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여행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
윤고은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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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惡)'은 '분업(分業)'으로 평범해진다
- [밤의 여행자들], 윤고은, <민음사>, 2013.


1.

'회사'라는 곳이 내 예상과 달리 '민주적'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마지막 학기를 종강한 1999년 12월 둘째주 목요일에 단편소설 한 편을 21세기 첫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교문을 나선 나는, 그 주 토요일에 대기업 손해보험회사의 신입사원 연수에 들어갔다.

21세기 첫 1월에 첫 발령을 받았을 때, 팀장인 과장급은 30대 후반이었고, 부서장은 40대 초반이었는데, 27세 신입사원이었던 내 눈에 비친 '회사'의 첫인상이 믿을 수 없게도 애초 생각했던 것과 달리 '민주적'이었다.

소설을 쓰고 싶던 이십대의 내게, 
세상은 불평등하고 그래서 부조리했으며,
더군다나 군사독재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당시 우리 사회는 학교든, 가정이든, 어딜 가든 다 모두 다 '군대'였다. 

그런데, 처음 만난 회사는 내가 짐작했던 것에 비해 의외로 '민.주.적'으로 보였단 거다.

물론, 그 '환상'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2.

아마도, 군대문화에 찌든 사회라는 곳을 지레 짐작하고 심각하게 예단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군대 고참이나 상관 같을 줄 알았던 회사 선배들은 생각보다 선했고 내게 잘 해주었다. '군대는 사회의 축소판이고, 사회는 군대의 연장이다'라고 군생활 할 때 숱하게 들었기 때문에 그 반작용으로 회사가 그리 보였을 수도 있었겠다.

군대와 회사의 차이점이 있다면, 군대는 되도록 빨리 뜨고 싶은 시한부 생활이었던 반면에 회사는 오래 버티고 싶었다는 거였다. 그러니 군대는 길어야 2년 볼 거 서로 막 대하는 거였고 회사는 대부분 평생 붙어있고 싶으니 서로 대놓고 그럴 수 없었을 거다. 물론 군대가 회사인 직업군인은 그런 경계가 없겠지만, 의외로 '민주적'으로 보이던 회사는 대놓고 까댈 수 없는 대신 주로 뒤에서 '작업'들을 해댔다.  평판이 그렇게 빨리 회자되었고 인사고과가 그렇게 이루어졌다. 회사마다 있었을 '밤의 황제 또는 대통령'들은 그렇게 양산되었다. 술 좋아하고 사람들 만나는 거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럼에도 윗 사람 비위를 맞출 줄 몰랐기에 술도 먹고 먹은 술만큼 욕도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니저가 작가와 요나만 입을 다물면 이 사건에 대해 떠들 사람은 없다고 자신하는 이유는 나머지 사람들은 '분업'화된 시스템 때문에 아주 부분적으로만 이 일과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 [밤의 여행자들], <5. 마네킹의 섬>, 윤고은, 2013.


윤고은의 소설 [밤의 여행자들](2013)은 '정글'이라는 여행사에서 한 때 잘 나가던 여행 프로그래머 고요나 과장이 회사에서 밀려나고 본인도 모르게 사라지는 잔혹한 현실을 '재난 여행'이라는 소재를 통해 그려내는 일종의 우화다.

베트남 '무이'라는 곳은 땅이 크게 꺼져내리는 싱크홀로 많은 사람들이 재난을 당한 곳이라며 여행사 '정글'의 인기 여행지 중 하나였지만, 이제 재난이란 게 지구상 곳곳에 만연하다보니 식상해지고 있었다.
찾아보니 베트남에 '무이 네'라는 섬은 있는 거 같은데, 소설 속 '무이'라고만 한 걸 보면 우화소설답게 '어디에도 없으나 어디에도 있는' 가상의 공간을 설정한 듯 하다.

여기서도 역시,
내 소설의 주된 세계관인 '부재(不在)'가 등장한다.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덧 사라지고,
없는 것 같은데 어디에서나 도사리고 있는.
만연한 '부재'.

