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ner (Paperback)
John Edward Williams / New York Review of Books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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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몰이를 하는 책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추측하여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고, 나도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여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은 충동이 있다. 작년부터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아 이제야 읽으며 발행 연도 때문에 깜짝 놀랐다. 1965년도에 출판된 책이 이제야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중간에 이유를 찾아보곤 했다. 사실 영문과 교수였던 분이라 문학적인 표현을 많이 기대했는데 앞부분은 다소 지루했다. 아름다운 배경 묘사나 마음을 꿰뚫는 심리적 표현 없이 무미건조하게 전개되는 주인공의 삶은 흥미롭지 않았다. 감정의 널뛰기를 하는 나와는 대조되는 그의 삶은 이름만큼 단조롭고 묵직했다.

Stone이 주는 느낌은 무엇인가? 발에 걸리는 돌은 어디든 굴러간다. 작게 혹은 크게 차이든, 내던져지는 대로 그 자리에 머무르고, 어떤 건축물에 사용되든 그 자리에 꼭 알맞게 부합되어 조화를 이룬다. 가볍지 않고 진중하며 어떤 상황에도 분노하지 않는다. 진흙과 섞여도 묵묵히 받아들이며 금세 적응하여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빛나지 않으며 튀지 않고 눈에 띄지 않으나 맡은 역할을 하고 있다.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지 않고 인정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눈에서 사라진다 해도 그 존재 가치는 기억에서 잊힐 것이다. 석화된 인간과 유사한 스토너를 읽으며 화가 나기도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잘 적응하는 그는 행복한 삶이었을까?

무엇이 스토너를 스토너답게 만들어 주는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생계 유지가 전부였던 부모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대학 졸업 후에도 당연히 농업을 이어갈 것이라 생각했으나, 셰익스피어 소네트 73번을 읽으며 문학적 감수성이 폭발하고 교수의 추천을 받아 영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문학에 대한 사랑, 그것 말고 그 무엇이 필요한가? (˝It’s love. You are in love. It’s as simple as that.˝ p. 20). 잘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좋다는 문구가 생각이 난다. 자신의 직업을 선택하는 우선순위가 사랑이길 바란다. 스토너는 자신이 사랑했던 문학 교수가 되었다.

문학에 대한 사랑을 간파하고 이끌어 준 교수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학생 안에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어 발굴하는 것 또한 교사의 역할이 아니던가? 스토너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읽어내어 영문학 전공을 추천한 Sloane 교수가 없었더라면 스토너는 농부가 되어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도와 조언으로 인해 그의 삶은 완전히 다른 방향을 선택하게 되고 그것이 직업이 되었다. 그의 삶에 또 다른 영향을 끼친 사람은 그의 아내 Edith였다. 그들은 왜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왜 불행한 결혼을 이어갔는지 몹시 궁금하다. Edith의 성격은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기에 그렇게 특이한 양상을 보였는지, 그녀의 입장이 되어 보지 못해 답답할 뿐이다. 그 사람의 피부 속을 걸어보기 전까지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문구를 떠올린다.

스토너의 노력은 정말 눈물겹다. 애정 없는 아내와의 관계, 갑자기 아이를 원하는 아내의 요구, 퇴근 후 채점하고 수업 준비하며 딸 돌봄, 딸과 서재에서 함께 책 읽으며 유지했던 평온한 관계, 아내의 딸에 대한 집착으로 딸과 소원해진 거리 등을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인다. 누가 보아도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나 프로처럼 잘 적응하는 모습에 놀랄 뿐이다. 개인적으로 스토아학파 관련 책을 읽고 나도 그렇게 환경에 상관없이 인내하고 적응하고 싶었다. 스토너에게 잘 어울리는 단어가 stoical이다.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그는 화석화된 인간이 아니고 살아 숨 쉬는 감정의 동물임을 읽을 수가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모든 것을 쉽게 단정 지음은 매우 위험하다.

