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철학적·문학적 해석
백승영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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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해설서의 최종 완결판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세밀한 해설서다. 모든 문장 하나하나를 니체의 다양한 저술에 흩어져 있는 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하기에, 니체가 직접 설명하는 듯하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니체는 이렇게 말하였다인가 보다. 저자의 자신감과 자부심이 느껴진다. 니체의 글들이 대부분 짧은 잠언 형식의 글이어서 다른 철학 서적들과는 달리 체계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은 데다가, 완결적으로 쓰이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에, 세밀한 해설서를 쓰는 일은 니체의 모든 저작을 꿰뚫고 있어야만 가능한 작업이다(니체의 문장이 독일어 문장으로 쓰인 글 중에서는 아름답다고 하는데, 독일어 자체가 영어나 프랑스어와는 달리 아름다운 문장을 구성하기에는 부적절 한데다, 시력이 안 좋아 일부러 짧은 잠언식 글을 썼다는 분석이 있다).

아쉬운 점 하나는, 니체의 저서를 니체의 관점에서만 읽어준다는 점이다. 해설서 저자가 니체 저서를 대할 때는 저자 자신이 하나의 독자 입장에서 읽는 것이기 때문에, 또 다른 독자에게 소개하기 위한 깊이 있는 독서를 위해서는, 소위 비판적 글 읽기를 해야 하는데, 그런 내용이 거의 없다는 점이 염려스럽기까지 하다.

니체 사상이 시대를 앞서는 도발적이고도 독창적인 사상이라고는 하나 시대 정신에 갇히는 한계가 있을 수도 있고, 니체가 주장하는 관점주의적 측면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해석과 반론들도 가능하다. 그래야 만이 니체가 파괴한 신의 성전의 폐허 위에, 또 하나의 새로운 신전이 아닌 아크로폴리스를 세워 진정 새로운 사상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니체가 차라의 입을 통해 비판하듯, 니체의 뼈다귀만을 핥아대는 딱한 독자에 머물 수밖에 없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오래된 표현이 철학전공자들(‘철학자철학 교수는 전연 다른 개념인데, 철학 교수가 자신을 스스로 철학자라고 여기는 경우가 흔하다)에게는 비아냥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철학은 진리의 심급’ ‘진리의 수호자운운하는 주장들은, ‘진리라는 또 하나의 을 모시는 변형된 신학이며, 그런 철학자들은 절대자로서의 진리를 독점하며 떠받드는 또 하나의 시대착오적 사제집단일 수밖에 없다는 걸 니체도 경고하고 있다. ‘인간은 결코 진리를 소유할 수 없다라는 니체의 주장만이 유일한 진리가 아닐까?

 

니체가 철학자로 여겨지고 있기에, ‘차라가 사람들에게 철학서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은데, 내게는 오페라 대본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다(바그너를 의식 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분명하게 이해되며 전달되는 메시지는 드물지만, 현실과 상상이 적절히 얽혀있고 뭔가 우리의 초월(?) 욕구를 자극하며, 종교와 우리 주위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에 대한 재치있고 신랄한 비판과 풍자 등이 빠른 템포로 진행되기에,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 같다. 니체가 예술이나 문학 분야에서 주목받는 것만큼의 주목을 철학계에서는 받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니체의 저술 중에서도 특히 차라가 어렵게 여겨지고 해석자들 간에도 서로 다르게 이해되는 이유가 많겠지만, 나 같은 문외한의 입장에서 추정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니체의 글 중에는 서로 모순되는 내용 들이 많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차라의 내용이 공허하고 애매하기 때문인듯하다(다르게 읽은 분들에게는 죄송하다. 하지만 관점이 다른 걸 어찌하랴!). 특히 책에서 수없이 반복되며 유사하게 설명되는 차라의 핵심 개념 영원회귀 힘에의 의지 위버멘쉬가 그렇다.

 

영원회귀에 대한 저자의 이해는 아마도 매 순간이 필연적이고 의미가 충만하다는 점인 것 같다(p. 606). 요즘 사용하는 용어로는 지금 여기혹은 영원한 현재개념 정도인 것 같은데, ‘차라에게 이 개념이 왜 그리 위험하고 어려운 개념으로 여겨졌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차라순간이라는 개념에 관해 유사한 발언을 하지만, ‘차라에서 뿐만 아니라 니체의 다른 저서에서도 언급되는 영원회귀의 특성은 동일한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묘사되어있어, 마치 불교에서의 영원한 윤회와 유사한 느낌이 훨씬 강하여 저자의 이해와는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기체는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다. 유령이 아닌 이상 과거에도 미래에도 실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살아 있는 동안 지금 이 순간(현재)은 계속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는 영원한 순간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실재로 존재(실존)’하는 순간이자 실존그 자체다. 유기체가 삶을 유지하는 시간은 비록 유한하지만, 그 유한한 시간 속의 순간들은 무한하기에, 인간의 유한한 삶은 영원한 지금이다. 하지만 영원한 순간영원한 시간을 의미하는 게 아니며, ‘순간의 내용 들은 순간순간 끊임없이 달라지기에(굳이 헤라클레이토스를 거론할 필요가 전연 없다!), ‘영원히 반복되는 동일하고 지루한 삶운운하는 건 완전 넌센스다. 또한, 사람들이 무한한 시간 속에 반복되는 무의미한 삶을 두려워하고 절망할 거라 염려하는데, 이는 니체 자신의 실존주의적 사유를 투사한 확증편향 오류다. 니체 자신이 관점주의적 인식론을 주장하며 유일한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의미를 자신만의 것으로 한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삶도 무의미할 거라 판단한 주제넘은 오류다. 니체가 주장하는 대로 의미는 이미 정해져 있거나 누군가에게서 전해지는 게 아니라 각자가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니체가 걱정해줄 이유가 전연 없다. 허무와 부조리를 상징으로 하는 실존주의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지만, 인간이 어디 무의미 앞에서 절망만 하고 있겠는가.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뇌에는 기본적으로 변연계를 포함한 파충류의 뇌‘(최근에 별로 쓰이지 않는 용어지만 그 생리적 기능을 쉽게 이해시키는 용어)가 장착되어 있기에, 의미 없이도 생의 의지 만큼은 죽는 순간까지도 작동시키고, ’인간의 뇌라는 전두엽 피질은 어떠한 의지와 행동에도 그럴듯한 의미(스토리텔링)를 제공한다는 게 현대 뇌과학이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회귀라는 용어 자체가 무언가 동일한 것이 동일한 상태를 반복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에, ‘회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건 대중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니체가 기독교에서의 직선적 시간개념과 대응되는 시간 개념으로서 순환적 시간과 관련된 회귀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 같은데,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던 게 아닌가 추정된다.

