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세상을 논하다 - 성호 이익의 비망록, <성호사설>을 다시 읽다 뉴아카이브 총서 3
강명관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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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보통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약력을 먼저 읽고 책머리를 꼼꼼히 챙겨 읽는 편이다. 그래야 책을 읽으면서 무슨 내용이 전개될 것인지 짐작할 수 있고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공교롭게 책을 한참 읽은 후에 저자의 약력을 읽었다. 한문학과 교수님이지만 책 내용에서 고리타분한 냄새가 나지 않을 뿐더러 여타 역사학자보다 휠씬 진보적이고 비판적이다. 아울러 어려운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잘게 부술 사(僿)" 자(字)처럼 먹기좋기 부셔서 자신의 생각을 가지런히 곁들여 놓아 한편 한편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성호사설이란 책은 읽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한문으로 쓰인데다가 모두 3007편이란 거창한 분량 때문이다. 이 3007편의 글은 천지문, 만물문, 인사문, 경사문, 시문문 다섯 부문으로 나뉜다. 글이 다루고 있는 제재와 주제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분류만 이루어졌을 뿐 각 편이 일정한 체계에 의해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 -11 pape-"

성호사설을 쓴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영조 때 사람이다. 저자의 말처럼 성호를 실학자로 생각해 왔으나 기본적으로 유학자였다는 말은 다산 정약용의 경우를 빛추어 보아 백배 동감했다. 그의 부친 이하진은 대사헌(현 검찰총장)을 지냈으나,  그는 남인이라 평생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저술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는 백성과 나라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유학자였으며 서얼제과 노비제를 비판하는 검소한 지식인이었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제2장 사회를 논하다"일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며 멍울진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백성의 거죽을 벗기고 뼈를 바르는 탐욕한 관료들과  토악질에 살던 곳을 떠나 길거리의 시체로 삶을 마감해야 했던  유민들의 삶이 교차되는 부분에 조선왕조 오백년이 풍악을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조선이란 국가의 관료조직은 본질적으로 거대한 착취기관이다"라는 한마디로 모든 폐악들을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본질적으로 의(義)보다 리(利)에 가까운 존재가 아닌가. 그래서 맹가(孟軻)는 맹자 첫장에서 하필왈리(何必曰利)라 물었고, 공자님 또한 견리사의(見利思義)라 하지 않았던가.

   마지막 장의 주전(主戰)과 주화(主和) 그리고 고려의 사대(事大)에 대한 성호의 의견이 상당히 흥미롭다. 성호는 주전을 하던 주화를 하던 닭보다 못한 정쟁을 일삼는 벼슬아치들의 명분론에는 관심이 없다. "한  장수가 공을 이루면 만 사람의 뼈가 마른다"는 말을 인용하며 "나라는 스스로 막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힘에 의지해야 하는 법인데 평소 백성을 후한 정치로 길러놓지 않으면 난리가 났을 때 어떻게 백성의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는 "성호를 주전파도 주화파도 아닌 개인과 백성의 생명을 위했던 생명파" 라고 했다. 평상시에는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호위호식하고 전쟁시에는 백성을 방패삼아 도망다니는 지배 구조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희망이 없다. 

  아울러 우리가 생각하는 사대(事大)에 대하여 성호는 달리 해석하고 있다. 고려란 국가가 거대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소멸하지 않고 국가를 유지하면서 강대국들(송나라, 원나라)이 세계사에서 사라지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던 것이 사대(외교)의 덕분이며,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강경주의로 나갔다면 힘없는 백성들만 도륙하고 국가조차 사라졌을 것이란 애기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성호사설을 통해 곳곳에서 강조한다. 당쟁으로 인해 전쟁을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왜란이 끝난 뒤에 반성하지 않고 다시 당쟁을 일삼은 것을 보면서 "역사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웠는가" 라며 통탄한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한다고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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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심리학 - 생활 속의 심리처방
와타나베 요시유키 & 사토 타츠야 지음, 정경진 옮김 / 베이직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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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기 전 "심리학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자구(字句)를 그대로 해석하자면  "마음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책을 읽고 나니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이 책에 의하면 "심리학이란 보통 사람의 마음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하는데, 마음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마음을 알면 인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현대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에 한정을 두지 않고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인간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으로 정착했다" 고 말한다. 