Lomax와의 일로 인해 가르침에 대한 열정도 상실하고 마치 식물인간처럼 살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덧없고 허무하며 무(無)에 수렴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Katherine Driscoll을 만나 급속도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히려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일에 대한 열정도 잃어버린 그에게 캐서린은 한 줄기 희망과도 같은 존재였다. 살아 있으되 죽은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그에게 그녀는 ‘처음 사랑이 마지막 사랑이 아님‘을, ‘사랑은 끝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임을 가르쳐 주었다. 캐서린 또한 사랑에 빠지게 되면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It takes being in love to know something about yourself.˝)

서로의 관계를 given opinion으로 부르며 사랑과 배움이 하나의 과정인 듯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지적인 탐구도 잘 이어갔으나, 결국 스토너는 캐서린을 잃고 다시 폐인이 된다. 사랑에 대한 상실과 가르침에 대한 열정을 반복하며 40년간의 가르침을 이어갔다. 은퇴를 완강히 거부하던 그에게 찾아온 질병으로 마침내 가르침을 내려놓게 된다. 스토아 철학적 인내의 삶(stoical endurance)을 살아낸 그는 어디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을까? 대학 시절 이래로 늘 책과 함께했고 책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책의 가치가 크지 않다고 생각했고 책에서 자신을 찾을 것이라는 허상은 없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작은 일부가 책에 있었고, 앞으로도 책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스토너는 문학을 사랑했고 가르침을 좋아했다. 딸을 돌보며 채점을 하고 수업 준비를 했던 내용이 여러 번 반복된다. 의무감을 넘어 애정이 있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비난받는 캐서린과의 사랑은 죽어 있던 그의 영혼을 살렸고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성과 논리로만 판단하기에는 사랑과 사람의 관계는 너무나 복잡하다. 또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열정적인 삶이 무엇이고 열정을 바쳐 사는 것이 과연 훌륭한 삶이라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스토너가 일상과 환경의 변화에 일희일비하며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면 부적응자가 되었으리라.

왜 21세기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스토너를 읽는가? 감정 노동에 지치고 상처받아 차라리 스토너의 삶을 부러워해서일까? 내게 선택권을 준다면 나는 그의 삶을 선택하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상황에 저항하지 않고 잘 순응하며 책과 가르침에서 위안을 얻고 거기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 그의 삶이 약간 탐나는 것은 사실이다. 문학에 대한 사랑은 한없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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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urrection (Paperback)
Tolstoy, Leo / Penguin Classics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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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을 알지 못한 채 마주한 고전은 뜻밖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칫 지루한 순애보로 읽힐 법한 제목 너머에는, 살점과 뼈가 튀는 치열한 사랑과 구원의 투쟁이 숨겨져 있었다.

마지막 510페이지를 읽으며 깜짝 놀랐다. 마치 클라이맥스를 지나는 것처럼 그 전 페이지부터 몰입해서 읽고 있는데 마지막 장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시베리아로 행군하면서 처음으로 이 책이 약간 지루한 감이 있었으나 엔딩이 너무 궁금했다. 유명한 고전이라도 제목으로 인해 흥미가 덜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고 나는 결말을 모르고 있었다. 현대에는 지루한 순애보라고 치부할 수 있으나, 제목 이면에 이렇게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신약에 푹 빠져서 치열한 자신의 고민에 답을 찾는 장면도 너무 감동적이었으나, 결국 완전히 새롭고 다른 의미를 찾게 된 그가 어떤 사랑을 하게 될지 궁금했다. 하지만 결국 나의 상상력에 도전을 주는 오픈 엔딩으로 끝이 나니 너무 허무하고 아쉬웠다. 사랑은 언제나 미완성인가? 진정한 사랑이기에 떠나보냄으로써 미완성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반자서전적 이야기이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책이라 엄청나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분량 면에 있어서 ‘전쟁과 평화’의 1/3, ‘안나 카레니나’의 2/3에 해당되는 적은 분량이지만, 두 권의 책과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쓰여진 책이며 왜 현대에도 명불허전이라 불리는지 잘 알 수 있다. 어쩌면 목숨 걸고 쓴 책과도 같고, 이 책으로 인해 파문까지 당했다고 들었다. 진정한 대문호 톨스토이의 용기, 대담성, 소명의식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눈물겹고 감상적인 연애 소설의 옷을 입고 있는 이면에, 당시 그리스도 정교의 허상, 러시아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과 대조되는 농민들의 참담한 현실, 정부 고위 관직들의 부정부패, 비참한 러시아 감옥 체제의 현실이 담겨있다. 그 어떤 사회 혁명가나 개혁가보다 엄청나게 파괴력 있는 울림을 전하는 사회 비판 소설이 아닐 수 없다.