 

힘에의 의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차라의 입에서는 마지막까지 발화되지 않고 있으나, ‘힘에의 의지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많은 문장에서의 맥락에 의하면, 파충류의 뇌의 기능에 생리심리학 개념이기도 한 항상성(恒常性, homeostasis)을 결합한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제일 적합할 듯하다. ‘차라와 저자는 힘에의 의지가 단순한 동물적 생존본능과는 다른 자기 극복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 이 또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또 다른 이원론에 불과하다. 모든 유기체의 행위는 모든 순간순간 현재 상태로부터의 긍정적 변화(욕구충족: 게쉬탈트 해소)를 추구하는 의미를 지니며, 이런 행위는 무의식적인 몸의 해석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게 바로 각 유기체의 자기 극복행위로서, 동물적 본능을 폄하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인간이 바로 동물이고, 개구리도 자신만의 관점이 있다. 니체가 힘에의 의지라는 제목의 독립적 저서를 완성했더라면, 의문들이 많이 해소될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

 

위버멘쉬를 묘사하는 술어가 수없이 반복되지만, ‘차라원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위버멘쉬의 모습과 특징은 여전히 모호하기만 하다. 모든 척도를 스스로 창조하며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른, 평범한 인간이기를 극복한다는, 위버멘쉬를 구체적 실존 인물을 예로 들어서라도 보여주면 좋으련만, 니체와 저자는 끝내 그러지 않는다. 그런 인간이 지상에 존재한 적이 아직 한번도 없었다면, 위버멘쉬는 니체가 극복하려 시도한 기독교 신과 유사한 또 하나의 초월자의 모습 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지상을 떠난 초월자를 파괴하고자 했지만, 니체 역시 초월자 개념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 게 아닌가 여겨지는데, 이는 니체가 그 당시 시대 정신을 극복하지 못한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망치를 들고 기존의 모든 걸 파괴하려 했지만 새로운 걸 제대로 세우지는 못한 미완의 업적을 남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위버멘쉬!

니체가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니체의 꿈인 위버멘쉬에 이미 잉태되어 있지 않았나 여겨진다.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려는 존재는 지금 여기의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해야 하는데, 그 당위가 지금의 모습과는 다른 나의 새로운 모습을 끊임없이 요구하니, 이는 자아의 끝없는 이종분열 생식으로서, 필연적으로 정체성의 분열에 의한 정신착란과 정신 에너지의 고갈에 의한 번아웃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니체 생애의 마지막 10년이 이를 여실하게 증명한다). 니체가 영원회귀 사상을 두려워했던 게 혹시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애초의 의도는 매우 건강한 것이었지만, ‘자기 극복’(‘초월이라는 용어를 니체가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 기제는 사실 기독적 초월 개념과 대차가 있을 수 없다)이라는 개념 자체가 더 나은을 전제로 하는데, 인간의 사유 능력은 진선미에 대한 절대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진화되지 않았기에, 그의 좌절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분석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를 특성으로 하는 서양식 사유방식을 태생적으로 습득한 니체로서는, 설사 선()과 노자를 알았더라도 이 역시 부정했겠지만,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지지불태(知止不殆)를 실행했더라면, 그의 말년은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니체는 자기의 심리적 그림자인 중력의 정신이 무겁고 힘들더라도 버리지 말고 함께 갔어야 했다. 내 모습 들 중에 마음에 드는 모습만을 인정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부정한다면, 자기의 일부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에, 결국 자기는 혼돈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자조차 내 모습으로 인정하는 강인한 자세가 바로 위버멘쉬의 자세이자 긍정의 철학의 모습이 아닐까?

니체는 위버맨쉬와 상대되는 평범한 군중들을 열등한 노예정신을 지닌 자들이라 평하며 극도로 혐오한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신과 인간을 구분하는 형이상학적 이분법과,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는 신체적 이분법을 파괴하겠다 하면서도, 이 세상에 또 하나의 새로운 이분법을 더하는 꼴이 된다. “지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하나 버릴 게 없다고 선언하며, 이런 사유야말로 자신만의 창의성을 최고로 보여주는 긍정의 철학이라고 장담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니체의 확증편향은 여러 곳에서 감지 되는데, 그 근본 기제는 바로 자신만이 위버멘쉬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위버멘쉬에 복종해야만 하는 열등한 자로 확신하기 때문인듯하다. 시대를 앞서서 모든 가치의 전도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가한 점 외에는, 니체의 확신에 대한 근거가 될만한 위버멘쉬의 다양한 특징을 보여주는 점들을 그의 실제 삶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평생을 병마에 시달리다 생애 마지막 10년을 정신상태가 완전히 붕괴되어 생을 마감한 모습은, 자신이 주장하는 자유롭고 존엄한 죽음(p. 334;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과는 너무나 다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초라한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후견인을 자처한 니체의 동생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방문객 들에게 관람시켰다. 가련한 위버멘쉬! 고흐는 생을 마감하기 전에 몇 번 정신줄이 끊기는 경험을 하였기에, 죽음에 끌려가지 않고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결단하고 생을 마감하였는데, 이런 모습이 바로 니체가 묘사한 자유로운 죽음의 전형이다. 한 인간 자체 및 그 사람의 사상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가 한 말보다도 그 사람의 삶을 조명하는 편이 훨씬 더 정확하다(특히 그가 철학자인 경우에).

니체가 인종주의나 전체주의를 직접 옹호한 적이 없다고 변호하는 연구자들이 있지만, 위버멘쉬나 열등한 민족 등에 관한 담론들이 그리 머지않은 훗날, ‘위대한 아리안족의 후예인 독일민족이 전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는 두 차례의 광기 어린 세계대전과(니체는 광기에 대한 호기심도 많았는데 아마도 자신의 개인적 심리 상태와 관련이 있었을 것 같다) ‘버러지 같은 유대인대학살,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데에 일조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1차 세계대전 중 참호 속 병사들에게 차라포켓 판이 보급되었고, 히틀러가 니체아카이브의 열렬한 후원자였다는 사실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어쩌면 니체의 위버멘쉬 사유 자체가 19세기 유럽을 휩쓸던 동양과 아프리카에 대한 우월적 제국주의와 계몽주의 사유의(니체가 파괴하고자 시도했던 바로 그 대상) 영향을 받은 산물일 가능성도 있다. 아울러 독일의 모태인 프로이센이 수백 년 강국 신성로마제국의 종주국이었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연이어 격파하고 승승장구하던 때가 바로, 니체의 혈기 왕성한 청춘 시기와 겹친다는 점도 니체의 사유에 영향을 미쳤을 듯하다(니체는 보불전쟁에도 종군 했었다).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각인한다. -이것이 가장 최고의 힘에의 의지다...p.748)”라는 문장은, 니체가 시도한 긍정의 철학측면에서 영원회귀힘에의 의지위버멘쉬의 의미를 가장 종합적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명제가 아닌가 싶다. 대지와 변화를 상징하는 생성은 니체가 추구하는 개념이고, 천상과 불변을 상징하는 존재는 니체가 파괴하려는 개념인데, 이 둘을 함께 아우르는 일원론적(통합적) 성격을 지니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지금 이 순간은, 시간이라는 샘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솟아나고 있기에 생성이며,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자 존재 현상 그 자체이기에 존재인데, 지금 이 순간 안에 생성과 존재가 동시에 실현되기에 동전의 양면처럼 각인되어 있고, 이 두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으로서의 시간의 샘은, 힘에의 의지를 지니는 (위버멘쉬적) 유기체만이 팔 수 있기에, 생성과 존재는 함께 힘에의 의지를 상징하는 표상이다. 매순간 끊임없이 출현하는 찰나에 소멸하는 존재로서의 아트만과, 영원한 순간속 통시적 존재로서의 브라만이 일치하는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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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즈 : 생각의 잡음 - 판단을 조종하는 생각의 함정
대니얼 카너먼 외 지음, 장진영 옮김, 안서원 감수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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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99, 밑에서 둘째 줄: “최대하중을 너무 낮게 추산하면 비용이 발생하고, 반대로 너무 높게 추산하면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 “최대하중을 너무 낮게 추산하면 끔찍한 사고가 발생하고, 반대로 너무 높게 추산하면 과도한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기계 설계에서의 최대하중이란, 기계 사용 시 기계가 고장을 일으키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최고하중을 의미한다. 따라서 설계할 때 이를 너무 낮게 예측하여 제작하면, 제작된 엘리베이터가 실제로 작용하는 하중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괴되어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최대하중을 너무 높게 예측하여 제작하면, 제작된 엘리베이터가 실제로 작용하는 하중을 견디는데 필요한 강도보다 강하게 제작되느라 쓸데없이 비용이 증가하게 된다.