  심리학의 역사도 엄청 복잡했다.(21p)  그 시초는 뉴턴의 고전물리학이 토대가 되어 <정신물리학>부터 시작된다. 이른바 "정신을 물리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는 새로운 학문"이다. 이 학문의 특징은 정신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증명해 보이는 것" 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정신물리학은 현대에 와서 크게 6개의 심리학(인지심리학, 심리측정학, 심층심리학, 생태심리학, 행동분석학, 행동유전학)으로 나뉘어졌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런 심리학 이론을 다룬 책이 아니라 평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심리학적 견해를 살짝 곁들인 에세이라서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다. 오히려 너무 쉬워서 뭔가 허전할 정도다. 쉬우면 쉬워서 문제이고 어려우면 어려워서 문제인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 같다.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심리학적으로는 단 하나의 기준밖에 없다. 그것은 행동하는냐, 향동하지 않는냐이다. 행동분석학에서는 죽은 사람이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행동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에 따라 행동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을 망인테스트라고 한다. " - 본문 119p에서 -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 한구석이 바늘로 콕 찔린 듯한 부분이 바로 윗 구절이다. 사회적 참여를 유도하는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이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죽은 양심, 혹은 악의 편이다"란 말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행동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며 앞서서 행동할 만큼 잘나지도 않았다며 애써 사회적 이슈들을 모른 척하며 지나갔는데,  심리학에서도 그런 내용을 읽으니 마음이 여전히 아팠다. 그나마 어제 올라온 소설가 신경숙씨의 트위터 글에 묘한 동감이 서렸다. "서정을 지키면 고독할 수밖에 없고, 서사의 세계를  선택하면 고통과 함께 살아간다."  난 서정도 모르고 서사는 더욱 더 모른다. 그저 삶이 짊지고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다만 그것이 살아있지 않은 삶이라니 그럴 수도 있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앞부분에서 심리학을 간략히 소개하고, 첫장은 성격에 관해 애기하고 그 다음은 인간관계 다루었으며 마지막으로 사회적 문제를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다루었다. 사실 성격에 관한 문제는 엄청 쉬우면서 간단한 주제이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주제이다. 저자의 말처럼 인간은 보통 변화를 꺼리고 안정성(일관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서 성격의 변화를 외면하고 성격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지만 사실 성격은 상황에 따라 변한다 . 아울러 그것은(안정성) 삶의 본질과 맞다아 있어서 섯불리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외향적이다 내향적이다 혹은 좋다 나쁘다"라고 쉽게 양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양분할려는 흑백논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정신질환에 대한 언급이 흥미로워 그 부분을 발췌하고 감상평을 접고자 한다. 나이 먹을수록 언어의 샐러화가 진행된다.

" 정신질환은 크게 정신분열증과 조울증으로 나뉜다. 하나는 분열성 장애이고 하나는 감정 장애이다. 정신불열증은 일본에서는 통합실조증이라고 말한다. 미국 정신의학회의에 따르면 정신분열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첫째 망상 둘째 환각 셋째 언어장애(언어의 샐러드화) 넷째 무질서한 행동 다섯째 감정의 평판화(사고의 빈곤화, 의욕결핍)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두가지 이상에 해당한다면 정신분열증을 의심해봐야 한다. 여기서 <언어의 샐러드화>란 대화의 맥락에서 벗어난 단어들을 두서없이 내뱉는 언어 패턴을 말한다." - 244p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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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문장
김애현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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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처음으로 읽은 단편소설이다. 단편소설이 좋은 점은 많은 시간과 노고를 들이지 않고 짧은 시간내에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요즘 애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이유도 일단 책을 읽게 되면 게임하며 노는 시간이 줄고 힘들게 한곳을 응시해야 하는 힘든 수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소설을 쓰는 작가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를 보더라도 일단 그 권수에 부담감이 앞선다. 마음을 단단하게 먹지 않으면 일독하는 것도 힘들다. 읽는 것 자체도 힘든데 쓰는 것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오죽하면 토지 세번만 읽으면 소설한권쯤은 넉넉하게 쓴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그런 측면으로 따져보면 단편소설읽기는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단편소설에도 엄연히 세계가 있다. 짧게 구연된 세계. 이 소설집도 아홉편씩이나 다른 세계가 구연되어 있다. 마음갈 때마다 한편씩 뽑아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책을 읽기 전 먼저 작가의 이력이 궁금했다. 어디학교 출신이길래 남들은 한번하기도 힘들다는 신춘문예 삼관왕을 차지했을까.  확실한 문맥이 아니라면 타고난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의외다. 인터넷을 검색해 본 바로 작가는 서울출신으로 세종대학원을 나왔으며 나이 사십에 등단해서 현재 나이가 벌써 사십대 중반이다. 그래서 그런지 예상했던과는 반대로 소설들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생기발랄한 수채화같은 느낌이 아니라  진중한 유화를 보는 느낌이다. 가장 먼저 읽은 <빠삐루파, 빠삐루파>는 반신불구인 아버지와 난쟁이 아들이 주인공이고, 두번째 읽은 <K2 블로그>는 사촌지간에 결혼하여 혼자가 된 엄마와 딸이 주인공이며, 화자를 여자로 착각해서 읽은 <화이트 이웃>은 이혼하고 혼자사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단편집의 제목이 왜 <오후의 문장>이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다른 아홉편에 비해 작가의 애정이 많이 갔을까. 아마도 신춘문예에 당선된 세편의 단편과 <백야>를 뺀 나머지 단편들 중에서 가장 비중있는 단편이었기에 제목으로 선정된 듯 하다. 아울러 여류작가임에도 주인공이 남자인 경우가 많은 점이 유독 눈에 띄였다. <백야>는 몸에 빛이 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고, <래퍼K>는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선배를 찾아다니며 신동 래퍼K를 취재하는 남자이며, 빠삐루파의 주인공도 남자이고, <화이트 아웃>과 <실러캔스>의 주인공들도 또한 남자이다.  작품을 구상하는데 남자의 입장이 주제를 표현하는데 오히려 편했는지 아니면 작품속에서 나마 남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는지 작가의 의도가 자못 궁금했다.

