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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이슬 하나
전택원 지음 / 바보새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지혜로운 선비의 뜻은 통하는 길이 없고, 어리석은 지아비의 말은 반드시 맞아 떨어진다."
智士之意未道, 愚夫之信必中.(196p 도선비결 중에서)
이런 우문현답이 있나. 처음 앞부분을 읽으면서 적잖이 실망했다. 무슨 놈의 책을 이렇게 재미없게 썼나. 정말 서울대 철학과를 나오신 분이 맞나. 현학적인 글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신변잡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야말로 형장의 이슬처럼 당장 사라져야할 무지몽매한 생각이었다. 투박한 책표지 사진(수운水雲선생 묘지앞 석상)에서 범상치 않음을 느꼈음에도, 간사한 마음에 성급한 판단으로 좋은 책을 그냥 지나칠 뻔했다. 이 책은 잡다한 지식을 제멋대로 끌어다 모으고 제 생각인냥 뽐내는 책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이 책에는 아침이슬처럼 영롱한 마음이 있다. 아울러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의 겸손함이 묻어있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속세의 난쟁이들은 거인의 어깨라도 슬쩍 만지면 그 위에 우뚝 올라탄 듯 자기자랑하기 바쁜데, 박사학위에 강단에 서고 중국특파원까지 다녀오신 분께서 대산(大山)선생님의 주역애기를 하며 아는 것이 없다고 겸손해 하신다. 역시 "言者부지(언자부지)요 지자불언(知者不言)"이란 말이 참말인가 보다.
"누구하고 결혼하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 결혼하느냐는 것이다(콘라드 로렌츠)" 이런 말은 사실 처음 들어본다.(163p) 한참 묵묵이 읽어가던 중 저자의 결혼담에 실소가 터졌다. 금강경을 읽고 연애를 결심한 저자가 그녀를 만나 우여곡절을 겪고 5년의시간이 지난 뒤, 그녀에게 한마디 했다. "우리 결혼이나 하지." 역시 철학도다운 프로포즈다.
2부 예언속으로는 다소 어려웠다. 도선비결과 동학을 넘나들며 서양철학까지 곁들여 서술되다보니 정확한 문맥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풍류와 같은 소개는 상당히 유익했다. "깨닮음으로 하여 밝아오는 진리의 세계를 뜻하는 한자말 가운데 하나가 풍류(風流)입니다. 풍류는 '밝음'을 이두(吏讀)로 표기한 것입니다. 바람 풍(風)의 초중성인 '바', 흐를 류(流)의 초성인 'ㄹ'를 반절식으로 합쳐 '밝'을 뜻하게 됩니다. 우리말 '밝'을 '풍'과'류'로 표시한 것입니다. (393p)" 아울러 맺음말에서 언급한 '에베레스트'에 대한 애기 또한 상당히 의미있었다. "해발 8,848미터, 쵸모랑마는 에베레스트입니다. 에베레스트는 영국사람 이름입니다. 제국주의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 측량담당 국장을 지냈던 사람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쵸모랑마의 고향에서는 아무도 에베레스트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511p)"
한 때 녹두장군(전봉준)의 절명시가 너무 좋아 무작정 정읍 황토현의 동학농민혁명기념관과 그 일대에 다녀온 적 있다. 초라하기 그지없던 장군의 초가에는 햇쌀만 가득했고 봉기의 목소리가 사라져버린 말목장터는 옛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오직 만석보유지비(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대항하여 만석보(萬石洑)를 때려부수고 세운 비석)만 썰렁한 배들평야 방죽을 한없이 바라보며 있었는데, 어디선가 "서면 백산(白山)이요, 앉으면 죽산(竹山)이라" 는 말이 들려오는 듯 했다. 백의(白衣)에 죽창들은 농민들의 한맺힌 원성소리가 가슴에 울먹거려 아직도 그 시절을 상상하면 눈시울이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