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개역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지음, 박여성.안병서 옮김 / 까치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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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여 년 전에(1979),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다양한 관점에서 분석을 시도한 안목이 대단하다무엇보다도 수학과 음악 및 회화 사이를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며휘황찬란한 스토리텔링을 현란하게 전개하는 박식함이 놀랍다.


 하지만 지엽적인 분야에까지 지나치게 언급함으로써오히려 논점이 흐려지고 논점을 파악하려는 독자의 에너지를 소진 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천 쪽이 넘는 분량 중에 특히 거북-아킬레스’ 담화와 수리논리학’ 담론이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지만저자와 역자의 언급과는 달리 이 내용들은저자가 원래 의도한 집필의 근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논리 전개에 그다지 이바지하지 못한다저자는 자기가 아는 모든 걸 다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전문적인 내용은 그 핵심만을 짧게 요약하여 인문학적 함의를 전했더라면논지가 매끄럽게 전개되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데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싶다양이 많다고 좋은 글이 되는 건 아니다쓸데없는 글이 없는 게 좋은 글이다.


 하지만 흥미를 끌어 중도에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매력은 분명히 있다결정적으로 아쉬운 점은책을 집필하게 된 핵심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이 마지막까지 제시되지 않아 알맹이가 빠진 느낌이 강하게 든다하긴그 답을 찾는 건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요원할 뿐이니흉만 볼일은 아니다.


 저자는 서문에서(p. vi), 이 책은 어떻게 생명이 있는 존재가 생명이 없는 물질로부터 나올 수 있는지 이야기하려는 매우 개인적인 시도이다라고탐구의 목적을 분명하게 언급한다이 문제는 이미 철학계와 과학계에서 수 세기 동안 다루어져 왔으나 아직도 논란이 종식되지 않고다양한 이론들만 난무한 -마음 문제(body-mind problem)를 다루겠다는 선언이기에수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마음 문제는 통상 마음-몸 문제라고 칭하지만이 명칭에는 마음이 몸보다 우월하다라는 고전적 관념이 자리를 잡고 있다데카르트식 사유 방식인데, “나는 생각한다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의 변형본이다철학은 신학 유전자를 떼어내지 못하는 한영원히 제자리를 맴돌 것이다. ‘-마음 문제는 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음으로 진행해야지, ‘마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으로 진행하면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견해다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있었다!


 ‘-마음 문제가 이리도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를저자는 이 문제가 “X 하는 자신(self)’을 하기의 재귀적 성격 때문이라 진단하고이와 유사한 문제가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하며 특유의 패턴’(특히 재귀적 동형성)을 지닌다고 논증한다그러면서 대표적으로 수학 분야에서의 괴델의 불완전성정리’, 미술 분야에서의 에셔의 판화음악 분야에서의 바흐의 다양한 작품을 예로 들며이 패턴들이 지니는 함의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저자가 애초에 이 주제에 주목한 계기는 괴델의 불완전성정리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괴델 제정리; “귀납적이며 무모순인(참인!체계가자신이 지니는 바로 그 모순성 때문에자신이 무모순()이라는 걸 증명하지 못한다.”

 1930년대에 괴델이 발표한 이 정리는수학에서의 정리이고 증명이기에 인간의 인지 기제 해석에 곧바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인간이 지니는 추론 능력(이성의 힘과 그 신뢰성)을 의심하게 할 함의를 지니기에수학자들뿐만 아니라 철학자들에게까지도 큰 충격을 준 사건이다(‘러셀이나 화이트헤드는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다).


 그런데 재귀적 성격이 지니는 되먹임의 순환적 고리’(저자가 작명한 황금 노끈’, 혹은 이상한 고리’)수학에서만 아니라 음악과 회화에서도 발견한 저자는의식의 신비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기존의 연구자 중에 이에 대하여 언급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 놀랐다고 술회한다왜냐하면, ‘이상한 고리가 -마음 문제 중에서도 가장 핵심 문제인 의 자기 성(selfhood)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은유적으로(직접적은 아니고!) 해명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고 저자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천 쪽이 넘는 이 책에서 계속해서 언급하는 하는 자신을 하기” 사례들과 그 유사성은 다음과 같다.

 수학의 집합론: “포함하는 집합을 포함하기

 회화: “그리는 을 그리기

 음악: (음을 재생하기 위해) “진동을 발생시키는 음반을 진동시키기

 이 예들은 외양은 유사하지만실제적 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다르기에저자도 자신의 담론이 은유적이라고 고백한다.

 자기 성(selfhood)과 관련해서사람들이 제일 많은 관심을 가지고 해결하려는 문제는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형태일 것이라고 짐작된다.


생각하는 를 생각하기


 저자가 패턴에 주목하는 이유가패턴 자체는 물리적 현상이지만 패턴에서 의미가 창발 되기 때문인데의미는 의식의 산물로서 -마음’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패턴과 관련하여 아쉬운 점 하나는자연계에도 다양한 패턴들이 존재하는데(강물의 소용돌이가 보이는 창발성; 보텍스는 보텍스를 유발하는 원인에 의해 파괴되어 카오스 상태로 되돌아갔다가 다시 보택스를 형성하기를 반복한다, 해안선이나 나뭇잎과 나무 형태의 복제 프랙털 등), 저자는 수학과 예술 등 인공적인 대상들만을 검토하였다는 점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저자의 담론발상 중에 제일 깜찍(?)하다고 여겨지는 건 무엇보다도위에서 언급한 분야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어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선()을 거론한다는 점이다저자는 선문답 사례들을 제시하며 위의 사례들과의 유사성을 언급하는데선에 대한 저자의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그런데 굳이 선을 담론에 끌어들이면서도선적 사유 방식이 문제 해결에 효과적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선에서는“X 하는 를 하기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아예 중심에 있는 를 무화 시킴으로써 문제 자체를 단숨에 해소 시켜버리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저자는 분석적 사유를 포기하지 않고선에 대해서 끝까지 의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저자가 다루고 있는 분야가 너무도 방대하여 이하필자가 이해할 수 있고 관심 있는 부분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p. 61, 위에서 열한 번째 줄: “하나 더 인정도록” ---> “하나 더 인정도록”. 탈자!

 p. 68, 둘째 문단동형성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의미를 창출해 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복되는 유사성은이를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직관적으로(비논리적으로), 우연이 아닌 필연적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이를 주재하는 존재가 있을 거라고신의 계시라고!) 해석될 가능성이 높아서명제적 의미를 창출할 거라는 저자의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p. 93, 첫째 문단전경과 배경 둘 다 인식할 수 있는 형태인가그렇다면 그 그림은 재귀적이다.

 선에서의 공()성은둘 다 인식 할 수 있는 형태인 주체와 객체(전경과 배경)의 연기 성에 기인하므로저자가 주장하듯 재귀적 패턴을 지니기에선을 담론의 장으로 끌어드리는 건 자연스럽다.

 저자가 아래의 담론 들을 의식하고 언급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저자가 사용한 어휘 전경’, ‘배경’, ‘형태는 게슈탈트 심리학에서의 개념들로서전경은 자체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배경과의 적절한 상대적 관계에 의해서만 우연히 일시적으로 창발하는 속성을 지니는 형태(게슈탈트)는 세상을 배경으로 일시적으로 창발하는 연기적 존재(불변하는 자체적 본질을 전혀 갖지 못하는 존재)로서공한(허망한) 존재다.


 철학과 과학계에서 -마음 문제를 해결하기가 그리도 어려운 이유는이미 존재의 공성(空性; emptiness)에 잉태 되어있는 게 아닌가 싶다공성 자체가 (언어와 의미들로 분절된현실을 초월한 상태를 가리키는 개념이기에공성을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순간적인 한 장면을 이용하여 지시할 수는 있어도공성을 말할 수는 없다말할 수 없으니 명제화하여 그 참임과 거짓임을 증명할 수도 없다괴델의 변형된 불완전성정리와 유사하다; “내가 그 안에 몸담고 있는 현실 세계 안에서는 나의 참모습(공성실상!)을 결코 볼 수가 없다!" 실존 부조리다!


 p. 112~114, 그림 20. 모순을 초래하는 동형성역 분사이상한 고리

 저자가 언급하는 동형성의 한 형태로서의 재귀적 고리재귀의 순환성을 기하학적으로 묘사한 어휘인데이게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는자신이 가지는 고유 특성 때문에 순환 고리가 파괴되는 이상한 현상즉 자신이 자신을 무력화 시키는 모순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근거 시키는 논리가 자체 논리를 부정하는 모순-마음 문제의 해결이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


 저자는 이상한 고리를 보여주는 실물의 예로축음기와 음반을 들어 담론을 전개한다그림 20에 첨부된 주석에는음악(소리)을 들으려고 축음기에 설치된 음반에서 나온 소리(매체인 공기의 진동)음반에 저장된 소리를 재생할 수 없게 하는 모순적 재귀성을 상세히 설명한다.