  저자는 최대하중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듯하다. 기본 개념에 대한 몰이해는, 편향이나 노이즈가 야기하는 오류보다 훨씬 더 참혹한 오류를 야기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판단오류를 주제로 다루는 이 책에서 이 문장은 치명적인 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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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홍 2022-06-03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문맥이 오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자의 말은 승강기가 버티는 ‘실제‘ 하중이 아니라, ‘추산된‘ 하중을 의미합니다. 즉, 실제 최대하중에 비해 추산된 최대 하중이 너무 낮으면, 원하는 하중을 지지하도록 설계하려면 승강기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래서 비용이 발생합니다. 반면에 실제 최대하중보다 최대하중을 높게 추산하면, 사람들은 제조사의 매뉴얼을 믿고 승강기가 버틸 수 있는 것보다 많은 물건을 싣게 될 것이고, 이는 사고로 이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설명이 맞습니다. 즉 제가 볼 때는 이것은 저자의 오류가 아닙니다.

김연홍 2022-06-03 12:53   좋아요 1 | URL
번역 오류도 아닌 것이, 실제로 원문에도 그와 같이 적혀 있습니다. 이 정도 수준의 내용에 오류가 있으면 어지간하면 편집자가 잡아 냅니다.

그냥 2022-06-0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번역자이신가요? 혹시 번역 과정에 오류가 있었나 생각도 했었는데, 원문도 읽으셨다니 번역오류는 아닌가 봅니다.
김선생님이 서로 다르게 말씀하시는 ‘실제 최대하중‘과 ‘추산된 최대 하중‘은 공학에서는 동일한 개념입니다. 처음 설계할 때 설계자는 실제로 작용할 하중(‘실제 최대 하중‘)을 전연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 값을 자신의 경험과 전문자료 및 안전 권고지침 등을 이용하여 추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값은 그래서 당연히 ‘추산된 최대 하중‘ 이지요.
이 때 편향과 노이즈를 주의 해야 합니다! 안전율을 너무 낮게 잡으면(최대하중을 너무 낮게 잡으면) 산업재해가 발생하기 쉬운데, 양심없는 자본가는 실무자에게 원가 감소만을 압박하거든요. 밉보이면 실업자가 될 수도 있는 엔지니어는 소위 자기 검열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아직도 흔합니다.
말씀하시는 ‘실제 최대하중에 비해 추산된 최대 하중이 너무 낮으면, 원하는 하중을 지지하도록 설계하려면 승강기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야 하고‘라는 언급은 설계를 전연 모르는분 이야기 입니다. 죄송하지만 김선생님의 문장 자체가 무의미한 내용이거든요. ‘추산된 하중이 너무 낮다‘는걸 설계자가 이미 알면(신입의 도면을 검토한 상급자가 다행히도 검토해서 찾아낸 경우) 수정된 하중을 기준으로 처음 부터 견고하게 만들기 때문에 언급하신 상황은 애초에 없습니다. 혹시 소비자가 돈들여 고쳐서 사용하는걸 염려하시는건 아니지요??
정상적인 설계자는 ‘추산된 하중‘이 너무 낮다거나 높다는걸 인식하는 상황을 결코 경험해서는 안됩니다. 추산된 하중이 너무 낮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제작한다면 범죄자가되고, 추산된 하중이 너무 높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제작한다면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자가 될테니, 설계자는 현 상황에서 이용가능한 모든 정보를 취합하여 사용자의 안전과 회사의 경제성을 동시에 만족 시킬 수 있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최적의) ‘최대하중(당연히 안전율까지를 고려한 예상 수치)을 결정해야 합니다(이게 바로 회사의 노우하우 입니다).
김선생님이 언급한 ‘사람들은 제조사의 매뉴얼을 믿고 승강기가 버틸 수 있는 것보다 많은 물건을 싣게 될 것‘이라는 상황은 애초에 있을 수 가 없는 상황입니다. 설계자는 사용자의 안전을 고려한 ‘최대 적재 하중‘( 이 값은 통상 설계자가 고려한 최대하중 보다 현저히 적습니다! 그게 P.100 에 있는 안전율 개념입니다)을 ‘사용자 주의 사항‘에 세세히 기록하여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PL법이 강화되어 김선생님이 염려하시는 상황은 없을 겁니다.
답변이 길어졌는데, 이해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경험상 외국 책들도 원서(원본)에 오류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어지간한‘ 편집자들이 하니까 그럴겁니다.

김연홍 2022-06-04 0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고하십니다. 저는 이 문장을 해석하기 위해 공학의 전문 지식, 설계 프로세스에 대한 지식, 건축업계의 일반적인 관행이나 미덕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필요한 부분을 중심으로 반박하려 합니다.

이 문장은 ˝제조사가 승강기의 최대 하중을 추정할 때의 오류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다룹니다.

우선 제가 착오가 있었던 부분을 교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대 하중은 건축용어사전의 정의를 취합해보면 물체가 갖는 성질입니다. 즉, 우리가 모르고 앞으로도 모르겠지만 물체는 x라는 하중을 가지는데, 우리는 물체가 버틸 수 있는 하중이 c일 것이라고 추정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실제 하중과 추정된 하중이 차이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물체가 실제로 하중을 갖는지, 정확히 x의 값이 무엇인지에 대한 믿음은 이 추정을 정당화하는 데 핵심적인 문제가 아닌 것은 맞습니다.