톨스토이의 사회악에 대한 진지하고 치열한 고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성의 시간을 통해 회개하고 다른 삶을 살려는 치열한 노력이 묻어나는 점도 매우 인상적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악에 대하여 눈을 감는 것은 쉬울 수 있다. 아니라고 말을 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조롱과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또한 말이 아닌 실천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자신의 논리를 피력할 수가 없다.

톨스토이를 대변하는 네흘류도프(Nekhlyudov)는 귀족으로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으나 배심원 자격으로 법정에서 카튜샤 마슬로바(Katyusha Maslova)를 만나면서 그의 삶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마슬로바이지만 그녀가 지닌 순수한 아름다움에 반해 불꽃 같은 사랑을 한 후 기억 속에서 지운 지 10년이 되었으나, 배심원과 피고인으로 만나 서로의 삶을 변화시키게 된다. 그녀가 직업 여성으로 변하게 된 것이 전적으로 네흘류도프의 책임만은 아니지만 부인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그녀의 무고함을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하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일단 일을 시작하면 전에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며 도와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주인공의 경우도 그런 것 같다. 무고한 마슬로바가 유죄를 받게 되어 변호사를 선임하게 되고 상소를 하기 시작하며 교도소를 드나들게 되다 보니, 무고하게 감옥에 들어가게 된 농민들, 정치범들이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게 되고 교도관들, 관리소장, 형법 체제의 비리를 알게 되어 분노하며 더욱 의욕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게 된다. 도중에서 그는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끌 것인지, 힘들어도 지치지 않고 나아갈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가 다른 귀족들처럼 향락과 사치를 즐길 때는 가족들과 지인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영향으로 토지 소유법에 대해 새로운 시선과 관점을 갖게 되고, 귀족들의 토지 소유를 반대하며 자신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임대하려고 할 때 많은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결국 갈림길에서 편한 길을 택함으로써 남들처럼 살고자 결심하긴 했으나, 마슬로바를 피고인으로 만나게 되면서 그는 양심을 따르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녀의 최종 결말이 어떠하든, 어디에 있든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런 그에게 ‘당신은 당신의 양심을 구원하기 위해 나를 이용하는 것이다(You want to use me to save your soul. You disgust me.)˝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슬로바는 수면 아래에 묻어 두었고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사랑과 아픔을 다시 상기시키게 된다. 한결같은 그의 태도와 행동으로 입증하는 그의 사랑, 두 명의 정치범 마리야(Marya), 시몬손(Simonson)의 영향으로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늘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된다.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 실감할 수 있다. 미모를 무기 삼지 않으며 늘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제일 좋아하는 취미가 자선이라 불리는 마리야, 과거의 죄를 보상하기 위해 자신을 선택하는 네흘류도프와 달리 현재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는 순수한 청년 시몬손이 그녀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과연 그녀는 누구를 선택하고 싶었을까? 네흘류도프의 노력으로 시베리아의 힘든 노동에서 사면(pardon) 소식을 들었으나 기뻐하지 않으며 시몬손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하겠노라고 선언한다. 이것이 그녀의 진심이었을까? 진심으로 네흘류도프를 사랑했기에 신분 자체가 다르고 살아온 방식이 다른 그를 구속할 수 없어서, 그를 떠남으로써 그에게 자유를 선물하고 싶었을까? 시몬손을 선택한 그녀가 다시 그로 인해 상처를 받고 다시 예전의 그녀로 돌아갈까 봐 불안하다. 물론 그녀가 어떤 남자를 선택하더라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는 항상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성과의 사랑은 항상 불완전한 것인가? 완전한 사랑이 존재하기는 할까?

