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 그런 나는 없다
홍창성 지음 / 김영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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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인이 아닌, 스스로 평생 철학을 연구해온 필자(p. 162)라고 자부하는 저자가 너무 딱하다!

 

- 유사한 문제적 주장이 다수 있지만, 책에 있는 대표적인 주장 하나만 인용한다. 저자는 나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전체는 부분의 합과 다르다라는 명제가 엉터리이고 따라서 전체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박 논증을 아래와 같이 전개한다.


 p. 129~130: “제니의 책상은 네 다리 하나하나의 무게가 2kg이고 위의 널빤지는 12kg이라고 해 보자. 이 다섯 부분을 합치면 20kg이 된다. 전체로서의 책상도 물론 20kg이 나간다. 그런데 만약 부분들을 합친 것(20kg)과 별도로 전체로서의 책상(20kg)이 실재한다면, 제니가 쓰는 책상은 두 무게를 합쳐서 40kg이 나가야 한다(A). 그러나 우리는 제니의 책상이 20kg만 나간다는 사실을 안다. ~~ 우리는 전체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전체가 허구라고 결론 내려야 한다. ~~부분들이 실재하더라도 그것들이 모인 전체는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요, 허깨비이며, 환상이어서 단지 이름에 불과할 뿐(B)이라는 논의를 충분히 살펴보았다.”

 

 위 인용문에서, 명제 A가 오류이기에 B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거다. 이런 코믹한 주장은 주로 순진한 유아들이나 억지를 쓰는 정치인들에게서나 볼 수 있다. 벽 구석에 머리를 쳐 박고 눈을 감은 채 '나 여기 없다!'고 주장하는 어린 아이가,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 되지 않고 귀엽게 만 여겨지는 건, 아이가 전적으로 순수하고 진심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봉숭아 학당 수준의 끝장 토론을 수 세기 동안 계속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철학 교수 머리에서 이런 황당한 논리가 나올 거라고까지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이 문장이 스탠딩 코미디언의 공연 멘트라면 기꺼이 웃어줄 수 있겠지만, 엄밀한 논리를 생명으로 하는 철학전공자에게는 치명적인 오류이고, 평생 교수 생활을 했다는 사람의 멘트로는 적절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헛소리다. 소위 철학교수나 정치인들이 맥주캔의 형태에 관한 토론을 하면, 한 사람은 사각형이라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원형이라고 주장하며, 각자 옆면과 윗 면을 찍은 사진들을 확실한 증거라고 제시하고 자기 주장을 포기하지 않으니 토론이 끝장나지 않는다. 그런데 더 웃기는 건, 이런 경우 대부분은 상대방 관점에서 보면 상대방 말이 맞는다는 걸 서로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양쪽 모두 상부 측면에서 두 면을 동시에 입체적으로 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자동차를 만드는데 필요한 부품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모아도, 그냥 쌓아 놓기만 하면 그건 자동차가 아니다! 책상 다리 네 개와 널빤지를 조립하지 않은 채 팔에 안고 있으면, 그건 아직 책상이 아니고 책상이라 부를 수조차 없다. 저자가 들고 있는 물건을 저자가 제니의 책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바로, 그 부품들이 이미 조립되어 하나의 새로운 물건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 전체라는 현상이 새롭게 출현했기 때문이다!

 

 책상이 새롭게 나타났다고 해서, 부품들은 부품대로 그대로 있고 책상이 별도의 공간을 차지하며 또 다른 물건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책상이라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거다. 부품들은 원래 그대로 여전히 똑같은 부품이지만, '분리된' 상태로부터 '하나로 연결된' 새로운 상태로 변하면서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에, 이 새로운 상태를 배경으로 책상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전경으로 나타난다. 배경이 달라지면 그 배경과의 관계에 따라 전경이 달라지는 이 현상이 소위 게슈탈트 현상이라는 거다(이게 바로 연기성에의한 존재의 공성이다). 게슈탈트는 특정 조건이 성립하여 유지될 때에만 한시적으로 드러나는 임시적 현상에 불과하지만, 사회적으로 유용하기 때문에 별도의 이름을 부여하여 일상에서 유용하게 사용된다. 이걸 사회학에서는 사회적 실재라고 부른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은 아무런 근거 없는 임의적인 것이지만, 이것 없이는 사회가 유지 될 수 없기에 무언의 약속에 의해 실재라고 여겨지는 것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X 대학 입학 설명회에 참석한 학생들을 태운 버스가 캠퍼스를 돌며 안내자가 대학을 소개한 후, 한 학생이 질문을 하였다. “그런데 X 대학은 어디에 있어요?” 안내자가 조금 전에 본 것들이 바로 X 대학이라고 하자, 그 학생이 다시 물었다. “건물들밖에 못 보았는데, 그 건물들이 X 대학입니까?”라고.

