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가 옳았다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지금까지 알려진 노자 주해서가 수백여 종이나 되고, 국내에서 번역되거나 직접 주해된 서적도 수십여 종이 되는 건, 노자라는 서물 내용 자체가 어쩌면 시와 같기도 하고, 주해자 자신들의 삶과 경험이 제각각이기에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와 태도도 제각각이어서, 다른 주해자들의 설명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느끼는 각각의 저자들이, 자기만이 파악했다고 느끼는 내용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게다. 이런 결과는, 노자가 주장하듯 의 특성 자체가 고정된 개념이 아니고 변화생성인데다, 주해서를 쓰는데 사용되는 언어 자체가 가명영역이기에, 개념 차원의 주해서에는 어짜피 상도’ ‘상명과는 거리가 먼 가도지도’ ‘가명지명만을 담을 수 밖에 없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 저자는 이전에 노자 주해서를 출간한 바 있는데도 이번에 개정판이 아닌 새로운 이름으로 주해서를 출간하였다. 많은 주해자들이 번자 수준의 주해를 하는데 반해서, 저자는 평소에 다른 주해자들이 놓치는 부분까지도 세밀한 관점으로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하였고, 이번에도 이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많은 학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으로 여겨지기에, 칠순이 넘은 저자의 학인으로서의 자세에 박수를 보낸다.

견강부회로 여겨지는 담론들이 다수 있지만, 도덕경의 가르침에 따라 그렇게 볼 수도 있지라고 여기고 보면 또 그렇게도 여겨진다.

- 다만, 전체 81(500)에 이르는 책에서, 1장에만 거의 90쪽을 할애하며 주로 에 대한 담론을 펼치면서, ”명과 짝을 이루는 지고의 개념은 도가 아니고 상이라고 본 것이다. 사실 도덕경은 도와 덕을 말하는 경전이 아니요, 상을 말하는 경전인 것이다(p. 49, 네째 문단)라고 까지 언급하는데, 이점에 대해서만 졸견을 제시코자 한다.

- 저자는 특히 초원을 언급하며 그가 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다 하나, 그가 상도’ ‘상명을 설명하면서 실제로 언급한 내용은 왕래무궁하여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인이나 바보나 다 같이 말미암을 수 있고, 만고에 오래오래 지속되어 폐할 수 없는뿐으로 (p. 52), 지금까지 많은 주석자들이 설명하는 의 특성과 다를 게 거의 없는 것으로 읽혀진다. 또한, 저자가 직접 언급하는 ()’에 관한 구체적 내용으로는 변화의 항상스러운 모습변화의 규칙성이나 지속성’(p.24)뿐이고, 이것들 역시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니어서 위의 주장이 지나치게 여겨진다. 왕필도 이미 返化終始 不失其常이라 한 바 있으니(p. 256, 아래 둘째 문단), 저자나 초원이 주장하는 모든 게 이미 여기에 다 들어있다. 또한 도법자연이라고, ‘의 특성이 바로 자연의 특성이기에,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이미 사시사철에 매우 익숙하고 세상의 변화를 당연히 여기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 과 짝을 이루는 개념이 가 아니라면, 1장에 수록된 많은 표들과 일관성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도덕경 속 담론 전체가 이 전의 대부분 주해서들이 언급한 의미와는 완전히 달라져 버릴 것이다. ‘상도’ ‘상명에서 보다시피, ‘만이 아니라 에도 적용되는 개념으로서, ‘의 수식어지 와 일치하거나 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이는 아마도 저자가, 형용할 수 없는 대신에 언어적 표상을 제공하는 의 특성을 더 잘 표상한다 여겨, ‘으로 대체 가능하다 여긴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또한, ‘을 완전히 영구불변하다고 여기는 서양식 사고와, ’상도‘(저자가 도덕경의 핵심 키워드이라고 이해하는)를 거의 번자 수준으로 주해하는 다른 주석자들의 미흡함을 염려한 때문에, 좀 과한 표현을 쓴 게 아닌가 짐작된다.

아울러, 저자가 개념을 부연 설명하면서, ”산은 산이 아니다라는 철저한 부정을 거쳐서 산은 산이라는 대긍정에 도달한 여여(如如)의 경지(p. 27, 넷째 문단) ’이문일심등의 개념들을 언급하면서도(p. 65, 넷째 문단), ‘변화의 항상스러운 모습이나 변화의 규칙성이나 지속성개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매우 아쉽다.