카너먼의 주장은 이 최대 하중 c가 ˝낮게 추정되는지˝ 또는 ˝높게 추정되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낮게 추정˝이란, 이 승강기의 최대 하중을 추정할 때 적합한 하중 E[c]나 그 구간이 있다면, 개별 제조사가 실제로 추정한 이 승강기의 최대 하중 c가 E[c]보다 값이 훨씬 작다고 판단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높게 추정˝의 의미는, 마찬가지로 적합한 추정 하중 E[c]가 있을 때, 제조사가 실제로 추정한 최대 하중 c가 E[c]보다 훨씬 크다고 판단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아마 이것이 해석을 달리 보는 핵심적인 이유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해석했기 때문에, 저자의 예시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조사가 승강기의 최대하중의 추정값을 산출한다는 사실, 즉 의사결정 내지는 판단한다는 것이 중요하지 설계 프로세스 또는 실제 설계 관행은 이 문맥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 해석에 따라, 먼저 ˝높게 추정˝의 경우를 확인해봅시다. 사용자가 합리적으로 사용한다면, E[c]보다 c가 크다고 제조사가 산출했을 때, E[c]보다 크고 c보다 작은 구간의 무게를 가진 물건을 승강기에 실을 수 있는 확률은 0이 아니게 됩니다. 그래서 저자는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낮게 추정˝의 경우, 생산비용과 c가 정비례하고, 구조상 동일한 승강기의 생산비용이 어떤 제조사에게나 동일하다고 가정한다면, 낮게 추정하는 회사 1(추정 최대하중은 c1)과, 회사 1보다 추정값이 항상 큰 회사 2(추정 최대하중은 c2)가 있을 때, c1=c2이면(그러나 구조는 다를 것입니다) 회사 1은 회사 2보다 생산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렇기에 저자는 낮게 추정하면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2022-06-05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래서 제가 애초에 답변을 하지말까 주저했었는데 유감입니다. 비공개 논란은 그만하고, 지금 까지의 논란 내용 들을 그대로 카피하여 김선생님의 리뷰로 작성하여 올려 주십시요.
 
우리편 편향 - 신념은 어떻게 편향이 되는가
키스 E. 스타노비치 지음, 김홍옥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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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정치적 양극화, 타자에 대한 극단적 혐오의 확산, 가짜뉴스가 범람하는 기제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담론을, 관련 논문을 인용하며 제시한다. 다양한 형태의 편향들이 대부분 지적 수준이 증가함에 따라 감소하는 데 반하여, 우리편 편향만은 오히려 증가하고, 우리편 편향이 지적 엘리트들에 의해 조장되고 강화된다는 주장도 신빙성 있게 제시한다. 그 이유가, 우리편 편향은 다른 편향들과 달리 개인이 지닌 신념과 확신(가치관, 세계관)에 기인하기 때문에, 편향을 지적받거나 신념을 수정하고자 할 때 자기 정체성이나 도덕성이 훼손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라는 점은, 기존의 통념들과 유사하다고 여겨진다.

  저자는 우리편 편향을 완화 시킬 수 있는 대책들을 다양하게 제안하는데,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신념이 우리 자신이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소유하게 된 게 아니라,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흡수하게 된 이기 때문에,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을 상기하라고 권유한다. 또한, ‘관점 바꾸기’, ‘아무 데서도 오지 않는 관점’, ‘중심에서 벗어나기’, ‘거리 두기’, ‘주관성 배제하기같은 탈 맥락화 양식의 사고 기술들과,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라’, ‘편향은 집단 안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 안에서도 일어난다등도 상기하라고 제안하고, ‘정당 정체성에 의한 폐단을 강조하며 그로부터의 탈피를 권유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편향이라는 개념을, “사고 오류(B)로 이어지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추론 과정(A)이라고 정의한다(p.34). 그런데 이 명제가 논리적 효용을 지니기 위해서는 오류잘못됨을 판단할 수 있는, 명제와 독립적인 기준이 존재해야만 한다. 오류가 있다고 이미 판명된 추론과정(A; 원인)을 이용한 추론결과는, 잘못된 추론과정을 거친 결과이기에 그 결과가 무엇이든 조건 없이 기각되어야만 하는 오류결과(B)’라고 판정하는 게 합리적이기 때문에, 다툼이 발생할 이유가 없다. , 결과(B)는 원인(A)에 대해 종속적이어서, 저자의 편향에 대한 정의는 사실상 전형적인 선결문제 요구오류(petitio principii)’를 범하는 동어 반복적인 정의다. 원인 판단에 대한 합리적 근거 없이 원인(추론과정)이 오류라고 미리 부정적판단을 내려버리면, 이를 근거로 한 결과(추론결과)는 오류라는 부정적 판단을 피할 수가 없다!

  즉, 편향성 여부 판정 열쇠는 추론결과가 아닌 추론과정이 쥐어야 하는데, ‘추론과정에 오류가 없다라는 판정을 하는데 다툼이 있을 수 있다면, 추론결과에 대해서도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모두에게 동의받으며 모든 명제에도 적용될 수 있는 합리적 추론 이론이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논리학은 아직 불완전하다), 사람들은 명제를 역으로 이용하여(아마 의도적으로), 자신이 이미 지니는 신념(스스로 합리적으로 획득했을 거라 여기는 근거 없는 추론결과)에 대한 확신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 상대방의 추론과정이 편향적이어서 자기와 다른 추론결과(나와는 다른 신념)를 지니게 되었다고 비판하게 된다(너는 편향적이야!).

  바로 이 점이, 지적 엘리트인 전문 연구자들 간에도 서로 우리편 편향이라고 낙인찍고 오류투성이인 연구결과들을 발표하는 현재의 상황을 간명하게 설명한다(심리학자들도 철학과 논리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동일한 증거에 대한 평가(결과)를 서로 다르게 하는 근거(엄격하게 검증되지 않은 개인의 선 신념)를 각자가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한, 의미가 사라지고 힘을 잃은 상대방에 대한 편향성 비판은 끊임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끝장 토론에 끝이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저자 역시 확신을 지닌 채 이런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우리가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근거가 가치관이나 세계관 같은 원위신념(권위신념)’이라면, 저자가 언급한 바와 같이 철학적 가치판단 영역이기에,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오류 여부를 판가름하기가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다(철학자들도 수천 년 동안 끝장 토론을 계속하고 있다).

  저자는 지적 엘리트들 중에서도, 편향을 다루는 핵심적 엘리트들인 심리학자들이 누구보다도 높은 우리편 편향을 보이고,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닌 연구자들의 비율이 보수주의적 성향을 지닌 연구자들의 비율보다 월등히 높다고 하며,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닌 연구자들이 보수주의적 성향을 지닌 연구자들보다 우리편 평향이 낮다는 주류적 연구결과를 비판하고,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닌 연구자들 역시 보수주의적 성향을 지닌 연구자들과 거의 유사한 수준의 편향을 보인다는 증거를 5, 6장에서 집중적으로 제시하면서, 자유주의적 성향이 있는 연구자들의 편향 예만을 주로 들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저자의 주장은 자유주의자보수주의자를 규정하는 기본 개념 정의와 맥락이 다르므로 의문이 생긴다. 우리편 편향을 극복하기 위해 저자가 권유하는 관점 바꾸기등과 같은 사고 기술들은 모두, 일반적으로 변화’, ‘고정관념’, ‘타자 수용’, ‘권위등에 유연한 자유주의자의 사회적 태도를 정의할 때 적용되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근거로 인용한 논문들의 핵심 연구 의제들이 인종 차별’, ‘이민’, ‘성 평등’, 성 정체성‘, ’사형제도‘, ’건강보험‘, ’소득 불평등같이, 주로 약자와 소수자들이 불이익을 받는 의제들인데, 이런 의제들에 대해서 자유주의자가 보수주의자와 비슷한 우리편 편향을 보인다는 결과를 얻는 건, 혹시 연구자들의 조작적 정의에 오류가 있지는 않았을까 강한 의문이 든다.