 [이 현상의 물리적 원리세상에 존재하는 임의의 물체(질량과 형상을 가지는 고체)거의 예외 없이 자기만의 고유한 고유진동수를 지니는데만약 외부에서 전해지는 진동 주파수가 물체의 고유진동수와 일치하면(공진공명 현상:resonance), 진동을 계속해서 증폭시킴으로써(진동이 전달되는 현상의 물리적 의미는 에너지가 전달되는 것이기에), 최후에는 진동 때문에 야기되는 물체의 변형물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변형을 넘게 되어물체가 파괴된다.]


 저자가 축음기와 음반을 예로 든 건 아마도 공진현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 듯한데예로든 상황에서는 이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없다!

 본문에는 전축을 파괴하는 이라는 무시무시한 표현도 있지만전축이나 음반이 깨지는 정도의 파괴는 아예 불가능하고음반이 깨지기 전에 바늘이 튀어 트랙을 이탈함으로써 소리가 정상적으로 전해지지 않을 수는 있다일반적인 음반이라면가사나 선율이 일부분 탈락되어(특정 정보가 상실되어정상적인 감상이 불가능할 것이기에이 정도도 이상한’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원리가 물리적 원리인 공진이기에음반에 새겨진 소리는 애초에 아름다운 선율일 수가 없는 일정한 주파수(음반 자체 속성인 고유진동수사이렌 같은 일전한 높이의 소음이어야 하는데그러면 이 음반은 결국 음반 아닌 음반일 수밖에 없다물론 약간 억지를 써서 그 소리가 소음이 아니고음악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저자가 언급한 존 케이지라면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런데그렇다 하더라도그게 일정 주파수만을 가진 소리이기에 바늘이 튀어도 손실되는 새로운 정보는 하나도 없어서소리를 감상(?) 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다변화 없는 정보는 정보가 아니다!

 음반 자체를 깨뜨리면 되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겠으나음반은 유리잔과 달리(와인 잔은 가수가 목성만으로도 깨뜨리기도 한다유연한 플라스틱 재질이라서보통의 축음기 출력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축음기 출력이 엄청나게(무한으로?) 크면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 할 수도 있을 텐데아쉽게도 저자는 그 어떤 축음기로도”(보통의 축음기로도) 소리를 재생할 수 없는 음반이 존재한다고 발화 함으로써 자신의 퇴로를 스스로 막아버렸다! '저자가 한 말'이 '저자가 한 말'을 파괴시켰다!

 청각 분야에서 재귀적 패턴에의한 자기파괴 현상을 예로 들기 위해서라면, 저자는 '축음기-음반' 사례 대신에, 마이크와 스피커가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보고 있는 예를 들었어야 했다. 이럴 경우에 마이크와 스피커는, 소리를 서로 재귀적으로 주고 받으며 무한 증폭 시킴으로써 귀를 찢을 듯한 소음을 발생 시켜, 마이크와 스피커의 기능을 상실 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마이크를 사용하는 행사장이나, 라디오 생방송 중에 아나운서와 청취자가 통화하는 경우에 흔히 발생한다.


 p. 343~346, 선과 이즘:

(A); “~~선이 추구하는 목표를 가리킬 이름이 하나 있다: 이즘(主義, ism)이다이즘은 반()철학이고생각이 없는 존재방식이다이즘의 대가들은 바위,나무조개이다.” (p. 343)

 저자는 이즘을 통상적인 슬로건이나 주장이 아닌저자만의 의미로 사용한다~~ 이 낱말은 접두어 아닌 접미어이기 때문에이념(idea) 없는 이념(ideology)을 제시한다당신이 그 이념을 어떻게 해석해도 아마 맞을 것이다. ‘이즘은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이름이 아주 잘 맞는다. ~~(p. 973~975)”.


 선()은 근본적으로 무언가를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선의 무주성無住性), 결국 어떤 주장도 부정하지 않는다‘X 이즘 X에 어떤 명제 혹은 언어를 넣어도 문제가 안 된다는 점에서선을 저자가 뜻하는 이즘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합당하며이 정의가 모순적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반철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생각이 없는 존재방식이다이즘의 대가들은 바위나무조개이다.”라는 명제는저자의 완전한 오해다선은 생각이 없는 존재방식이기는커녕 메타 생각(급조한 어휘임저자의 어휘로는 상하 층위의 엉킴 ?)을 하는 존재 방식이며바로 이 점 때문에 바위나무조개들은 결코 이즘의 대가가 될 수 없다. ‘바위나무조개들은 재귀적 사유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B); 지각을 억누르는 것논리적언어적이원론적 사고를 억누르는 것-이것이 선의 본질이요이즘의 본질이다이것이 바로 언-방식(Un-mode)으로-지능적인 것도 아니고 기계적인 것도 아니고 그냥 (Un)”이다~~.” (p. 344)


 “~을 억누르는 것이 선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나, (A)에서 보듯 선은 무언가를 주장하거나 배척하지 않기 때문에 ~을 억누르는 짓은 선과 거리가 멀다대신에 관심을 두지 않을 뿐이다저자가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선은 논리적언어적이원론적 사고를” 메타적 층위에서 자유자재 활용한다저자는 선의 화두를 다수 인용하며 해설하고 있으면서도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방식을 (Un)이라고 하지만, ‘은 영어에서 대개 부정적 의미를 띠는 어휘이기에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맞다’ ‘틀리다’ 혹은 ’ ‘아니오를 요구하는 질문은분명한 가치판단을 요구하는 명제이기에선에서 이런 개념은 무의미하다따라서 맞다’ ‘틀리다’ 혹은 ’ ‘아니오는 답이 될 수가 없다이때 굳이 답을 하자면역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데그게 조주선사가 애용한 (, Mu). ‘’ 속에는 아무런 의미도 들어있지 않고 그냥 텅 비어있다 (라즈니쉬는 이런 상황에 적절한 답으로 (Po)를 추천한다). 선어록에 있는 선사와 제자 간의 대화에서제자의 질문에 대한 선사의 대답은 대부분 무성(無性)’을 지닌다제자의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C); “~~~선은 한 술 더떠서세계가 전혀 부분들로 쪼개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p. 344)


 “세계가 전혀 부분들로 쪼개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고 저자가 주장하지만이는 선에 대한 코믹한 오해다.

세계가 부분들과 아무런 상관없이독자적인 본질을 지니는 별도의 존재로서 있었던 게 아니고애초부터 부분들만 있었는데그 무수한 부분들이 상호 간에 아무런 관계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 존재하지 않고사이좋게 옹기종기 모여있기에멀리서 보면 마치 한 덩어리처럼 보인다그처럼 무수한 부분들이 한 덩어리처럼 모여있는 그 모습(실체가 아니고 단지 현상일 뿐인 모습)을 세계라고 부를 뿐이다그래서 세계는 개념이며 환영(幻影)이다세계는 두뇌 속에만 존재한다이처럼 부분들이 모여 전체로서 새로운 형태를 창발하는(두뇌 속에서!) 현상이 바로 게슈탈트가상이기에 애초에 깨지고 말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사실이 이러하니, “세계가 전혀 부분들로 쪼개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일이나이를 비웃는 일은(저자가 이러고 있다!) 모두 다 웃음거리에 불과하다이게 비이분법적인 무분절(無分節공계(空界)의 특성이다진제(眞諦)라고 불린다.


 하지만 세계를 구성하는 물리적 실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세계가 공 할 뿐이다아무런 실체도 아니면서 하나의 독자적인 형태가 창발하는 현상은(두뇌 속에서-마음 문제), 진화 과정에서 우리 두뇌가 창발시킨 물리적 기제인데이 기능이 없었다면 인류는 생존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숲으로 사냥을 나간 사냥꾼이 저 멀리 나무 그늘 사이에서 아른거리는무의미한 조각들을 하나로 모아 토끼’ 형태로 만들거나 호랑이’ 형태로 만들지 못하면사냥꾼은 먹이를 구하지 못해 하루를 굶거나아니면 자신이 무언가의 먹이가 될 수 있으므로그야말로 온 힘을 다해 형태를 인식해야만 했다이게 이분법적으로 분절된 색계(色界)의 속제(俗諦).


 그래서 공즉시색 색즉시공 공불이색 색불이공이다.


(D); 선사는 분명히 깨달음의 상태란 자기 자신과 나머지 우주 사이의 경계선이 사라지는 상태()라는 생각을 전달하고 싶었다이것이야말로 이원론의 종식일 것이다왜냐하면 그가 말한 것처럼지각을 갈망하는 어떤 체계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그러나 그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죽음이 아니라면()? 어떻게 살아있는 인간이 자기 자신과 외부 세계 사이의 경계를 없앨 수 있다는 말인가?” (p. 345)


 원래 선 어록에 실려있는 선사와 제자 사이의 대화(화두)를 인용하며, 그에 관해 저자가 논평하는 부분인데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담론이기에길지만 상세한 논의를 위해 해당 대화를 인용한다소위 선문답이라는 게, ‘알쏭달쏭한 비문(祕文)처럼 여겨지기에무리해서 어리석은 소견을 첨부한다.


