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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네팔의 중서부 도시 포카라에서 오랜만에 박상민과의 재회를 나눈다. 그 뒤에는 박상민의 배다른 동생이라는 한영교가 있었다. 박상민은 오래 전에 클라이밍을 그만두고 산악계에서 잊혀진 사람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동생인 영교와 함께 둘이서 6440미터의 빙벽. 촐라체를 위험한 알파인 스타일로 넘어가려고 한다. 그런 그들을 보며 '왜 산을 다시 오르려는 건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나'는 그들의 캠프지기를 맡게 된다.
'촐라체'의 이야기 구조는 굉장히 단순하다. 많은 물량과 삶을 동원하여 차례로 전진캠프를 설치하며 정상에 오르는 극지법 등반법과 다르게 로프로 서로를 묶은 안자일렌 상태로 오르는 위험한 알파인 등반법으로 촐라체를 넘어가던 두 사람의 조난기와 그것을 기록하여 소설로서 탄생시킨 화자 '나'의 이야기이다. 조난 상황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구원은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는 빤한 내용과 다르지 않다. 독창적인 부분이 전혀 없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감히 고백하거니와, 나는 '존재의 나팔소리'에 대해 썼고 '시간'에 대해 썻으며,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대해, '불멸'에 대해 썼다. 천지간에 홀로 있다고 느낄 때, 세상이 사막처럼 생각될 때, 그리하여 살아 견디는 게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실존의 빙벽 아래로 투신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면 바로 소설 <촐라체>의 주인공인 '상민'과 '영교'를 기억해주기 바란다. 이 유한한 인생에서 참으로 위로가 되는 것은, 욕망에 따른 '성취'가 아니라 이룰 수 없을지라도 가슴 속에 '촐라체' 하나 품고 사는 일이 아니겠는가.
- 작가의 말 -
그러나 빤한 서사 구조와는 다르게 이야기 속에 가득 차있는 '메시지'는 훌륭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삶의 무게와 운명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신음하는 인물들이다. 박상민은 사업에 실패하고 동업자의 농간으로 사기죄에 걸려 석 달간 감옥에 다녀와 아내와 이혼한 상태이고 동생인 하영교는 죽은 아버지의 빚을 받아가려던 남자의 옆구리를 칼로 찌른 뒤에 도망치는 신세이다. 비단 '촐라체'를 올라가려는 이 두 사람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나' 역시 업의 무게에 힘겨워한다. 낯선 여인에게 당신의 아이라면서 아이를 건네받고 꿈과 같았던 글쓰기를 포기한 후 아들을 위해 살아왔건만, 아들은 갑자기 "......그리워서요"라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중이 되겠다며 집을 떠난다. 그리고 그들은 맨몸으로 거대한 빙벽을 넘어가기 시작한다.
그의 나머지 말을 듣지 않고 나는 무전기를 끈다. 두 피치 전에 무전기를 통해 그가 고백한 것은 '그놈....... 중 되겠다고'였고, 이제 내가 고백한 건 '이혼'이다. 각각 달리 출발해 왔는데 산행의 백그라운드가 되는 생의 그늘이 너무 닮았다는 게 신기하다. 그것만 닮은 게 아니라 고백을 듣고 나서 딴청으로 대꾸하는 습관도 닮아 있다. 말이 때론 소음이라는 걸 그와 내가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촐라체'를 넘는다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로프 하나에 의지한 채 맨몸으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추락과 환각의 공포에 맞서 싸우는 이 모습은 자신들의 삶에 닥친 위기를 돌파해내야 하는 그들의 현 상황을 암시한다. '촐라체'라는 높은 '삶'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크레바스는 그들의 삶에 박혀있는 위기와 동일하다. 그렇기에 지금 삶에 위기다 닥친 그들은 맨몸으로 미친 듯이 산을 넘어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산을 넘는 그들뿐 아니라 그들을 지켜보며 글을 써내려가는 '나' 또한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을 지켜보며 초조해하고, 랜턴 빛을 밤새 밝히고, 조난당한 그들을 찾으러 다니고, 산을 넘고 있는 그들과 기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널 살릴 거야. 나는 혼잣소리로 화답했다. 아냐. 네가 아냐. 나락으로 추락한 나를 더 이상 버려두지 않겠어. 너희와 함께 나의 남은 인생도 살리고 싶어. 너희를 살리고, 내 가슴속 이 폐허를 히말라야에 반드시 부려놓고 갈 거야.
험한 빙벽을 맨몸으로 넘으며 죽음을 넘나들다가 조난당하고, 그런 그들을 살리기 위해 찾는 모습과 그들이 어두운 삶을 버리고 다시 시작하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 올라가는 산행의 모습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한줄기 '희망'임에 분명하다.
단순한 서사 구조지만, 나는 이 작품이 오히려 박범신 작가와 첫만남을 가지게 해준 '은교'보다 재미있었다. 빤하다면 빤한 이야기지만, 나는 그곳에서 피어나는 희망과 형제애, 그리고 글쓰기라는 '꿈'을 쫓아나가고 결국에는 작가의 탄생을 보여주는 '나'의 모습에서 아무리 힘들고 어두운 삶이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그 단순한 이야기를 묘사하는 박범신 작가의 문장은 여전히 빛난다. 이 책의 주인공인 '상민'과 '영교' 두 사람의 모습이 실제 산악인 박정헌, 최강식이 촐라체 등반에서 겪은 조난과 생환의 경험을 모티브로 삼아 그려졌기에 더욱 감동이 컸는지도 모른다. 빙벽에서 추락한 최강식을 포기하지 않고 끌어올려 손가락 발가락을 잃고도 결국에는 목숨을 구해 살아돌아온 그들의 모습을 뇌리에 그리면 숙연해진다.
얼마 전에 읽었던(감상은 아직 적지 못했지만) 요코야마 히데오의 <클라이머즈 하이> 또한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등산을 소재로 하고 있다. 물론 <촐라체>와 <클라이머즈 하이>는 장르부터 다르지만, '산'을 통하여 '삶'을 그려냈다는 점에는 일맥상통하다. 무엇이 산악인들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산을 오르게 만드는 것일까. 나로서는 그들의 내심을 옅보는 것이 어렵고, 또한 그렇기에 더욱 숭고해보인다.
출처 : http://tlqtown.blogspo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