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사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지음, 승주연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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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아메리카'는 얼음 속에 냉동 되어 있다가 깨어난 히어로다. 보통 사람이라면 냉동 된 신체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학자들이 개발한 인체 강화 주사 덕분에 멀쩡하게 깨어날 뿐만 아니라, 남다른 신체 능력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른 세상에서 깨어난 뒤, 조그만 수첩을 가지고 다닌다. '캡틴아메리카 - 윈터솔저' 영화에는 조깅 중 만난 팔콘의 말을 듣고 수첩의 to do list에 하고 싶은 것을 덧붙이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관에서 봤을 때는 변화한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해서 좋았다. 


그가 메모하는 모습을 보면서 만약 내가 냉동 되어 몇십 년 후에 일어난다면 내가 알던 세상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전혀 다른 곳에서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 살아갈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은 이 표지를 보시면 무엇이 떠오르나요?(은행나무 스태프 정리드)"






은행나무 서포터즈로 선정되었다는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며칠 뒤, 흐릿한 기억 같기도 하고 잠들기 전 가물어지는 시선에 닿은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 도착했다. 표지와 내용 사이에 스태프 님의 편지가 끼워져 있었다. 다른 어떤 내용보다 표지에 관한 질문이 콕 박혔다.


나는 입을 크게 벌려 하품한 뒤, 맺힌 눈물을 통과해서 본 사람 같았다.


이 책 <비행사>는 크게 1,2부로 나뉘어 있다. 첫 부분은 병원 침대 위에서 주인공이 깨어나며 시작된다. 두 번째 부분은 주인공과 그의 아내, 그리고 주치의의 시점에서 같은 사건을 겪은 뒤 쓴 일기의 내용으로 전개된다.


내가 '나' 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 내가 태어나서 자라온 시대와 다른 시대를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이 들까. 내가 기억하고 알던 사람들은 모두 죽어 흙으로 돌아갔으며 어느 것 하나도 나의 기억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없다. 이미 뒤안길로 사라진 역사의 일부분이 되었어야 할 나와 어울리지 않는 세상이다. 내가 자주 듣던 소리가 사라지고, 냄새가 낯설다. 


공기중으로 퍼져가는 연기처럼 점점 이야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기억을 잃었던 그가 과거의 장면들을 떠올릴 때 나도 함께 그의 인생을 구성하게 됐다. "왜 내 삶에서 행복한 순간은 단편적으로 기억나는 걸까요?(45쪽)" 그가 찾은 소중한 관계에 대한 기억은 편린片鱗과 같았고, 잡힐 듯 하면서 모래처럼 손 안에서 빠져나갔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이 시대에 적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텅 비어버린 것이 점점 기억으로 채워지는 것을 보여주는 작가의 섬세한 시선이 좋았다. "이 시대는 내가 속한 시대가 아니며, 지금 이 시기에 나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가 나는 여전히 낯설다.(388쪽)" 하지만 잘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그는 여전히 낯섦에 대해 생각한다.


작가는 서문에서 "역사라고 하는 이야기와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가 공존(9쪽)"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나라인 러시아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주인공 인노켄티가 살아남은 솔로베츠키 제도의 강제 수용소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궁금증이 일었다. 수용소라고 하면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러시아의 강제 수용소에 대해 몰랐던 터라 검색을 해봤다. 갑작스러운 사실이 눈 앞에 툭 튀어나왔다. 그곳은 과거에 수도원 이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성스러운 것부터 악한 것까지 모든 것이 한계에 도달해 있었습니다.(9쪽)"라는 작가의 말처럼, 그곳은 유서 깊은 수도원으로서는 정교회의 성지였고 강제수용노동소로서는 한번 들어오면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이었다.


냉동 상태에서 소생 한 그는 국민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는다. 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냉동 인간을 회생시키는 실험을 세계 최초로 성공시킨 것이라면? 미국보다 우주에 먼저 진출했던 러시아 사람들이 당시, 그 사실에 대해 얼마나 열렬하게 반응했을 지 궁금해졌다. 


그는 그런 수용소를 겪었으면서도 정부에서 수여하는 훈장을 받는다. 이 훈장을 받으면서 그 자신도 알지 못했던 그의 이중적인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수용소에서의 기억이 자신을 구성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주치의인 가이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 한다. 국가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는 문서를 보내왔음에도 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의 무고를 밝힐 분은 오직 신뿐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국가가 뭘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393쪽)" 그는 국가에 대한 모든 감정을 포기한 것일까?