 1.“무엇이 진정한 길입니까?” 자는 리얼리티로서의 궁극의 실재(실상實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출가한 이유다그런데 문장속에 있는 진정한 (머릿속에 있는 개념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진정한 길은 진정하지 않은 길 이미 전제하고 있다이원론이다. “진정한은 일종의 가치판단이며이게 가능해지려면 절대적 판정 기준이 존재해야만 하는데, 선은 그런 걸 인정하지 않는다. ‘절대적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자의적 어휘와 개념을 배경으로 하는 근거 없는 허상이기 때문이다.

 2. 그것은 바로 네 눈앞에 있다.” 엉뚱하고 냉정한 대답 같아 보이지만자의적 가치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그대로 보면 모든 게 옳기도 하고 동시에 그르기도 하다는 뜻이다그러한 관점에서는세상 모든 것이 제모습을 한점 남김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선사는 친절하다불 친절한 선사라면 자 하나로 제자의 입을 막아버리고거친 선사라면 바로 몽둥이가 날아간다달마는 전자에 속한다황제에게도 예외가 없다.

3. 어째서 제 눈에는 안 보입니까?” 답답한 상황이긴 하지만제자의 자세는 치열하다분별적 시각으로 보기에 안 보일 수밖에 없다.

4. 왜냐하면 너는 너 자신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가 보기 때문이다너는 를 생활 세계 속에서의 분절적 개념으로 파악하여너를 분절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주체 자신이 분열된 일상생활 세계 속의 이기에), 대상이 분절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너 자신이 너 자신을 이미 이분법적으로 분절하여 인식(사고)하기 때문에세상도 그리 보인다는 뜻이다이쯤이면 대부분 제자는 실망하고 물러나거나 아예 포기하여 하산한다.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게 뭐가 문제야?’

5. “그러면 선사께서는 그 길을 보십니까?” 제자 눈에는 진정한 길이 보이지 않는데그 이유가 나 자신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하니선사께서는 그게 가능하냐는 질문이다. (우리는 모두 내가 나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 잘 안다고 믿는다!) 비이분법적(무분절적사유가 인간에게 가능하겠냐는 질문이자 반박이다답답하지만 치열하고 기특하다.

6. 네가 나는 어쩌지 않는다’, ‘당신은 어쩐다’ 등 이런 식으로 말하며 이분법적으로 보는 한네 눈은 흐려져 있다.” 선사는 정말 자상하다.

7. 저도 선사께서도 없다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볼 수 있습니까?” 제자는 정말 끈질기다(치열하다)! 그러기에 선사의 자상함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다이제 제자는 보는 주체가 없다라는 실마리를 잡았다질문 중에 있는 없다면이 그 증거다만일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보는 주체()’가 없다면.... 하지만 아직 그것(특별한)’을 놓지 못하고 있다.

8. 나도 너도 없다면 그것을 보려는 자가 누구란 말인가?” 선사의 포효다이미 분절된 시각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데누가 또 분절된 그것을 보려고 하겠냐는 것이다대화 장면은 무척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다!


 - 명제 (D)속의 (); 인용한 대화 깨달음의 상태란 자기 자신과 나머지 우주 사이의 경계선이 사라지는 상태라는 문장에서의 경계선의 의미를이어지는 담론을 근거로 추정할 때저자는 경계선 너머로는 아무것도 넘나들 수 없는 실선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한데이런 이해는 오해다.


 왜냐하면선의 관점에서는 자기 자신과 나머지 우주 사이의 경계선은 애초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다만 우리의 생존적 필요 때문에(나를 둘러싼 으로서의 세상의 상황 때문에) ‘임시로’ 그리고 임의대로’ 그은 가상적인 경계이기 때문에상황이 바뀌면 그 경계선은 얼마든지 달라지거나 아예 사라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경계선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경계선은 공()하다경계선 자체가 공성을 지니기에경계선에 의해 나누어진 개별자들의 본질도 결국 공하다!


 사실이 이렇다면그 경계선은 굳건한 실선이 아닌 유연한 점선 정도일 것이고(게슈탈트 현상이기에), 비록 경계선이 존재할지라도 유연한 점선이기에나뉘어 있던 개별자들은 얼마든지 상호 침투하고 교섭하며 형태를 바꿀 수가 있게 된다()에서는 경계선을 부정하거나없애야만 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나머지 우주 사이의 경계선이 사라진다 명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저자의 이해는 오해에 불과하다.

 물론 경계선을 지나치게 부정하면(‘경계선은 없다 주장 역시 그 절대적 근거가 없다), 현실에서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우리가 이 세상을 개별자들로 분절하지 않으면세상 속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구별할 수가 없고 이름 짓는 게 불가능하기에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속제). 피식자와 포식자나와 너우리와 그들약초와 독초선과 악미와 추 등등분절은 하면 할수록 생존과 번영에 유리하기 때문에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을개념과 어휘들을 이용한 범주화 작용으로 철저하게 분절시켜 왔고이 능력은 이미 진화 과정에서 우리 유전자 안에 깊숙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한 개체로서의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사물들의 이름을 익히며 세계를 분절하는 법을 배운다밥과 사탕은 접근해도 되지만똥과 불은 멀리해야 한다고이걸 부정하면내가 아끼는 에서 나온 을 멀리 해야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 심리치료를 받아야 하고불을 만지려다 화상을 입는다이해할 수 없는 가혹한 세계다.


 분절 능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종이나 집단은 분절 능력이 더 높은 다른 종이나 집단에 잡아 먹히고 굴복하는 건 자연스럽게 추론할 수 있다분절은 기호와 상징을 이해할 수 있는 추상화 능력에 해당하는데이 능력은 이미 유인원일 때부터 시작되었을 거라는 점에 대해서는 진화심리학이나 인류학계에서도 거의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저자도 이점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언급하고 있다(p. 339~340).

세계를 범주들로 쪼개는 것은 사고의 위층 훨씬 아래에서 일어난다. ~~ 인간의 지각은 본질적으로 이원론적인 현상이며이것은 깨달음의 추구를 힘겨운 투쟁으로 만든다전혀 과장이 아니다.” ~~~깨달음의 적이 논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 틀린 것이고그 적은 오히려 이원론적이며 언어에 의지하는(번역문이 애매하여 수정하였다사고이다그런데 사실언어에 의한 사고보다 더 기본적인 것이 있는데 바로 지각이다어떤 대상을 지각하자마자우리는 그 대상과 그 밖의 세계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세계를 인위적으로 부분들로 쪼개며 그로 인해서 진정한 길을 놓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말하면서도 확신은 못 하는 듯저자는 마지막까지 오락가락한다.


- 명제 (D)속의 (); 지각을 갈망하는 어떤 체계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선이 추구하는 궁극의 상태가자기 자신과 나머지 우주 사이의 경계선이 사라지는 상태라고 믿고 있는데(), 그렇다면 분절할 대상도 방법도 없어서 지각을 갈망하는 주체도 지각 체계도 없을 거라고 나름 엄밀한 논리적 추론을 하고 있다이 과정에서 저자는, “전제 명제가 허위이면 그 전제 명제로부터 유도되는 모든 명제는 참이라는 논리학의 약속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물론 이때 유도되는 명제들은 모두 참이지만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명제에 대응하는 체계가 실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헛소리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명제()가 허위이기에유도된 명제()가 엄밀한 논리적 추론으로 얻어져서 문법상으로는(의미론적으로는하자가 없지만, (화용론적으로는불행하게도 헛소리에 불과하게 된다.


 ()에서 살펴보았듯이경계선은 세상의 상황에 따라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겨나는데경계선에 의한 분절(구분)을 하지 않으면 곤혹스러운 상황에 부닥치게 되니언제나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동물원 철창에 갇힌 사자는 감상의 대상에 불과하지만숲속에서 만나는 사자는 포식자다그러니 지각 체계를 어찌 포기할 수 있겠는가직장에서 신임받으며 잘나가는 부장급 회사원이퇴근 후 귀가해서도 배우자와 아이들 앞에서 부장 노릇을 하려 들면배우자는 우울증에 시달리고 아이들은 자폐증에 갇힐 수가 있다부모님 앞에서는 자식이 되어야 하고동창 모임에 참석해서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즉 경계선이 있는 듯 없는 듯 느슨하게 유지하며 끊임없이 변형해야만 한다소위 스위칭이다(p. 382~389; 두 가지 서로 다른 방법을 의식적으로 제어하여 동시에 대상을 볼 수 없으니번갈아 보아야 한다는 게와 거북이의 대화가 있다). 내가 그 안에 있는 세상이 끊임없이 흐르며 생성 유동하기에세상에 존재하는 인과성의 그물 속 하나의 그물 격자인 그 상황에 어울리게 끊임없이 생성 유동해야만 한다언제나 지각 체계를 총동원하여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이게 요즘 말하는 깨어 있음이며 알아차림이다피곤한 일일 수밖에 없다실존 부조리이고 운명이다.


