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은 카톨릭 신부님이자 하버드 대학 교수님이셨다. 그런 그가 서커스단에 매료되어 몇년간 생활을 같이 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신부님과 교수님에 대한 고정관념을 넘어 그의 명성에 큰 타격이 있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한 그의 용기와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 뜨거운 가슴이 시키는 일에 도전하여 즐거움과 기쁨을 얻고 아울러 서커스 단원들과 함께 했던 시간으로부터 영성을 끌어 낼 수 있었던 그에게 존경심을 표한다.

나이든 노교수가 서커스 공연 맨 앞자리에 앉아 어린아이와 같은 황홀한 얼굴로 박수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우리에게 항상 따라 다니는 족쇄가 있다면 ‘나이’라는 단어이다. 마치 그 누가 몇 세에는 무엇을 하고 몇 세에는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정해둔 것 처럼 나이값이란 단어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먼저 생각하게 한다. 내가 여자라서 더 나이에 민감한 것일까? 평생을 정신적인 고뇌와 영적인 싸움에 시간을 쓰신 신부님이 몸으로 표현하는 서커스단에 매료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Body-centered spirituality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서커스와 영성은 서로 닮아 있었다. 서커스 공연은 매일 위험을 감수하고 실패를 극복하며 한계에 도전해야 한다. 서커스 단원들은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영적 허기를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무리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flying을 잘 해도, 잡아주는 catcher가 없다면 그 공연은 실패로 끝이 난다. Flyer의 노력이 아니라 catcher가 잡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공연의 완성이 전적으로 catcher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Flying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이 단어 속에서 자유를 보았다. 구속에서 자유롭게 어딘가로 마음껏 날 수 있는 자유함이 그립고 그립다. 현재 나의 하루 하루가 얼마나 버겁고 큰 구속에 단단히 묶여 있는가? 난 이 속박을 벗어나 자유롭게 날고 싶다. 그러나, 비행을 시도한다는 것은 떨어질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내가 자유롭게 마음껏 날아 오를 때 누군가 항상 그 자리에서 나를 잡아주는 catcher가 있다는 것과 떨어져도 safety net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날 수가 있다.

나는 이제 확실히 나의 catcher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동안에도 여러번 떨어졌고 우아하기는 커녕 엄청 추한 모습으로 떨어진 적이 있다. 앞으로도 살아가는 동안 또다른 추락이 있을 수 있다. 이제는 예전과 다른 나의 safety net을 생각하며 용감하게 도전할 수 있을까? Henri Nouwen 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쉼없이 도전하는걸 좋아한다. 이제 나도 직업에서 소명으로, 개인주의에서 공동체 의식으로, 쾌락에서 영성으로 삶에 도전이 가능할지 생각해 본다.

놀라운 문장이 있었다. God does not want to be feared. God wants to be loved. God wants to be as close to us as we are to ourselves.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 했기에 경외감이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사랑과 친밀함을 원하실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도,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도 마치 서커스 공연을 하듯이 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다. catcher에 대한 믿음이 없이 날 수 없고, 떨어져도 safety net가 있다는걸 믿어야 도전할 수 있다.

나의 catcher이자 safety net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고 멀리 있지도 않다. 늘 나와 함께 동행하며 나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고, flying을 두려워하는 것도 아신다. 가끔은 falling도 계획하시어 나의 교만을 고개 숙이게 하시고, 겸손이 글로벌 코드임을 알게 하신다. 나에게 falling이 없었다면 나는 고개 숙이는 법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사랑할만한 구석하나 없는 내가 무조건적으로 사랑받았음으로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조건없이 사랑하고 돌려받지 못함에 서운한 마음을 품지 않고 그 누구도 정죄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기도하고, 신앙 서적을 읽으며 감동하고 회개해도 하루에도 몇번씩 넘어지고 실패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safety net으로 떨어졌기에 매번 다시 일어나 사랑하기를 연습한다. 덜 받음에 서운한 감정은 조금씩 희석되는 것 같으나, 또 넘어질 가능성은 여전하다. 그래도 catcher가 있는걸 알기에 사랑과 도전을 계속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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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단어 중의 하나이며 내가 가장 취약한 아킬레스건이 ‘waiting’이었다. 속도와 효율성을 큰 자산으로 하는 시대에 기다림이 낭비가 아닐 수 있다는 반전에 이 책을 선택했다. 고정관념을 깨는 정도의 신선함은 있어야 집중할 것 같았다. 나는 왜 그리 ’기다림‘을 싫어하는가? 이 단어는 개인적인 아픔과 관련이 있다. 오래 오래 기다렸는데 응답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혼에 대한 응답을 오래 오래 기다렸고, 언젠가 응답이 있느리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있었으나, 그 자신감이 교만과 오만이라는걸 알고, 결국 난 지쳤고 자포자기 하다가 무기력에 빠지곤 했다. 기다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anger, anxiety, and apathy의 반응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내가 바로 그럴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왜 위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가? 상황이나 환경을 통제하고 제어할 능력이 없음에도 나 스스로가 바꾸어가지 못함에 대한 자신의 무능력에 화가 났던 것이었다. 결국, 궁극적인 통제권과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시간표, 나의 뜻과 계획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다른 그림을 그리고 계실 수도 있는데, 헤아리지 못하는 나의 소견은 늘 불안했던 것이었다.

