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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노스케 이야기 ㅣ 오늘의 일본문학 7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1월
평점 :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삶'을 느끼게 만드는 좋은 소설을 읽게 되면 책을 읽던 도중 여운과도 같은, 이상한 공백에 휩싸여서 잠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활자 사이에서 느껴지는 그 빈 공간이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와 주변에서 소리가 사라지고 바깥을 향해있던 눈이 내면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곳(우주나 바다, 혹은 사막)에 알몸으로 던져진 듯 기묘한 여운을 느끼며 '삶' 혹은 '인생' 에 대해 생각하다 정신을 차리면,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정신을 차리고 난 후의 '나'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보통 담백하게 쓰여진 힐링소설이나 작가 자신의 삶을 담아낸 자전적 소설에서 얻게 되기 마련인데, 설마 읽으면 웃음이 터져 나오는 유쾌한 청춘소설에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2010년 서점대상 3위를 수상하기도 한 요시다 슈이치(吉田修一)의 청춘소설. 요노스케 이야기(横道世之介)는 웃음이 터질 정도로 유쾌하고 재미있지만, 결코 유쾌함과 가벼움만으로 끝나지는 않는 '삶'을 보여준 작품이다.
아들에게 새로운 생활은 희망이지만, 어머니에게 새로운 생활은 걸레였던 모양이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아버지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이불은 도착했니?"라는 말부터 물었다.
어머니가 걸레라면, 아버지는 '새로운 생활 = 이불'인 모양이다.
대학생이 된 열여덟 살 요코미치 요노스케는 고향인 규슈에서 벗어나 도쿄로 상경한다. 생소함을 느끼며 계약한 맨션에 찾아간 그는 이웃인 고구레 교코를 만나게 된다. "왠지 대단하네요. 저 같은 놈은 기껏해야 자기 소개할 때 할 말이 요노스케의 유래 정도인데"라는 그에게 교코는 말한다. "무슨 소리야. 앞으로 온갖 것들이 늘어날 텐데." 그 때부터 대학에 입학하고, 친구를 사귀고, 동아리에 들어가고, 여자친구를 사귀고,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는 요노스케의 청춘이 시작된다.
읽고 있으면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유쾌하지만, 결코 이 소설은 과장된 코미디나 판타지 인생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요노스케의 청춘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요노스케 이야기>라는 제목 그대로 어디에나 있을 법한 대학생 인생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상적인 생활이나 계획성 있는 미래 성계가 아니고, 오히려 쓸데없고 허망한 시간을 더욱 많이 그려낸다. 실제로 대학생인 나 스스로도 그 청춘에 공감하는 일이 많았고, 그러한 일반적인 이야기임에도 유쾌함을 안겨준다. '청춘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 또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교코에게 작별을 고하고 요노스케는 자전거를 세워둔 1층으로 내려갔다. 자전거를 구르며 달려가는데 왜 그런지 맨션에 처음 도착했던 날이 떠올랐다.
인도 유학을 다녀왔다는 화려한 경력을 가진 교코 앞에서 자기는 요노스케라는 이름의 내력밖에 할 얘기가 없다며 몹시 부끄러워했다.
"무슨 소리야. 앞으로 온갖 것들이 늘어날 텐데."
교코는 분명 그런 말로 위로해주었을 것이다. 그런 교코가 "그때보다 빈틈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신변에 뭔가가 늘어났을 거라고 요노스케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어렴풋하게는 알 것 같았지만, 그것이 앞으로도 자기 곁에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었다.
요노스케는 책에서 다루는 1년 동안 도쿄로의 상경 이후 많은 만남과 많은 일을 겪으며 자신도 모르게 점점 성장해나간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던 어떠한 계기로 인한 내면의 변화와 성장이라는 부분이 충분히 가슴 속까지 다가온다. 요노스케는 이웃집 사진작가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보도사진 작가가 되고, 부잣집 철부지 아가씨가 난민과의 조우를 통하여 국제연합의 직원으로 일하게 되기도 하고, 대학 동기가 책꽂이 고립을 계기로 연인이 되어 일ㄴ나이에 결혼과 출산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이 작품은 '우연한 계기'가 우리 인생을 깊숙이 지배한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서 생 앞에 숙연해지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그런 부분 때문인지 모두 읽고 나면 청춘을 소중히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숙연함이 느껴진다. 재미있는 것은 '흘러가는 대로 되겠지'라는 낙천적인 태평함도 함께 다가온다는 것이다.
"......요노스케, 나 말이지, 열심히 살 거야.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갈 거야. 너밖에 없었어. 이사 도와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고맙다. 어쨋든 유이랑 함께 열심히 살아볼게."
난데없이 눈물을 보이는 구라모치 앞에서 요노스케는 품에 안은 상자를 내려놓고 싶어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저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릴 뿐이었다.
이러한 '우연한 계기로 인한 성장과 구원'은 단순히 요노스케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의 주변 인물들은 요노스케라는 사람과의 만남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 또한 성장하게 된다. 그러한 장면이 극적으로 그려지거나 대단한 행위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는 대로. 담담하게 그려지는 것이 또한 이 소설의 매력이라고 할만하다.
요노스케와 만난 인생과 만나지 못한 인생이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봤다. 아마도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청춘 시절에 요노스케와 만나지 못한 사람이 이 세상에 수없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왠지 굉장히 득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작품은 단순히 1년 동안의 대학 생활만 그려내지 않는다. 중간 중간 등장인물들의 20년 후의 모습을 그려내며 재미를 더한다. 20년 후의 사람들은 요노스케와는 이미 멀어져서 그를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를 생각나게 만드는 무언가 때문에 그들은 다시 요노스케를 생각해내고, 즐거운 듯이 웃거나 눈물을 흘린다. 그러한 모습이 슬프고, 유쾌하면서도 또한 숙연함을 가져온다.
정말 재미있었고, 그 이상의 감동과 여운을 안겨준 훌륭한 걸작이다. 최근의 일본 소설은 대부분이 독자에게 감정과 시사점을 전달하기 위하여 과한 판타지와 허구의 이야기로 독자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박아넣는 듯한 단점이 여러 부분에서 보여진다. 그런데 요시다 슈이치 작가는 다르다. 오히려 더 과장되었어야 할 청춘소설이라는 장르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리얼리티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이 더욱 가슴에 다가왔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많은 것을 얻은 작품임에도 아쉬운 마무리 때문인지 뒤끝은 개운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주변 인물들과의 이야기도 모두 마무리 지어지지 않고 짧게 끝나버린 이야기(오히려 그런 현실적인 인간관계가 매력이기도 하지만)도 아쉽지만, 무엇보다도 주인공인 요노스케에게 많이 감정이입을 했기에 안타깝게 끝나버린 결말에 울적해졌다.
요시다 슈이치는 2009년 봄에 한국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 작품. <요노스케 이야기>를 통해 사상 최초 한일 동시출간이라는 전례를 남기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이 소설에는 배경이 되는 당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나 유학생 '김 군'과 같은 등장인물, 그리고 일본인을 구하려다 전차에 치여 세상을 떠난 한국인의 의로운 죽음을 연상시키는 사건 등의 소재가 등장하여 우리에게도 굉장히 친숙하게 다가와 더욱 재미를 끌어올린다.
정말. 한번쯤 읽어봐도 나쁘지 않다. 아쉽게 느껴지는 마무리 때문에 '꼭 읽어라!'라고 강하게 추천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이 작품을 읽는다는 '우연한 계기'를 통하여 조금은 인생과 청춘이 달라질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출처 : http://tlqtown.blogspo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