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그레인지 코플랜드의 세 번째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9
앨리스 워커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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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고요를 산산이 부수어뜨릴지 모를 아기를 곁에 두고는 하얗게 내리는 눈이나 화려하고 따스한 리무진의 편안함은 물론이고 상상 속의 사랑스러운 아내가 베푸는 충실한 보살핌에 빠져들기란 불가능했다

그녀는 독을 먹인 아기를 데리고 공터의 어둠 속으로 나갔고, 아침에야 브라운필드에게 발견되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을 무릎을 꿇고 보낸 듯 아기에게서 떨어져 쓸슬하니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브라운필드는 어둠 속에 혼자 있으면서도 깊이 잠든 아들을 만져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를 가장 증오했다.

소리라고는 울퉁불퉁하고 축축한 도로의 어깻죽지를 밟는 그의 발소리뿐이었다.

그는 그녀를 넘어뜨려 밟고 우뚝 섰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녀를 일으켜 세우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그녀가 소녀 시절 아버지의 집에서 보낸 마지막 날 밤. 죄악으로 얼룩진 그녀의 인생을 그 땅 고유의 정의로 돌려놓고자 하였던 그날 밤.

난 점쟁이지 신이 아니에요. 한계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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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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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신이여, 나는 강을 건너,
집회의 땅으로 가고 싶어라.
? 흑인 영가

하나뿐인 둥근 의자에 걸터앉은 채, 머릿속에 짜 놓은 거짓말을 한 번 더 반추했다. 아내는 께느른하게 눈을 떠 남편을 보고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 이 여자를 홀대해 온 뒤가 켕기는 느낌을 감추기 위해 이소베는 더욱 거짓말을 보탰다. "온천에라도 가자고."

지금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집의 허허로움이 밀려들었다. 아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내가 집에 있는 걸 당연히 여겨 특별히 그 존재를 의식한 적도 없을뿐더러 용건이 없으면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다.

흩어져 있는 묘하게 푸르스름한 뼛조각

대기실 창문으로 보이는 화장장의 높다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병실에서 자주 보았던 찌푸린 하늘을 떠올리게 했다

아무리 환생이 늦는 분이라도 사십구 일째에는 어김없이 어느 분인가의 자식이 되셔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지요

찾아요…… 날 찾아요, 하는 아내의 마지막 헛소리는 생생한 잔상처럼 귓속에 남아 있다.

거의 대부분의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종교가 없는 그에게 죽음이란 모든 게 소멸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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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노스케 부부의 친절한 마음은 알겠지만 자신의 성격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만한 이유로 성사되지 못한 혼담이라면 아쉽지 않다는 태도였다.

의외로 마음이 약한 데가 있는 다에코가 언니한테는 잠자코 있어달라고 했다지만 사실 속마음은 그 반대일 거라는 걸 사치코는 잘 알고 있었다

이 혼담은 성사되지 않을 운명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겠어? 처제가 완전히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이렇게 되는 건 숙명인지도 모르지.」

데이노스케 씨와 사치코 씨가 보여 준 호의는 잘 알겠지만 당사자가 그렇게 나온다면 그 호의를 받고 싶어도 받을 수가 없다.

그런 식으로 매사에 소극적이고 전화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사람한테도 역시 장점이 있는데, 그런 걸 시대에 뒤쳐졌다거나 고리타분하다고 보지 않고 그런 사람 안에 있는 여성다움이나 고상함 같은 걸 인정해 주는 남자도 있을 거라는 거지. 그걸 아는 사람이어야 처제의 남편이 될 자격이 있다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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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샤베르 대령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0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선영아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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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다 덮이지 않은 나무들이 어스름한 달빛 아래 흐린 하늘이 만들어 낸 회색빛을 배경으로 희끄무레한 윤곽을 드러냈다.

나무들은 엉성하게 수의를 걸친 유령들, 저 유명한죽은 자들의 춤2)의 거대한 이미지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연인을 향한 의미심장한 고갯짓과 남편에 대한 거부의 몸짓도 감지되었다. 뜻밖의 패가 나올 때마다 터지는 노름꾼들의 탄성, 짤랑대는 금화 소리가 음악과 두런두런한 대화 사이로 섞여 들었다.

내 오른편으로는 어둡고 소리 없는 죽음의 이미지가, 내 왼편으로는 삶의 격조 높은 바쿠스 축제가 펼쳐졌다

눈은 끌어당기고, 밀어내고, 말하거나 침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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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50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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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과 읽다 만 소설책 한 권을 비단 보자기에 조그맣게 싼 것을 오하루가 들고 한큐 역까지 배웅하러 나왔을 때는 이삼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아주 가벼운 차림새였다

한번은 사치코가 에쓰코를 데리고 스이도미치로 산책하러 나갔다가 구더기가 들끓는 죽은 쥐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옆을 지나쳐 한 2백 미터쯤 갔을 때였다.

정신이 어떤 한 가지 일에 쏠리면 오히려 이런저런 망상을 할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라는 것, 흥분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답답한 소리를 하더라도 무턱대고 야단치지 말고 찬찬히 타일러서 말을 듣게 하는 것이 좋다는 등의 주의 사항을 설명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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