연애 소설의 이면에 종교가 있다. 어쩌면 톨스토이의 진정한 목적은 기독교의 복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의 치열한 고민인 악의 존재, ‘과연 범죄하는 인간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벌할 수 있는가? 과연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미친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갈등의 답은 마지막 장에 있었다. 시베리아 장군의 초대에서 만난 영국인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시베리아 감옥 체제 조사 및 분석, 둘째는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알리고 신약을 죄수들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죄수들이 듣든 아니 듣든 간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왼뺨을 맞거든 오른뺨을 돌려대고, 믿음이 있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가능해진다고 설교하는 그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랑할 만한 이들만 사랑하고 쉽고 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으나, 교도소에서 이런 복음을 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국 마지막 장에서 주인공은 마태복음 18장을 읽으며 그의 풀리지 않던 질문에 답을 찾는다. 날마다 죄인인 인간이 현재도 죄를 범하면서 악을 고치려 드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러시아 감옥 체제, 형법 제도, 귀족들의 허영과 이중성, 러시아 토지 제도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고치려고 분개하고 동분서주했던 그는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느낌이었으리라. 베드로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며 그는 얼마나 가슴이 뜨거웠을까? 사소한 것이라도 인간의 의지로 용서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결국엔 인간의 힘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악을 척결하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될 수 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와 명예를 다 가졌던 톨스토이가 50세에 영적인 위기를 맞이했으나, 결국 신앙에서 답을 찾은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쓴 직후에 바로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나, 말년에 결국 그는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안다.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의 의미, 선과 악에 대처하는 방법, 같음과 다름의 삶의 여정, 언행일치의 삶, 기독교인의 태도와 자세, 작가의 역할과 영향력 등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 이 책이 내게 너무 소중하고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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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ickness Unto Death : A Christian Psychological Exposition of Edification and Awakening by Anti-Climacus (Paperback)
Anti-Climacus / Penguin Classics / 198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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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궁극적 목표는 심리학 혹은 철학 원서 속에서 위안과 평안을 찾고 싶었다. 잠들지 않는 내적 불안감과 허무감을 철학서로 위로받으려 했다. 한글 번역서와 원서에는 큰 간극이 있고 영어가 부족하지만, 한글로 읽을 때보다는 영어로 읽는 것이 이해 체감도가 높았다. 마침내, 부족한 내가 키에르케고르의 원서를 도전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지만, 절반 정도 이해한 것 같은 아쉬움이 있다. 영어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력의 한계, 신학적 배경 지식, 신앙의 농도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답답했던 갈증과 목마름에 시원한 해갈을 제시한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무엇일까? 질병이라 함은 신체의 질병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의학 발전에도 여전히 불치병으로 존재하는 암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 책의 질병은 신체의 질병이 아니라 정신적, 실존적, 영적인 질병으로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질병인 despair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despair가 전체 책을 통해 관통하기에 읽기만 해도 내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 같다. 죽음(Death)이란 단어 앞에서 누구나 작아지고 소심해질 수밖에 없지만, 헤아릴 수 없는 신체의 고통으로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해방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육체의 죽음으로 고통이 끝나지 않는 질병이 있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청년의 때에는 암울한 미래를 놓고 절망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지울 수 없는 과거에 대해 절망한다. 자신의 영혼을 세상에 저당 잡힌 채, 유능함, 부와 명예의 축적 등을 향해 달려가며, 당면한 현실적 문제에만 집착하는 세상인(immediate person)으로 살아가다가 우리의 시선을 내적인 방향(inward direction)으로 돌릴 때가 있다. ‘나의 삶은 이대로 좋은가?’ 세속적인 것, 일시적인 것, 유한한 것에 절망하고, 영원한 것을 찾는 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서 또다시 절망을 한다. 이렇게 인간은 육적인 것으로만 만족할 수 없도록 지어졌다. 인간은 합성물이다(A human being is a synthesis.)라는 표현이 있다. 무한/유한, 영원한/일시적, 자유/필연이 합쳐진 존재이다. (infinite/finite, eternal/temporal, freedom/necessity)

