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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철학적·문학적 해석
백승영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4월
평점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해설서의 최종 완결판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세밀한 해설서다. 모든 문장 하나하나를 니체의 다양한 저술에 흩어져 있는 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하기에, 니체가 직접 설명하는 듯하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니체는 이렇게 말하였다’인가 보다. 저자의 자신감과 자부심이 느껴진다. 니체의 글들이 대부분 짧은 잠언 형식의 글이어서 다른 철학 서적들과는 달리 체계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은 데다가, 완결적으로 쓰이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에, 세밀한 해설서를 쓰는 일은 니체의 모든 저작을 꿰뚫고 있어야만 가능한 작업이다(니체의 문장이 독일어 문장으로 쓰인 글 중에서는 아름답다고 하는데, 독일어 자체가 영어나 프랑스어와는 달리 아름다운 문장을 구성하기에는 부적절 한데다, 시력이 안 좋아 일부러 짧은 잠언식 글을 썼다는 분석이 있다).
아쉬운 점 하나는, 니체의 저서를 니체의 관점에서만 읽어준다는 점이다. 해설서 저자가 니체 저서를 대할 때는 저자 자신이 하나의 독자 입장에서 읽는 것이기 때문에, 또 다른 독자에게 소개하기 위한 깊이 있는 독서를 위해서는, 소위 ‘비판적 글 읽기’를 해야 하는데, 그런 내용이 거의 없다는 점이 염려스럽기까지 하다.
니체 사상이 시대를 앞서는 도발적이고도 독창적인 사상이라고는 하나 시대 정신에 갇히는 한계가 있을 수도 있고, 니체가 주장하는 관점주의적 측면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해석과 반론들도 가능하다. 그래야 만이 니체가 파괴한 ‘신의 성전’의 폐허 위에, 또 하나의 새로운 ‘신전’이 아닌 ‘아크로폴리스’를 세워 진정 새로운 사상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니체가 ‘차라’의 입을 통해 비판하듯, 니체의 뼈다귀만을 핥아대는 딱한 독자에 머물 수밖에 없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오래된 표현이 철학전공자들(‘철학자’와 ‘철학 교수’는 전연 다른 개념인데, 철학 교수가 자신을 스스로 철학자라고 여기는 경우가 흔하다)에게는 비아냥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철학은 ‘진리의 심급’ ‘진리의 수호자’ 운운하는 주장들은, ‘진리’라는 또 하나의 ‘신’을 모시는 변형된 신학이며, 그런 철학자들은 절대자로서의 진리를 독점하며 떠받드는 또 하나의 시대착오적 ‘사제집단’일 수밖에 없다는 걸 니체도 경고하고 있다. ‘인간은 결코 진리를 소유할 수 없다’라는 니체의 주장만이 유일한 ‘진리’가 아닐까?
니체가 철학자로 여겨지고 있기에, ‘차라’가 사람들에게 철학서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은데, 내게는 오페라 대본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다(바그너를 의식 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분명하게 이해되며 전달되는 메시지는 드물지만, 현실과 상상이 적절히 얽혀있고 뭔가 우리의 초월(?) 욕구를 자극하며, 종교와 우리 주위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에 대한 재치있고 신랄한 비판과 풍자 등이 빠른 템포로 진행되기에,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 같다. 니체가 예술이나 문학 분야에서 주목받는 것만큼의 주목을 철학계에서는 받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니체의 저술 중에서도 특히 ‘차라’가 어렵게 여겨지고 해석자들 간에도 서로 다르게 이해되는 이유가 많겠지만, 나 같은 문외한의 입장에서 추정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니체의 글 중에는 서로 모순되는 내용 들이 많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차라’의 내용이 공허하고 애매하기 때문인듯하다(다르게 읽은 분들에게는 죄송하다. 하지만 관점이 다른 걸 어찌하랴!). 특히 책에서 수없이 반복되며 유사하게 설명되는 ‘차라’의 핵심 개념 ‘영원회귀’와 ‘힘에의 의지’ 및 ‘위버멘쉬’가 그렇다.