기다림은 왠지 ’느림‘과 관련이 많은 것 같다. 인내심있게 잘 기다리려면 시간을 갖고 여유있게 불확실성을 견뎌야 한다. 그럼, 게으른 성격이 무던하게 잘 기다릴 수 있을듯하다. 실제로, 난 천성적으로 느린 나무늘보 같은 성격인데, 이것이 삶속에서 드러나 나의 치부가 될까봐 매우 이른 시간부터 활동하기 시작해서 지인들은 내가 아침형 인간이라 생각한다. 의도치않게 일중독으로 살아서 멀티태스킹이 일상이 되었고 말도 빨리 하다 보니 습관이 행동이 되어 나에게서 ‘느림’이란 단어가 빠지게 되었다.

결국, 나는 느림을 늘 동경하면서 추구하지 못했고, 무능력과 동의어로 치부하며 경시하며 살았다. 빠름이 자산이 되고 힘과 능력이 되는 시대를 살아가다 보니, 기다림을 통해 나타나는 느림을 견디지 못했다.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기제에서 생기는 ‘quiet quitting’은 기다림과 희망이 포기된 상태를 말한다. 최소한의 일을 하고, 포기는 했지만 여전히 일은 하는데, 동기부여되지 않은 무기력한 상태이다.

기다림이 낭비가 아님을 인정하며 느림까지 수용하고 인정하려면 기다림은 어렵고, 보편적이며, 성경적이고, 느리며, 명령이고, 관계지향적임을(hard, common, biblical, slow, commanded, relational)기억해야 한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한나, 예수님 등등 모두 오랜 기다림의 여정을 통과했다. 이 시간 많은 사람들과 교회가 각자의 다른 기도 제목을 놓고 긴 기다림의 여정을 통과하고 있으리라. 희망을 안고 기다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기다림에 대한 FAST(Focus, Adore, Seek, Trust)의 처방이 마음에 든다. 삶에 우선순위, 방향을 먼저 설정하고 집중하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늘 주를 사모하고 예배하며, 간구하면서 끝까지 믿으며 기다리는 것이다. 내가 상황과 환경을 통제하려는 의지와 고집을 내려 놓고 전적 의존과 확신에 찬 기대감(absolute dependence and confident expectation)을 갖고 기다릴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든, 과정은 낭비가 아니며, 영적 성숙과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보여주는 척도임을 기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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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mezzo (Paperback) - 『Normal People』저자 샐리 루니의 신작
샐리 루니 / Farrar, Straus and Giroux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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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mal People에 심취해서 읽어서 큰 기대감을 안고 읽었는데, 그만큼의 재미는 아니었고 과정에서 약간 지루함을 느꼈다. 완성 문장이 아니라 주어, 목적어도 생략하고 명사구로 이루어진 문장을 두드러지게 사용한 특이한 문체가 처음엔 어색했으나,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자극적인 줄거리에 길들여진 탓일까 아님 클라이막스나 반전이 없이 같은 내용이 계속 전개되어 그런지 다소 단조로운 느낌이었다.

놀라운 스토리 전개, 감동적인 영어 문장이나 문체는 적었으나, 연애나 사랑의 개념에 대해 도전거리를 던져주는 내용이다. 제목 Intermezzo는 두 공연 사이에 연주되는 간주곡이란 뜻이다. 마치 이 책이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 사이에서 고민하는 신세대들의 사랑 방식을 이야기한다고 해야할까? 현재는 한 사람과의 연애와 사랑이 당연하고 정상적이며 사회에서 용인되는 방식이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색안경을 쓰고 보지 않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까?

