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가 온다
백가흠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 이런 장면이 나온다. 전경이 속한 밴드가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게 실패로 돌아간 날, 밴드 생활을 하는 전경을 처음부터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전경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 대문을 두드리는 전경의 뺨을 때린다. 음대 출신의 딸이 밴드 생활을 하는 것에 늘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는 아버지에게 전경은 말한다. 이것도 음악고 저것도 음악이라고. 고상하게 차려입고 하는 것만이 음악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있는 것도 음악이라고. 주인공이 전경이 아니라 백가흠 작가였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이것도 사랑이고, 저것도 사랑이라고. 고상하게 보여주는 사랑만이 사랑이 아니라 자신이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랑이라고. 소쉬르(F. de Saussure)는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을 말한다. 그러나 자의적인 관계가 해체될 때 “의미하는 것(기표)과 의미되는 것(기의)”의 구조 속에서 기의는 수없이 미끄러진다. 이것도 사랑이고 저것도 사랑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랑에 대한 기의가 미끄러지지 않는 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러나 친절하게도 『귀뚜라미가 온다』(인용문구는 쪽수로 표시) 백가흠의 사랑 방정식에는 공통점이 있다. 요컨대 그가 미끄러낸 기의는 ‘어머니 혹은 아버지’로 귀결되는 사랑이라는 거다. 어머니 혹은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랑 행위에 대한 설명을 할 때 프로이트(S. Freud)만큼 궁합이 맞는 사람이 또 없다. 대형마트에서 외쳐대는 '대박 할인' 혹은 '파격 세일'이라는 구호만큼 흔히 볼 수 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내게 당신은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와 같았다. 당신은 내 옷을 벗기고 내 성기를 애무했다. (...) 당신의 젖가슴이 손에 닿았다. 나는 어느새 젖꽃판에 돋아 있는 작은 돌기들을 손끝으로 훑고 있었다. 엄마의 자궁 속이 기억나는 것 같았다.”(「광어」, p.19)
 
 「광어」의 화자가 사랑하는 미스 정은 화자의 어머니를 상기시킨다. (모성에 대한 전형적인 고착 단계를 보여주는 화자는 비단 「광어」만이 아니다. 「귀뚜라미가 온다」, 「밤의 조건」, 「구두」 .. 모두 어머니 혹은 노모가 등장한다.) 「광어」의 화자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미스 정의 빚을 갚아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미스 정은 “어머니가 나를 버리”(p. 29)듯 가 버린다. 미스 정이 빠져나간 문을 보며 화자는 얼굴 없는 어머니가 불쑥 들어올 것 같다고 말한다. 그에게 부재한 건 미스 정이 아니라 어머니라는 것. 이렇듯 「광어」를 시작으로, 화자의 “퇴행적 혹은 유아기적” 고착 단계의 사랑은 문학평론가 김형중 씨의 지적처럼 “피학적 헌신, 가학적 폭행, 강간, 신성모독”의 모습으로 각 단편마다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메타적으로 접근해 보자.『귀뚜라미가 온다』의 화자들은 왜 “퇴행적 혹은 유아기적” 고착 단계를 보여주는 걸까? 심리학적 접근이 아니라 왜 백가흠 작가가 왜 그러한 사랑을 그리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은희경 작가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가 연결된다. 인간의 결핍, 부재를 은유한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과 다른 양상(사드-마조히즘적)으로 결핍된 존재를 표현한 『귀뚜라미가 온다』. 현대인들은 언제나 풍요의 반대급부에 시달린다.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삶. 어제보다 나은 내일, 과거보다 풍요로운 미래를 위해 혹은 빈곤해 지지 않기 위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하는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던져진 존재.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 인간은 결코 욕망을 채울 수 없다. 끊임없이 생산되며 욕망을 부추기는 체제 속에서 인간은 욕망의 기아에 허덕여야 한다. 여기서 백가흠 작가는 퇴행의 길을 택한 것이다. 퇴고적 인간의 날 것 그대로의 욕망으로. 현대인들의 욕망의 끝은 "멀쩡해 보이는 배들도 뻘에 처박혀 있는" 배의 무덤과 같다.( 「배(船)의 무덤」, p. 172)  "목 없고, 가죽 벗겨진 바다사자가 바다에 버려졌듯이"(p. 175), "우리 왔던 길을 잃어버린 것"(p. 193)과 같이 백가흠 작가는 은희경 식으로 표현하면 좌표를 잃어버린 화자들을 등장시켰고, 그들은 폐가로 향하는 길에 믿음이 있고 신앙이(p. 256)  있다고 믿으며,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 

 이런 작가들의 다음 작품은 기다려질 수밖에 없다. 『조대리의 트렁크』역시 백가흠만의 무수한 기의를 남겨줄 것 같다.

 

* 사족: 이 리뷰 역시 몇 년 전에 쓴 건데, 수정하지 않으련다. 지금은 귀찮아서 부러 찾지 않은 꺽쇠들(『』「」)과 각 단편마다 조목조목 따지며 쓴, 몇 안 되는 부지런한 리뷰인 만큼, 원본대로 보존해주고 싶다! 물론 토를 달자면, 지금은 백가흠 작가의 멋진 이 소설집의 리뷰를 이렇게 쓰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내용 분석에 치우친 감상이 아쉽다는 거다. 마치 평론가 행세라도 할 것 마냥, 소설을 두고 이런 분석이나 하고 있다니!  이러한 리뷰 쓰기 방식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굳이 벗어나려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벤야민은 카프카에 관한 글을 쓸 때, 카프가가 되고 보들레르에 관한 글을 쓸 때는 보들레르가 된다. 니체 역시 필요한 건, "가면" 이라고 말한다. 여러 개의 가면, 창조적 모방이 되는 인용,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없다. 그게 리뷰든 뭐든 글쓰기는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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