그런데, 무한함과 영원함을 거부하며 나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다. 생물학적인 기본값을 거부하며 혼자 힘으로 살아감은 마치 ‘나라가 없는 왕(a king without a country)’으로 살아감과 같다. 원래 왕은 따로 있는데 그를 인정하지 않으며 내가 왕이 되어 살려고 하는 것이 모순이고 반항이며 범죄가 되는 것이다. 나 자신 외에 그 누구도 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절망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 왕이라 스스로 생각하지만, 강함이 아닌 약함(weakness)에, 적극적인 세력을 펼치지 못하는 수동성(self-passivity)에 절망하는 인간이 바로 과거의 나였다. 정말 치열하게 게으르지 않게 살았으나, 미래가 항상 밝은 것이 아니기에 멈출 수가 없었고, 더 열심히 살면 밝은 미래를 손에 얻을 것 같았다. 어느 순간에는 불행한 과거를 망각으로(forgetting) 달래며 원래의 나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절망은 늘 현재형이었고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죄(sin)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소크라테스 이론(Socratic doctrine)과 기독교적 이론(Christian doctrine)에 대한 비교가 있었다. 옳은 것을 알면서 행하지 못함은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며 무지를 깨우치라고 주장했던 소크라테스의 이론은 정확치가 않다. 무지해서 옳은 일을 행하지 못함이 아니라,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않으려는 고집과 반항이 인간에게 있으며 이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나의 경우만 보아도 딸로서, 친한 친구로서, 지인으로서, 공직에 있으면서 어떤 일을 어떻게 행함이 좋은지 알지만, 행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으며, 양심이 시키는 데도 고집을 피우며 망설인 적이 얼마나 많은가? 내 안의 죄성이 있어서 양심의 소리에도 모르는 척하며 눈감았던 적이 많았다. 결국 죄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것처럼 무지(ignorance)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 이행하지 않는 의지(will)와 그 의지의 부패(corruption)에 있다.

왕과 일일 노동자의 비유가 있었다. 어느 날 왕이 일일 노동자에게 찾아와 사위가 되는 특권을 주었다고 하자. 그러나 일일 노동자는 자신이 왕의 딸과 결혼할 능력이나 위치가 안 되는 걸 알기에 믿으려 하지 않는다. 믿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조롱하며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이 또한 죄(sin)이다. 왕이 되신 하나님께서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어 아무것도 아닌 인간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특권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는데, 이것을 믿으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조롱하며 온몸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것이 죄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왕은 강제로 일일 노동자에게 왕임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완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 채로(totally incognito) 일일 노동자에게조차 공평한 사랑을 베푸시고 자유 의지를 주시며 인간의 의지(will)를 테스트 하심과 같다.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큰지를 셰익스피어의 맥베스(Macbeth)와 비유한다. 심리학적 교묘한 수단(psychological master-stroke)은 죄의 계속성과 강화를 의미한다. 맥베스가 왕을 살해하고 죄책감과 공포에 시달리지만, 이미 악을 행했으므로 폭군이 되는 더 악한 일을 함으로써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죄를 유지하려고 한다. 결국 그는 절망을 덮으려고 죄를 강화시킴으로써 절망을 벗어날 수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만이 인간의 목표이자 기준이 되어야 하거늘 인간 스스로 절망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절망을 키우는 일이 된다. 모든 인간은 죽을 운명이고 죽은 후에는 심판이 기다린다. 개인 각자가 잠시 다니러 온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든 일들이 낱낱이 밝혀지는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죄성 이전 단계에 3가지의 offense 단계가 있다. 첫째, 가장 낮은 단계의 거부감/죄(offense)는 중립적인 것으로 예수님의 존재에 대하여 결정하지 않고 유보하는 단계이다. 나를 태어나게 하시고 인간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을 인정도 거부도 안 하는 것이다. 둘째,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형태로 예수님을 인정하지만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마지막은 긍정적인 거부로 기독교적 관점을 모두 비진리 및 거짓말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재 내 주변에도 위 3가지 단계의 지인들과 가족이 있다. 나 역시 오랜 기간, 두 번째 단계로 살아왔기에 지인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지만, 다시 이 책을 읽으니 마음이 급해진다.