어쩌면 먼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도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지난 번 읽었던 A Little Life에서도 Jude와 Willem의 사랑이 다르지만 조금 비슷했다. Willem은 지적, 정서적 사랑은 Jude에게서, 성적인 만족은 다른 여자에게서 찾았고, Jude도 이걸 용인했다. 이 책에서 Peter 역시 Sylvia와의 사랑 과정에서 Sylvia가 교통 사고로 성적 관계가 불가능해지자 다른 여자 Naomi와의 만남을 동시에 이어갔고, 두 여자 역시 Peter의 이런 사랑 방식을 다 받아들인다. Peter는 지적, 정서적 교감은 교수인 Sylvia와 성적 관계는 Naomi와 나누는 느낌이다.

현재는 이런 사랑 방식이 용인되지 않음에 고통을 느껴서인지, 동생 Ivan이 14살이나 많은 Margaret과의 사랑을 이야기하자 상당한 불쾌감을 보인다. 정작 Peter 본인은 10살 어린 Naomi를 일 년 이상 만나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역시 아일랜드 문화에서도 나이가 문제가 되고 중요하다는걸 보여준다. 이 책은 2024년 신작이지만 여전히 현대에서도 남자는 되고 여자에게 연하는 논란이 많이 된다는걸 보여주기도 한다. Peter는 변호사이며 경제적 여유가 있어 더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Peter만 Ivan의 만남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Margaret의 부모 역시 연하와의 만남에 우려를 나타냈고, 친구들에게도 연애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큰 상실감을 느꼈던 Ivan은 Margaret과의 큰 나이 차이에도 그녀의 따뜻한 공감 능력과 이해심으로 인해 전례 없는 삶의 이유를 찾게 된다. 형 Peter에게 늘 부족하고 비정상적이라 무시 당했던 그가 사랑의 힘으로 인해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다. 사랑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의 생각의 변화를 보며 새삼 느낀다. 한편, Peter가 두 여자 사이에서 죄책감을 느끼고, 어떤 것이 정상적인 삶인지 고민하다가 결국엔 두 여자를 모두 만나는걸 보며 사랑의 정의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마지막에, Peter는 그의 관계가 정상적이거나 관례적인 것이 아님을 알고 있고, 고민을 해 보았으나 해결책을 못찾고 현 상태를 이어가며 아무것도 고정된 것은 없다고 한다.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사랑이 항상 매끄러운 것은 아니고 삐걱거릴 수 있으나 최선을 다할 것이고 어찌되었든 삶은 계속된다는 말로 책은 끝이 났다. Ivan은 나이 차이로 결국 Margaret과 헤어질 수도 있고, Peter도 두 여자를 모두 사랑한다고 하지만, Naomi가 떠나갈 수도 있다. 아니면 반대로 끝까지 영원히 사랑을 이어갈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면서 사랑 방식만은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한 사람에 의해 사랑받음이 아름답고 고상한 것이라 말하는 전통에 도전하는 소설이 많이 나오고 있고, 실제 삶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현재 읽은 이런 사랑 방식이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닌 그런 시대가 올까? 이런 소설을 시도한 작가는 이전 책 Normal People에서 처럼 이 책에서도 normal, conventional이란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하며 과연 무엇이 정상인지 독자에게 묻고 있다. 이제 어떤 것인 정상적인 사랑법인지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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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work)은 그동안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작년 연말에 일로 인해 엄청난 좌절감과 상실감을 느꼈다. 그 잔향이 오래 남아 큰 내적 갈등을 겪으며 다시는 어리석게 살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감정이 다치지 않기 위해서는 기대감을 낮추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최대한 자제하리라 생각했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잘 저울질하고, 내가 어떤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리라는 오만을 내려 놓으리라 결론을 내렸다. 위의 결론은 거의 분노에서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과연 왜 화가 잔뜩 나 있었을까? 나는 분명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한 것이고, 과거의 나와 비교하여 그 이상을 해야 만족을 얻는다. 열심히 하는 것이 기본값이고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부인하고 싶지만 인정의 욕구가 바닥 깊숙이 깔려 있었나 보다. 남들보다 그 이상을 노력했는데 덜 사랑받고 덜 인정받음에 큰 서운함이 있었나보다. 내가 가장 유치하게 생각하는 감정이 ‘서운함’인데, 내가 바로 서운함을 크게 느끼는 부족한 어린 아이였다.

서운한 감정으로 부끄러울 때마다,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이 생각이 난다. 아주 오래 전에 읽어서 책 제목은 틀릴 수 있으나, 신영복 교수님이 저자인 것은 확실하다. 남들은 짜장면을 줄 생각도 안했는데 미리 먹을 줄 알고 기대했다가 머쓱해지고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고 쓰셨던 것 같다. 나의 기대감으로 서운함이 클 때, 난 항상 그 짜장면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내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일했으나, 인정받지 못하고 더 사랑받지 못해 상처가 컸다.