'어디에도 없으되, 어디에나 있는' 그 재난의 공간은 스스로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적 재난 상품을 연출하는데 결국 그런 인위적 작업 과정 자체가 진짜 재난의 원인이 된다.

결말은 같다.
재난을 조작하고 창조하던 '폴'이라는 거대한 배후는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어디에도 존재해 왔으며, 인재였든 자연재해였든 조금이라도 연루된 자들 모두를 삼켜버린다. 이 재난은 생계를 위해 재난 조작에 참여한 '무이' 섬의 원주민들은 물론, 회사에서 퇴물이 되어 어느덧 그곳으로 출장을 갔다가 어이없게 되돌아갈 길을 잃은 여행사의 설계자인 고요나 과장과 재난 시나리오 작가 및 재난 기획의 배후인 '폴'의 대리인과 같은 현지 매니저까지도 모두 파멸시키고 만다. 

그들 모두는 '무지'했다.
재난 조작의 거대한 프로젝트 중 극히 일부분만 담당하는 '분업'을 통해 죄의식을 분담했고 아마도 '나만 그런가, 뭐'라는 생각으로 무심하게 조작된 재난에 가담했다. 원주민들은 생계를 앞세워 사기를 합리화했고, 여행사 직원 고요나는 청춘을 바친 회사에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심지어는 그 새로운 재난의 드라마를 썼던 작가 조차도 자기만의 이야기에만 몰두했지 현실이 되고 만 재난이 시나리오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렇게,
'악(惡)'은 '분업(分業)'으로 평범해진다.


3.

이십대에 대학에서 들었던 노래 중에 '새세대 청춘송가'란 게 있었다. 

'내가 철들어간다는 것이 내 한 몸의 평안을 위해 세상에 적당히 길들어지는 거라면 내 결코 철들지 않겠다'고 담대하게 선언하는 청년의 노래였다. 이 노래를 부르고 다니던 자주통일운동 청춘들과 생각이 다르다고 나 스스로 생각했더랬으나 사회에 나와 한참을 지나서까지 노래의 가사가 가끔 생각나곤 했다.

어느덧 그 노랫말을 더 이상 진지함이 아닌 희극적으로 되뇌이는 나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나는 '철들어' 있었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사회에서 내 자리를 찾고자 기를 쓰면서 어느덧 나는 체제에 철저히 종속되었다. 2000년대에 진보정당과 2010년대에 노동조합도 기웃거렸으나 달라진 건 없었다. 어디에 있든, 나는 여전히 체제의 노예였다.

2012년이었던가.
내가 노동조합 상무집행간부를 맡았던 첫 해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함께 살자!"며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천막농성을 할 때, 박근혜 정권이 그 자리에 느닷없이 화단을 설치한다고 노동자들을 내몬적이 있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연대투쟁을 갔던 나는 거대한 배후인 박근혜 정권보다도,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해고 노동자들을 밀쳐대며 열심히 화단 만들 땅에 삽질을 해대던 서울 중구청 공무원들이 더 싫었다. 그들 힘없는 공무원들의 머릿속에는 집에서 아빠만 바라보는 가족만 있었겠지만 그때 그곳에서 그 가장들의 생계형 삽질은 분명 '악'을 행하고 있었다.

뜬금없지만, 만약 내가 일제강점기를 살았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싶었다.
독립운동을 했을까, 친일을 했을까.

아마도 이광수나 서정주 같은 친일 지식인들의 변명처럼 진짜로 해방이 될지 몰랐을 테니, 사회에서 내 자리를 성실하게 지키며 '순리'에 따라 '친일'을 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하면 지금 태어났음에 안도의 한숨을 고르게 된다. 

'분업'은 '무지'를 낳고, '무지'로 인해 나도 모르게 '악'을 행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가 시키는 대로만 성실하게 이행했을 뿐"이라고 줄곧 자기 스스로를 변호했다던 독일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은 '악마'와 같은 유대인 학살 기획자였지만, '분업'으로 '무지'했고, 그만큼 '평범'했다고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기록했다고 한다.
이른바, '악의 평범성'이다.

'악(惡)'은 '분업(分業)'으로 평범해진다는 생각을 노래 가사처럼 되새기며, 다음 책으로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이제 비로소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부디,
그 속에 내가 없기를.

