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포성
바바라 터크먼 지음, 이원근 옮김 / 평민사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류는 미쳤다!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면 미친 게 틀림없다. 이 학살극을 보라! 이 공포와 주검의 광경을! 내가 받은 인상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지옥도 이 정도로 끔찍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모두 미쳤다!” ☞ 베르뎅 전투 당시 프랑스군 제5사단 소속 21살의 젊은 중위였던 알프레드 주베르(Alfred Joubaire)의 일기 중에서. 그는 이 일기를 남긴 지 며칠 뒤 전사했다.

2022년 개봉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에서는 한 어린 독일 병사의 눈으로 본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사실적이면서 신랄하게 묘사한다. 입대할 때만 해도 교사들과 동창들의 열렬한 격려를 받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전장터로 향했던 주인공은 막상 최전선에 도착하자 환상은 대번에 깨진다. 그는 배치 첫날에 참호에서 죽을 뻔했고 프랑스군의 격렬한 포격으로 친구를 잃는 등 참혹한 신고식을 치르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독일은 패전을 눈앞에 두었고 한쪽에서는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 다른 한쪽에서는 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 했다. 결국 협상이 타결되면서 주인공은 집에 갈 기회를 얻었지만 이에 반발하는 장군이 최후의 공격을 명령한다. 이미 무의미한 싸움이었지만 주인공과 전우들은 어쩔 수 없이 공격에 나섰고 휴전을 몇 분 남기고 주인공은 프랑스 병사의 총검에 찔러서 전사한다. 하지만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 내내 무수히 죽어나가야 했던 수백만명의 개죽음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정작 아집에 눈이 멀어서 어린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늙은 장군은 끝까지 살아남음으로서 현실의 부조리함을 고발한다.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 마지막에서 최후의 돌격을 앞두고 주인공의 무표정한 얼굴은 영화 초반의 생기 넘치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늙은 정치인과 장군들의 아집과 독선이 만들어낸 무의미한 전쟁이 한 젊은이의 인생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보여주는 셈이다.

1918년 11월 11일 유럽에서 포성이 멈추었을 때 승자는 없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 러시아는 전쟁의 고통에 참다 못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아예 정권이 붕괴되었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역시 말이 승전국일 뿐 만신창이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처럼 나치의 압제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하는 환희의 물결도, 해방군을 환영하는 인파도, 폐허가 된 적의 수도에 승리의 깃발을 꽂는 장면도 없었다.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그저 어느 쪽이 먼저 나가떨어졌는가일 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말 그대로 한 세대를 파멸시켰다. 가장 큰 피해자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가장 인생이 창창했던 젊은이들이었다. 20여년 뒤 히틀러가 새로운 전쟁을 위협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인들이 1914년처럼 강경하게 맞서는 대신 지레 꼬리부터 내렸던 것도 그만큼 제1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가 악몽마냥 뼛속까지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해문집에서 나온 제1차 세계대전 그래픽노블인 <그것은 참호전이었다>의 한 장면. 유럽인들이 기억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이미지란 하나같이 인간도살장과 다를 바 없는 무자비한 학살과 지옥의 참호전이다. 이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 아닐까 싶다.

전쟁이 끝나는 순간, 도대체 이 지독한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제1차 세계대전이 제2차 세계대전이나 태평양전쟁과 다른 점은 누구도 처음부터 원했거나 미리 계획한 전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실로 어이없을 만큼 그야말로 어쩌다가 시작된 전쟁이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세르비아 극우주의자의 테러에 의해 암살당했을 때만 해도 이로 인해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어 장장 4년 동안 지속되리라 예상했던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었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어느 쪽도 유럽 정치의 중심에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몹시 신경질적이고 제멋대로인 것으로 유명했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대중의 동정심을 얻을 만큼 인기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이 사건은 25년 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을 위해 조작된 글라이비츠 사건처럼 자작극도 아니었고, 진주만 기습이나 911테러처럼 "그 일을 기억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온 국민의 공분을 자아낼 일도 아니었다. 정작 한달 뒤 유럽 대륙에서 제일 먼저 총성이 울린 쪽은 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수백km 떨어진 벨기에-독일 국경이었다.