  또한, 저자는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양당 지지자 모두 자기편만을 옳다고 하는 상황이기에, 민주당 지지자들이 트럼프를 조롱하는 건 트럼프 지지자들이 힐러리를 조롱하는 것과 똑같은 우리편 편향이라고 하나, 이는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민주당의 정책과 공화당의 정책 자체가 다른 걸 고려하지 않고, 단지 트럼프 지지자들도 힐러리 지지자들 못지않게 미국에 대한 애국심을 지니고 있다는 점만을 증거로 강조하는 건, 내용을 무시하고 표현만을 검증하는 것이기에 비합리적인 주장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혹시 저자는 나치 정권 당시 대부분의 독일 시민들이 일치 단결하였기에, 독일 시민들은 우리편 편향이 매우 적었다고 주장하겠는가? 저자가 자신만은 우리편 편향에서 자유로운 듯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유주의자들을 나무라지만, 저자의 우리편 편향이 감지되는 지점이다.

  저자의 이러한 인식 경향은 ‘X로서 말하기에 관한 언급(6, ‘편향을 강화하는 정체성 정치‘)에서, 정체성 정치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시민 미국인(Citizen American)‘이라는 정체성을 사용하면, ’단순한 신념을 우리편 편향에 불을 지르는 확신으로 바꿔 놓지 않는다(p. 370)’고 주장한다. 물론 그리하면, 개인의 국소적 정체성이 미국 시민이라는 정체성으로 확대되어 모두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게 될 것이기에, 인종, 국적, , 성적 취향, 종교, 경제적 지위 등에 따른 차이 때문에 벌어지는 미국 내에서의 다양한 우리편 편향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저자의 세계관이 매우 협소한 것이어서 요즈음의 국제적 세계관으로서는 부적절하다고 추정하게 한다. 혹시 저자는 미국의 강대국 일방주의에 대한 약소국의 비판에 대해서는 우리편 편향이라고 비판하지 않을까?

  저자는 대학 캠퍼스에서 포용성다양성 존중개념을 권유하는 걸, 정체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증 가능한 명제에 대한 신념을 확고한 확신으로 바꾸고 그것을 새로운 증거에 투사 하도록 만든다고 비판하면서(p. 270), 특정 피해자 집단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하는 게 사회적 문화적 통합을 추구하는 게 아니고 그들만을 부각시키는 우리편 편향적 태도라고 규정한다. 또한, 이를 공동의 적 정체성 정치라 규정하며, 소외된 사람들이 누가 누가 가장 억압받는지 경쟁한다는 억압 올림픽이라는 조롱 섞인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귀족, 자본가, 백인, 남성, 성다수자(?), 부유층 주류 집단들이 ‘X로서 말하기특권을 독점하며, 평민, 노동자, 유색인, 여성, 성소수자, 빈곤층에게 또 다른 정체성 렌즈를 사용하여 검증 가능한 명제에 대한 신념을 확고한 확신으로 바꾸고 그것을 새로운 증거에 투사 하도록강제한 수천 년 역사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이 염려하는 새로운 시대 경향이 최근 50년 동안에 현저해졌다고 하니, 저자가 편향적이라 지칭하는 경향이 우세적인 건 사실 상대적으로 극히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X의 지위를 강자만이 아니라 약자도 행사할 수 있다는 걸 분노 없이 수용할 수 있는 게 바로 자신이 권유하고 있는 입장 바꾸기인데 말이다. X가 강자였던 기나긴 역사는 문제 삼지 않고, X가 약자인 최근 수십 년간의 경향만을 문제 삼는 태도는 혹시 우리편 편향은 아닐까? 혹시 저자는 접근성 좋은 위치에 설치된 장애인용 주차 공간이 비어있는 걸 볼 때면, 자신이 억압받고 있다고 느끼는 걸까?

  또한, 저자는 최근의 자유주의 성향 연구자들의 편향적 연구결과 때문에, 대중들이 조만간 그들의 연구결과를 신뢰하지 않는 부메랑을 맞을 거라 예측하지만, 혹시 지금의 경향성이 지난 기나긴 세월 동안 보수주의적 연구자들의 편향된 연구결과에 대한 부메랑일지도 모른다는 인식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저자가 진정으로 학문적 진실을 추구한다면, 현 상황에 대해 그리 낙담할 필요는 없다. 지금의 상황이 기존의 테제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언젠가는 새로운 씬테제에의해 극복될 거라는 걸 역사가 보여주니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혹시 변증법적 역사를 싫어하지는 않을까?

  우리편 편향을 극복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저자가 우리에게 권유하고 있는 유연한 사고와 신념 기술들은, 그 효과의 근본 기제가 정체성의 유연성이다. 그런데 저자는 자신의 주된 연구 분야인 편향 연구에 있어서, 정체성을 정치적 정체성의로만 여기고 있는듯한데, 이 점이 저자로 하여금 유연하지 못한 관점을 유지하고 연구의 폭을 협소하게 하는 요인이지 않을까 짐작된다. 한 개인의 정치적 정체성은 사회적 정체성의 일부에 불과하며, 한 사람의 정체성은 사회적 관계망을 넘어 훨씬 더 확대될 수 있고, 그럴 때 유연한 정체성으로 인하여 단순한 사물뿐만 아니라 세상을 훨씬 더 유연하게 볼 수 있게 된다는 건, 현대적 과학인 심리학에 의해서도 증명되고 있다.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저자의 현재 인식은 나와 그것의 관계를 나와 너의 관계로 변화시키는 데까지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나와 우리‘, ’우리와 인류‘, ’인류와 생명체‘, ’생명체와 자연 그리고 우주로 까지 확장되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것들에게까지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저자는 편향과 관련해 과학적 세계관에 내포된 아무 데서도 오지 않는 관점반직관적인 우월성언급하는데(p. 277), 아마도 저자는 과학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기만 하면, 과학자의 추론은 순수 그 자체로서 어떠한 편향도 개입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지닌 듯하다. 하지만 이런 우월적 확신이야말로 저자가 언급한 과학계 지적엘리트들의 원위신념이며, 지적엘리트들이 인지 수준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일반인들보다도 더 심한 우리편 편향을 부추기고 강화하는 핵심적 기제다.

  과학자가 관심을 가지는 연구 주제를 선택할 때, 그 동기에 이미 개인적 취향이 반영되고, 실험 도구와 방법을 기획할 때 자기가 예측하는 결과에 관련된 변수만을 측정할 수 있게 설계하기 때문에 반증하는 증거가 될 수 있는 데이터가 누락 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 획득된 증거 중에서도 자기가 선호하지 않는 증거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가능성이 있고, 그 결과를 해석할 때 역시 조작적 정의에서의 가중치를 임으로 부여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 소위 과학적 추론과정에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얼마든지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연구자가 실제로 이런 의도를 전연 가지고 있지 않을 때도 벌어질 수 있다는 걸, 다양한 메타분석 연구결과들이 보여준다. 과학계에는 소위 유사과학이라 불리는 학파와 연구자들이 엄연히 존재하며 활발하게 학술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이게 바로 그 확실한 증거다.