‘영원회귀’에 대한 저자의 이해는 아마도 “매 순간이 필연적이고 의미가 충만하다는 점”인 것 같다(p. 606). 요즘 사용하는 용어로는 ‘지금 여기’ 혹은 ‘영원한 현재’ 개념 정도인 것 같은데, ‘차라’에게 이 개념이 왜 그리 위험하고 어려운 개념으로 여겨졌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차라’가 ‘순간’이라는 개념에 관해 유사한 발언을 하지만, ‘차라’에서 뿐만 아니라 니체의 다른 저서에서도 언급되는 영원회귀의 특성은 ‘동일한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묘사되어있어, 마치 불교에서의 ‘영원한 윤회’와 유사한 느낌이 훨씬 강하여 저자의 이해와는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기체는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다. 유령이 아닌 이상 과거에도 미래에도 실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살아 있는 동안 지금 이 순간(현재)은 계속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는 ‘영원한 순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실재로 존재(실존)’하는 순간이자 ‘실존’ 그 자체다. 유기체가 삶을 유지하는 시간은 비록 유한하지만, 그 유한한 시간 속의 ‘순간’들은 무한하기에, 인간의 유한한 삶은 ‘영원한 지금’이다. 하지만 ‘영원한 순간’이 ‘영원한 시간’을 의미하는 게 아니며, ‘순간’의 내용 들은 순간순간 끊임없이 달라지기에(굳이 헤라클레이토스를 거론할 필요가 전연 없다!), ‘영원히 반복되는 동일하고 지루한 삶’ 운운하는 건 완전 넌센스다. 또한, 사람들이 무한한 시간 속에 반복되는 ‘무의미한 삶‘을 두려워하고 절망할 거라 염려하는데, 이는 니체 자신의 실존주의적 사유를 투사한 확증편향 오류다. 니체 자신이 관점주의적 인식론을 주장하며 유일한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의미‘를 자신만의 것으로 한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삶도 무의미할 거라 판단한 주제넘은 오류다. 니체가 주장하는 대로 ’의미‘는 이미 정해져 있거나 누군가에게서 전해지는 게 아니라 각자가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니체가 걱정해줄 이유가 전연 없다. 허무와 부조리를 상징으로 하는 실존주의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지만, 인간이 어디 무의미 앞에서 절망만 하고 있겠는가.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뇌에는 기본적으로 변연계를 포함한 ’파충류의 뇌‘(최근에 별로 쓰이지 않는 용어지만 그 생리적 기능을 쉽게 이해시키는 용어)가 장착되어 있기에, 의미 없이도 생의 의지 만큼은 죽는 순간까지도 작동시키고, ’인간의 뇌‘라는 전두엽 피질은 어떠한 의지와 행동에도 그럴듯한 의미(스토리텔링)를 제공한다는 게 현대 뇌과학이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회귀‘라는 용어 자체가 무언가 동일한 것이 동일한 상태를 반복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에, ‘회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건 대중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니체가 기독교에서의 ‘직선적 시간’ 개념과 대응되는 시간 개념으로서 ‘순환적 시간’과 관련된 회귀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 같은데,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던 게 아닌가 추정된다.
‘힘에의 의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차라의 입에서는 마지막까지 발화되지 않고 있으나, ‘힘에의 의지’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많은 문장에서의 맥락에 의하면, ’파충류의 뇌‘의 기능에 생리심리학 개념이기도 한 ’항상성(恒常性, homeostasis)을 결합한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제일 적합할 듯하다. ‘차라’와 저자는 ‘힘에의 의지’가 단순한 동물적 생존본능과는 다른 ‘자기 극복’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 이 또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또 다른 이원론에 불과하다. 모든 유기체의 행위는 모든 순간순간 현재 상태로부터의 긍정적 변화(욕구충족: 게쉬탈트 해소)를 추구하는 의미를 지니며, 이런 행위는 무의식적인 몸의 해석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게 바로 각 유기체의 ‘자기 극복’ 행위로서, 동물적 본능을 폄하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인간이 바로 동물이고, 개구리도 자신만의 관점이 있다. 니체가 ‘힘에의 의지’라는 제목의 독립적 저서를 완성했더라면, 의문들이 많이 해소될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
‘위버멘쉬’를 묘사하는 술어가 수없이 반복되지만, ‘차라’ 원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위버멘쉬’의 모습과 특징은 여전히 모호하기만 하다. 모든 척도를 스스로 창조하며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른, 평범한 인간이기를 극복한다는, 위버멘쉬를 구체적 실존 인물을 예로 들어서라도 보여주면 좋으련만, 니체와 저자는 끝내 그러지 않는다. 그런 인간이 지상에 존재한 적이 아직 한번도 없었다면, 위버멘쉬는 니체가 극복하려 시도한 ‘기독교 신’과 유사한 또 하나의 ‘초월자’의 모습 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지상을 떠난 초월자를 파괴하고자 했지만, 니체 역시 초월자 개념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 게 아닌가 여겨지는데, 이는 니체가 그 당시 시대 정신을 극복하지 못한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망치를 들고 기존의 모든 걸 파괴하려 했지만 새로운 걸 제대로 세우지는 못한 미완의 업적을 남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위버멘쉬!
니체가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니체의 꿈인 위버멘쉬에 이미 잉태되어 있지 않았나 여겨진다.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려는 존재는 지금 여기의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해야 하는데, 그 당위가 지금의 모습과는 다른 나의 새로운 모습을 끊임없이 요구하니, 이는 자아의 끝없는 이종분열 생식으로서, 필연적으로 정체성의 분열에 의한 정신착란과 정신 에너지의 고갈에 의한 번아웃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니체 생애의 마지막 10년이 이를 여실하게 증명한다). 니체가 영원회귀 사상을 두려워했던 게 혹시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애초의 의도는 매우 건강한 것이었지만, ‘자기 극복’(‘초월’이라는 용어를 니체가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 기제는 사실 기독적 초월 개념과 대차가 있을 수 없다)이라는 개념 자체가 ‘더 나은’을 전제로 하는데, 인간의 사유 능력은 ‘진선미’에 대한 절대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진화되지 않았기에, 그의 좌절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분석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를 특성으로 하는 서양식 사유방식을 태생적으로 습득한 니체로서는, 설사 선(禪)과 노자를 알았더라도 이 역시 부정했겠지만,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와 지지불태(知止不殆)를 실행했더라면, 그의 말년은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니체는 ‘자기’의 심리적 그림자인 ‘중력의 정신’이 무겁고 힘들더라도 버리지 말고 함께 갔어야 했다. 내 모습 들 중에 마음에 드는 모습만을 인정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부정한다면, 자기의 일부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에, 결국 자기는 혼돈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자’ 조차 내 모습으로 인정하는 강인한 자세가 바로 위버멘쉬의 자세이자 ‘긍정의 철학’의 모습이 아닐까?