- 명제 (D)속의 (): 그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죽음이 아니라면?

 저자가 명제()에서 지각을 갈망하는 어떤 체계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라고 전제하기 때문에명제()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며 역시 헛소리다하지만 희망은 있다죽지 않고서야 어떻게 인간이 자기 자신과 외부 세계 사이의 경계를 없앨 수 있을까라고 걱정하지만방법은 있다그 방법에 관한 힌트는 지금까지의 담론들 안에 모두 언급되어 있고저자도 알고 있다. 면 할 뿐어쩌면 죽어야 할지도 모른다분절적 자기가 소멸하여야무분절적 자기가 가능할 테니.


p. 345, 선과 툼볼리아

 저자는 녹아 사라지는 눈()을 죽음에 비유하는 선사의 편지 내용을 언급하며다음과 같이 죽음에 대한 평을 한다.

한때 우주 속에서 식별할 수 있는 하위체계였던 눈송이가 이제는 한때 그 눈송이를 포함했던 더 큰 체계 속으로 사라져 들어간다구별된 하위체계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겠지만 그것의 본질은 어떻게든 여전히 남아있고 앞으로도 남게 될 것이다(A).”


 자체로 매우 아름다운 문장이다저자는 감성도 매우 풍부할 것으로 짐작된다이 문장 안에 언급 되어있는 하위체계’, ‘더 큰 체계’, ‘그것의 본질 들에 관해 더 알아보면 명제()와 관련된 의문점을 해소하는데 다소나마 더 도움이 될 듯하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A)에 있는 본질을 검토해 보면, (서양철학에서의 본질은 플라톤 이래로, ‘자기 자신(X)의 존재 근거를어떠한 다른 존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보유하여, ’X‘를 ’X‘이게 하는 특징을 지칭한다이런 X’는 존재의 근거를 자신이 지니기에 영원불멸한다저자가 명제 A를 언급할 때저자는 아마도 이러한 본질을 염두에 두고 썼을 듯하다왜냐하면 다른 종류의 본질에 대한 저자의 언급을 이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에서는 근본적으로 본질 같은 걸 인정하지 않는다애초에 고정불변한 것이 없이 일체가 무상(無常)하여서, “그것의 본질은 어떻게든 여전히 남아있고 앞으로도 남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헛소리다.


 선에서 본질과 유사하다고 여길 수 있는 걸 굳이 찾는다면이슬람 철학에서의 후위야’ 개념이 아닐까 생각된다(이는 지극히 필자의 주관적 소견일 뿐이다후위야’ 개념은 이즈스 도시히코에게서 빌려왔다.)

 본질에 관한 이슬람 철학에서의 논의 중에 등장하는 후위야는 마히야에 상대되는 개념으로서이 둘은 각각 개별적(개별자로서의본질과 보편적(보편자로서의본질을 의미하는데이 중에 마히야는 서양 철학에서의 본질과 유사한 개념이다.

 ‘후위야’ 개념 자체가언어와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는 보편적 본질과 상대되는 개념이기에이에 관한 설명을 논리적으로 말하는 게 어려워이해를 돕기 위해 스토리텔링으로 지시한다. (스토리텔링의 대가인 저자가 볼까 두렵다)


 늦은 겨울밤새 눈 내린 이른 새벽누군가가 오솔길로 산책을 나선다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오솔길에는 흰 눈이 덮여있다그렇게 한참을 걷는데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가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순간?’하는 느낌도 잠시(0.01초 쯤?; 장면 1), ‘복수초가 피었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며 지나간다(이하 장면 2). 그리고 허리를 굽혀 한참을 보면서 일찍 피었네’ 등등 여러 가지 상념들이 이어진다휴대폰을 꺼내어 집으로 전화를 건다. “복수초가 피었네?” “그래좋겠네한 송이만 꺾어다 줘” “”.


 ‘장면 1’에서의 복수초 이미지가 바로 복수초의 개별적 본질(후위야)’이고, ‘장면 2’에서의 복수초 이미지는 복수초의 보편적 본질(마히야)이다.


 장면 2에서의 복수초는통화하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상호 의미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기호로서의 존재다여기에서의 복수초는 단지 지시 대상일 뿐이며실존하는 존재가 아니고 단지 이름’에 불과하야생화 교본에 실려있는 그림 이미지와 다르지 않으며하나의 범주에 속하여 수많은 다른 복수초들과 구별되지 않고 단지 그중의 하나일 뿐이다. ‘속계’ 속의 존재다군중 속에 파묻힌 그림자로서의 고독을 느끼며실존 불안에 시달리는 존재.


 반면에 장면 1’에서의 복수초는아직 이름을 붙일 수 없고단지 지금 여기 이것!이라고느낄 수밖에 없는(설명할 수 없고 가리킬 수만 있는하나의 신비이며수많은 다른 복수초들과 선명하게 구별되는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다보는 자와 보여지는 대상 사이에 아무런 선(개념도 없고 기억도 없다무주(無住)둘 사이를 갈라놓는 어떤 것도 없이둘은 각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존재로서직접 무매개 상태로 서로 마주 보며 접촉하고 있다(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Tat tvam asi!

 온 존재! ‘진계’ 속의 존재다.

혹시 물 자체(Ding an sich)?

 그런 존재가 목이 꺾여 피를 흘린 채 이미 죽어있다이게 장면 1’에서의 복수초의 개별적 본질이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존재이것이 바로 그 존재의 참 모습(실상)일 것이기에선에서 일컫는 소위 실상에 해당하지 않을까아직 어떤 것으로도 분절되지 않아 자신의 본래 모습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존재! 여여한 여래’, ‘오면서 가는 자’, ‘머무르지 않는 자. 아직 그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았기에 모든 가능성을 지닌 무한자모든것을 품고있는 일자. 복수초가 꺾이는 순간, 우주가 꺾인 셈이다. 그 어떤 이즘으로도 규정할 수 없고그 무엇에도 기대지 않으며 끊임없이 흐르는 존재분절되지 않아 구별할 수 없고 이름도 부를 수 없기에 있다고 할 수도 없지만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니 없다고 할 수도 없는그 공성(空性)!

 목이 꺾여 죽어있는 복수초의 개별적 본질은 누군가에게 말해질 수 없다. 오직 체험만 가능하다. 개별적 본질을 얼핏 엿보는 그 찰나가 혹시존재의 신비를 엿보는 틈새가 아닐까?


 장면 3식탁 위에 놓여있는 꽃병에 꽂혀있던 복수초는,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다가, 그날 저녁 볼품없게 시들고 오그라든 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속제의 실상이다.


 p. 343; ‘백장’ 선사가 어느 날 제자들 앞에 꽃병을 내려놓고이름을 대지 않고 이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고?”라며 문제를 낸다제자들이 얼마나 익었는지 시험하려는 의도다공부의 최종 목표인 실상’(‘이것의 개별적 본질)’을 한번 말해보라는 요구다고참 제자가 아무도 이것을 나막신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고 답변하지만 인정받지 못한다이것의 이름(X)을 언급하지 않는다는답변이 되기 위한 기본조건은 갖추었기에 완전히 틀린 답은 아니지만 정답은 아니다. ‘Z가 아니다는 곧바로 X’를 지시하지 못한다이름을 갖지 않는 X’는 무한을 품고 있어서유한한 의미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언어로는(‘나막신은 아니다로는) ‘X’를 직접 지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이때 신참 제자인 위산이 앞으로 나와 아무 말 없이 꽃병을 발로 걷어 차버린다대범하다싹수가 있다그리고 선사의 인가를 받는다이름을 갖지 않는 ‘X에게 이름을 붙이려는 시도 자체를(분별지에 갇힌 상황)을 일거에 소거시켜그것의 본질(공성)을 보인 것이다앞의 명제(B)는 이 일화에 대한 저자의 평이다.


 저자는 책 뒷부분에서(p. 966) 기호와 대상의 관계를 다루며, “비트겐슈타인이 기호-대상 (사용과 언급)을 심층적으로 연구했다라고 언급하는데이 말만 딱 세 줄 언급하고 만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 있는 명제 중지금의 담론과 관계될 수 있을 거라고 여겨지는 명제로는 이런 게 있다.

보여 질 수 있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 (4.1212)

“~~그러나 물론 그것은 말해질 수 없다그것은 드러난다.” (6.36)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7)


 필자의 견해로는, 이 명제들이 말할 수 없는 개별적 본질에 관한 명제로도 여겨질 수 있는데비트겐슈타인이 (6.36)에서는 그것은 드러난다고 하면서도마지막에(7) ”침묵해야 한다 결론 내리는 게 아쉽다.


