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생각한다 - 숲의 눈으로 인간을 보다
에두아르도 콘 지음, 차은정 옮김 / 사월의책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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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적 인덱스적 표상으로, ‘상징적 표상인 언어와 개념너머의 의미와 사고를 가능케하고; ‘구성적인 부재로서의 무죽은 자의 가늠할 수 없는 무게,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으며; ‘기호와 형식의 임시 거처로서의 자기에 의해, 생성과 현상으로서의 자기를 이해할 수 있고; ‘기호작용으로서의 생명개념으로, 일체 유기체들과의 연계성을 느낄 수 있으며; ‘목적이 세계외부 어딘가에 있는게 아니라 세계 내부에서 끊임없이 번성하는 생명 영역에 본래적인 것이기에, 실존적 소외와 무의미를 고민할 필요가 없슴을; ‘자신의 의미를 간접적으로 지시하는 명사 대신에 가장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대명사’ ‘이것에 의해, 지금 여기(오직 이것! 이것!)현존할 수 있슴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하여 너무나 인간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듯.

역자는 존재론적 전회를 이끄는 저서라고 하나, 내게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전회를 이끄는 저서이지 싶다. 관념 철학(이들은 육체를 결여하고 을 떠나 있다)을 극복한 현상학과 몸철학(이들은 아직 편재하는 패턴을 결여하고 개인의 살에 갇혀있다)을 넘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정표일 듯!

중문의 문장이 많은데도 매끄럽게 읽히는건, 역자가 내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오랜만에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을 소개해준 역자와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오자 및 번역 문장 몇 개

- p. 25, 셋째 문단: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이 재규어를 표상하는 방식(a)재규어가 인간을 표상하는 방식(b)하나의 단일하고 열려 있는 이야기의 상호 교환될 수 없는 구성 요소들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원문(p. 9, 넷째 문단) “~~, in which how humans represent jaguars and how jaguars represent humans can be understood as integral, though not interchangeable, parts of a single, open-ended story” 부분.

번역 문장은 ab의 차이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고 유사성은 무시해버리는 느낌이 강해서 원문과는 너무 다른 느낌을 준다. 따라서 이를;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이 재규어를 표상하는 방식과 재규어가 인간을 표상하는 방식을, 상호 교환될 수는 없지만 하나의 단일하고 열려 있는 이야기의 구성 요소들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정도면 어떨지.

- p. 40, 첫째 문단:

우리 앞에는 자신과 서로에 대해 자기이기를 멈추는 수많은 길 들이 놓여 있다”: 원문(p. 18, 둘째 문단) “There are many ways in which we cease being selves to ourselves and to each other.” 번역문은 우리자신서로에 대응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서로에는 이미 우리우리 자신이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의미가 모호하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또한 서로 간에 자기이기를 멈추는 수많은 길 들이 놓여 있다정도로 하면 어떨지.

- p. 82, 첫째 문단: “~~ -상징적 사고는 더 넓은 기호적 장으로부터 창발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 원문(p. 43, 둘째 문단) “ ~~ symbolic thought has to jump out of the broader semiotic field from it emerges, separating us, in the process, ~~”부분;

상징적 사고뿐만 아니라 아이콘적 인덱스적 사고들도 모두 그들을 품는 더 넓은 기호의 장으로부터 창발하는데, ’너무나 인간적인 상징적 사고는 아이콘적 인덱스적 사고들과는 다른 특질을 지니기에, 저자는 상징적 사고가 그것에서 창발한 공동의 장으로부터 또 한번 jump out‘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므로, 위 문장은 “~~ -상징적 사고는 그것이 창발하는 더 넓은 기호적 장으로부터 솟아오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 정도로 하면 어떨지.

- p. 108, 둘째 문단의 자체의 본질”; 원문(p. 58, 넷째 문단) “own suchness”;

본질, 저자가 극복하고자 하는 너무나 인간적인관념철학( 인류학)의 존재론에서나 이용되는 용어로서, 저자가 이를 표현하고자 했다면 ‘suchness’ 대신에 ‘essence’를 썼을 것 같다. ‘suchness는 원래 서구권에는 없던 기념이기에 영어에 없던 단어로서, 불교의 tathata’에 해당하는 개념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다. 저자는 이미 책에서 노자를 언급하며 쓸모 없슴의 쓸모’ ‘무위의 위등의 개념도 차용하고 있다. 따라서 본질대신에 우리에게도 친숙한 여여성(如如性)’으로 하면 어떨지...‘여여성은 궂이 의도하지는 않지만 이미 일체의 가능성(가능태로서의 여래장)을 지닌 채, 더 보태거나 뺄 것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의 충만한 모습(현실태:tathata)을 지닌 상태로서, 저자의 의도에도 더 부합할 듯하다. 저자는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어설픈 신조어를 전연 사용하지 않고 기존의 어휘들만을 사용하면서도, 우리에게 언어 너머의 것을 친절하게 지시해준다.