그런데, 나는 이 책으로 인해 일의 방향성을 찾고 궁극적인 해결책을 찾게 되었다. 일단 일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해야 한다. 나의 일터가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아 실현의 장으로서 나의 유익을 위한 곳이 아님을 기억하고 일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를 쇄신하자.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일(work)을 하시고 7일째 쉬셨다는 부분이 있다. 태초에 하나님도 일을 하셨고, 현재도 이 세상을 운행하시며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이 땅에서 생육하여 번성하라고 하셨다. 구약의 하나님은 정원사(gardener)로, 신약의 예수님은 목수(carpenter)로 일하셨다.

인간은 일을 하도록 지어졌고 일에 의해 자유함을 얻는다. 보통 일은 구속이라 생각하지만, 물고기가 완전한 자유함을 얻기위해 땅으로 올라오면 안되고 물 속에서만 살아야 하듯이, 자유가 구속의 부재가 아닌 것이다. 일로 인해 자유함을 얻고, 의미 있는 일을 통해 내적 공허감과 상실감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열심히 하면서 이것이 내게 적합한 일인지 항상 고민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마치 내가 교회, 전도, 봉사관련된 일을 더 해야 그것이 유의미하고, 일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현재 일하는 장소에 나의 힘으로 우연히 온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려 부르셨다고 했다. 그 소명(calling)은 나의 유익이나 자아 실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함이라고 했다. (God’s assignment to serve others) 이 책에 제일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serve였다. 사실 내가 이런 의미를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서운한 감정에 분노를 덜 느꼈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 책은 그 섬김을 기쁘게 열정적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 정도 열심히 하면 당연히 대접받아야(deserve) 한다는 교만함(pride)이 좌절되어, 냉소주의(cynicism)에 빠지는걸 넘어, 무관심(detachment)을 방어 기제로 삼으려 했던 내가 어떻게 해야 기쁨으로 일할 수 있을까? 확신과 만족감을 안고 나의 분야에서 탁월함을 발휘하려는 지속 가능한 동기 부여는 어디에서 얻을까? 이 땅에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낮고 낮은 섬김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실존적 좌절(existential frustration)을 넘어 실존적 의존(existential dependence)을 하라고 조언한다.

내가 바라고 구할 것은 세상의 인정이 아니었다. 일은 천하고 귀한 것이 없고 누구나 당연히 해야지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자신의 유익만이 아니라 섬김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함이 궁극적인 목적인데 왜 인정을 통해 나의 가치를 드러내고자 하는가? 일은 기도이고(Your work is your prayer.), 현재 일을 하도록 준비시켜 부르신 하나님을 숭배하는 궁극적인 행위라고 했다. 내가 특별히 조심할 것은 overwork이다. 물론 overwork와 underwork 둘 다를 조심하라고 하고 있으나, 열정을 다해 일을 하되 쉼도 중요함을 언급하고 있다.

나는 평생을 일중독으로 살았으나, 나의 대의 명분(a just cause)이 잘못 설정되어 있었고, 소명 의식이 없어서 열심히 하는 것이 기본값이었으나 만족과 기쁨이 적었다. 지인들은 항상 일을 줄이라고 당부하였기에, 열심히 하는 내가 부끄럽기도 했다. 이제는, 현재 나의 자리로 부르신 것을 확신하고, 부담이 아닌 특권( feel not a burden, but a privilege)으로 기쁘게 섬기고 싶다. 나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항상 조심하고, 열심히 하되 일중독이 되지 않으려면 기도와 독서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려 노력해야 한다. 나의 audience는 오직 한 분인 것을 기억하며 책임감과 기쁨으로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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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ttle Life (Paperback)
Hanya Yanagihara / Pan MacMillan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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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삼매경을 선물한 이 책이 너무 고맙다. 나의 눈물샘을 자극시키며 3번씩이나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게한 이 책이 너무 감사하다. 주변 지인들이 모두 울고 있던 작년 연말 어느 상황, 눈물이 나지 않는 나를 보며, 감정이 메마른 나를 자책하지 않았던가? 나의 주체할 수 없었던 눈물이 이 책의 자극성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감수성 때문인지는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이 심정적으로 부담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글씨도 깨알만한데, 분량도 어마어마하고(720p), 인칭도 1인칭이 아니어서 원서로 읽음에도 he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순간 혼란스럽기도 했다.