신을 떠난 인간은 모두 절망이라는 질병을 만날 수밖에 없고 회개하지 않은 모든 죄는 새로운 죄를 낳을 수밖에 없다. 나를 아는 모든 지인들이 나라가 없는 왕으로 살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모시며 왕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며 살기를 소망한다. 헤아릴 수 없는 높고, 깊고, 넓은 사랑으로 날마다 죄를 범하는 죄인인 인간에게 공평한 사랑을 베푸시며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고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참아주시는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온몸으로 깨닫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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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yer: Experiencing Awe and Intimacy with God (Paperback) - 『팀 켈러의 기도』원서
Timothy Keller / Penguin Group USA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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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으로 책을 다 읽었어도 리뷰를 쓰기 전까지는 항상 마음이 무겁다. Flyleaf에 빼곡히 적어 두었던 키워드 및 감동 문구를 읽고, 다 읽은 내용을 바탕으로 리뷰가 내 마음에 들게 작성이 되어야 비로소 큰 쾌감을 느낀다. 그때야 비로소 책의 내용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고, 잘 내면화된 자족감이 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단기간에 잘 읽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1개월에 걸쳐 읽다가 2개월을 쉬고 다시 읽어서 리뷰를 쓰기가 부끄럽다. 그럼에도 나의 오랜 습관으로 인해 끊어졌던 기억을 되살리며 부족한 리뷰를 쓰려고 고집을 피우니 많은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누구나 기도를 하지만, 기도 자체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워 본 적이 없어서 이 책을 골랐다. 신학적, 경험적, 방법론적인 면에서 신학자들의 예시와 함께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안내하고 있다. Augustine, Martin Luther, John Calvin 등 많은 분의 기도 방법과 사례가 있다. 결론적으로 내가 얻은 답은 기도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을 넘어 축제가 되길 희망한다. 처음에는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 및 만남이며 이것이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다는 말에 설레기 시작했고, 정말 기쁨의 시간이길 기도했다. (through duty to delight) 그러나 마지막 장에서는 George Herbert, Dwight Moody의 언급을 통해 연회 및 축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연회장에서 와인을 마실 수 있는데 왜 물로만 만족하려는가?’로 끝이 났다.

기도가 나의 간구와 필요를 채우는 수단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마치 자판기에서 원하는 것을 얻듯이 하나님께 나의 간구만 마구마구 쏟아내는 시간이 되지 않아야 한다. 내가 과거에 나의 조건이 아니라 나 자신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사랑해 줄 수 있는 my better-half를 얼마나 고대하고 기대했었는가? 지금은 더 이상 그런 환상을 꿈꾸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도로 나아가는 자리가,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더 알려고 (know) 노력하는 자리가 아니라 필요만을 채우는 자리였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무게의 경중에 상관없이 삶의 어려운 순간은 항상 있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가 아니라, 어려움 때문에(because of) 더욱더 기도에 힘쓰며 성장하라고 촉구한다.

기도의 모범이 되신 예수님의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이 가장 아름다운 기도라고 했다. 과거에 내가 너무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지인으로부터 주기도문을 계속 암송해 보라고 들은 것이 비로소 생각이 났다. 예수님의 주기도문보다 아름답고 향기 나는 기도가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지만, 우리의 기도가 당장 응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응답 없는 기도는 없다고 단언한다. (There is no such thing as unanswered prayer). 돌아보면 내가 잘못 간구한 것뿐이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거절하신 것이 아니며, 나의 타이밍과 하나님의 타이밍이 다를 뿐이다. 기도는 규칙적으로, 끈질기게, 단호하게, 지속적으로 해야 하지만, 순종과 끈질김 사이에서 극단을 피하라고 조언하신다.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며 최선을 다해 기도하되, 응답이 지연되더라도 내가 원했던 것의 방향과 다르더라도 순종하라는 뜻이리라.

기도의 순서로 찬양과 감사-고백과 회개-간구와 중보를 추천한다. (adoration and thanksgiving-confession and repentance-petition and intercession) 새벽 예배에서도 출근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나의 필요와 간구를 쏟아내던 나의 기도 습관을 고치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신실하심, 정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숭배함으로 기도를 시작해 보자. 사랑하는 사람과 물건이 있다면 마구마구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 마치 그런 것처럼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로 시작해 보자. 내가 사랑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나의 정체성을 말해 준다는 표현을 암기해 보자. (What we love is basically what we are.)