 

 육안에 보이는 물체로서의 부분 만을 보면, 책상의 이 부분 저 부분은 각각 다리와 널빤지일 뿐이지만, 전체를 동시에 보면 책상이 보인다(맥주캔의 형태는 원통이다!). 책상 다리를 널빤지에 수직으로 붙이지 않고 나란하게 붙이면(배경 즉 관계가 달라지면) 이번에는 '책상'은 사라지고 발판이 전경으로 출현하고, 책상 위에 내가 걸터 앉으면 이번에는 의자가 출현한다. 찰흙으로 빚은 항아리를 뒤집어 세워 그 위에 걸터앉으면 항아리가 의자로 변신하는 것처럼.

 저자는 자기 손에 책상을 들고 책상이라고 부르면서도 책상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소위 소 등에 앉아 소를 찾고 있는꼴이다. 그러면 혹시 저자는, 부분으로서의 수소와 산소가 합쳐진 전체가 실제로 존재할 수 없으니, 목이 마를 때면 물 대신에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를 따로따로 마시기라도 하는 걸까?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베이글 두 쪽 사이에 토마토와 양상추, 피클, 치즈, 소고기 조각, 그리고 케첩을 뿌린 것을 달라고 하면 주문을 거절 당할 수도 있다. 그냥 햄버거 주세요하면 서로 편하다.

 

 노자가 얘기한 대로, 우리가 생활하며 사는 '방'이라는 게, 육안에 보이는 물체라고는 벽뿐이지만,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함께 보면 이라는 전체가 출현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방으로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단지 텅 빈 공간일 뿐이다. 방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벽과 공간이 모두 필요하고, 방을 보기 위해서는 벽과 공간 전체를 동시에 보아야만 한다.

 

 내 신체 자체가 는 아니고, 나를 찾기 위해 내 신체를 완전히 해체한다 해도 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다. 두뇌 속 신경 신호는 단지 전기 신호일 뿐 거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그런데도 육신과 정신이 함께 있을 때면 문득 가 출현한다. ‘역시 현상일 뿐이고, 나를 구성하는 부분들이 흩어지면 나 역시 사라질 수밖에 없다. 게슈탈트로서의 내 존재는, 배경 역할을 하는 조건으로서의 부분들인 타자 없이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석 씨(석가모니)라는 건 없다고 한 이유도, 전경으로서의 는 배경으로서의 육신과 두뇌 속 전기 신호들을 필수 조건으로 하는 게슈탈트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게 없다라는 정확한 의미는, 아무것도 없다는 게 아니고 라는 존재가 공()하다는 뜻이다. 언제나 불변하는 본질을 지니는 독자적인 실체가 아니어서 항상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타자들과의 관계가 충족되었을 때 나타나는 상황적 존재로서는 존재하기 때문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확실한 존재 근거 하나 없이 우연히 세상에 던져 진 이런 아슬아슬한 존재가, 현상으로서나마 생생하게 느끼고 울고 웃으며 살 수 있으니 이건 분명 기적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석 씨는 이를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속 안에 묘하게도 모든 게 다 있다!