  ‘아무 데서도 오지 않는 관점은 결코 과학적인 개념이 아니고 인문학적 개념에 가깝다. 과학적으로 관점은 그 자체가 보는자(주체)’보여지는 대상(객체)’이 있어야만 하며, 보는자에 의해 획득된다. 그리고 그럴 때의 관점은 바로 보는자의 것이다(오는 데가 있다!). ‘아무 데서도 오지 않는 관점은 오직 보는자(관찰자)가 없을 때만 발생한다(주체가 없으니 획득되는 아니다). 이런 관점은 누군가가 자신이 그러한 관점을 지녔다고 인식하는 순간(인식하는 주체가 출현하는 순간), 주체의 개별적 인식에의해 오염되어 그 자격을 상실하는 모순된 특질을 지닌다. 어쩌다 그런 관점이 발생하는 상황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상세히 인식(혹은 묘사)하려는 의도(타자에게 전하려는 게 아닌 자기의식 속에서조차)를 떠올리는 순간, 개인의 경험적 한계와 인간이 지닌 언어적 개념적 한계(개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사회 관계망에서 밈의 도움으로 우리에게 주입된)로 인하여 이미 변형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는 거울이 또 하나의 동일한 거울을 마주하고 비추는 상황으로서, 주체가 사라진(소위 물아일체 상태로서, 칙센트미하이의 몰입 상태와는 다르다), 정확하게는 주체가 사라진 게 아니고 객체와 하나 된, 상황이다. 이런 종류의 현상(혹은 순간; 인식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인식과 추론 능력이 진리 탐구가 아닌 생존을 위해(저자가 강조하는 바에 의하면 상대방을 설득하여 내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진화했을 거라는 진화 심리학적 연구에 의하면 거의 환상에 가까운 것 같은데, 저자는 이를 우리에게 천연스레 권고한다.

  선()에서는 이런 답답한 상황을 흔히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고 표현하며,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 없기에 말은 하지만 비유적으로밖에 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대부분, 우리들이 서로 편견을 갖고 다투지 말고 어울려 살기를 권유하며, 그럴 수 있는 구체적 방법들을 몸소 자신들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석가모니, 노자, 공자, 예수 모두 비유의 대가들이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우리의 지적능력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는 걸 일찌감치 간파하였기에 우리에게, 매사에 머리 너무 쓰지 말고 정신적 수행이라는 반성적 행위를 해보라고 권유하는 게 아닐까? 그들이 권유하는 수행은 한결같이 아무 데서도 오지 않는 관점을 지향한다; 어떤 선 이념에도 기대지 않고 즉흥적으로 살기(應無所住 而生其心), 진리를 고착화 시키지 않기(道可道 非常道), 내 뜻을 고집스레 쥐어 잡고 주장하지 않기(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 (절대 진리) 앞에서 나를 주장하지 않기(내가 절대 진리를 소유한다고 주장하면 죄인이라는 것). 이러니 수십 년에 걸쳐 치열한 수행을 하는 자들도 아무 데서도 오지 않는 관점을 경험하는 게 그리도 어려운가 보다.

  ‘아무 데서도 오지 않는 관점의 발생(존재현상)’대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인지적 인식(관찰)이 둘 다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건, 마치 양자역학에서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하려는 순간(관찰자가 출현하는 순간), 전자의 행동(현상)이 달라져 버린다는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의 원리와 유사한 것 같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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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동경대전 1~2 - 전2권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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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권 영소편 17-1, p. 301, ‘옥안첫 문장: 물수탈승미리용勿水脫乘美利龍에서 의미 있는 글자는 수승용水乘龍일 뿐이고, “문문범호나무수問門犯虎那無樹에서 의미 있는 글자는 문호수門虎樹일 뿐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7자나 3자나) 의미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 시는 전형적인 선시다. 첫째 연 花扉自開春風來, 竹離輝踈秋月去는 육안에 보이는 현상기연을 묘사한 구절이고, 둘째 연 影沈綠水衣無濕, 佳人語不和는 심안에 보이는 실상불연을 묘사한 구절이며, 문제의 셋째 연 勿水脫乘美利龍, 問門犯虎那無樹는 불연기연을 묘사한 구절이지 싶다(일반적인 시가 아닌 선시를 해석한다는 게 조심스럽다).

 저자는 이 구절이 의미가 성립하지 않는다 하나, 이 구절은 선어록에서 있는 그대로 명명백백하다는 의미로 등장하는 다양한 관용구(; ’삼칠은 이십일‘, 3X7=21; ’뜰앞의 잣나무‘) 같은 언명이라 여겨진다. 선어는 원래 짱구‘(저자가 자주 쓰는 표현)를 굴리면 절대 이해 되지가 않는다!

  저자가 의미 없다고 여기는 글자들(, , 미르美利, , , 나무那無)은 모두 우리말 발음을 이두식으로 표기한 한자들이다. ”물수, 탈승, 미르! 문문, 범호, 나무수!“ 고상한 이론을 머릿속에서 모두 지우고 단순히 읊어보면, 이것은 서당에 처음 간 아이들이 첫날 배워 신나게 외우는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르황그 자체다. 수운은 서당 훈장을 한 사실이 있다.

 저자는 미르을 나타내는 우리말인 걸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물수, 탈승, 미르용! 문문, 범호, 나무수!“ 명명백백 그대로다. 저자가 매사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여기기 때문에 놓친 실수이지 싶다. 수운은 발음에 쓰일 한자로 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연이 기연‘ ’불연을 넘어 불연기연을 묘사한 거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사심 없이 순수한 아이들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아무것도 가릴 게 없이 있는 그대로 명명백백한 山是山 水是水“(‘하늘은 검고 땅은 누런’) 그 자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에 비친 옷 그림자가 물속에 있는 건 엄연한 현상으로서 기연이고, 그런데도 물에 젖지 않는 건 이해되지 않는 불연이지만(우리는 대부분 이걸 놓친다!), 모든 현상은 지금 여기 엄연히 동시에 존재하기에 불연기연이다.

 둘째 연 첫 구절은 야보도천의 싯구 竹影掃階塵不動, 月穿潭低水無痕을 연상시키는 구절이고, 두 번째 구절은 선시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싯구다. 첫째 연에서 셋째 연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그대로 기연에서 불연을 거쳐 기연불연에 이르는 과정으로서, 수운의 치밀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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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옳았다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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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알려진 노자 주해서가 수백여 종이나 되고, 국내에서 번역되거나 직접 주해된 서적도 수십여 종이 되는 건, 노자라는 서물 내용 자체가 어쩌면 시와 같기도 하고, 주해자 자신들의 삶과 경험이 제각각이기에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와 태도도 제각각이어서, 다른 주해자들의 설명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느끼는 각각의 저자들이, 자기만이 파악했다고 느끼는 내용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게다. 이런 결과는, 노자가 주장하듯 의 특성 자체가 고정된 개념이 아니고 변화생성인데다, 주해서를 쓰는데 사용되는 언어 자체가 가명영역이기에, 개념 차원의 주해서에는 어짜피 상도’ ‘상명과는 거리가 먼 가도지도’ ‘가명지명만을 담을 수 밖에 없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 저자는 이전에 노자 주해서를 출간한 바 있는데도 이번에 개정판이 아닌 새로운 이름으로 주해서를 출간하였다. 많은 주해자들이 번자 수준의 주해를 하는데 반해서, 저자는 평소에 다른 주해자들이 놓치는 부분까지도 세밀한 관점으로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하였고, 이번에도 이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많은 학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으로 여겨지기에, 칠순이 넘은 저자의 학인으로서의 자세에 박수를 보낸다.