내가 사랑하는 것이 곧 나라는 사람을 말해 주는 것이다. (I am what I love) 만약 내가 하나님이 아닌 부, 명예, 권력을 쫓는 사람이라면 나 자신에게 내가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우리는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거나, 사랑해야 하는 것을 사랑하지 못하거나, 덜 사랑해야 하는 것을 더 사랑하고, 더 사랑해야 하는 것을 덜 사랑하기 쉽다. 사랑해야 할 것을 제대로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감사가 넘칠 수 있고, 나의 부족함도 깨닫고 비로소 필요와 간구를 전적으로 맡김으로 평안을 얻을 수 있다. 기도 시간을 일정하게 정해 놓고 하기를 추천하고 시편 인용이 너무 많았다. 시편 자체가 하나의 시이고 노래이며 기도이다. 시편의 내용을 살짝 바꾸어 시작해도 되고 개인적인 내용으로 바꾸어 인용하는 것도 추천한다.

우리의 영혼이 배(boat)라면 누군가는 항해 중(sailing), 노를 젓는 중(rowing), 표류하는 중(drifting), 가라앉는 중(sinking)일 수 있다. 어떤 상태라 하더라도 쉼 없이 기도하라고 한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는 기도를 쓰면서 향기로운 기도를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에 했는데 아직도 실천을 못 하고 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함으로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소심함이 찾아든다. 파스칼은 영적 체험을 한 후 기록한 메모를 코트 안감에 꿰매어 지니고 다녔다고 했다. 기록은 그만큼 강력한 것이다. 희미하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되었다.

의무를 넘어 기쁨이 되고 축제가 되는 기도의 시간을 가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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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ale of Two Cities (Paperback) A Tale of Two Cities 11
찰스 디킨스 지음, Maxwell, Richard 엮음 / Penguin Classics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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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를 학수고대했던 이유는 2권의 책을 끝내겠다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휴 시작 직전에 책의 Introduction을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을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 위대한 Charles Dickens가 아닌가? 그간 읽었던 그의 모든 책은 나를 잠 못 들게 했던 page turner였다. 독서 삼매경에 빠지게 하는 그의 작품은, 밤을 지새며 읽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명불허전이었다. 사실 약간 걱정이 되었던 것은, 누군가의 리뷰에서 A Tale of Two Cities를 읽으면 실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서 지금까지 미뤄두었다는 점이다. 눈물 범벅으로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한글 독자들의 리뷰를 다시 보니 그 우려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영어가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1859년도에 출판된 고전으로, 수사학적 기교가 넘쳐나는 만연체 문장이 많았다. 대화체를 제외하면, 배경과 상황 묘사는 탁월한 은유와 직유를 사용해 긴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Mr Cruncher의 비문법적 문장은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이렇게 은유와 비교가 넘치는 함축적 긴 문장을 제대로 번역하는 일은 정말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많은 한글 독자 리뷰가 번역의 한계를 지적했다. 작가 본연의 의도를 살리면서 문학적으로 번역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부분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위대한 작가의 탁월한 문체에 감탄하고, 부족한 나의 지식의 한계를 느끼며, 연애 소설에 포장된 역사 이야기에서 감동을 받으며 읽었다. 처음 진입 장벽은 높았지만, 중간에 포기했더라면 장엄하고 숭고한 뒷부분의 감동을 놓치는 큰 실수를 했을 것이다.