p. 154, 첫째 문단, ”양극단 존재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어떻게 서로를 알 수 있는지를 규정하기 위해 수렴된다“; 원문(p. 86, 아래 첫줄) ”These poles are taken to define how beings can relate to and know each other“ ----> ”장대들은 존재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어떻게 서로를 알 수 있는지를 규정하기 위해 이용된다“. ‘poles’은 해당 문장 앞부분에 있는 뛰어넘도록 노력해야 하는 허들을 뛰어넘는데 사용되는 도구이고, 문단 중에 있는 벌레의 눈이 바로 그 역할을 하는 장대다.

- p. 167, 세부 절 제목(원본 p. 95~96): ‘퍼스펙티브주의’(perspectivism) ---> ‘관점주의’, ‘퍼스펙티브적’(perspectival) ---> ‘관점주의적

관점주의라는 용어는 니체가 직접 사용하진 않았지만, 니체가 인식론적 사상을 전개하며 서양에서는 최초로 이용한 사유 방식을 일컷는 용어로서 이미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임

- p. 239, 아래 여덟째 줄: 궁지 ----> 긍지

- p. 382, 아래 여섯째 줄: ‘2살아있는 사고에서는 살아있는 것(A), 고로 숲이 생각한다(B)는 주장을 개진하고자 했다’;

고로라는 단어는 통상, 뒤에 있는 단어 혹은 명제에 상응하는, 동류의 단어 혹은 명제가 앞에 대응할 때 사용된다. 때문에 위 문장은 단순한 명사(A)에 술어명제(B)가 대응하게 되어 맥락이 어색하다. 원문 “Chapter2, ”The Living Thought“, sought to unpack the claim that lives, and hence forests, think.”(원본 p. 234, 세 번째 문단)에서는, ‘forests’ 뒤에 또 한번 쉼표를 찍어 ‘hence’ 앞뒤에 정확히 명사 ‘lives’‘forests’를 대응시키고 있다.

고로!! 위 문장은

‘2살아있는 사고에서는 살아있는 것이, 고로 숲이, 생각한다는 주장을 개진하고자 했다’; 혹은

‘2살아있는 사고에서는 생명체로서의 숲이 생각한다는 주장을 개진하고자 했다정도면 어떨지,

- 전문 번역가도 아닌 주제에 죄송합니다. 그저 옥에 티 일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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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어드 2022-01-03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능력자시군요. 책 읽고나서 원서와 대조하면서 검토해보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유가철학, 감정으로 이성을 말하다 중국철학총서 3
몽배원 지음, 주광호.임병식.홍린 옮김 / 예문서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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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계에서 이성에 비하여 거의 방치되어있던 감정이 유학 이론의 핵심적 주제였다는 주장을, 주로 송명대 유학자들의 주장을 빌어 전개하며, 감정과 이성 및 성리, 욕망, 의지, 지식 등의 관계와 통합성을 분석하는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는 시도가 재미있고 참신하다. 그런데 방대한 분량속에 유사한 주장들이 반복되는 까닭에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다. 주로 사변적 개념인 성, , 리만을 주된 핵심어로하고, 구체적 논거로는 자연계의 생의지(생생지리) 하나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변주하며 이용하기 때문에, 논리가 치밀하지 못하다는 느낌도 든다.

- p. 42, 위 열한째 줄부터 p. 43 위 열한째 줄까지의(2) ”인문주의 ~볼 수 있다는 문장은, p.45 아래 아홉째 줄부터 p. 46 아래 아홉째 줄까지의 문장(3)과 완전히 중복된다. 거의 한 쪽에 가까운 동일한 문장이, 연속되는 것도 아니고 상이한 절에 수록되어 있는건, 5년간의 번역작업이라는 언급을 무색하게 하는 실수다. 문맥상으로는 아마 2절보다는 3절에 있어야 할 문장이다.