 침묵만을 지킨 유마’ 거사는 제자를 키울 수 없다. ‘백장처럼 (활어活語!)도 사용하며가르치는 방법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야제자를 깨우칠 수가 있다제자보다 반보 앞서가야지한보만 더 앞서가도 제자는 포기한다유마거사와 비트겐슈타인은 백장보다 한 수 아래다사이비 선사들은 침묵만을 지키거나혹은 몽둥이만을 휘두르거나아니면 알겠느냐?’만 반복한다.


 경계선으로 나뉘어져 보편적 본질을 지니는 개념으로서의 존재는다른 존재들과 분절되어 따로따로 존재하기에 구별된 하위체계에 해당하고경계선으로 분절되지 않은 존재들은 따로따로 존재하지 않고 섞여서 큰 덩어리로 존재할 것이기에 더 큰체계 속으로 들어간다.”


 p. 350, 둘째 문단; ‘확대 추이도(Augmented Transion Networks, ATN)’. 원래의 의미상으로는 확장천이문법이 더 적절하다.

 p. 355, 제일 아래 문단 첫 줄; ‘바로 바로’ 중복 되었다.


 p. 962~965;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또는 뇌를 이해할 수 있는가및 괴델의 정리와 개인의 비존재


 몸-마음 문제와 관련하여 저자는, “뇌의 물리적 구조를 모든 층위에서 완전히 이해하려는 것은 괴델정리의 자기-반영과 유사한데, “메타수학과 계산이론의 모든 제한적 정리가 어떤 임계점에서는 우리를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걸 보증하니까그 유사성에 따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것은 영원히 미뤄질 거라는 절망적인 예측을 한다,


 하지만 저자는 바로 포기하지 않고메타수학과 계산이론의 모든 제한적 정리들과 사람의 뇌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아제한적 정리들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니해결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으로그 적용 방식의 유형을 세 가지로 제시하며 가능성을 검토해 보지만결국 어느 유형의 경우에도어느 누구도 자기(the self)라는 불가사의로부터 면제될 수 없다라고 절망적인 결론을 내린다.


 전적으로 공감한다추상세계를 취급하는 철학자나 수학자들과 달리실재를 다루는 인류학자나 진화 심리학자들은인간의 인지 능력은 자연 속에서의 생존을 위하여 진화하였지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일찍부터 주장해 왔다무한한 우주 속의 한 점 모래알 같은 유한한 인간존재가무한한 앎을 주장하는 건 무리라고 여겨진다.


 p. 964, 끝 문단; 내가 살아있지 않았던 때가 있었고내가 살아있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a). ~~ ‘그냥 또 다른 인간존재로 볼 경우 이것은 완전히 의미가 통한다(b)그러나 또 다른 층위아마 더 깊은 층위에서 개인의 비존재는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c).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있다(d)따라서 내가 우주에 없는데 그것을 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e). ~~ ”


 저자는 여전히 개인을 이분법적으로 분절된 로만 전제하고 담론을 지속한다그러면서도 (a) ‘명제가 일상의 나가 아닌 또 다른 인간존재에게만 의미가 통할 거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b). 일상에서 이분법적으로 분절된 나로 살아가는평범한 상식적 인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명제(a)의 의미를 모를 사람은 없다또 다른 인간존재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완전히 의미가 통한다.


 저자에게명제(c)에 언급된 더 깊은 층위는 개념은우리가 결코 인식할 수 없는 의식의 저 아래층즉 생리화학적 층위를 의미하는데그 층위에서는 아무런 의미작용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의 비존재라는 의미가 전혀 통하지 않을 거라는 말은 의미론적으로는 타당하다그러나 저자는 개인의 비존재라는 어휘를 존재 자체가 없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명제(c)는 의미 없는 대상은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되기 때문에결국 의미 없는 동어 반복에 불과하다.


 저자는 명제(d)를 근거로 명제(c)와 (e)를 주장하는데명제(d)는 참이지만 명제(c)(e)는 모두 오류다참인 명제(d)로부터 명제(c)와 (e)를 유도하는 논리가 타당성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그 이유는명제(d)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부정확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즉 우리라는 단어가 분절적 존재와 무분절적 존재를 구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저자가 우리를 이분법적으로 분절된 우리로만 제한하고 있어서 발생한 오류다이분법적으로 분절되지 않은 무분절적 존재로서의 우리에게, ‘개인의 비존재는 분절적 존재의 부재를 의미할 뿐 존재 자체가 없다는 의미를 뜻하지 않는다따라서 명제(e) 속의 내가 우주에 없는데라는 명제는 그 자체가 헛소리가 된다!

 같은 이유로 p. 965 두 번째 문단 속 동양의 믿음과 ~~~서양의 믿음 사이의 대립~~” 담론도 무의미하다.


 p. 966, 둘째 문단과학과 이원론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뒤섞임 패턴을 보여주는 다양한 사례들을 흥미진진하게 해석하며 들려주었지만마지막 장에서는서문에서 언급한 책을 쓴 애초의 동기즉 -마음 문제와 연관될 수 있는 뒤섞임 패턴이 지니는 함의는 파악하지 못했다고즉 주체와 대상의 융합에 본질적으로 의존하는 모든 결과들이 제한적인 결과들이었다결론지으며 이 모든 결과들이 왜 제한적인지는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자폭일까?


 p. 977, 둘째 문단지능의 우발적 불가해성?

 세부 절 제목에 있는 우발적과 “?”에 왠지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데 이유가 있었다.

“ 우리가 자신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하더라도그 배후에 괴델의 비틀기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우리의 뇌가 스스로를 이해하기에 너무 미약하다는 것은 그저 우연한 운명일 수 있다.~~그 특성들을 왜 이해할 수 없는지 근본적인(즉 괴델식의)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확인 사살이다우연성의 필연성!


 p. 993, 인용문 중리체르카 --->리체르카(p. 9). 통일성 유지!


 오랜만에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역자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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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그런 나는 없다
홍창성 지음 / 김영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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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인이 아닌, 스스로 평생 철학을 연구해온 필자(p. 162)라고 자부하는 저자가 너무 딱하다!

 

- 유사한 문제적 주장이 다수 있지만, 책에 있는 대표적인 주장 하나만 인용한다. 저자는 나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전체는 부분의 합과 다르다라는 명제가 엉터리이고 따라서 전체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박 논증을 아래와 같이 전개한다.


 p. 129~130: “제니의 책상은 네 다리 하나하나의 무게가 2kg이고 위의 널빤지는 12kg이라고 해 보자. 이 다섯 부분을 합치면 20kg이 된다. 전체로서의 책상도 물론 20kg이 나간다. 그런데 만약 부분들을 합친 것(20kg)과 별도로 전체로서의 책상(20kg)이 실재한다면, 제니가 쓰는 책상은 두 무게를 합쳐서 40kg이 나가야 한다(A). 그러나 우리는 제니의 책상이 20kg만 나간다는 사실을 안다. ~~ 우리는 전체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전체가 허구라고 결론 내려야 한다. ~~부분들이 실재하더라도 그것들이 모인 전체는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요, 허깨비이며, 환상이어서 단지 이름에 불과할 뿐(B)이라는 논의를 충분히 살펴보았다.”

 

 위 인용문에서, 명제 A가 오류이기에 B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거다. 이런 코믹한 주장은 주로 순진한 유아들이나 억지를 쓰는 정치인들에게서나 볼 수 있다. 벽 구석에 머리를 쳐 박고 눈을 감은 채 '나 여기 없다!'고 주장하는 어린 아이가,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 되지 않고 귀엽게 만 여겨지는 건, 아이가 전적으로 순수하고 진심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봉숭아 학당 수준의 끝장 토론을 수 세기 동안 계속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철학 교수 머리에서 이런 황당한 논리가 나올 거라고까지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이 문장이 스탠딩 코미디언의 공연 멘트라면 기꺼이 웃어줄 수 있겠지만, 엄밀한 논리를 생명으로 하는 철학전공자에게는 치명적인 오류이고, 평생 교수 생활을 했다는 사람의 멘트로는 적절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헛소리다. 소위 철학교수나 정치인들이 맥주캔의 형태에 관한 토론을 하면, 한 사람은 사각형이라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원형이라고 주장하며, 각자 옆면과 윗 면을 찍은 사진들을 확실한 증거라고 제시하고 자기 주장을 포기하지 않으니 토론이 끝장나지 않는다. 그런데 더 웃기는 건, 이런 경우 대부분은 상대방 관점에서 보면 상대방 말이 맞는다는 걸 서로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양쪽 모두 상부 측면에서 두 면을 동시에 입체적으로 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자동차를 만드는데 필요한 부품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모아도, 그냥 쌓아 놓기만 하면 그건 자동차가 아니다! 책상 다리 네 개와 널빤지를 조립하지 않은 채 팔에 안고 있으면, 그건 아직 책상이 아니고 책상이라 부를 수조차 없다. 저자가 들고 있는 물건을 저자가 제니의 책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바로, 그 부품들이 이미 조립되어 하나의 새로운 물건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 전체라는 현상이 새롭게 출현했기 때문이다!