무엇보다 마음이 힘들었던 것은 Jude의 삶이다. 상상하기 힘든, 현실에서 일어나서는 안되는 소설 속의 이야기로 남기를 희망한다. 친구 Willem은 Jude를 ‘숨기는 것이(concealment)이 그의 유일한 기술인 마법사(magician)’라고 묘사하고 있었다. 숨김의 명수라는 뜻이다. 평생에 걸쳐 철저하고 완벽하게 숨기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답답했는데, 알고나니 충분히 이해가 된다. 자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그의 삶이 답답하여 화까지 나려고 했으나 점차 밝혀지는 그의 과거를 읽으며 상상이나 감당이 어려워서, 이렇게까지 슬프고 처절한 삶이 현실에 있을까 생각하며 작가가 미워지기까지 했다.

5장에서 끝났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책이 아니었을까? 충분히 자극적이고 감동적이었는데, Willem을 너무나 끔직한 교통사고로 죽게 설정한 후, Jude와 주변 사람들이 받는 고통, 결국 Jude의 자살, 그로 인한 평생 인자함을 실천한 Harold의 슬픔이 나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아 후반부는 읽기가 너무 너무 힘들었다. 내가 독서를 통해 얻고자하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의 소재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데, 이렇게도 슬픈 이야기거리가 현실에 존재하는지, 아니면 자극적인 것에 중독된 독자를 위한 반전을 위해서인지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기까지 하다.

Jude는 가장 불행한 남자이면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외모, 재력, 지성을 모두 가진 탁월한 변호사이다. 내가 가장 부러웠던 것은 그를 변함없이 사랑해 주는 친구 3명(Willem, Malcolm, JB)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우정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보통 여자들의 끈끈한 우정을 그린 드라마와 책은 많이 보고 읽었는데 남자 4명의 진한 우정을 그린 내용은 다소 신선했다. 뿐만 아니라 평생을 친자식보다 더 사랑한 Harold와 Julia와 같은 양부모가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그를 한결같이 사랑해준 지인들도 (Andy, Richard) 많다.

그럼에도, 모두의 연인으로 사랑받으며, 가장 용감하게 살아왔던 Jude의 28년은 늘 15년의 과거에 철저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타인의 눈에 비추인 그의 완벽한 현재는 과거에 종속되어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평등의 공리(axiom of equality), 즉 X always equals X이며, 과거의 그가 항상 현재의 그가 될 것이라는 공포가 있었다. 상처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는 프로리드의 심리학보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과 이유에 의해 상처도 치유될 수 있다고 믿는 애들러의 미래 지향적 심리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소설이 아닐까한다.

한편으로는, Jude가 유일하게 그의 아픈 과거를 모두 털어 놓았던 변함없는 친구 Willem으로 인해 Jude가 변화되기도 한다. 그들의 우정이 사랑으로 발전하며 Jude의 외로움이 잠시 위로받는 듯 했다. 과거에 대한 상처외에도 Jude의 외로움은 엄청난 두려움이었다. 배우로서 화려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결혼에 대한 고민을 하는 Willem의 이야기도 많이 공감하며 읽었다. 20, 30대를 지나며, 일, 운동, 봉사 활동도 혼자 외롭게 평생 늙어가리라는 두려움을 극복해 주지 못했다. 20대에는 친구에게 서로 의존하는 것은 멋있지만, 30대에는 남자들의 우정에 대해 주변의 색안경이 있음에 불편해하는 Willem의 고민을 읽으며, 서양에서도 나이에 대한 편견이 있다는걸 느꼈다.

Willem의 결혼관을 보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결혼이란 항상 무언가를 희생해야 하며, 문제는 무엇을 희생하느냐이고, 사람들은 각자 다른 선택을 한다. 이것이 현실적인 결혼관이라는 것인데, 나는 과연 무엇을 선택하며 무엇을 희생할 생각을 했는가? 지적 교감/양립성, 외적인 미, 부드러움, 친절함, 유연성, 신뢰감, 능력 등에서 한가지를 선택하고 나머지는 희생을 했어야 했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을 찾음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며, 나는 과연 그런 상대방이 될 수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평생을 과거의 수치심과 힘겨운 싸움을 했던, 울지 않는 것이 가장 자랑스러웠던, 가장 용감한 삶이면서 가장 소심한 삶을 살았던 Jude의 결코 작지 않은 이야기는 상처, 열등의식, 가족, 우정, 사랑, 결혼관, 삶의 목적과 이유, 동성애, 입양 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누구에게나 아픈 과거는 다 있을 것이고 나에게도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고, 그 과거가 현재를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인 방법으로 이끌 수도 있다. 깊은 아픔과 상처의 희석은 많은 시간의 기다림과 무한한 애정이 필요한 것같다. 어쩌면 궁극적 치유와 회복은 신의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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