   연초 단편소설하면 신춘문예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등용문이며 상상만해도 즐거운 아득한 꿈같은 무대다. 그 무대에 해마다 새로운 별들이 기지개를 펴고 떠오른다. 그러나 신춘문예는 유명 작가로 가기 위한 첫걸음이며 피해갈 수 없는 좁은문이다. 그런 무대에서 한꺼번에 삼관왕이 된다는게 어디 이름처럼 쉬운 일인가. 그 자체로서 목표에 한 획을 그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아름다운 작품으로 보다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영원히 회자되는 작품으로 다시 떠오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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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이슬 하나
전택원 지음 / 바보새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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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로운 선비의 뜻은 통하는 길이 없고, 어리석은 지아비의 말은 반드시 맞아 떨어진다."
   智士之意未道, 愚夫之信必中.(196p 도선비결 중에서)

  이런 우문현답이 있나. 처음 앞부분을 읽으면서 적잖이 실망했다. 무슨 놈의 책을 이렇게 재미없게 썼나. 정말 서울대 철학과를 나오신 분이 맞나. 현학적인 글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신변잡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야말로 형장의 이슬처럼 당장 사라져야할 무지몽매한 생각이었다. 투박한 책표지 사진(수운水雲선생 묘지앞 석상)에서 범상치 않음을 느꼈음에도, 간사한 마음에 성급한 판단으로 좋은 책을 그냥 지나칠 뻔했다. 이 책은 잡다한 지식을 제멋대로 끌어다 모으고 제 생각인냥 뽐내는 책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이 책에는 아침이슬처럼 영롱한 마음이 있다. 아울러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의 겸손함이 묻어있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속세의 난쟁이들은 거인의 어깨라도 슬쩍 만지면 그 위에 우뚝 올라탄 듯 자기자랑하기 바쁜데, 박사학위에 강단에 서고 중국특파원까지 다녀오신 분께서 대산(大山)선생님의 주역애기를 하며 아는 것이 없다고 겸손해 하신다. 역시 "言者부지(언자부지)요 지자불언(知者不言)"이란 말이 참말인가 보다.

 
"누구하고 결혼하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 결혼하느냐는 것이다(콘라드 로렌츠)" 이런 말은 사실 처음 들어본다.(163p) 한참 묵묵이 읽어가던 중 저자의 결혼담에 실소가 터졌다. 금강경을 읽고 연애를 결심한 저자가 그녀를 만나 우여곡절을 겪고 5년의시간이 지난 뒤, 그녀에게 한마디 했다. "우리 결혼이나 하지." 역시 철학도다운 프로포즈다.

  2부 예언속으로는 다소 어려웠다. 도선비결과 동학을 넘나들며 서양철학까지 곁들여 서술되다보니 정확한 문맥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풍류와 같은 소개는 상당히 유익했다. "깨닮음으로 하여 밝아오는 진리의 세계를 뜻하는 한자말 가운데 하나가 풍류(風流)입니다. 풍류는 '밝음'을 이두(吏讀)로 표기한 것입니다. 바람 풍(風)의 초중성인 '바', 흐를 류(流)의 초성인 'ㄹ'를 반절식으로 합쳐 '밝'을  뜻하게 됩니다. 우리말 '밝'을 '풍'과'류'로 표시한 것입니다. (393p)" 아울러 맺음말에서 언급한 '에베레스트'에 대한 애기 또한 상당히 의미있었다. "해발 8,848미터, 쵸모랑마는 에베레스트입니다. 에베레스트는 영국사람 이름입니다. 제국주의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 측량담당 국장을 지냈던 사람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쵸모랑마의 고향에서는 아무도 에베레스트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511p)"