견강부회로 여겨지는 담론들이 다수 있지만, 도덕경의 가르침에 따라 그렇게 볼 수도 있지라고 여기고 보면 또 그렇게도 여겨진다.

- 다만, 전체 81(500)에 이르는 책에서, 1장에만 거의 90쪽을 할애하며 주로 에 대한 담론을 펼치면서, ”명과 짝을 이루는 지고의 개념은 도가 아니고 상이라고 본 것이다. 사실 도덕경은 도와 덕을 말하는 경전이 아니요, 상을 말하는 경전인 것이다(p. 49, 네째 문단)라고 까지 언급하는데, 이점에 대해서만 졸견을 제시코자 한다.

- 저자는 특히 초원을 언급하며 그가 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다 하나, 그가 상도’ ‘상명을 설명하면서 실제로 언급한 내용은 왕래무궁하여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인이나 바보나 다 같이 말미암을 수 있고, 만고에 오래오래 지속되어 폐할 수 없는뿐으로 (p. 52), 지금까지 많은 주석자들이 설명하는 의 특성과 다를 게 거의 없는 것으로 읽혀진다. 또한, 저자가 직접 언급하는 ()’에 관한 구체적 내용으로는 변화의 항상스러운 모습변화의 규칙성이나 지속성’(p.24)뿐이고, 이것들 역시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니어서 위의 주장이 지나치게 여겨진다. 왕필도 이미 返化終始 不失其常이라 한 바 있으니(p. 256, 아래 둘째 문단), 저자나 초원이 주장하는 모든 게 이미 여기에 다 들어있다. 또한 도법자연이라고, ‘의 특성이 바로 자연의 특성이기에,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이미 사시사철에 매우 익숙하고 세상의 변화를 당연히 여기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 과 짝을 이루는 개념이 가 아니라면, 1장에 수록된 많은 표들과 일관성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도덕경 속 담론 전체가 이 전의 대부분 주해서들이 언급한 의미와는 완전히 달라져 버릴 것이다. ‘상도’ ‘상명에서 보다시피, ‘만이 아니라 에도 적용되는 개념으로서, ‘의 수식어지 와 일치하거나 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이는 아마도 저자가, 형용할 수 없는 대신에 언어적 표상을 제공하는 의 특성을 더 잘 표상한다 여겨, ‘으로 대체 가능하다 여긴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또한, ‘을 완전히 영구불변하다고 여기는 서양식 사고와, ’상도‘(저자가 도덕경의 핵심 키워드이라고 이해하는)를 거의 번자 수준으로 주해하는 다른 주석자들의 미흡함을 염려한 때문에, 좀 과한 표현을 쓴 게 아닌가 짐작된다.

아울러, 저자가 개념을 부연 설명하면서, ”산은 산이 아니다라는 철저한 부정을 거쳐서 산은 산이라는 대긍정에 도달한 여여(如如)의 경지(p. 27, 넷째 문단) ’이문일심등의 개념들을 언급하면서도(p. 65, 넷째 문단), ‘변화의 항상스러운 모습이나 변화의 규칙성이나 지속성개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매우 아쉽다.

- ‘항상 그러한이나 여여한이 그 진정한 의미를 지니는 건 바로, ‘그러하지 않은면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저자가 든 예를 이용하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산은, ‘그 산이 항상 그 산으로 명확하기에, ‘산은 산이다(A=A)’(I)라는 명제는 가도지도수준의 명제로서, 평소 우리 눈에 사계절 변화(생사)를 보이며 명쾌하게 이해되는 유와 명의 영역이다. 그런데, 그렇게 안다고만 생각했던 그 산이 언젠가 다르게 보일 때 (내가 알던 그 산이 이 산이 아닐 때; 산의 모습이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이라는 걸 알게 될 때), ‘산은 산이 아니다(A=not A)’(II)라는 무와 도의 영역에서의 명제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 산이 아무리 무한한 다른 이름과 모양을 가져도, 그 산은 여전히 여기 이대로() 있는 이 산외에 다른 게 아니다. 그래서 결국 산은 산이다(A=A)’(III). 노자는 철두철미 지금 여기 생생한 현실만을 얘기하지, 결코 초월적 관념을 얘기하지 않는다. 저자가 설명하고자 했던 여전히 그러한, ‘그렇지 않지만(not A)’을 품고 있는, ‘산은 산이 아니다(A=not A)’(II) ‘를 통과한, ’여전히 그러한이고, 그래서 새로운 명제 산은 산이다(A=A)’(III)가 바로 상도의 경지다. 처음의 산은 산이다’(I)라는 명제와 마지막 명제 산은 산이다’(III)가 같아 보이지만, 마지막 산은 산이다는 처음과 달리 그렇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를 품고 있다는 게 양자의 차이다. 그 점이 바로 가도지도상도의 차이이고, 이래야 저자가 설명하려는 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게 바로 저자가 그리도 찬탄한 수운의 불연기연그러하지 아니함은 그러그러함이다’(p. 55-56)이리라 짐작된다.

- 저자는 수운이 동학을 창시했다는 점에 착안한 듯, ‘불연서학이라 단정하지만(p. 55, 세째 문단), 저자가 주장하는 측면에서라면, ‘서학불연에 끼어들 틈조차 없다고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동학교도들에게 수운의 불연인식할 수 없는 현상 너머, ‘기연현상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불연기연은 양자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 ‘불연가도지도를 넘어선 상태로서, 최종적으로는 기연(상도, 상명)과 하나로 되어야 하지만, 일단은 지향해야 할 상태다. ‘서학은 이런 불연개념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극단적 명가명상태로서, 지양해야만 할 체계일 뿐이다. ‘A=not A, hence still A=A’라는 개념이 서양에는 없다. 단지 헛소리이고 모순일 뿐이다.

- 대부분 주석자들이 常名참다운 이름이라고만 언급하고 넘어가는데, 아마도 은 규정되고 고정된 개념이어서 , 의 변화성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저자는 常名에 대해서도 분석의 확대경을 들이대는데(p. 32, 셋째 문단), 바로 이런 점들이 저자의 치열한 학인의 자세를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 그런데 저자는 명가명 비상명도가도 비상도와는 달리, 명료한 뜻을 전달하지 않고 동어반복의 무의미한 토톨로지처럼 들린다고 언급하는데, 아마 그 이유는 저자가 다른 주석자들처럼 을 부동하는 와 달리 고정된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저자는 명은 방편이기에 고착적 성격이 있고, 상은 여여이기에 유동적이다고 하면서도(p. 50, 둘째 문단), p. 51의 표에는 상도상명유동 생성의 특성을 지니는 것으로 표시하여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혹시라도 저자가 상명과 상반되는 가명지도로만 여기고 있다면 이건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기에, 설마 이리 여기고 있지는 않으리라 확신한다. ‘상명은 유동 생성 특성을 지니는 게 맞다!

