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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노트
우타노 쇼고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1월 29일에 정발 된 우타노 쇼고(歌野晶午)의 작품입니다. 일본에서는 2009년 5월에 발매된 작품입니다. 본격 미스터리를 주로 써내는 우타노 쇼고(歌野晶午)는 국내에서도 이름 높은 유명 작가이지만 그의 글을 읽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단순히 '절망노트'라는 표제와 괴롭힘을 당하던 주인공이 '절망'이라고 이름 붙인 노트에 가해자를 죽여 달라고 소원을 빌자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소개에 끌려 구매했습니다.
표지에는 '절망'이라고 쓰여 있었다. '2007 Schedule & Diary'라는 활자를 지워 없애려는 듯이 크고, 굵게, 자필로 그렇게 적혀있었다. 그 하나가 아니었다. 무수한 '절망'이 표지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글자는 크고 작고 굵거나 가늘고, 테두리를 그리고도 삐침을 넣기도 했으며. 'despair'라고 영문으로도 적혀 있었고, 검정 빨강 형광이 섞여 있거나, 왼쪽으로 기울고 거꾸로 뒤집어져 있기도 해서 마치 활자로 콜라주한 미술작품 같았다.
학교에서의 괴롭힘에 의해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리게 된 주인공. 다치카와 숀은 노트에 '절망'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매일매일 일기를 써 나갑니다. 그 '절망'이라는 노트에는 주인공이 괴롭힘 당하는 모습을 하루 또는 몇일에 걸쳐서 세세하게 묘사해놨습니다. 하지만 결코 어둡거나 암울하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은 절망노트에 자신이 괴롭힘 당하는 모습을 유쾌하게 써내려갑니다. 그 유쾌하면서도 처절한 내용에 몇 번이나 웃고 절망하게 됩니다.
보라고, 내 죽음으로 뭐가 달라지느냐 말이다. 풀장에 작은 돌멩이를 던진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거울처럼 매끈한 수면에 파문이 이는 것은 처음 잠깐뿐이고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잔잔해진다. 바닥에 가라앉은 돌은 아무도 줍지 않는다. 나의 자살은 아무런 교훈도 남기지 못하고, 학교폭력은 연면히 계속된다. 즉 나의 죽음은 개죽음인 것이다.
절망노트에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이 소개만 보자면 미신이나 영적 소재가 들어간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작품 역시 본격 미스터리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도달하기 전까지 트릭이 등장하기는 커녕 그림자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300페이지가 넘어가도록 숀이 괴롭힘 당하는 이야기만 유쾌하게 그려져 있어 중간이 넘어가도록 이게 무슨 소설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301페이지. 바라던 사건의 첫 희생자가 나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500페이지가 넘어가서야 범인과 트릭이 등장하고 이 책의 베일이 벗겨집니다.
말은 혼이다. 혼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서 평온을 주기도 하고, 아프게 해서 불안과 초조를 느끼게도 하며, 끝없는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말은 칼이다.
숀의 절망노트 자체가 유쾌하고 읽기 편하게 써져있기 때문에 읽는데 큰 지루함은 없었지만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체력이 고갈되는 듯한 따분함을 안겨주었습니다. 드디어 대망의 마무리. 트릭은 밝혀집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읽은 뒤에는 허무함과 함께 '이런 결말을 보기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왔나'하는 실망감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에 가서야 본론이 나온 것 치고는 충격적이지도, 재미있지도 못했습니다. 이 결말 하나를 위하여 500페이지가 되도록 쓸데없는 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구성에 의문을 느꼈습니다.
상상만으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존 레논은 사기꾼이다.
소설은 실망스러웠지만 확실히 느낀 점은 있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문제되는 '괴롭힘'과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주변의 '무관심'에 대하여 생각하니 굉장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절망노트'에는 주인공이 괴롭힘 당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채주지 않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반 아이들, 교사, 부모님,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는 절망노트에 '죽고싶다'고 써내려갑니다. 그 절망노트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주변 사람들이 그 절망노트를 읽고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지 보다보면 '죽고싶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죽고싶다'라고 쓰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말보다 강한 글의 힘을 뼈져리게 느끼게 됩니다.
소재 때문에 많이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취향에 맞는 소설은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마지막의 '트릭'에 혼신의 힘을 담은 작품들은 그 트릭이 간파되거나. 생각보다 의표를 찌르는 트릭이 아니었을 경우 순식간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