거의 마지막 직전까지 Charles Darnay와 Lucie Manette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18년 동안 억울하게 바스티유 감옥에 있었던 아버지(내과 의사)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Lucie는 누구에게나 사랑스러운 여성이다. 프랑스 귀족이었던 신분을 스스로 버리고 영국에서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는 Charles는 도덕과 양심의 대명사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청년이다. 평온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던 중, 부하가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듣고 목숨을 걸고 프랑스에 들어가 1년 이상 갇혀 있었던 정의의 사도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 두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고, 다른 누가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대미를 장식한 인물은 Sydney Carton이었다. 자기 파괴적 삶을 살며 자존감도 낮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던 그가 Lucie Manette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그러나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내면을 지닌 Lucie는 Carton에게 진심 어린 위로와 격려를 건네며, 그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고, 평생 이 고백을 비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녀의 선량함과 따뜻함이 만들어낸, 엄청난 영향력의 순간이다. 이로 인해 Sydney는 언젠가 기회가 오면 반드시 자신을 희생하리라고 다짐한다. 이 부분이 Chapter 13이다. 그리고 한동안 잊혀진 Sydney는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타나, 감옥에서 교수형을 기다리던 Charles 대신 옷을 바꿔 입고, Charles를 내보낸 뒤 자신이 대신 죽음을 맞이한다.

누군가를 위해 대신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는 생소하지 않지만, 막상 책으로 읽으니 엄청난 감동이 밀려왔다. 마지막 장은 그 어떤 책보다 감동적이었다. Sydney는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했을 뿐 아니라, 옆에서 같이 죽어야 했던 소녀의 손을 잡아 위안이 되어 주었다. 죽는 순간까지 편안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아 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Sydney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함을 발산했다. 그의 마지막 문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It is a far, far better thing that I do, than I have ever done. 그가 죽음으로 누군가를 살린 행위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 온 모든 행위보다 의미 있고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는가? 현실에서 과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Lucie를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그는 기꺼이 목숨을 버리고 평온하게 삶을 맞이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남편, 아이, 아버지 모두를 살릴 수 있다는 기쁨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사랑이 이렇게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을까? 나 역시 어디서든 주인공으로 살고, 센터에서 조명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한다. 그러나 Sydney는 처음에는 비중이 적고, 주인공을 빛나게 하는 조연 정도라 생각했지만, 결국 내 눈물을 쏟게 하고 삶 전체를 돌아보게 한 인물이었다. 그는 주인공의 목숨을 살린 조연이 아니라, 혁명의 의미, 사랑의 가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Sydney가 암기했던 성경 구절은 마지막 부분에 세 번 정도 반복된다.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 (John 11:25) 결국 진정한 부활은 혁명을 통해 이룰 수 없다는 점을 작가가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피와 복수를 부르는 프랑스 대혁명의 민낯이 연애 소설의 포장 속에 담겨 있었다. 평민 여자들이 차라리 불임이 되어 비참한 평민들이 죽기를 기도한다는 평민 청년의 말은 너무나 가슴 아팠다. 귀족들의 고귀한 잠을 위해 평민은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밤을 지새워야 했다. 배고픔, 헐벗음, 가난, 고통, 목마름 외에 가진 것이 없었던 그림자 같은 삶을 살던 평민들에게 혁명만이 살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던 프랑스 대혁명(1789)의 실체는 The Reign of Terror(공포 정치: 1792~1793)로 이어져, 많은 사람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52명이 처형되기로 예정된 단두대가 놓인 장소는 마치 대중의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공원(a garden of public diversion)처럼 묘사되었고, 여성들은 바쁘게 뜨개질하며 현재 몇 명이 죽었는지 숫자를 세고 있다. Sydney의 손을 잡고 억울하게 죽었던 소녀는, 공화국이 정말로 평민에게 선한 행위를 한다면 배고픔과 고통이 줄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혁명이 아니고서는 바꿀 수 없는 뿌리 깊은 체제와 관습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어 가야 하는가? 악을 악으로 이길 수 없음을 프랑스 대혁명이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악을 선으로 이길 능력조차 없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 귀족들의 횡포, 평민들의 불행도 있어서는 안 되지만, 대혁명 이후 자유와 평등을 표방한 공포 정치 또한 무섭고 섬뜩하다. 이어지는 우울함 이면에는 Sydney의 희생이 주는 감동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 사람의 따뜻함과 진정성으로 변모된 삶, 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삶, 사랑받지 못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는 삶. 그는 이런 행위가 평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다고 고백했다. 숭고함을 넘어 장엄하다. 다시 나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만난다. 어떻게 해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 돌아보게 하는, 감동적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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