 

 책상이 새롭게 나타났다고 해서, 부품들은 부품대로 그대로 있고 책상이 별도의 공간을 차지하며 또 다른 물건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책상이라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거다. 부품들은 원래 그대로 여전히 똑같은 부품이지만, '분리된' 상태로부터 '하나로 연결된' 새로운 상태로 변하면서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에, 이 새로운 상태를 배경으로 책상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전경으로 나타난다. 배경이 달라지면 그 배경과의 관계에 따라 전경이 달라지는 이 현상이 소위 게슈탈트 현상이라는 거다(이게 바로 연기성에의한 존재의 공성이다). 게슈탈트는 특정 조건이 성립하여 유지될 때에만 한시적으로 드러나는 임시적 현상에 불과하지만, 사회적으로 유용하기 때문에 별도의 이름을 부여하여 일상에서 유용하게 사용된다. 이걸 사회학에서는 사회적 실재라고 부른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은 아무런 근거 없는 임의적인 것이지만, 이것 없이는 사회가 유지 될 수 없기에 무언의 약속에 의해 실재라고 여겨지는 것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X 대학 입학 설명회에 참석한 학생들을 태운 버스가 캠퍼스를 돌며 안내자가 대학을 소개한 후, 한 학생이 질문을 하였다. “그런데 X 대학은 어디에 있어요?” 안내자가 조금 전에 본 것들이 바로 X 대학이라고 하자, 그 학생이 다시 물었다. “건물들밖에 못 보았는데, 그 건물들이 X 대학입니까?”라고.

 

 육안에 보이는 물체로서의 부분 만을 보면, 책상의 이 부분 저 부분은 각각 다리와 널빤지일 뿐이지만, 전체를 동시에 보면 책상이 보인다(맥주캔의 형태는 원통이다!). 책상 다리를 널빤지에 수직으로 붙이지 않고 나란하게 붙이면(배경 즉 관계가 달라지면) 이번에는 '책상'은 사라지고 발판이 전경으로 출현하고, 책상 위에 내가 걸터 앉으면 이번에는 의자가 출현한다. 찰흙으로 빚은 항아리를 뒤집어 세워 그 위에 걸터앉으면 항아리가 의자로 변신하는 것처럼.

 저자는 자기 손에 책상을 들고 책상이라고 부르면서도 책상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소위 소 등에 앉아 소를 찾고 있는꼴이다. 그러면 혹시 저자는, 부분으로서의 수소와 산소가 합쳐진 전체가 실제로 존재할 수 없으니, 목이 마를 때면 물 대신에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를 따로따로 마시기라도 하는 걸까?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베이글 두 쪽 사이에 토마토와 양상추, 피클, 치즈, 소고기 조각, 그리고 케첩을 뿌린 것을 달라고 하면 주문을 거절 당할 수도 있다. 그냥 햄버거 주세요하면 서로 편하다.

 

 노자가 얘기한 대로, 우리가 생활하며 사는 '방'이라는 게, 육안에 보이는 물체라고는 벽뿐이지만,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함께 보면 이라는 전체가 출현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방으로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단지 텅 빈 공간일 뿐이다. 방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벽과 공간이 모두 필요하고, 방을 보기 위해서는 벽과 공간 전체를 동시에 보아야만 한다.

 

 내 신체 자체가 는 아니고, 나를 찾기 위해 내 신체를 완전히 해체한다 해도 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다. 두뇌 속 신경 신호는 단지 전기 신호일 뿐 거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그런데도 육신과 정신이 함께 있을 때면 문득 가 출현한다. ‘역시 현상일 뿐이고, 나를 구성하는 부분들이 흩어지면 나 역시 사라질 수밖에 없다. 게슈탈트로서의 내 존재는, 배경 역할을 하는 조건으로서의 부분들인 타자 없이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석 씨(석가모니)라는 건 없다고 한 이유도, 전경으로서의 는 배경으로서의 육신과 두뇌 속 전기 신호들을 필수 조건으로 하는 게슈탈트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게 없다라는 정확한 의미는, 아무것도 없다는 게 아니고 라는 존재가 공()하다는 뜻이다. 언제나 불변하는 본질을 지니는 독자적인 실체가 아니어서 항상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타자들과의 관계가 충족되었을 때 나타나는 상황적 존재로서는 존재하기 때문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확실한 존재 근거 하나 없이 우연히 세상에 던져 진 이런 아슬아슬한 존재가, 현상으로서나마 생생하게 느끼고 울고 웃으며 살 수 있으니 이건 분명 기적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석 씨는 이를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속 안에 묘하게도 모든 게 다 있다!

 ‘는 '아우구스티누스 시간 역설'에서의 시간과 유사한듯하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나에게 그 질문을 하지 않을 때는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에게 그것을 묻고 내가 그것을 설명하려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과학자들이 21세기 까지도 시간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 하지 못하고 아직 까지도 갑론을박하고있는 건 바로, '시간' 역시 게슈탈트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우리가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건 '변화'일 뿐이고, 그 '변화'를 배경으로 출현하는 전경으로서의 '시간". 시간을 제대로 정의 하기 위해서는, 과학자들이 이제라도 관점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 저자는 책의 제목이자 주제인 무아(無我)와 관련하여 책 전체에 걸쳐, 소위 (,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다양하게 전개하면서도, 마지막에는 개인 인격체로서의는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실용적으로 필요하다고 긍정한다(P. 152, 6.2).

 

 그런데 개인 인격체로서의 도 역시 수사만 다를 뿐 결국 ! 저자는 '나'라는 건 없다는 논증을 당당하게 전개해 놓고서, 황당하게도 마지막에는 자신의 주장을 부정한다!

또한, 저자는 개인 인격체로서의 나는 존재 한다라고 마치 새로운 진리라도 발견한 듯 주장하는데, 저자가 굳이 그리 주장하지 않아도, 세상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일상을 살고 있다.

 “실용적으로 필요하기에 개인 인격체로서의 나를 긍정하는 건, 생존과 번식을 무의식적인 기본적 목표로 삼고 있는 우리 인간들이야말로 세상 그 어떤 유기체들보다도 더 잘하는 일이다. 특히 요즘 같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심지어 인적자원이라는 용어를 쓸 정도로, 인간을 하나의 부품으로 다루며 매우 실용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정도이니, 사람들이 이걸 못할까 봐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지만, 애초에 석 씨가 무아(나라는 건 없다)를 주장한 이유는, 소위 생활 세계 속의 중생들이 개인 인격체로서의 나를 아무런 의심 없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굳건히 붙잡고 있는 걸 안타깝게 여기고, 이 생각이 옳지 않으니 이를 바로 잡아주려 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결국 저자는 지금 석 씨의 의도와는 매우 다른 메세지를 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저자가 석 씨의 가르침이 다른 종교들에는 없는 가르침이라며, 석 씨를 매우 칭송 하면서도(p. 161).

 

 ’ 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석 씨의 주장은, 우리가 부모, 교육, 국가, 시대, 성별, 인종, 직위, 직업, 학력 등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환경에 의해, 철저히 분절된 사회관계망 속에서 지극히 단편적인 경험 만을 하며 존재하기 때문에, 경험과 기억의 총합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분절적, 유동적, 상대적,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개인 인격체로서의 나같은 정체성을 '고정되어 불변하는 실체이자 참이라고 여기며 집착하고 있다는 거다. 우리가 개인 인격체로서의 나 같은 정체성을 실용적이라 여기지만, 실제로는 바로 이 같은 정체성으로 인하여 모든 고통이 발생하니 이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라고 권유하는 거다.

 또한 나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는 고정되어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고 유동적, 상대적, 생성적 이어서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다 뜻이지(전경으로서의 게슈탈트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상황이라는 배경에 의지해 끊임 없이 변화하기에), 결코 가 아예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라는 게 아예 없다'라고 여기는 걸, 석 씨는 '나는 참이고 실체다'라고 여기는 만큼이나 '또 하나의 극단'에 빠지는 일 즉, 공에 빠지는 일'이라고 경계하며, '중도'를 지키라고 권유한다. 가 없으면 무엇이 마음을 쓰겠는가!