- ‘는 직접 언급할 수 없기에 을 통해 보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은 상호 침투하는 대대(對待)’의 관계성에서만 유지 된다는 걸, 저자 스스로 계속해서 강조하면서도 이를 놓치고 있다. 노자에 따르면 만물이 유동하는데 이라고 유동하지 않겠는가. ‘명가명 비상명도가도 비상도처럼만 해석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자연스럽게 읽힌다. ‘이름이름지으면에서, 앞뒤 이름이 동일하기 때문에 동어반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앞의 이름상명이고 뒤의 이름은 가명이어서 전연 동어반복이 아니다. 앞의 이름(상명)이름!’이라고 말하는 순간, 규정되지 않고 무한히 생생약동하던 상명의 의미가, 언어가 지니는 제한성에 의해 총체성을 상실하고 왜곡된 의미만을 지니게 축소되어, 원래의 이름(상명)은 단순한 이름(가명)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에서 언어를 그토록 기피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지만, 결코 말하지 않을 수 없기에 선불교에서는 禪語라는 독특한 화법을 개발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산은 산이다(A=A)(I)’가명이고, ‘산은 산이다(A=A)(III)’상명이다. IIII 모두 언어로 표현된 명제지만, 명제 III은 이미 언어를 넘어 서 있다. 선에서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말을 뛰어넘으려 한다. 가명을 손가락으로 이용하여 상명이라는 달을 가리키려는 것이다. 부처가 뭐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똥막대기!’라고 선언하는 선사의 답변에 제자가 놀라는 이유는, 제자의 눈에 똥막대기더러운 똥막대기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사의 눈에 비치는 똥막대기는, 우주 전체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하는 자신의 실상을 한점 남김없이 있는 그대로 찬란하고 당당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부처다. 길가에 버려진 연탄재에서 쓰레기가 아닌 한때 누군가에게 온기를 전하던 존재를 보는 시인의 눈은, 그 순간 부처의 눈과 다르지 않다.

- 1장 처음 두 절의 명제 구조 즉, ‘가도지도 상도가 아니다라는 형식 구조는 ’A X가 아니다는 구조로서, 어쩌면 부정신학적 명제나 ‘Neti Neti’ 담론 혹은 아포하 담론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유한한 이성과 개념 영역의 A를 아무리 바꿔도 무한을 품은 기호 X와 같아질 수 없기에, X를 포착하려는 일체의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때 서양의 신비주의자들은 구하려는 의지를 포기하고 단지 신의 응답을 기다리라고 한다. 그런데 노자는 1장에서 우리의 기를 완전히 꺾어 놓고는, 친절하게도 2장 이하에서 다양하게 의 특성들을 보여주며, 적극적으로 우리를 이끌고 재촉한다. 선불교의 화두도 철저히 적극적이고 독창적으로 학인을 자극하는 방법론이다.

- 노자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만을 보고 이 곧 인줄 아나(A=A), 우리가 실제 방으로 사용하는 건 이 아닌 빈 공간이라며, 벽 자체가 방은 아니라고 가르친다(A=not A). 그런데, 공간을 남기지 않고 벽만 쌓아도 방이 생기지 않지만, 벽이 없어도 방은 생기지 않는다. 즉 벽과 공간이 함께 있어야 이 생기니, 벽을 볼 때 공간(눈에 보이지 않는!)을 함께 보라는 얘기다. 그러면 우리 눈에는 여전히 벽만 보일지라도(A=A) 공간이 함께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중생 모습에서 여래를 보고, 여래 모습에서 중생을 보라는 얘기다.

그런데 어렵게 노력하여 깨달았다고 해서, 두 번째 경지인 산이 산이 아니다만을 고집하고, 계속해서 산은 산이다를 거부하는 게 바로 공에 집착하는 거라며, 불가에서는 이를 경계한다. 선사는 똥막대기를 여전히 그렇게 해우소에서 똥막대기로 사용할 뿐, 법당에 고이 모셔두지 않는다또다시 산은 산(III)’임을 보고 저자 거리로 돌아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여전히 그 사람으로 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제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 속에 매몰되지는 않는다. 이게 화광동진(和光同塵)’이자 시은(市隱)’이며 입전수수(入廛垂手)’. 진여문을 통과한 생멸문이기에, 진여 즉 생멸이고 이문일심이다. 이즈스 도시히코는 이를 분절을 품은 무분절이라 부른다. 저자가 언급한 바대로, 중국의 사유에서 노 유 불은 혼재한다.

- 사족(많이 주저하다가 쓴다): 전에도 그랬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도 내 해석이 맞다’,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자주 언급하고 있다. 인정한다! 저자의 박식함은 다른 사람들도 다 인정하리라 믿는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나는 모른다고 주장하여 신탁에의해 아테네 제일의 현자라고 선포되었고, 공자도 나는 아는 게 없다고 선언하였으며(저자가 주석한 논어에서), 석가모니는 아는 게 없기에 안다고 할 수 있다고 얘기하고(저자가 주석한 금강경에서), 예수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조차 광장에서 사람들이 들리게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저자가 강해한 도마복음에서).

언젠가 어느 한옥마을에서 처마 밑에 시은이라 새긴 현판을 본 적이 있다. 주인장은 자신이 산이 산이 아닌지점을 지나왔노라 자랑하고 싶었나보다. 하지만 시은을 현판에 새기는 그 순간, ‘시은은 언어 너머로 시현(市顯)’을 가리킨다는 걸 주인장은 미처 몰랐을게다. 공자는 이런 행위를 사이비 군자인 향원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맹렬히 비난한다. 누군가가 나는 세상에서 제일 겸손하다라고 주장한다면, 이 어찌 우스꽝스럽지 않겠는가.

내가 주장하는 명제가 참인가의 여부는, 나의 믿음이나 타인의 인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주장하는 명제현실 속에서 실천되는 내 삶의 정합성 여부에 의해 저절로 드러난다.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인문학적 명제도 이런 식으로 참/거짓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거라 여겨진다. 다른 저서에서라면 몰라도 적어도 도덕경에서만은 後其身’, ‘我獨昏昏’, ‘不自見’, ‘不自是‘, ‘不自伐‘, ‘不自矜하면 좋으련만! 아호를 스스로 도올이라 할 정도면, 어릴 적 짱구트라우마 정도는 이제 훌훌 털어내 버릴 수도 있을 텐데, 칠순 넘도록 그 무거운 을 짊어지고 있는 저자가 너무 안타깝다. 앞으로도 강녕하여 좋은 책 많이 소개시켜 주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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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ve95 2020-11-10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대가리가 스스로 짱돌이라 말하니 어찌 상돌있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