문제는 유럽 특유의 복잡한 외교 관계와 보불전쟁 이래 프랑스와 독일 간의 증오심, 무엇보다도 지도자부터부터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마치 몽유병자마냥 전쟁에 취하여 전쟁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어느 한 사람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산업혁명과 기술의 발전으로 전쟁 무기가 나폴레옹 전쟁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파괴적으로 바뀌었음에도 무책임한 정치인들은 그저 여기서 물러나면 자신들의 위신이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을 선동했다. 이들은 한 세기 전 워털루 전투처럼 한바탕 크게 붙고는 길어야 서너달이면 끝날 것으로 태평하게 여겼다. 바로 반 세기 전 대서양 저편에서 벌어졌던 미국 남북전쟁이 4년 동안 이어졌고 100만명 가까이 죽었으며 수백만명이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은 유럽인들에게 아무런 교훈이 되지 못했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참호전을 연상시키는 광경이지만 남북전쟁 말기인 1864년 6월부터 1865년 3월까지 벌어진 피터스버그 포위전(Siege of Petersburg). 남북전쟁하면 영화 <게티즈버그>나 <영광의 깃발>에 나오는 것처럼 나폴레옹 시절의 구태의연한 라인배틀을 떠올리게 되지만 실제로는 남북전쟁 후반부에 오면 참호전이 중심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예행연습인 셈이었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위협하자 세르비아의 큰 형님 노릇을 하던 러시아가 끼어들었고 독일이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었으며 독일의 라이벌인 프랑스가 들고 일어났다. 독일이 프랑스 침공의 길을 빌린다는 명목으로 벨기에로 진격하자 벨기에의 보호자인 영국 또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여기에 영국 해군대신이었던 처칠이 영국에서 건조 중이던 오스만 제국의 전함을 멋대로 몰수하면서 분노한 오스만 제국이 독일 편에 섰다. 항상 으르렁대던 발칸 제국들 역시 편을 나누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작은 불씨는 한달 사이 것잡을 수 없이 유럽 대륙 전체로 들불마냥 번져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평민사 출판사에서 모처럼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책이 나왔다. 저자는 바바라 터크먼 여사.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시오노 나나미급으로 유명한 여류 역사가이다.(참고로 이미 죽었다.) 그것도 여자들이 대개는 어려워 하거나 따분하게 여기는 전쟁사 쪽으로 말이다. "여자가 뭔 전쟁이야?"라면서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젠더간의 역할과 경계가 분명한 우리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 엄밀히 말하면 권위를 갖춘 역사 연구가라기보다 작가에 가깝지만 말이다. 그녀는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특파원으로 종군하면서 여러 권의 역사서를 썼고 퓰리처상을 두번이나 수상했다. 그 중 하나가 1962년에 쓴 <8월의 포성(The Guns of August)>이다. 국내에서는 2008년에 이미 나왔더라. 그렇다고 완역판이나 개정판이 아니라 같은 출판사, 같은 역자에 표지까지 똑같은 것을 보면 한번 절판되었던 것을 재출간한 모양. 제1차 세계대전이 국내에서 그다지 인기 없는 주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신기할 따름. 독자들의 아우성이 있었나.

1971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외아들이자 군사 역사가인 존 아이젠하워(오른쪽)와 <제3제국의 흥망>의 저자 윌리엄 샤이러 영감님(왼쪽)과 대화 중인 바바라 터크먼 여사(가운데). 뭔 얘기를 하는거지?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 책과함께>가 1912년 발칸 전쟁을 시작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복잡했던 유럽 정치의 상황을 파헤쳐서 전쟁의 기원을 찾고, A. J. P. 테일러의 <기차 시간표 전쟁, 페이퍼 로드>가 유럽의 군주들이 꽉 짜여진 철도 운행의 스케줄 때문에 원하건 원치 않건 전쟁에 끌려들어 가야 했음을 보여주었다면, 터크먼 여사의 <8월의 포성>은 원래 단기전으로 끝났을 싸움이 어째서 4년에 걸쳐서 그토록 지독한 학살극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 전쟁의 첫 한달 동안 치열했던 현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1910년 5월 아침,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 참석한 아홉명의 국왕들로 구성된 기마행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 p.464

본문은 1910년 5월 6일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이자 조지 5세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서 시작한다. 그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영국 왕실의 오랜 원칙을 준수하면서도 외교에 매우 능숙하여 영국을 고립된 섬나라에서 유럽 외교 무대의 중심에 놓은 인물이기도 했다. 특히 어린 시절 나폴레옹 3세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나폴레옹 3세의 몰락 이후 아프리카 식민지를 놓고 한때 무력 충돌까지 갈 뻔했던 프랑스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1904년에는 영불 조약의 체결을 주도했다. 만약 그가 아니었으면 두번의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프랑스의 편에 서서 독일과 싸우는 모습은 없었을지도. 그러나 에드워드 7세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와도 그런대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도 영국 육군 원수의 복장을 입고 참석하여 애도를 표했을 정도. 불과 4년 뒤에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서 총부리를 겨누게 되리라고는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듯.