 ‘는 '아우구스티누스 시간 역설'에서의 시간과 유사한듯하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나에게 그 질문을 하지 않을 때는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에게 그것을 묻고 내가 그것을 설명하려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과학자들이 21세기 까지도 시간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 하지 못하고 아직 까지도 갑론을박하고있는 건 바로, '시간' 역시 게슈탈트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우리가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건 '변화'일 뿐이고, 그 '변화'를 배경으로 출현하는 전경으로서의 '시간". 시간을 제대로 정의 하기 위해서는, 과학자들이 이제라도 관점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 저자는 책의 제목이자 주제인 무아(無我)와 관련하여 책 전체에 걸쳐, 소위 (,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다양하게 전개하면서도, 마지막에는 개인 인격체로서의는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실용적으로 필요하다고 긍정한다(P. 152, 6.2).

 

 그런데 개인 인격체로서의 도 역시 수사만 다를 뿐 결국 ! 저자는 '나'라는 건 없다는 논증을 당당하게 전개해 놓고서, 황당하게도 마지막에는 자신의 주장을 부정한다!

또한, 저자는 개인 인격체로서의 나는 존재 한다라고 마치 새로운 진리라도 발견한 듯 주장하는데, 저자가 굳이 그리 주장하지 않아도, 세상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일상을 살고 있다.

 “실용적으로 필요하기에 개인 인격체로서의 나를 긍정하는 건, 생존과 번식을 무의식적인 기본적 목표로 삼고 있는 우리 인간들이야말로 세상 그 어떤 유기체들보다도 더 잘하는 일이다. 특히 요즘 같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심지어 인적자원이라는 용어를 쓸 정도로, 인간을 하나의 부품으로 다루며 매우 실용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정도이니, 사람들이 이걸 못할까 봐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지만, 애초에 석 씨가 무아(나라는 건 없다)를 주장한 이유는, 소위 생활 세계 속의 중생들이 개인 인격체로서의 나를 아무런 의심 없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굳건히 붙잡고 있는 걸 안타깝게 여기고, 이 생각이 옳지 않으니 이를 바로 잡아주려 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결국 저자는 지금 석 씨의 의도와는 매우 다른 메세지를 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저자가 석 씨의 가르침이 다른 종교들에는 없는 가르침이라며, 석 씨를 매우 칭송 하면서도(p. 161).

 

 ’ 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석 씨의 주장은, 우리가 부모, 교육, 국가, 시대, 성별, 인종, 직위, 직업, 학력 등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환경에 의해, 철저히 분절된 사회관계망 속에서 지극히 단편적인 경험 만을 하며 존재하기 때문에, 경험과 기억의 총합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분절적, 유동적, 상대적,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개인 인격체로서의 나같은 정체성을 '고정되어 불변하는 실체이자 참이라고 여기며 집착하고 있다는 거다. 우리가 개인 인격체로서의 나 같은 정체성을 실용적이라 여기지만, 실제로는 바로 이 같은 정체성으로 인하여 모든 고통이 발생하니 이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라고 권유하는 거다.

 또한 나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는 고정되어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고 유동적, 상대적, 생성적 이어서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다 뜻이지(전경으로서의 게슈탈트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상황이라는 배경에 의지해 끊임 없이 변화하기에), 결코 가 아예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라는 게 아예 없다'라고 여기는 걸, 석 씨는 '나는 참이고 실체다'라고 여기는 만큼이나 '또 하나의 극단'에 빠지는 일 즉, 공에 빠지는 일'이라고 경계하며, '중도'를 지키라고 권유한다. 가 없으면 무엇이 마음을 쓰겠는가!

 

 ’무주생심(無住生心)‘에서의 무주가 바로 고정되어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를 붙잡으려고 고집하지 말고 해체하라는 뜻이고, 생심유동적, 상대적, 생성적지금 여기에서의 상황에 맞게 즉흥적으로 주인공이 되어 마음을 쓰라는 뜻이다. '무주'하면 내 마음에 아무런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없어, 내 마음이 텅 빈 거울 같은 배경이 될 테니, 지금 여기에서의 상황에 맞는 유동적, 상대적, 생성적인 전경이 있는 그대로 왜곡 없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람은 태생적으로 욕망을 지니는 존재인 데다, 나를 둘러싼 분절된 사회관계망 속에서 형성된 개인 인격체로서의 가 내 안에 항상 기본적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동물적 생존에는 지극히 유리하기에 DNA에 디폴트값으로 자리 잡게 된 사회적 '밈'이자 진화적 특성), 우리가 새로운 상황에서 새롭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걸 방해하고, ’하던 대로 하고 보던 대로 보게유도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그 배경을 바꾸거나 지우는 일은, '지금 여기'에서의 상황에 맞게 인식하고 행동하기 위해 매 순간 깨어있어야 하는 치열한 노력을 요구하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에, 공자 같은 사람도 인생 칠십에 이르러서야 도달했다는 경지니, 내가 나의 주인공 노릇 한다는 일은 오직 까마득하게만 여겨질 따름이다.