- p. 118, 아래의 하이데거 인용문 중의 첫 단어 양지, 하이데거가 전습록을 읽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고, 이 책에서 양지라는 개념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부적절한 용어다. 양지는 매우 복잡한 개념이기에, 그에 해당하는 독일어가 있을 리가 없다. 저자가 참고한 중국어 번역본에 양지라고 되어있었다 해도, 저자는 독일어 원어를 언급하고 양지를 그대로 인용해야만 할 이유를 설명했어야 타당하다. 같은 쪽 아래 존재와 시간이라고 제목만 나와 있고, 해당 쪽수가 없는 점도 아쉽다.

- p. 138, 위 아홉째 줄, ”~ 공부를 시작할 것인가 그들이 공부를 ~~ “: 주희와 왕수인의 논쟁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언급하는 문장인데, ‘시작할 것인가까지는 차이점이고 그 다음 부터는 유사점 이기에, ‘시작할 것인가바로 다음에 만이 차이점이고라는 문장이 추가되어야 맥락이 통한다.

- p. 140 위 둘째 줄: ”원시유학보다는 선진유학이 적절하다. 저자도 p. 176에서 선진유가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 p. 171, 아래 문단; ”만일 을 드러남이나 현현으로 이해 한다면(A), 미발은 일종의 잠재적 존재 상태이고, 이것이 일단 한 번 발하면 희노애락의 감정 활동이 된다(B). 그러므로 드러남과 발동은 모순이 되지 않는다“: 명제 A는 같은 쪽 위의 문단 중 모종삼의 입장이며, 이때 당연히 미발이발은 본체와 현상의 관계이고, 이는 저자도 같은 문단에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동일한 명제를 전제 하면서도 반대 결론을 내리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명제 B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명제 B을 드러남이나 현현으로 이해하지 않고 발동으로 이해할 때에만 유도될 수 있는 명제다. A명제를 취한다면 B명제는 이것이 일단 한번 발하면 희노애락의 감정이 (새롭게) 발생한다정도가 되어야 한다. 미발 이발을 모두 다 감정상태로 해석하고자 하는 의욕이 너무 앞서고, 논리도 미흡하기 때문에 생긴 전형적인 오류이며, 이하 계속되는 주장들은 따라서 의미가 없다. 저자가 헛갈리고 있기 떄문에, p.173의 위 문단에서도 계속 유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여기에서 주희도 모종삼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는걸 알 수 있다.

- p.173 위 셋째 줄의 아직 발하지 않음과 넷째 줄의 미발은 각각 아직 발동하지 않음미발현쯤으로 바뀌어야 맥락이 매끄럽다. ’발하지 않음미발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인데, 미발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도로 미발을 사용하면 독자도 헷갈린다.

- p. 173, 위 열한 번째 줄; ”그러나 중용의 원래적 의미에서 보면(A) 발하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한다”(B)에서처럼 모두 희노애락의 감정을 의미한다(C). ‘이란 바로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음이란 의미이다(D). ~~ 미발 시에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으며, 또한 저절로 자연스러워 지극히 적당하고 알맞은 것(E), 이것이 바로 중이다“:

명제 C는 명제 A(희노애락지미발)에 대해 모종삼이나 주희의 입장과 반대되는 입장을 취할 때만 유도될 수 있다. 또한, 명제 D는 저자가 무리하게 주장한 결과인데, 모든 문제를 야기한 원래 인용문인 중용 1장을 보면(p. 170) ‘절도에 맞는이라고 번역된 원문은 중절(中節)’을 번역한 것이다. 저자가 명제 D에서 언급한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음은 바로 중절(中節)에서 얻어낸 구절인데, ’은 미발 상태에서 사용되고 있고, ’중절은 이발상태의 찰식과 관련된 것으로, 둘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문장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모든게 명백한데 무리한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명제 E 역시 발동으로 해석할 때에만 유효하다. ’현현으로 해석하면, 과하거나 부족할게 아예 없어 의미 없는 문장이 된다.