그에게 점점 어떤 기운이 드리웠다. 나는 이것을 해동 되기 전부터 따라오던 불행이라 불러야 할지, 필멸자인 사람이 밟아나가는 죽음의 길이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전에도 이번 생을 떠난 적이 있다. 하지만, 수용소에서 죽은 것은 출구였고, 지금은 떠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헤어지는 것이다.(515쪽)" 그가 이것을 헤어짐이라 불렀으니, 잠깐 동안의 이별이라 하고 싶다.







작가들의 표현력에 감탄할 때가 있다. 내가 마치 그들과 같은 공간에 서서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느끼고, 숨 쉬며, 같은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때다. 최근에 박완서 선생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다시 봤는데, 눈이 맑아지는 문장들과 더불어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가 어린 완서의 손을 잡은 느낌이었다.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단 하루도 같은 놀이를 하지 않았고, 석양 지는 수수밭에서 비애를 느꼈다. 다 자란 성인의 눈높이가 아닌 어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세상이 있었다.


책을 읽을 때면 현실과 유리 되어 활자 사이를 걷는다. 그가 심문이 끝난 후에 어둡고 역한 냄새가 나는 감방으로 끌려갈 때 나도 함께 끌려갔다. 과거에 사랑했던 아나스타샤를 만나기 위해 407호 병실 앞에 서자 내 심장도 함께 쿵쾅거렸다. 그의 몸이 죽음을 느끼고 정신력으로 버틸 때 나도 함께 육체의 고통과 싸웠다. 나사로처럼 부활했지만, 로빈슨 크루소처럼 좌표 없이 표류 하는 삶을 살았다.


고장 난 랜딩 기어를 가진 비행기가 착륙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종착지를 향해 가는 이노켄티, 그처럼.




※ 은행나무 출판사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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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살고 싶은 시간
신민경 지음 / 책구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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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데이'라는 어플을 이용해서 달리기를 한 적이 있다. 헬스장을 끊어 놓고 도통 가지를 않아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1분을 시작으로 30분 연속 달리기까지 총 8주 코스로 되어 있었다. 한 회를 진행할 때마다 도장을 찍어주는데, 비어있던 칸에 하나씩 채워지는 것이 보기 좋았다. 코로나 시국 이후로는 가지 못했지만. 


처음 시작 할 때는 30초 달리기도 힘들었다. 심장이 펌프질 하며 뿜어내는 혈액이 근육으로 스며드는 감각이 느껴졌다. 숨이 차올라 들이 쉬는 숨보다 내쉬는 숨이 더 커지고,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몸이 가벼워 졌다. 


무거운 몸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당연한 듯 찾아오는 휴식 때문이었다. 이 어플은 연속해서 오랜 시간을 뛰기 보다 30초 뛰고 1분 휴식, 이런 형태로 짜여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달릴 수 있었다. 휴식이 달고 달아 계속 이대로 있고 싶었지만 당근은 채찍과 공존해야 더 달콤한 법. 달려야 할 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인생은 이처럼 달리기와 멈춤을 반복한다. 멋지고 설레는 하루가 있으면 초라하고 어려운 하루가 있다. 그렇게 매일을 쌓아가던 중, 강제로 멈춰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을 읽다가 잠시 덮었다. 방대한 내용이나 복잡한 설정 탓에 잠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일렁이는 감정이 손을 붙들었다.


"통증은 나의 신념을 약하게 만들고, 나를 불안하게 흔들어 놓는다.(47쪽)"


인생에 이겨낼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찾아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세상이 참 공평하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맘 편히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온갖 아픔과 부조리함과 불공평을 다 겪는 사람도 있으니까. 양 극단의 평균은 중간이 되니까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공평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신에게 물어봐 주세요. 뭘 좋아하고, 뭘 잘하고, 뭘 하고 싶은지. 그리고 거기에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쓰세요. 저는 그게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인 것 같아요.(107쪽)"


열심히 산다는 건, 잘 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건지 생각했다. 요즘의 나는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고 있다. 잘 하고 싶은 것을 찾고, 목표를 세우고, 조금씩 다가가도 있다. 다난 했던 20대를 돌아보면 지금이 더 행복하다. 이렇게 매일의 행복을 찾으며 사는 것이 좋다. 