니체는 위버맨쉬와 상대되는 평범한 군중들을 열등한 노예정신을 지닌 자들이라 평하며 극도로 혐오한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신과 인간을 구분하는 형이상학적 이분법과,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는 신체적 이분법을 파괴하겠다 하면서도, 이 세상에 또 하나의 새로운 이분법을 더하는 꼴이 된다. “지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하나 버릴 게 없다”고 선언하며, 이런 사유야말로 자신만의 창의성을 최고로 보여주는 ‘긍정의 철학’이라고 장담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니체의 확증편향은 여러 곳에서 감지 되는데, 그 근본 기제는 바로 자신만이 위버멘쉬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위버멘쉬에 복종해야만 하는 열등한 자로 확신하기 때문인듯하다. 시대를 앞서서 ‘모든 가치의 전도’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가한 점 외에는, 니체의 확신에 대한 근거가 될만한 위버멘쉬의 다양한 특징을 보여주는 점들을 그의 실제 삶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평생을 병마에 시달리다 생애 마지막 10년을 정신상태가 완전히 붕괴되어 생을 마감한 모습은, 자신이 주장하는 자유롭고 존엄한 죽음(p. 334;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과는 너무나 다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초라한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후견인을 자처한 니체의 동생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방문객 들에게 관람시켰다. 가련한 위버멘쉬! 고흐는 생을 마감하기 전에 몇 번 정신줄이 끊기는 경험을 하였기에, 죽음에 끌려가지 않고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결단하고 생을 마감하였는데, 이런 모습이 바로 니체가 묘사한 자유로운 죽음의 전형이다. 한 인간 자체 및 그 사람의 사상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가 한 말보다도 그 사람의 삶을 조명하는 편이 훨씬 더 정확하다(특히 그가 철학자인 경우에).
니체가 인종주의나 전체주의를 직접 옹호한 적이 없다고 변호하는 연구자들이 있지만, 위버멘쉬나 열등한 민족 등에 관한 담론들이 그리 머지않은 훗날, ‘위대한 아리안족의 후예’인 독일민족이 전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는 두 차례의 광기 어린 세계대전과(니체는 ‘광기’에 대한 호기심도 많았는데 아마도 자신의 개인적 심리 상태와 관련이 있었을 것 같다) ‘버러지 같은 유대인’ 대학살,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데에 일조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1차 세계대전 중 참호 속 병사들에게 ‘차라’ 포켓 판이 보급되었고, 히틀러가 니체아카이브의 열렬한 후원자였다는 사실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어쩌면 니체의 위버멘쉬 사유 자체가 19세기 유럽을 휩쓸던 동양과 아프리카에 대한 우월적 제국주의와 계몽주의 사유의(니체가 파괴하고자 시도했던 바로 그 대상) 영향을 받은 산물일 가능성도 있다. 아울러 독일의 모태인 프로이센이 수백 년 강국 신성로마제국의 종주국이었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연이어 격파하고 승승장구하던 때가 바로, 니체의 혈기 왕성한 청춘 시기와 겹친다는 점도 니체의 사유에 영향을 미쳤을 듯하다(니체는 보불전쟁에도 종군 했었다).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각인한다. -이것이 가장 최고의 힘에의 의지다...p.748)”라는 문장은, 니체가 시도한 ‘긍정의 철학’ 측면에서 ‘영원회귀’와 ‘힘에의 의지’ 및 ‘위버멘쉬’의 의미를 가장 종합적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명제가 아닌가 싶다. 대지와 변화를 상징하는 ‘생성’은 니체가 추구하는 개념이고, 천상과 불변을 상징하는 ‘존재’는 니체가 파괴하려는 개념인데, 이 둘을 함께 아우르는 일원론적(통합적) 성격을 지니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지금 이 순간은, 시간이라는 샘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솟아나고 있기에 ‘생성’이며,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자 존재 현상 그 자체이기에 ‘존재’인데, 지금 이 순간 안에 생성과 존재가 동시에 실현되기에 동전의 양면처럼 각인되어 있고, 이 두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으로서의 시간의 샘은, 힘에의 의지를 지니는 (위버멘쉬적) 유기체만이 팔 수 있기에, 생성과 존재는 함께 힘에의 의지를 상징하는 표상이다. 매순간 끊임없이 출현하는 찰나에 소멸하는 존재로서의 아트만과, 영원한 순간속 통시적 존재로서의 브라만이 일치하는 사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