- p. 180, 아래 문단: ‘성자명출의 관점은 후대 유학 특히 송명 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곽점초간이 발굴된게 1990년대 일이고 송명대 유학자들에게 곽점초간의 존재는 알려져있지 않았을 것이기에 무리한 주장이다. 거의 천 년 전의 선진 시대 사유를 다시 발견한 송명대 학자들의 학문자세를 높이 평가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기록물 없이도 중국 사상계에 유사한 사유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 p. 195에 있는 인용문 전체 중에 여섯 번 언급되는 마음이라는 단어 중에, 열네 번째 줄 과 열다섯 번째 줄에 있는 마음을 쓰기지혜를 쓰기라고 바꾸어야 한다. 원문에 분명히 용지(用智)라고 되어있고, 역자도 용지를 지혜를 쓰는이라고 번역하고 있다(p. 202, 위 넷째 줄). 또한, 열아홉 번째 줄의 마음이는 아예 생략되어야 한다. 원문에도 이라는 단어가 없을 뿐 아니라, 없어도 문맥에 아무 문제가 없다. 마음()은 성정리와 함께 이 책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에, 허투루 쓰면 글의 의미가 달라질 뿐만 아니라 전체 주장의 신뢰도가 떨어진다. 대중을 상대로 한 저널리스트의 글과 달리 학인의 글은 엄밀함이 생명이다.

- p. 196 위 넷째 줄: ” ~~ 있는데, 이는 수행과 실천, 을 본체라고 본 것이다“: ‘정혜쌍수에 관한 부분인데, ‘수행이고 실천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는 수행과 실천이 아예 생략되거나 아니면 이는다음에 수행과 실천 중 수행을 체로라는 문장이 추가되어야 적절하다. 정혜쌍수를 언급한 무학의 혜능이 수 백년 후의 송대 최고 유학자들의 사유를 이미 선취했던게 아닌가 여겨진다. 이점 역시 유불을 불문하고 중국 사상계에 고유한 사유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을 가능성을 보여주며, 중국불교의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선불교의 토양이 선진유학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p. 242; 불가의 화두 부모미생전본래면목과 관련하여 주희가 언급한 감정도 없고 천리도 끊어버렸음과 저자가 언급한 불교의 허무맹랑한 말이나 부모의 생명에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으며 등의 담론은 기막히게 코믹하고, 주희는 한때 불학에 심취한 적도 있었기에 의아하기도 하다. 이 화두는 분절적 관계 속에 제한된 정체성을 탈피하여 무애한 정체성을 탐구하게 하기 위한 질문이다. ”‘누구인가에서 ”‘무엇인가, 다시 “’이것무엇인가(이뭐꼬?)”로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 진행될수록, 사회관계망 속에서의 자기가 자연계 속에서의 유기체로 확대된다. 그로 인하여 자기와 타자에 대한 시각이 유연해지고, 고정되고 분절된 자기가 아니라 현상으로서의 자기, 생성으로서의 자기를 찾게 하기 위한 질문이지, 인정이나 혈육 관계 등에 관한 담론과는 전연 관련이 없다. 굳이 생로병사까지를 언급할 거 없이 인간들의 고민은 대부분 고정된 자기 정체성(타자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에 기인한 인지오류의 결과이며, 그에 따라 타인과 세상에 대한 인식도 제한적이고 오류인 경우가 많다. 학벌과 직업, 혈연과 지연, 인종과 종교, 정치적 이념과 경제 상황 등 거의 모든게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관계망(인드라망)을 구성하는 요소들이고, 이것들에 의해 우리의 가치관과 세상에 대한 태도가 분절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많은 심적 물리적 갈등이 발생하는게 엄연한 현실이다. 주희는 할 수 없고, 저자라도 저 화두를 잡아보기를 권한다.

- 이밖에도 논리가 치밀하지 못한 부분이 많아 매우 아쉽다.

- 15감정 철학의 현대적 발전20세기 중반까지의 중국 철학사만을 주로 다루고 있어, 20세기 후반부터 쏟아져 나오는 감정에 관한 철학이나 인지심리 및 인지과학 분야의 최신 연구 결과들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은 점은, 저자가 아직 생존해있다는 점에서 아쉽다. 특히 감정이 인지에 의해 구성된다는 감정 구성주의와, 저자의 전공분야인 중용 2장과 4장에 나오는 시중(時中)과 지미(知味)는 맥락의로서의 장이론과 게슈탈트 및 요즘 핫한 알아차림과 관련된 개념이어서 감정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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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정동과 건강 - 감정의 자유를 통해 건강한 삶을 만들다
이상범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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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문장:

p. 54, 아래 여섯째 줄: “여기서 만약 힘이 근육량에 비례하는 것이라면, 힘의 증가를 대변하는 근육량~~ 의지를 자극하는 요소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문장은 상단 인용문 중의 근육의 느낌에 대한 저자의 소견인데, 근육량이 정동처럼 수시로 변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약간 코믹한(너무 나간; 근육에서 근육량으로) 문장으로 느껴진다.