나의 경우 오히려 성인이 된 후 했던 공부들이 재미 있기도 했는데, "거의 밤을 새워 공부하는 게 정말 좋았다.(126쪽)" 는 것에서 저자의 생에 대한 노력과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요리하는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그 열정이 얼마나 컸을까. 아프고 난 이후 "요리라는 일련의 작업이 너무도 귀하게 느껴진다.(135쪽)"에서 생각이 바뀐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나는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 생활 전반적인 부분에서 많은 것을 느꼈는데, 그 중 식사 부분이 가장 컸다. 세끼를 차려 먹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음식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지만, 먹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 들어가는 정성이 더 크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에필로그까지 읽고 나자 감히 위로할 수 없는 고통을 재단하기보다 그녀가 소망한 일을 이루기를 바라게 됐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만큼 바라는 결말을 맺을 수 있기를.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스쳐지나가는 밤. 가만히 누워 행복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내게는 손톱 만한 행복도 행복이었다. 


※ 책구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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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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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는 결국 가장 오래된 서사 방식이며, 가장 보편적인 서사입니다.(46쪽)"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행복함을 중독적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동감한다. 검은 활자 사이를 누비다 보면 얇아지는 뒷 페이지가 야속하다. 읽었던 모든 걸 다 기억할 수 없는 내 머리에 그나마 단편적인 감상이라도 쌓아둘 수 있는 방법이 글쓰기인데, 나는 종종 읽는 것은 쓰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읽고 쓸 수 있는 서평 활동이 참 좋다. 읽을 기회와 쓸 기회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다.


나는 특히 판타지 장르가 좋았다. 태생부터 비범한 능력을 지녔건, 아니건 그 세계는 나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오롯한 나만의 세계였고 그들의 도덕은 나의 도덕이 되었다. 선명한 이미지들이 살아 숨 쉬었다. "상상은 현실을 알고, 현실에서 출발하고, 돌아가서 현실을 풍성하게 만들(192쪽)" 어 주었다. 과거와 미래의 틈새인 현재를 사는 나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 






"사람들은 '다 지어낸 이야기라서' 판타지를 읽지 않는다고들 말하지만, 판타지의 재료는 리얼리즘이 다루는 사회 관습보다 훨씬 영구적이고 보편적이에요. 판타지의 바탕은 정신적인 요소, 불변하는 인간의 정수, 우리가 아는 심상들이거든요. 설령 만나 본 적이 없다 해도 어디에 있는 누구든 드래곤은 알아보는 게 사실이잖아요.(47쪽)" 


처음 읽어본 판타지 소설은 학교 도서관이나 책방에서 발견한 것들이었다. 내게 소설은 친구였고 시간이었고 세상이었다. (영상 시대로 접어들며 가장 아쉬운 점이 동네마다 있었던 책방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퇴마록, 드래곤라자, 눈물을 마시는 새, 룬의 아이들. 그리고 어스시 이야기. 세월에 곰삭은 두뇌는 내용을 잊었지만 특이했던 작가의 이름 만큼은 간직하고 있었는데, 어슐러 르 귄의 삶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게 되어 정말 기뻤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장, 강연과 에세이, 어쩌다 내놓은 조각글들.


2장, 책 서문과 작가들에 대한 글 모음.


3장, 서평.


소설 작가들의 에세이는 읽어본 적이 있었지만 다른 소설에 대한 글을 읽어보는 일은 서문에 소개글이 대부분이었다. 작가가 바라보는 장르 문학과 다른 소설에 대한 글들이 너무 궁금해서 나는 서평 부분 부터 읽었다.


책 속 책들의 이야기는 세헤라자데가 그의 왕에게 살기 위해 바친 천일야화를 떠오르게 했다. 그 이야기들은 연애, 범죄, 여행 등 여러가지 주제를 품고 있었고, 마치 천 권의 책을 읽는 것 같기도 했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세상과 같다. 한 작가가 쓴 책이어도 다 같지 않다. 그러다보니 같은 작가에 대한 다른 소설의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녀는 번뜩이는 재치와 날카로운 이성으로 책에 대한 비평을 썼다. 평가를 부탁 받는다면 냉정한 비판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그녀는 그런 내용도 솜씨 있게 적어 놓아 감탄했다. 행간을 읽을 뿐 아니라 작가까지 깊게 탐구하는 열정에 탐복했다. 나도 앞으로 책을 읽을 때 문자 아래에 깔아 놓은 작가의 말을 이해하려 애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평 파트가 끝난 뒤에 그녀가 작가들의 공간에서 생활한 일주일의 기록이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컴퓨터 화면으로 작업할 때와 다르게, 작업에 완전히 몰두하면서도 주위 세계에 열려 있는(508쪽)" 체험을 한 점이 부럽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장소에서의 일주일.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안온한 시간 속에서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은 기회가 아닐까. 나는 고요한 시간을 참 좋아해서 집에서 TV를 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있는 곳의 층간 소음과 벽간 소음이 적응되지 않아 꽤 힘들었다. 그녀의 일주일을 함께 하면서 잠시나마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떨지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인간 공동체의 핵심 기능은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삶이란 어때야 하는지,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배웠으면 하는지에 어느 정도 합의하고, 그다음에는 우리와 그들이 우리 생각에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25쪽)"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진정한 목적은, 이전 세대로부터 전승되는 것을 익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읽고 사유함으로써 산란했던 정신을 모아, 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그들이 건네는 따뜻한 손을 맞잡는 것이다. 