- ‘항상 그러한이나 여여한이 그 진정한 의미를 지니는 건 바로, ‘그러하지 않은면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저자가 든 예를 이용하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산은, ‘그 산이 항상 그 산으로 명확하기에, ‘산은 산이다(A=A)’(I)라는 명제는 가도지도수준의 명제로서, 평소 우리 눈에 사계절 변화(생사)를 보이며 명쾌하게 이해되는 유와 명의 영역이다. 그런데, 그렇게 안다고만 생각했던 그 산이 언젠가 다르게 보일 때 (내가 알던 그 산이 이 산이 아닐 때; 산의 모습이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이라는 걸 알게 될 때), ‘산은 산이 아니다(A=not A)’(II)라는 무와 도의 영역에서의 명제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 산이 아무리 무한한 다른 이름과 모양을 가져도, 그 산은 여전히 여기 이대로() 있는 이 산외에 다른 게 아니다. 그래서 결국 산은 산이다(A=A)’(III). 노자는 철두철미 지금 여기 생생한 현실만을 얘기하지, 결코 초월적 관념을 얘기하지 않는다. 저자가 설명하고자 했던 여전히 그러한, ‘그렇지 않지만(not A)’을 품고 있는, ‘산은 산이 아니다(A=not A)’(II) ‘를 통과한, ’여전히 그러한이고, 그래서 새로운 명제 산은 산이다(A=A)’(III)가 바로 상도의 경지다. 처음의 산은 산이다’(I)라는 명제와 마지막 명제 산은 산이다’(III)가 같아 보이지만, 마지막 산은 산이다는 처음과 달리 그렇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를 품고 있다는 게 양자의 차이다. 그 점이 바로 가도지도상도의 차이이고, 이래야 저자가 설명하려는 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게 바로 저자가 그리도 찬탄한 수운의 불연기연그러하지 아니함은 그러그러함이다’(p. 55-56)이리라 짐작된다.

- 저자는 수운이 동학을 창시했다는 점에 착안한 듯, ‘불연서학이라 단정하지만(p. 55, 세째 문단), 저자가 주장하는 측면에서라면, ‘서학불연에 끼어들 틈조차 없다고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동학교도들에게 수운의 불연인식할 수 없는 현상 너머, ‘기연현상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불연기연은 양자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 ‘불연가도지도를 넘어선 상태로서, 최종적으로는 기연(상도, 상명)과 하나로 되어야 하지만, 일단은 지향해야 할 상태다. ‘서학은 이런 불연개념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극단적 명가명상태로서, 지양해야만 할 체계일 뿐이다. ‘A=not A, hence still A=A’라는 개념이 서양에는 없다. 단지 헛소리이고 모순일 뿐이다.

- 대부분 주석자들이 常名참다운 이름이라고만 언급하고 넘어가는데, 아마도 은 규정되고 고정된 개념이어서 , 의 변화성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저자는 常名에 대해서도 분석의 확대경을 들이대는데(p. 32, 셋째 문단), 바로 이런 점들이 저자의 치열한 학인의 자세를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 그런데 저자는 명가명 비상명도가도 비상도와는 달리, 명료한 뜻을 전달하지 않고 동어반복의 무의미한 토톨로지처럼 들린다고 언급하는데, 아마 그 이유는 저자가 다른 주석자들처럼 을 부동하는 와 달리 고정된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저자는 명은 방편이기에 고착적 성격이 있고, 상은 여여이기에 유동적이다고 하면서도(p. 50, 둘째 문단), p. 51의 표에는 상도상명유동 생성의 특성을 지니는 것으로 표시하여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혹시라도 저자가 상명과 상반되는 가명지도로만 여기고 있다면 이건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기에, 설마 이리 여기고 있지는 않으리라 확신한다. ‘상명은 유동 생성 특성을 지니는 게 맞다!

- ‘는 직접 언급할 수 없기에 을 통해 보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은 상호 침투하는 대대(對待)’의 관계성에서만 유지 된다는 걸, 저자 스스로 계속해서 강조하면서도 이를 놓치고 있다. 노자에 따르면 만물이 유동하는데 이라고 유동하지 않겠는가. ‘명가명 비상명도가도 비상도처럼만 해석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자연스럽게 읽힌다. ‘이름이름지으면에서, 앞뒤 이름이 동일하기 때문에 동어반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앞의 이름상명이고 뒤의 이름은 가명이어서 전연 동어반복이 아니다. 앞의 이름(상명)이름!’이라고 말하는 순간, 규정되지 않고 무한히 생생약동하던 상명의 의미가, 언어가 지니는 제한성에 의해 총체성을 상실하고 왜곡된 의미만을 지니게 축소되어, 원래의 이름(상명)은 단순한 이름(가명)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에서 언어를 그토록 기피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지만, 결코 말하지 않을 수 없기에 선불교에서는 禪語라는 독특한 화법을 개발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산은 산이다(A=A)(I)’가명이고, ‘산은 산이다(A=A)(III)’상명이다. IIII 모두 언어로 표현된 명제지만, 명제 III은 이미 언어를 넘어 서 있다. 선에서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말을 뛰어넘으려 한다. 가명을 손가락으로 이용하여 상명이라는 달을 가리키려는 것이다. 부처가 뭐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똥막대기!’라고 선언하는 선사의 답변에 제자가 놀라는 이유는, 제자의 눈에 똥막대기더러운 똥막대기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사의 눈에 비치는 똥막대기는, 우주 전체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하는 자신의 실상을 한점 남김없이 있는 그대로 찬란하고 당당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부처다. 길가에 버려진 연탄재에서 쓰레기가 아닌 한때 누군가에게 온기를 전하던 존재를 보는 시인의 눈은, 그 순간 부처의 눈과 다르지 않다.