 

 - 가 이리도 골치 아픈 이유가 혹시, 에두아르도 콘이 말한 것처럼 자신의 의미를 간접적으로 지시하는 ’추상 명사 이기 때문일지도 모르니, ‘ 대신에 가장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대명이것 사용하면 문제가 조금이라도 쉬어질까 싶지만,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 역시 전혀 쉽지 않은 과제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영어로 하면 ‘Who am I?’가 되는데 이건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묻는 질문이기에 ‘What am I?’라고 하는 게 원의에 더 가깝다며, ‘나는 누구인가? (A)라는 질문보다는 나는 무엇인가? (B)라는 질문이 더 적절하다고 언급하고 있다(p. 16).

 내가 누구 누구라는 건, 대체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의 인격적 속성을(남자, 자식, 회사원, 노인, 동양인 등) 드러내는 의미를 지니기에, 질문 A 속의 누구라는 어휘가 지니는 의미는 당연히 저자가 언급한 개인 인격체로서의 나에 가깝다.

 그와 달리 질문 B 속의 무엇은, 인간이라는 경계를 벗어난 범주에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내 정체성은 인간 외에도 동식물과 유기체 및 사물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더 넓은 장 속에 위치하게 되어, ’를 규정하는 경계가 질문 A 때보다 훨씬 더 확장되는 효과를 지닌다. 하지만 질문 B 역시 여전히 를 지니고 있기에, ’외의 존재들과 상호 교섭하지 못하고 분리된 상태로 고립되어 분절된 존재일 수밖에 없어서, 보다 넓은 장에서의 '우주 속의 인간은 수많은 무생물이나 생명체들과 같은 존재 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관점을 놓치기 쉽다.

 하여, 질문 B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은 무엇인가? C)’라는 질문을 던지면(이게 화두 '이뭐꼬'이자 '부모미생전본래면목'이다), ‘’가 특별히 분리되어 구별되지 않으니'개인 인격체로서의 나'가 사라지고, 모든 존재가 다 함께 어우러지는 화엄세상으로서의 우주 만물'을 배경으로 다양한 이것들이 그때 그때 전경으로 출현하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만물 사이의 견고한 경계와 경계 때문에 일어나는 다양한 차별과 갈등이 함께 사라지고, 이것들이 상호 침투 하여, '꽃을 보면 꽃이 되고, 산을 보면 산이 되는' 상태일 테니, 이게 바로 '네가 바로 그것이다!' 즉‘,Tattvamasi의 의미가 아닐까? 이렇게 되면 소위 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든 문제가 해소될 거라는 게 석 씨의 주장이다.

 

 우주 속에서의 지금 여기 이것!은 무한히 많은 먼지 중의 한 점 먼지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지닌다면, 무한한 이것중에서 특정한 이것에만 특별한 애착을 느낄 일도 없을 테니, 소위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매일 겪는 문제들 뿐만 아니라 죽음마저도 사소하게 느껴질 듯하기는 하다. 이럴 땐 죽음마저도 단지 배경의 변화에 따른  전경으로서의 현상에 불과 할테니까. 그런데, ’가 사라진다고 생각할 때 엄습하는 차가운 소름은, 업에 의하여 형성된 에고의 두려움일 뿐이라지만, 그걸 극복한다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일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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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나들이 2023-10-04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수준의 글입니다. 이런 수준의 글을 종종 올려주시길 감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