※ 황금가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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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장면 소설, 향
김엄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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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았다 뜨니 1월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해를 넘어도 여전히 날 선 하루를 매만지다 보니 금방 이었다. 시간은 줄곧 조용히 흐르다가, 심통이 나면 괜히 내 몸을 물고 늘어지는 것 같다. 아슬아슬하게 정상과 감기의 경계에서 옷깃을 여몄다. 퇴근 길 가로등 밑을 지날 때, 뒤를 밟는 어둠이 무서워지는 계절이었다.







작가정신에서 [겨울장면]이라는 이 계절과 어울리는 책이 도착했다. R의 시점으로 단편적인 이야기를 훑어보다가 버지니아 울프가 떠올랐다.


버지니아 울프는  20세기 초반의 인물로, 특별한 줄거리가 없고 등장인물의 의식에 따라 내용이 전개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이용한 작품을 썼다. 그녀의 독특한 전개는 현재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서 국내의 여러 작품에도 이 기법이 등장한다. 


나는 독서 모임에서 [자기만의 방]을 읽은 적이 있다. 그간 꾸준히 책을 읽어왔음에도 문장들이 눈 앞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좁고 꼬불꼬불한 길을 걸어가는 느낌이 들어 어지럽기도 했다. 자기만의 방을 읽는 방법으로 결론을 먼저 읽은 뒤 앞으로 돌아가서 읽으라는 조언이 있었는데 상당히 유효했다. 나는 그 말을 되새기며 이 책의 뒷 부분을 먼저 읽은 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저 어두운 윤곽이 네모는 아니라고, R은 생각한다.(9쪽)" 소설은 R의 생각으로 시작된다.


R은 8개월 전 5미터 바닥으로 추락해 기억을 잃은 사람이다. 플랑크톤 처럼 부유 하던 생각들 사이로가끔, 어떤 기억이 선명해 지기도 있다. 짤게 토막 난 이야기들이 제대로 반죽 되지 않아 툭툭 끊어지는 R의 의식 같았다.


"R은 한순간, 단 한 번에, 여러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눈앞에서 생생하게 겹쳐지는 시간. R은 갑자기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지고.(29쪽)"


잠들기 전 몽롱한 시간이 되면 흘러가는 것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내일인 지 모를 때가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지난건지, 아니 사실은 하루 동안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난 것은 아닐까, 아내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마치 R이 된 것처럼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마음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고. 기억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기억은 모든 것이다. 모든,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R은 생각했다.(75쪽)"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요소중에 가장 큰 것은 뭘까. 내가 나로서 살아온 기억이 없다면 나의 모든 것을 잃은 게 아닐까.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억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아무것도 아닌 것이 기억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일주일은 반복을 암시하는 속임수다.(79쪽)"


성인이 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이 지루함이다. 이 지루함은 반복에서 온다.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일주일은 금요일의 퇴근으로 끝나고, 주말을 침대에서 보내다 보면 어느 새 월요일이다. 매일을 달라지게 만드려고 약속을 잡고, 친구를 만나고, 취미 활동을 하지만 결국 그것들도 반복되는 일주일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또다시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지루함이 부정적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지루함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책을 계속 읽었고, 독서 모임에 나가게 되었으며, 사이드 프로젝트들도 시작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원동력이 되어 준 셈이다.


작가는 겨울 낙엽처럼 바싹 마른 문체로, 덤덤하게 R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상처 입었고 멈춰 있는 것이 최선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계속 시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언젠가 R이 성공 했으면 좋겠다. 기억과 망각 사이의 유영을 끝내고, 아내와의 관계를 끝 맺고, 파도 위를 떠다니는 유리병 같은 삶에서 벗어 나기를 바란다.