에드워드 7세 장례식에 참석한 독일 카이저 빌헬름 2세(왼쪽 앞쪽) 빌헬름 2세의 외할머니가 빅토리아 여왕이었으니 에드워드 7세와는 외삼촌과 외조카의 관계인셈. 책봉 외에 거의 왕래가 없던 동아시아와는 달리, 유럽에서는 군주들끼리 결혼하다보니 서로 친척지간에 특유의 유전병까지. 그래봐야 수 틀리면 남보다 못할 만큼 으르렁대었지만. "원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법이라고."

보불전쟁 이후 프랑스에서는 '벨 에포크(Belle Époque, 좋았던 시절)'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약 40여년 동안 유럽은 평화를 누렸다. 대신에 그 힘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돌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에드워드 7세가 죽은 뒤 더 이상 유럽에서 평화의 중재자 노릇을 할 사람은 없었다. 프랑스와 러시아가 이국 협상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이국 동맹을 맺고 서로를 견제하면서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점점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은 것잡을 수 없이 전쟁을 향해 내달리고 수차례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결국 독일이 러시아의 동원령을 핑계로 8월 1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8월 4일에는 독일군이 슐리펜 계획에 따라 벨기에를 전면 침공했고 프랑스와 영국 또한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전쟁의 불길은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확대된다. 이 책은 사라예보 사건을 시작으로 촉발된 7월 위기와 전면전으로 이어지기까지의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4국의 상황, 그리고 8월 한달 동안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투를 600여 페이지에 걸쳐서 다룬다. 독일군의 벨기에 침공, 제17계획에 따른 프랑스군의 공세와 패배, 국경전투, 탄넨베르크 전투, 마른 전투까지 타크먼 여사는 특유의 뛰어난 필력으로 마치 한편의 다큐멘타리나 대하 드라마처럼 꼼꼼하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특히, 탄넨베르크 전투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엉뚱하게 알려진 렌넨캄프와 삼소노프의 주먹 대결이 독일군 작전참모였던 막스 호프만의 근거없는 낭설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어쨌든 두 사람이 제대로 협조하지 못하여 삼소노프가 전멸한 것은 사실. 그 이유는 두 사람의 불화가 아니라 러시아 북서전선군 총사령관 질린스키의 무능함 때문.

호프만은 자신이 독일군 참관단원이었던 러일전쟁에서 시작된 렌넨캄프와 삼소노프 간의 개인적인 불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략) 삼소노프는 묵덴 정거장의 플랫폼에서 싸움을 벌여 렌넨캄프를 때려 눕혔다고 말했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듯이 렌넨캄프는 분명히 삼소노프를 돕기 위해 서두르지 않았을 것이다. 호프만이 자신의 얘기를 정말로 믿었던 것인지 그저 믿는 척 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는 항상 일화, 소문 따위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 p.464

놀랍게도 호프만은 OHL의 작전과장인 타펜 대령으로부터 3개 군단과 1개 기병 사단 규모의 지원 병력을 보내주겠다는 제안을 들었다. 서부전선으로부터 새로운 병력이라니! 슐리펜의 계획은 마지막 한명까지도 우익을 강화하는데 쓰도록 되어 있었다. 아연실색한 루덴도르프는 타펜에게 동부전선에서 병력 증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이미 시작된 전투에 맞추어 오기는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말했다. 타펜은 그들을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써도 좋다고 말했다. 타펜이 지원병력을 보내겠다고 언급하게 된 이유는 프랑스 국경에서 거둔 '위대한 승리'였다. OHL 내부에서는 이미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믿음이 자리잡았다. - p.466

독일군이 퇴각 중이라고 '추정한' 질린스키는 그들이 삼소노프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며 원래의 계획대로 삼소노프의 우익과 서둘러 접선하도록 렌넨캄프를 독려하지도 않았다. 두 개의 러시아군은 서로 연결되지 않았고 서로를 향해 움직이지도 않았으므로 '합동'이라는 단어를 적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 - P.472

루덴도르프의 승리에는 여러 사람이 기여했는데, 비록 그 이유는 틀렸지만 시종일관 정확하게 렌넨캄프가 추격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제8군을 이동시켜 삼소노프와 맞서기 위한 계획을 준비한 호프만, (중략), 그 무엇보다도 기여한 것은 독일군의 계획 입안 과정에서 한번도 고려된 적이 없는 러시아군의 무전이었다. 호프만도 감청이야말로 탄넨베르크 승리의 진정한 요인임을 인정했다. - P.487