p. 55, 위 열둘째 줄: “이렇듯 니체의 비철학적 해석은 생명체로서의 인간 그 자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론인 것이다”; 이 문장이 1880년대에 작성된 거라면 긍정할 수도 있겠으나, 몸철학이나 현상학 및 현상학에 대한 비판적 담론들이 쏟아져 나오는 21세기의 담론으로는 지나치게 단정적인 문장이다.

p. 56 아래 첫째 줄부터: “의지는 무언가를 의욕하기 위한 작용일 뿐, 의지 자체에 대한 자극, 즉 명령일 수 없다”; 이 문장에서 수식어를 생략하고 간략히 하면, “의지(A)의지 자체에 대한 자극(B)일 수 없다는 명제가 되는데, BA와 같은 유개념이 아닌 게 너무나 명확하므로, AB가 다르다는 문장은 무의미하다.

p. 78, 인용문 아래 첫째 줄: ” ~~ 니체는 정동으로 대변되는 원한의 인간의 반동적 감정이 ~~“; 이 문장은 두 가지 정동 유형 중 특히 반동적 정동형 인간에 대한 언급이기에, ’정동으로앞에 반동적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어야 적합하다.

p. 79, 아래 셋째 줄: ”~~ 보편적 삶의 진리(A) 아래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양식을 창조할(B) 수 없는 자 ~~“; 니체에 의하면 AB는 한 개인에게서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 창조적 삶의 진리 아래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양식을 창조할 수 없는 자 ~~“ 쯤으로 바뀌어야 문맥이 분명하고 매끄러워진다.

- 그 밖에도 이런 부류의 어색한 문장이 1부에서만도 다수 보인다.

 

오류:

p. 57, 위 다섯째 줄: “ ~~, 정동을 만족시키는 누군가에 대한 ~~”; 니체의 원문을 그대로 인용한 이 문장 속 단어 정동을 전제해서 이하 정동에 관한 담론이 계속되는데, 저자가 인용한 번역문(니체 전집 12)에는 분명히 정동이 아니라 격정이라고 되어있다(대부분의 인용문이 전집 번역문과 차이가 없기에, 번역문에 실수가 있어서 저자가 원문을 새로 번역하였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저자가 이 책에서 주요 개념으로 다루려 하는게 바로 정동이고 저자도 언급하듯이 정동과 격정은 완전한 동의어가 아니므로, 니체의 원문 인용에 실수가 있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또한, 이 책의 모든 내용들이 기존에 학회 논문집에 발표하였던 글이기에, 관련 학회의 논문 심사 체계 신뢰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이다.

 

- 니체는 한 인간의 내부에서 명령하는 자복종하는 자의 역동적 투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능동적 삶을 위버멘쉬의 삶으로 상정한다. 하지만 명령하는 자의 전형적 삶을 사는 대표적 존재로 니체가 예를 든 사자는(짜라투스트라를 통해) 그 내부에서 명령하는자복종하는 자로 분열되지 않는다(사자의 마음을 인간이 정확히 알 수 없기에 어디까지나 추론이지만). 지구상의 유기체들 중 유일하게 인간만이 신경증을 겪는 원인이 바로 내면의 분열 때문이라는 게 현재까지 알려진 사실이다. 바로 이 점이 니체를 마지막까지 괴롭힌 병마와 신경증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르며, 다양한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저자가 모색하는 정동에 의한 창조적 건강은 니체식의 분열된 자아틀에 의해서는 실현되기 어렵지 않을까 염려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 했지만, 신이 오히려 니체는 죽었다고 선언했다는 소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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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1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9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박찬국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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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까지의 유럽철학을 완성한 니체라고 추켜세우며 니체를 극복하고 참된 철학을 개척한다고 주장하나, 내게는 니체에 대한 실존적 현상학적 해석쯤으로 읽히는 또 다른 유럽철학 가설로 여겨진다. 견강부회하는 주장도 많으며, 계속해서 반복되는 곁가지 담론으로 인하여 요점이 희미해진다. 나름 자신의 주장에 대한 설득력을 증가시키려는 듯한데, 니체의 저서를 읽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촌철살인적 경구에 의한 상쾌함과 신선한 맛은 전연 느낄 수 없고, 답답함과 텁텁한 맛만이 느껴진다. 마치 니체의 얼굴에 스프레이 낙서를 뿌려대는 악동처럼 굴곡진 삶을 산 강단 철학자의 그림자가 드리운 듯.

