에서도 뽀빠이 신화는 꺾이지 않고 세계를 제압하고 있다.
소수점 한 자리를 잘못 친 데서, 글자 한 자를 바꿔 읽는 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없었던 허구의 세계가 창조된다.
풀은 무엇인가를 붙이는 접착력이 생명이다. 붙지 않는 풀은 이미 풀이 아니다. 그러나 약품을 잘못 혼합하여 붙었다가도 떨어지는 불량 풀이 만들어졌을 때 3M 같은 메모지용 풀이 발명된 것이다.
Salvador Dali나 뒤샹Marcel Duchamp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처럼 혹은 신문지의 글자들을 모아 시를 쓴 미래파 시인들처럼 우연을 잡아라. 그리고 허구의 F를 향해 낚싯줄을 던져라.
인간은 벽을 만들었다. 허허벌판에선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벽 속에서는, 감옥이나 동굴에서처럼 살아갈 수 없다. 벽에 의지하고 벽에 반발하는 앰비버런스ambivalence(모순)에서 회화가 생겨난다.
어원적으로도 그림이라는 말, 긁는다는 말, 그리고 글이라는 말, 그리고 그리움이라는 말, 그것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그림은 긁는다에서 나온 말이다. 그림은 그리움에서 나온 말이다. 그림은 글에서 나온 말이다. 벽을 긁는 글과 그림과 그리움은 벽을 넘는다.
쥐가 1988년 미국에서는 정반대로 암을 비롯해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하버드 마우스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1544년 미국 대륙에 처음 침입한 지 440년 만에 생물 특허 제1호를 얻은 하버드 마우스야말로 BT시대가 열리고 지재권의 문이 활짝 열렸음을 상징한다.
특허품이 된 쥐는 한 마리에 100달러씩 팔린다. 그러니 우글거리는 쥐, 쥐덫을 놓아 잡기가 바쁜 쥐를 지식재산 마우스로 만들어놓으면 한 마리당 100달러씩 벌어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외짝 신발을 우리는 안다. 달마의 신발이다. 면벽面壁 참선하던 달마, 양梁나라 무제武帝의 부덕과 오만함을 간하다 죽음을 당한 달마, 그리고 관 속에서 다시 살아나 신발 한 짝만 남기고 서쪽으로 떠나간 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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