뒤이어 벌어진 마수리안 호수 전투에서 렌넨캄프 장군은 동프로시아에서 쫓겨났다. "겁을 집어먹고 군대를 버린 채 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달아남으로서" 자신의 명성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으며, 그 자신과 함께 질린스키까지 불명예스럽게 해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공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질린스키는 렌넨캄프가 공포에 질려 황급히 도망쳤다고 비난했다. 대공은 진노했다. 그는 근본적인 잘못이 질린스키가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 p.488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라는 책에서 세계대전은 흔히 생각하듯 패권국가가 도전국가를 견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팽창의 한계에 직면한 도전국가가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전쟁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도 그래서 일어났다는 것. 전적으로 일리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전쟁의 원인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히틀러의 야욕이 불러온 제2차 세계대전은 그렇다쳐도, 제1차 세계대전은 죄다 독일 탓이라기에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역시 독일만큼이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전쟁의 발발은 몰라도 전쟁이 장기화된 것은 독일이 자초했다는 점이다. 전쟁 초반 이른바 '벨기에의 강간(Rape of Belgium)'이라고 불리는 독일군의 만행은 유럽 사회의 공분을 불러오고 문명국으로서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렸다. 학살과 범죄는 결코 나치만의 전매 특허가 아니었다. 게다가 국경 전투와 탄넨베르크 전투 등 8월의 승리는 독일을 완전히 기고만장하게 만들었다. 독일이 내건 화평 조건은 보불전쟁과 비할 바가 아니었고 연합국들을 격분시키면서 대화의 통로를 스스로 막아버렸다. 이들이 자신들이 패전하자 베르사유 조약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떠들었지만 그야말로 뻔뻔한 소리였다.

8월 말이 되자 연합국 국민들은 자신들의 궤멸시켜야만 하는 적, 붕괴시켜야만 하는 정권, 끝장을 봐야만 하는 전쟁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9월 4일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 정부는 "현재 진행 중인 전쟁 중에는 단독 강화를 맺지 않겠다."라고 약속하는 런던조약에 서명했다. - p.509

독일은 벨기에 전체 국토와 덩커크로부터 볼로뉴와 칼레를 포함하는 프랑스 해안 지역에 대해 지배권을 가질 예정이었다. 또한 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식민지도 차지할 계획이었다. 보상에 관해 패전국들은 직접 전비로 최소한 100억 마르크를 지불하고 그 이외에 참전 군인 기금, 공공 주택 및 장군들과 정치인들에 대한 선물에 필요한 비용을 내야 하며, 독일의 모든 국가 채무를 면제함으로서 독일 국민들은 향후 수년 동안 세금을 안내도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 해 8월 승리에 도취된 상태에서 독일이 설정한 전쟁 목표는 너무나 거창하여 실현 가능한 타협안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 p.510

카이저에게는 불행히도 독일군의 진격은 9월 12일 파리를 코앞에 두고 마른 전투에서 좌절되었다. 파멸 직전의 프랑스군이 '마른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독일군이 많은 실수를 저지르면서 다 이긴 싸움에 스스로 재를 뿌린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프랑스 지도부가 1870년이나 1940년과 달리 혼신을 불태울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총리이자 전시 내각을 지휘하여 연합국을 승리로 이끌게 되는 조르주 클래망소는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폴 레노와 달리 '호랑이'라고 불릴 만큼 단호한 인물이었고 파리 방위를 맡은 조제프 갈리에니는 프랑스 최고의 장군 중 한 사람이었다. 제9군의 지휘를 맡아 독일군을 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한 포슈 장군은 프랑스군의 꺾이지 않는 전의를 보여주었고 나중에 연합군 총사령관이 된다. 무엇보다도 이 순간 '20세기의 잔다르크'는 조프르 원수였다. 그는 개전 초반 로렌과 아르덴에서 무리한 공세로 한때 프랑스군을 궁지로 내몰기도 했지만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전열을 정비한 뒤 반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만약 조프르가 가믈랭같은 멍청이 똥별이었다면 제1차 세계대전은 한달 만에 끝났을 것이다.