 

 ’무주생심(無住生心)‘에서의 무주가 바로 고정되어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를 붙잡으려고 고집하지 말고 해체하라는 뜻이고, 생심유동적, 상대적, 생성적지금 여기에서의 상황에 맞게 즉흥적으로 주인공이 되어 마음을 쓰라는 뜻이다. '무주'하면 내 마음에 아무런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없어, 내 마음이 텅 빈 거울 같은 배경이 될 테니, 지금 여기에서의 상황에 맞는 유동적, 상대적, 생성적인 전경이 있는 그대로 왜곡 없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람은 태생적으로 욕망을 지니는 존재인 데다, 나를 둘러싼 분절된 사회관계망 속에서 형성된 개인 인격체로서의 가 내 안에 항상 기본적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동물적 생존에는 지극히 유리하기에 DNA에 디폴트값으로 자리 잡게 된 사회적 '밈'이자 진화적 특성), 우리가 새로운 상황에서 새롭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걸 방해하고, ’하던 대로 하고 보던 대로 보게유도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그 배경을 바꾸거나 지우는 일은, '지금 여기'에서의 상황에 맞게 인식하고 행동하기 위해 매 순간 깨어있어야 하는 치열한 노력을 요구하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에, 공자 같은 사람도 인생 칠십에 이르러서야 도달했다는 경지니, 내가 나의 주인공 노릇 한다는 일은 오직 까마득하게만 여겨질 따름이다.

 

 - 가 이리도 골치 아픈 이유가 혹시, 에두아르도 콘이 말한 것처럼 자신의 의미를 간접적으로 지시하는 ’추상 명사 이기 때문일지도 모르니, ‘ 대신에 가장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대명이것 사용하면 문제가 조금이라도 쉬어질까 싶지만,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 역시 전혀 쉽지 않은 과제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영어로 하면 ‘Who am I?’가 되는데 이건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묻는 질문이기에 ‘What am I?’라고 하는 게 원의에 더 가깝다며, ‘나는 누구인가? (A)라는 질문보다는 나는 무엇인가? (B)라는 질문이 더 적절하다고 언급하고 있다(p. 16).

 내가 누구 누구라는 건, 대체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의 인격적 속성을(남자, 자식, 회사원, 노인, 동양인 등) 드러내는 의미를 지니기에, 질문 A 속의 누구라는 어휘가 지니는 의미는 당연히 저자가 언급한 개인 인격체로서의 나에 가깝다.

 그와 달리 질문 B 속의 무엇은, 인간이라는 경계를 벗어난 범주에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내 정체성은 인간 외에도 동식물과 유기체 및 사물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더 넓은 장 속에 위치하게 되어, ’를 규정하는 경계가 질문 A 때보다 훨씬 더 확장되는 효과를 지닌다. 하지만 질문 B 역시 여전히 를 지니고 있기에, ’외의 존재들과 상호 교섭하지 못하고 분리된 상태로 고립되어 분절된 존재일 수밖에 없어서, 보다 넓은 장에서의 '우주 속의 인간은 수많은 무생물이나 생명체들과 같은 존재 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관점을 놓치기 쉽다.

 하여, 질문 B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은 무엇인가? C)’라는 질문을 던지면(이게 화두 '이뭐꼬'이자 '부모미생전본래면목'이다), ‘’가 특별히 분리되어 구별되지 않으니'개인 인격체로서의 나'가 사라지고, 모든 존재가 다 함께 어우러지는 화엄세상으로서의 우주 만물'을 배경으로 다양한 이것들이 그때 그때 전경으로 출현하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만물 사이의 견고한 경계와 경계 때문에 일어나는 다양한 차별과 갈등이 함께 사라지고, 이것들이 상호 침투 하여, '꽃을 보면 꽃이 되고, 산을 보면 산이 되는' 상태일 테니, 이게 바로 '네가 바로 그것이다!' 즉‘,Tattvamasi의 의미가 아닐까? 이렇게 되면 소위 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든 문제가 해소될 거라는 게 석 씨의 주장이다.

 

 우주 속에서의 지금 여기 이것!은 무한히 많은 먼지 중의 한 점 먼지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지닌다면, 무한한 이것중에서 특정한 이것에만 특별한 애착을 느낄 일도 없을 테니, 소위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매일 겪는 문제들 뿐만 아니라 죽음마저도 사소하게 느껴질 듯하기는 하다. 이럴 땐 죽음마저도 단지 배경의 변화에 따른  전경으로서의 현상에 불과 할테니까. 그런데, ’가 사라진다고 생각할 때 엄습하는 차가운 소름은, 업에 의하여 형성된 에고의 두려움일 뿐이라지만, 그걸 극복한다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일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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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나들이 2023-10-04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수준의 글입니다. 이런 수준의 글을 종종 올려주시길 감히 바랍니다.
 
무한의 신비 - 수학, 철학, 종교의 만남
애머 액젤 지음, 승영조 외 옮김 / 승산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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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47~248: “수는 단지 실제의 물리적 양을 셈하고 비교하기 위해 사람들이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수는 실세계의 문제를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언어, 즉 인간의 발명품이라고(A)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수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하며, 수들의 상호 관계도 모두 알아야 한다. 우리 인간이 만든 거니까(B).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수학에서 우리는 고된 연구를 통해 끊임없이 수의 속성(그리고 수의 추상적 개념과 함수와 공간의 속성)을 발견한다(C) - 흔히 우리의 직관과 배치되는 진실을 발견하기도 한다. 따라서 수는 우리 인간이 만든 것일 수가 없다(D).”

 

 ‘무한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과 탐구 과정을, 수학 역사를 중심으로 다룬 내용이 흥미롭다. 특히 실무한에 관한 연구 결과들과 불완전성 정리등은, 인간의 사유 능력이 결코 무한과 일자()를 인식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에, 인간이 절대지를 지닐 수 없다는 기존의 다양한 인문학적 담론들과 유사한 결과를 수학적으로 명증한다는 면에서, 신기하고 무언가 선명한 느낌도 든다.

 저자가 책 속에서 자주 주장하듯, 수학은 그 자체로 실생활에 거의 도움이 안 되고 수학자들이 연구하는 건 연구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런데도 전 세계 교과 과정에 수학이 있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수학 공부를 통해 창의적 사유에 필수적인 논리와 추론 능력을 계발할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결론부에 있는 수에 관한 저자의 위와 같은 주장은, 책의 앞부분이 주는 감동을 일소에 제거해버릴 정도로 허망하고도 코믹하다! 왜냐하면, 자타 공인한다는 수학자라는 저자의 논리가 너무나도 빈약하기 때문이다.

 인용문에 의하면 저자는 명제 B를 참이라 전제하고, 명제 C를 근거로 명제 A를 부정하며, 대신에 정반대인 최종명제 D를 주장한다. 그런데 저자가 참이라 전제하는 기본 명제 B, 인간은 인간이 만든 모든 것에 관하여 완벽한 앎을 지닌다(E)는 새로운 명제를 전제해야만 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적으로 명제 E는 전연 참이 될 수가 없다는 증거가 세상에 넘쳐난다.

언어만 하더라도 분명 인간의 발명품이지만 언어의 속성도 끊임없이 발견되고 있다(명제 C를 충족시키며!). 일상에서 자연스레 사용하는 언어를 인간이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언어는 실체가 아니고, 단지 임의성을 지닌 불완전한 자의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저자는 모르는 걸까? 언어뿐만이 아니다. ‘’ ‘’ ‘’ ‘정의’ ‘도덕등등 인간의 발명품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완벽하기는커녕 완전 뒤죽박죽이다. 스스로 가장 엄밀한 학문을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수천 년에 걸쳐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 게 바로 그 생생한 증거다.

 그런데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저자가 언급하는 불완전성 정리때문이 아닐까? 인간의 앎은 결코 완벽할 수 없다는 게 바로 불완전성 정리의 함의이기에.

 저자의 논법대로라면, 전쟁 무기마저도 우리 인간이 만든 것일 수가 없다. 전쟁에서 우리는 고된 연구를 통해 끊임없이 무기의 속성을 발견하니까(C).

결국, 애초의 기본 명제 B가 오류이기에 저자가 주장하는 최종명제 D는 유감스럽게도 헛소리에 불과하다. 수학은 엄밀할지라도 수학자가 엄밀한 건 아닌가 보다. 혹시 저자는 뿐만 아니라 언어진선미등도 모두 인간이 발명하지 않은 실체라 여기고 있을까? ‘궁극의 리얼리티라고?

 저자가 철학보다 훨씬 더 엄밀한 논리적 사유를 기본으로 하는 수학자이면서도 이런 황당한 주장을 하는 이유가, 혹시 명제 D를 원위신념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논리와 상식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제공하는 원위신념을 지키려는 종교적 심리상태! 실무한을 규명하려는 카발리스트들과 일부 수학자들의 의지는 혹시 순수한 탐구욕이 아닌 지적 허영심이 아닐까? 수학을 통해 절대지라는 신성을 접하고 그를 통해 영생을 얻고자 하는 지적 허영! 하지만 진리는 하늘에 있지 않고 우리 발밑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저자를 보면 수많은 수포자를 양산하면서까지 굳이 수학이 교과목으로 존속해야 할 이유도 약한듯하고, 역자가 영어 전공자가 아닌 수학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장이 8쇄를 거치는 20년 동안 수정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놀랍다.