※ 작정단 6기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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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택트시대 여행처방전 - 지금은 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할 시간
이화자 지음 / 책구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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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내가 떠나던 것이었다. 복잡하고 산란한 도시를 떠나 힐링을 위해. 맘 맞는 사람과 함께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다양한 면을 발견하기 위해.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나의 첫 해외여행이 떠올랐다. 들썩 하고 북적대는 공항에서 처음으로 면세품을 수령하던 순간의 설레임. 첫 여행이자 4개월의 인턴 생활을 위한 것이었다. 어린 날의 치기라고 해도 좋았다. 실제로도 '어떻게든 되겠지.'하며 떠난 것이었다. 한국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먼저 와 닿은 것은 다른 언어로 적힌 간판을 보기 전, 비행기에서 내리며 폐부로 스며든 눅눅한 공기를 느꼈을 때가 아닐까 싶다. 눈으로 보고, 냄새로 맡기보다 먼저, 숨을 들이켰다. 올라탈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낯선 얼굴의 승무원들이 환영 인사를 했다.


그 후 10년. 사람이 운전하지 않는 자동차가 다니고, 내 방 침대 위에서 전 세계 사람과 소통하고, 내 목소리에 대답하는 AI가 있고, 드론으로 배달을 하는 시대가 됐다. 그렇다고 해서 내 방에서 세상을 여행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뜻밖의 재난災難이 찾아왔다.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는 상황은 타인의 온기를 쥐는 것이 죄처럼 느껴지게 했다. 사람 간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자라나고,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도 2주라는 시간적인 거리가 생겼다. 방역 수칙이 강조됐다. 그래서 여행은 우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치명적인 전염병에 의해, 혈연은 찢어 지거나 송진처럼 굳었다. 대면하는 자리에는 손소독제와 마스크가 예의가 되었다. 언제든 보던 가족들을 만나는 것을 자제해야 했다. 그럼에도, 세계 곳곳에서 마음이 소통하는 새로운 방법이 생겨났다. 그런 장면을 볼 때면 목에서 울음이 끓었다. 몰아내도 밀려오는 파도처럼, 우리는 언택트 시대로 내밀려졌다.


여담이지만, 이 '언택트(untact)'라는 단어는 한국에서 생긴 신조어라고 한다. 컨택트(contact)의 반대어로 통용된다. 너무 자주 쓰이고, 굳어져 버려 당연한 듯 사용되어 이 말이 콩글리쉬라는 것을 우연히 듣고 더 놀랐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코로나로 인해 생긴 '공항장애(공항에 못 가서 생긴 병)' 치료차 떠난 국내 여행"


밖으로 떠날 수 없다면, 우리 나라 안에서 색다른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은 어떨까?


이 책에는 저자가 탐구하고 발견한 우리나라의 수많은 명소가 실려있다. 지금 당장 떠나라는 말이 아니다. 비대면, 비접촉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이 상황이 언젠가 끝나기를 바라며, '공항장애'가 발병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며 준비해 보자는 것이다.


웅진, 통영, 신안, 강화, 연천, 한탄강, 제주, 속초, 인제, 고성, 양주, 양평, 안양, 양양, 속초, 부산, 고창, 진안, 안주, 영주, 파주, 춘천 등. 24가지 장소에서 우리나라에서 만나보지 못했던 장소를 만날 수 있다.


저자는 걷고, 빠져들고, 감상한다. '미인도'라는 이름이 붙은 비진도, 한국의 '섬티아고' 소악도, 소금꽃이 피어나는 섬 '신의도', 역사적 의미가 있는 '호로고루성', 유네스코에서 세계지질공원에 선정된 '한탄강', 치유의 공간이 된 박물관을 거닐었다. 지명들이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고 적확한지. 섬 뿐만 아니라 산, 강, 공원, 사찰, 축제 그리고 미술관과 박물관을 비롯한 카페와 건축물. 나만 알고 싶은 장소들을 숨김없이 모두 내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의 사진은 사진집을 보는 것처럼 풍광명미가 실린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 찍었을까 싶을 정도로 자연의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지 않고 저자 본인이 직접 걸으며 하나씩 사진을 담아온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언젠가 내가 저곳에 간다면 눈 앞에 마주할 것 같은 경치가 선연했다.


바다에서 짭쪼름한 냄새가 느껴지고, 녹음에서 시원한 산바람이 살랑였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동네 책방을 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통영 '봄날의 책방'사진을 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과 나무 냄새가 났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 내는 소리가 부서졌다. 통영은 다른 어느 곳보다 내가 있는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절로 몸이 근질거렸다.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건 지금 여기 당신과 내가 존재한다는 것. 행복이란 비 일상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 속에 있다는 것(Epilogue)"


[지금은 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할 시간] 이라는 부제목이 참 와 닿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꿈은 가장 어두운 한밤에 꾸는 것이다.




※ 책구름 출판사 서포터즈, 「책구름지기」 1기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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