"프랑스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이었을 이 시기에 조프르는 존 프렌치 경처럼 겁에 질리거나 몰트케처럼 주저하거나 헤이그 또는 루덴도르프처럼 일시적으로 무기력해지거나 프리트비치처럼 비관론에 굴복하지 않았다. 만일 그의 이러한 침착함이 상상력의 부족에서 기인했다면, 이는 프랑스에게 큰 행운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위기감과 책임감을 느끼게 되면 의기소침해지는 법인데, 오히려 "판단력을 강화시켰다면 틀림없이 범상치 않은 위대한 정신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클라우제비치는 기술했다. - p.596

약간 가독성이 떨어지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전반적인 번역은 그런대로 무난한 듯. 하지만 중간중간 군사 용어의 번역에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 흠이랄까. 무슨 이유인지 '중포(heavy artillery)'를 '대형대포'라고 번역한 것이나, 특히 프랑스군의 주력 야포였던 75mm 야전포(French 75mm field gun)를 그냥 '75'라고 적어 놓았다. 역자가 원문의 'French 75'를 직역한 모양인데 전쟁사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숫자만 적어 놓았으니 문맥상 이게 뭔 소리인지 알 수 없어 헤깔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이 야포는 현대 야포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포병사에서는 한 획을 그은 물건이기도 하다. M3 리 전차나 M4 셔먼 전차 초기형의 주포 또한 원래는 이 야포를 개량한 것. 그래서 보병 잡는데에는 쓸 만 한데 정작 적 전차 잡는데 화력이 딸렸던 것도 이 때문. 터크먼 여사가 약칭인 'French 75'라고 한 것은 같은 이름의 칵테일조차 있을 만큼 그 동네에서야 워낙 유명한 대포이기 때문이지만 국내에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역자도 그걸 알고 그렇게 쓴 것은 아닐 듯. 게다가 본문 내내 이렇게 나온다는 점이다.

프랑스 M1897 75mm 속사포. 세계 최초로 유압식 주퇴복좌기를 사용하여 반동을 줄이고 발사 속도를 높였다. 또한 기동성이 뛰어나서 보병과 함께 다니면서 신속한 화력 지원에 유용했다.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초반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이후의 참호전에서는 화력 부족을 드러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대전차포와 대공포로 사용되기도.

전쟁 초반 독일이 영국 해군에 쫓겨서 콘스탄티노플로 망명한 몰트케급 순양전함인 괴벤(Goeben)을 '궤벤'으로 번역한 것도 이상하다. 독일어 표준발음에서 oe(Ö) 발음은 '외'라고 읽지 않음? 실수로 놓쳤다기에는 한 챕터가 통째로 그리 적혀 있으니. 심지어 p.517에는 그나이제나우(Gneisenau)를 '그나이센노'라고 적어놓기도. p.434와 p.450의 '4와 2분의 1개 군단(army of four and a half corps)'라는 표현도 어색한 느낌. 처음에는 도대체 이게 뭔 소리인가 생각했음. 그냥 '군단 네개 반'이라던가 뒤에 나오는 것처럼 '4.5개 군단'이라는 쪽이 낫지 않았을지. 사실 이런 건 역자보다도 편집자가 꼼꼼이 잡아야 할 일이기도 하다.

바바라 터크먼 여사가 이 책을 내자말자 미국 사회가 떠들썩할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다음해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퓰리처 상을 수상하여 그녀를 하루아침에 유명인사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여기에는 때마침 벌어진 사건 덕분이기도 했다. 바로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사건이다. 쿠바 미사일 사건은 냉전 시절을 통틀어 인류가 핵전쟁의 위기에 가장 가까이 갔던 순간이기도 하다. 소련이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의 요청을 받아들여 쿠바에 핵미사일 배치를 강행하면서 촉발된 이 사건은 원래 흐루쇼프가 깊은 고민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미국도 소련의 턱밑인 터키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고 있는데 소련이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케네디는 소련의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벼랑 끝 전술로 맞섰다. 서로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양측은 서로의 진정한 의중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의 선입견과 편견만으로 판단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흐루쇼프가 먼저 물러섰고 그는 인류를 구했지만 자신의 권좌를 잃어야 했다. 또한 케네디는 이 사건을 통해 의사결정 과정에서 호전적인 각료와 장군들의 말에만 귀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배웠다. 그는 터크먼 여사의 <8월의 포성>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단순히 독일의 야심 때문이 아니라 쿠바 미사일 사건과 마찬가지였음을 깨달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필독서로 추천했다고 한다.


원래 죽음의 문턱에 가 본 사람만이 죽음이라는 말을 함부로 들먹이지 않는 것처럼 전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언제나 전쟁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우리 역시 중요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대화는 어렵고 선동은 쉽다. 하지만 전쟁은 설령 이기더라도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증오만을 남길 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이 한반도에서 재현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몽유병자>와 더불어 이 책을 읽기를 적극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