 칸토어와 괴델 모두, 신의 영역이라는 실무한을 엿 보려 한 죄로 신의 저주를 받은 게 아니고(누군가에게는 믿음일 테지만), ‘실무한이라는 허공을 헤매느라 두 발을 굳건히 지탱해 주는 대지로부터 분리되었기에 심신이 쇠약해진 건 아닐까?

 저자를 포함한 수학자들은 무한이 신비롭다 하나, 내게 무한은 신기할 뿐 신비롭지는 않다. 무한개념을 발명한 인간자체가 신비로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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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 노래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303
고은 지음 / 실천문학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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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언()에 절사(). ‘절에서 들려오는 소리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일 것!”

미쳐야() 미친다()!

 

어떤 인간도 결코 진선미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지금의 도덕이 얼마 지나지 않아 비도덕적인 것이라 여겨질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밖의 관점에서는 인간의 도덕이라는 게 그저 인위일 뿐,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관념일 수도 있다. 공이 공인 줄 알고 색이 색인 줄 알면 그뿐, 공과 색에 빠지거나 혐오할 이유가 전연 없다.

 

판매금지는 혹시 21세기판 분서갱유는 아닐까?

저자를 비난하는 정당한 목소리가 존중되어야 하듯, 저자의 작품을 접하고 싶은 독자의 의사도 존중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번 사태 속의 출판사의 태도는 매우 실망스럽다.

불매운동에 자진 판매중지를 취하는 게 출판이 적절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기 때문이라면, 애초에 출판하지 말아야 할 걸 알면서도 저자의 성가를 이용한 매문을 시도한 것이라 여겨질 수밖에 없기에 실망스럽다. 자본의 쓰나미에 올라타 너나없이 한몫 챙기려는 신자유주의 세상인데, 출판사에만 무리한 기준을 요구하는 걸까?

애초에 출판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서 출판했는데 불매운동 자체가 부담스럽고 두려워서 판매중지 조처를 했다면, 이는 소신 없고 당당하지 못한 처신이라 역시 실망스럽다. 저자 옆에 함께 서서 모든 비난을 당당히 감수하는 게 옳지 않을까? 종교나 철학 역사나 윤리 등과 문학은 엄연히 다르며, 일상의 관점과 가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글은 문학일 수는 있어도 결코 시가 될 수 없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걸까? 수많은 시인이 당대에 신성모독자’ ‘정신병자’ ‘부도덕한 자라는 주홍글씨를 강요받은 게 엄연한 현실이며, 작가의 도덕성과 작가의 작품을 같은 가치관으로 평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치열한 논쟁의 중심에 있는 난제다!

 

인류의 위대한 예술과 문학 유산들은 대부분 광인들의 작품이다(당시의 평가 기준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자신만은 틀림없이 제정신이라 주장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 속에서 누가 진짜 미쳤는지 누가 알겠는가? 혹시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미치는 게 정상 아닐까?

진정한 광인을 보는 기회를 얻는 것은 내게는 기쁨이다. 강렬한 카타르시스가 나를 진정 미치게 해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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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주역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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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616, 셋째 문단: “문명의 이기가 ~~ 그러나 논의가 명료하지 않다

P. 617, 둘째 문단: “후반부를 정확히 번역해보려고 ~~ 논의가 되어야 한다

- 저자는 ()’괘에 대한 정이천의 해설에 대해, 이천의 해설 내용이 명료하지 않다”, “명료한 개념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송유의 페단티즘의 한 유폐에 불과하다고 까지 혹평을 하고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저자의 오독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기에 감히 오독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 첫째 이유: 원문 曰制器, 象也’(P. 615)를 저자는 그릇을 제작하는 것은 그 상에서 취한 것이라 말하곤 한다라고 해석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괘의 상을 먼저 보고서 힌트를 얻어 세발솥()을 만들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바로 뒤의 문장 괘가 실제의 그릇보다 앞선 것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라는 문장과 모순이 된다. 그러니 논의가 명료하지 않다고 여기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러운 사실을 왜곡하는 비합리적인 태도인데도 이렇게 해석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기에, 이를 바로잡으려는 이천의 의도와도 배치되는 해석이다. 

- 둘째 이유: 저자가 ()’의 개념을 괘의 상만으로 한정하기 때문인 듯하다. 상은 괘상만이 있는 게 아니라 물체의 상도 있으며,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여 문맥이 이해되지 않았나 싶다.

- 대안; ‘曰制器, 象也그릇을 제작하는 것은 그 상 취하는 것이라 말하곤 한다라고 해석하면(허사 에서대신에 로도 읽을 수가 있다), 괘와 상의 선후 문제 자체가 해소 되기에,  ‘그릇보다 선행한다는 모순도 해결된다. 아울러 이때의 괘상이 아니라 물체의 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기면, 문장 해석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 제작된 물체()는 일정 공간을 점유하며 형상()을 지닐 수밖에 없는데, 이게 바로 그릇을 제작하는 것은 그 상 취하는 것의 의미다. 이리 해석해야만 617쪽의 마지막 문장에 있는 인위자연관련 담론도 문맥이 일관되며 매끄럽게 이해된다. 물체()의 형상을 결정할 때는, 그 형태가 사용하기에 적합해야 한다(形制如是則可用). 이천은 '형태가 기능을 결정한다'는 20세기의 구호를 이미 선취하고 있다!  ‘()’을 만들 때 세 발로 하면 바닥이 평탄하지 않아도 솥이 기우뚱거리지 않지만, 네 발로 하면 바닥이 평탄하지 않을 때는 솥이 기우뚱거리게 되어 사용하기에 불편하다(의 측면: 중력과 역학의 원리). 또한, 삶을 재료를 담는 그릇 부분을 아래에 두고 위에서 불을 때면, 불기가 위로만 가기 때문에 삶아질 수가 없다(의 측면; 불은 위로 향하고 물은 아래로 향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이치). 그러니 익힐 부분은 위로하고 불을 피울 공간을 다리를 이용하여 아래에 마련할 수밖에 없다. (; 세발솥)이 그 모양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게 바로 정괘가 성립하게 된 소이연을 말하자면, 그 상에서 취한 바도 있고 또 그 의에서 취한 바도 있다는 뜻이다(P. 615, 하단 문단).

- 즉, 그릇을 만드는 건 사람의 일로서 인위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자연의 순리 내에서만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게 바로 인위라고만 할 수는 없다. 자연스러워야 한(”此非人爲, 自然也)의 의미다.

저자에게 물()의 상 개념이 없으니 괘와 상에 관한 담론 중에 갑자기 인위자연이 등장하는 게 엉뚱하게 느껴지고, 정괘의 소이연인 자연 담론이(自然也) 해석이 안 되는 거다. 그러니 이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정확히 번역해보려고 자세한 주의를 기울였으나 결코 그 뜻이 정확하게 우리에게(정확히는 저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고하며, ‘이천명료한 개념적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되지 않는 거라며 이천만을 탓하고 있다.

- 616쪽 셋째 문단 첫 부분 그렇다면 괘가 만들어지는 ~~ 만들어졌다고 할 것인가?”는 원문에 ()”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질문 역시 누군가의 의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의 선후 문제나 '()이 자연의 상이냐 인위냐'라는 질문들은, 그 당시 이천의 주변인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던 담론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에 대해 이천이 평소의 격물치지적 관점에서 경험적이고 분석적인 해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사소한 페단티즘이 아니고 학인의 치열한 격물치지적 자세다!

- 617쪽 첫째 문단의 마지막 문장은, 615쪽 셋째 문단의 정괘가 성립하게 된 소이연을 말하자면, 그 상()에서 취한 바도 있고 또 그 의()에서 취한 바도 있다는 문장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부분이다.

- ’이천은 저자가 그리 가볍게 폄하 할 인물이 결코 아니다!

- ’은 기본적으로 기호를 다루는 책이기에, 역에 관한 저자의 기호학적 담론을 기대했었는데 전무하여 매우 아쉽다(저자가 다방면으로 매우 박식하다는 걸 알기에). 저자는 음과 양 두 심볼이라고 표현하는데, 퍼스의 기호이론에 따르면 심볼대신 아이콘이 적합하다. ’효사등은 기호적으로 그 성질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이들을 퍼스의 기호이론에 따라 아이콘인덱스심볼등으로 구분하여 접근하면, ’(‘)에 관한 설명이 기호의 위계에 따라 설명될 수도 있어 훨씬 더 쉽게 이해될 수 있을 듯하고, ’을 기호이론으로 해석하려는 논문들도 국내에 이미 많이 있기에 의아하기도 하다. 저자는 국내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에는 전연 관심이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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