- 1장 처음 두 절의 명제 구조 즉, ‘가도지도 상도가 아니다라는 형식 구조는 ’A X가 아니다는 구조로서, 어쩌면 부정신학적 명제나 ‘Neti Neti’ 담론 혹은 아포하 담론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유한한 이성과 개념 영역의 A를 아무리 바꿔도 무한을 품은 기호 X와 같아질 수 없기에, X를 포착하려는 일체의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때 서양의 신비주의자들은 구하려는 의지를 포기하고 단지 신의 응답을 기다리라고 한다. 그런데 노자는 1장에서 우리의 기를 완전히 꺾어 놓고는, 친절하게도 2장 이하에서 다양하게 의 특성들을 보여주며, 적극적으로 우리를 이끌고 재촉한다. 선불교의 화두도 철저히 적극적이고 독창적으로 학인을 자극하는 방법론이다.

- 노자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만을 보고 이 곧 인줄 아나(A=A), 우리가 실제 방으로 사용하는 건 이 아닌 빈 공간이라며, 벽 자체가 방은 아니라고 가르친다(A=not A). 그런데, 공간을 남기지 않고 벽만 쌓아도 방이 생기지 않지만, 벽이 없어도 방은 생기지 않는다. 즉 벽과 공간이 함께 있어야 이 생기니, 벽을 볼 때 공간(눈에 보이지 않는!)을 함께 보라는 얘기다. 그러면 우리 눈에는 여전히 벽만 보일지라도(A=A) 공간이 함께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중생 모습에서 여래를 보고, 여래 모습에서 중생을 보라는 얘기다.

그런데 어렵게 노력하여 깨달았다고 해서, 두 번째 경지인 산이 산이 아니다만을 고집하고, 계속해서 산은 산이다를 거부하는 게 바로 공에 집착하는 거라며, 불가에서는 이를 경계한다. 선사는 똥막대기를 여전히 그렇게 해우소에서 똥막대기로 사용할 뿐, 법당에 고이 모셔두지 않는다또다시 산은 산(III)’임을 보고 저자 거리로 돌아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여전히 그 사람으로 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제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 속에 매몰되지는 않는다. 이게 화광동진(和光同塵)’이자 시은(市隱)’이며 입전수수(入廛垂手)’. 진여문을 통과한 생멸문이기에, 진여 즉 생멸이고 이문일심이다. 이즈스 도시히코는 이를 분절을 품은 무분절이라 부른다. 저자가 언급한 바대로, 중국의 사유에서 노 유 불은 혼재한다.

- 사족(많이 주저하다가 쓴다): 전에도 그랬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도 내 해석이 맞다’,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자주 언급하고 있다. 인정한다! 저자의 박식함은 다른 사람들도 다 인정하리라 믿는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나는 모른다고 주장하여 신탁에의해 아테네 제일의 현자라고 선포되었고, 공자도 나는 아는 게 없다고 선언하였으며(저자가 주석한 논어에서), 석가모니는 아는 게 없기에 안다고 할 수 있다고 얘기하고(저자가 주석한 금강경에서), 예수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조차 광장에서 사람들이 들리게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저자가 강해한 도마복음에서).

언젠가 어느 한옥마을에서 처마 밑에 시은이라 새긴 현판을 본 적이 있다. 주인장은 자신이 산이 산이 아닌지점을 지나왔노라 자랑하고 싶었나보다. 하지만 시은을 현판에 새기는 그 순간, ‘시은은 언어 너머로 시현(市顯)’을 가리킨다는 걸 주인장은 미처 몰랐을게다. 공자는 이런 행위를 사이비 군자인 향원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맹렬히 비난한다. 누군가가 나는 세상에서 제일 겸손하다라고 주장한다면, 이 어찌 우스꽝스럽지 않겠는가.

내가 주장하는 명제가 참인가의 여부는, 나의 믿음이나 타인의 인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주장하는 명제현실 속에서 실천되는 내 삶의 정합성 여부에 의해 저절로 드러난다.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인문학적 명제도 이런 식으로 참/거짓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거라 여겨진다. 다른 저서에서라면 몰라도 적어도 도덕경에서만은 後其身’, ‘我獨昏昏’, ‘不自見’, ‘不自是‘, ‘不自伐‘, ‘不自矜하면 좋으련만! 아호를 스스로 도올이라 할 정도면, 어릴 적 짱구트라우마 정도는 이제 훌훌 털어내 버릴 수도 있을 텐데, 칠순 넘도록 그 무거운 을 짊어지고 있는 저자가 너무 안타깝다. 앞으로도 강녕하여 좋은 책 많이 소개시켜 주시기를 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reative95 2020-11-10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대가리가 스스로 짱돌이라 말하니 어찌 상돌있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