  한 때 녹두장군(전봉준)의 절명시가 너무 좋아 무작정 정읍 황토현의 동학농민혁명기념관과 그 일대에 다녀온 적 있다. 초라하기 그지없던 장군의 초가에는 햇쌀만 가득했고  봉기의 목소리가 사라져버린 말목장터는 옛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오직 만석보유지비(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대항하여 만석보(萬石洑)를 때려부수고 세운 비석)만 썰렁한 배들평야 방죽을 한없이 바라보며 있었는데, 어디선가 "서면 백산(白山)이요, 앉으면 죽산(竹山)이라" 말이 들려오는 듯 했다. 백의(白衣)에 죽창들은 농민들의 한맺힌 원성소리가 가슴에 울먹거려 아직도 그 시절을 상상하면 눈시울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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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2 암자로 가는 길 2
정찬주 글, 유동영 사진 / 열림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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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불교와 관련된 책자는 산뜻하지 않다. 화려함을 어거지로 회피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화려할 필요성이 없어서 그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산뜻하다. 책표지도 산뜻하고 책 중간중간의 사진들도 한폭의 풍경화를 옮겨온 듯 선명하다. 책 내용 또한 수채화같은 "암자에세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어둡거나 어렵지 않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내용이 너무 부드럽고 평이하여 다 읽고 난 후에도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서른 두개의 암자를 사계절로 구분하여 일정한 형식이나 내용에 구애받지 않고 저자 마음가는 데로 소개하였다. 혹시 독자(내)가 가본 암자가 있나 유심히 읽었으나 유명한 산의 암자 두군데 밖에 없다. 역시 저자를 일러 스님보다 암자를 더 많이 다닌 암자 순례자라고 하는 이유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암자(庵子)와 산사(山寺)의 차이는 무엇일까. 산사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사찰(寺刹)을 말한다. 암자는 그 의미가 모호하여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큰절에 딸린 절, 도를 닦기위하여 만들어진 자그마한 집"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암자라고 생각하면 바위 암(巖)자를 떠올려 바위 틈에 있는 조그만 거처를 떠올리기 쉬운데 암자도 엄연한 절이다. 절에는 부처님이 있고 부처님을 따르는 불자가 있다. 그러나 암자는 작은 절인 만큼 많은 중생들이 드나드는 큰절에 비해 보다 한적하고 고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의 글에서도 그런 설명이 잘 들어나고 있다. 
  " 사람들은 수행자들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수행자들은 공해없는 물 마시고, 풍광 수려한 곳에서 사니 더없이 좋겠다고. 그러나 저잣거리 사람들의 관점일 뿐이다. 수행자들이 머무는 암자는 고독하고 가장 불편한 공간일 수 있다. 상백운암의 경우 전기와 전화도 없고, 식량도 등짐을 져서 날라야 한고, 그 어떤 문명의 시설도 누릴 수 없는 원시와 다름없는 수행공간일 뿐이다.(213p)"
  그러면서 한편으로
"중생은 습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습이란 분별하는 의식으로 생겨난 모든 생각이자 행위입니다. 습에서 벗어나 중도에서 사는 사람이 대자유인이자 부처입니다.(214p)"라는 말씀을 기억하는 저자는 머리를 깍으라는 선지식이 권유에도 아랑곳없이 속세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 선택 또한 저자가 생각하는 자유인의 한 단편인지 내내 궁금했다.
 

  아울러 저자의 글에 유난히 눈에 띄는 두 구절이 있었다."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인도의 금언이 있다.(280p) 나그네는 어머니와 헤어진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나그네의 영혼을 지탱해 주던 뿌리 하나가 잘려나갈 것을 미리 생각할 때마다 인생은 고달픔(苦)이 아니라 슬픔(哀)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지는 것이다.(281p)" 지엽적인 면을 들어 저자의 생각에 반기를 들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독자는 부처께서 말씀하신 생즉고(生卽苦)란 말씀에 대하여 많은 세월동안 의구심을 가지고 생활해 왔다. 어째서 생이 고(苦)란 말인가. 생은 고(苦)도 아니고 애(哀)도 아니고 그 어느 것으로도 정의 될 수 없는 그 무엇일 진데 왜 구지 고달픔이라고 말씀하셨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나그네에게 던져진 "중생은 무엇인가"라는 노승의 말씀처럼 "생은 무엇인가"라는 말은 중생들의 영원한 화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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