독일철학서 번역본으로는 드물게 깔끔하게 읽혀서 좋다.

 

오류:

p. 12, 제일 아래 줄: 프라이부르크의 브라이스가우(Freiburg im Breisgau) -->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

p. 121, 아래 여덟째 줄: ‘~~ 이것에서는 바로 상태와 같은 것이 성립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실 된다’. ‘바로상태사이에 특정 단어(관조? 자각?) 혹은 문장이 빠진 듯하니 검토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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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는 말해야 하지 않는가 - 음악의 연주 분석 작품의 해석 세아 이운형 문화재단 총서 6
음악미학연구회 엮음, 오희숙.이혜진 책임편집 / 음악세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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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로렌스 크레이머의 글:

p.80 위 여섯째 줄: ‘신비한 직관은 그 자체로 공허함으로 들어난다는 문장은, 앞 문장 ‘~ 사람들이 유념해야 하는 침묵의 명령 ~’과 뒤 문장 초월적 침묵은 스스로 말할 수는 있기에 완전한 말 없음은 아니다라는 문장들과 맥락상 어울리지 않는다.

혹시 공허함의 원본에서의 용어가 emptiness였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그렇다면 공허함보다는 공성(空性)이 적합하며, 이래야 맥락도 맞게 된다. 불교나 선 명상 혹은 심리학 분야에서는 emptiness를 공성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성은 언어와 개념 혹은 분석적 사고의 특징인 분절성과 제한성을 부정하는 무 분절 무규정 성을 뜻하고, 비교 분석되어 제한적으로 규정된 언어와 개념이 아니기에, 분절 이전의 모든 걸 다 포함할 수 있어 부정에 의한 공허함이 아니라 충만함을 의미한다(텅 빈 충만). 저자도 케노시스 담론 혹은 아포페틱 진술은 무효 혹은 부정의 관계에 의해 단순히 비어있게 될 위험회피하고 충만함과 귀인을 소유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p. 77. 아래 다섯째 줄 ~ p. 78 위 넷째 줄). 그래서 음악은 제한적 해석을 거부하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엄밀하게는 해석이 아닌 그저 느끼는 대로 즐길뿐!, p. 84, 위 열째 줄), 이게 바로 입체화법(p. 83, 위 첫째 줄)이고 말 하지 않는 사유; 아포페틱 담론(p. 74; 역주)이며, ‘음악의 고유한 양식(p. 78 위 열 째줄)일게다.

물론 언어의 벽(형용할 수 없는 것)에서 온갖 의미가 상실된 상태를 넘지 못하고 단지 무질서와 허무만을 느끼는 경우라면(p. 79; 둘째 문단, 호프만스탈의 찬도스경. 유사한 예; 사르트르의 구토에서 마로니에 뿌리를 보다가 두려움과 부조리 및 구토를 느끼는 로캉탱) emptiness공허함으로 번역 하는게 맞지만, 언어의 벽을 넘어 공허함이 아닌 충만함을 느끼는 경우(예술 분야나 선불교 등)에는 emptiness충만함으로 번역해야 적절하다. (저자에 의해 인용된 찬도스경의 언급은 일부분뿐이어서 지나치게 부정적이지만, 호프만스탈의 저서 전체적인 맥락에 의하면 찬도스경의 상태는 완전한 허무와 공허함은 아니고 이미 충만함에로의 첫발을 디딘 상태로서 로캉탱의 상태와는 다르다. 로캉탱이 언어의 벽에 올라앉아 있는 거라면, 찬도스경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벽 너머로 막 뛰어내린 상태랄까? 찬도스경의 눈에는 이미 성속과 미추가 분리되지 않기 시작했다. 전연 경험한 적 없는 상태라서 혼란스럽게 느껴질 뿐.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불가에서는 스승을 구하라고 조언한다.)

특히 불가에서는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며, 공 속에 색이 있고 색 속에 공이 있다고 주장하는바, 이는 언어 너머에 혼돈이 있는게 아니고 질서정연한 화엄 세상이 있다는 의미다(p. 80, 아래 여덟째 줄; ‘피타고라스 유형’. 호프만스탈의 번역본에는 음악과 대수학처럼’, p. 118, 위 열한 번째 줄), 분석적 사고가 특성인 서양과는 달리 종합적 사고가 특성인 동양에서는 일찌감치 언어 너머의 충만함을 간파했으리라.

(출판 관계자께: 혹시 emptiness가 아니라면 리뷰는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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