***

1. [밤의 여행자들], 윤고은, <민음사>, 2013.
2. [친일문학론](1966), 임종국, <민족문제연구소>,2013.
3.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1963), 한나 아렌트,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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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전우치전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7
김현양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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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과 전우치의 '타협'
- [홍길동전/전우치전], 19세기 경판본.


1.

이십대와 삼십대까지 서양철학사와 현대소설만 알던 내가 사십줄에 들어 동양으로 돌아와 예전부터 존숭하던 여말선초의 혁명가 삼봉 정도전을 따라 '성리학'의 급진성과 '유물론적' 성격을 추출하면서 따라가던 어느 날, [주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려웠지만 복희씨의 8괘와 주문왕의 64괘, 공자와 왕필, 그리고 주희의 해석에 관한 각종 해설서와 대중서들을 통해 나름대로 산가지 점을 쳐보기도 했다. 점 치기 전 정좌한 후 실은 산가지가 아닌 이쑤시개 55개이긴 했지만, "떳떳함이 있는 크나큰 시초를 빌립니다(가이태서유상:假爾泰筮有常)"라고 두 번 외칠 때 자연스레 머릿속에는 어릴적 읽었던 [홍길동전]의 삽화가 떠올랐더랬다.

홍길동이 자기를 죽이려던 자객 특재가 들이닥치기 전 홀로 앉아 주역점을 치던, 지금은 내 머릿속 이미지로만 남은 그 삽화였다.


2.

"한편, 길동은 그 원통한 일을 생각하면 잠시도 머물지 못할 일이지만, 상공(아버지)의 엄명이 중하므로 어찌할 길이 없어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날 밤 촛불을 밝히고 [주역]을 보며 깊이 생각하다가, 문득 들으니 까마귀가 세 번 울고 가는 것이었다. 길동이 괴이하게 여겨 혼자 말하기를, 
'이 짐승은 본디 밤을 꺼리거늘, 지금 울고 가니 심히 불길하도다' 
하고, 잠깐 '팔괘'를 벌여 점을 쳐보고는 크게 놀라 책상을 물리고 둔갑법을 행하여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 [홍길동전], <길동을 죽여야 하옵니다>, 19세기 경판본.

조선 세종 시절에 이조판서 홍아무개의 서얼자로 태어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을 품고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출사하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던 홍길동은 이미 소년시절에 [주역]에 통달하였단다. 

청룡이 천둥벼락과 함께 달려드는 태몽을 꾼 홍판서가 정실부인 유씨를 곧바로 안으려는데 양반가 부인 유씨가 체통을 지키라며 내쳤을 때, 하필 나타난 여종 춘섬을 건드려 나온 자식이 홍길동이었다. 청룡의 기운을 받고 나온 길동은 여덟살에 문무를 겸비하였으나 얼자의 운명에 속박되어 서러워했고 홍판서 또한 안타까워 했지만 세상의 질서는 한 사람만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닐 터, '호부호형'을 못하는 길동을 신원해줄 길이 없어 무시로 길동을 꾸짖기만 한다. 
또 다른 첩 초란이 무녀, 자객과 짜고 재주 많은 길동을 암살하려 할 제, 소년 홍길동이 부리는 둔갑술은 [주역]과 같은 '인간'적인 도술이었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길동의 도술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동양적 유불선이 융합된 경학과 도학을 바탕으로 연마한 다분히 '인문학'적인 도술인 것이다.


"... 길동이 이때를 틈타 공중을 향해 진언(眞言)을 외우니, 오방신장(五方神將)이 대군을 거느리고 일제히 에워쌌다. 동쪽은 청제(靑帝) 장군이요, 남쪽은 적제(赤帝) 장군이요, 서쪽은 백제(白帝) 장군이요, 북쪽은 흑제(黑帝) 장군이요, 가운데는 길동이 황금(黄金) 투구에 큰 칼을 들고 거침없이 쳐들어가, 칼 한 번 제대로 부딪치기도 전에 (율도국 철봉태수) 현충이 탄 말을 찔러 엎어지게 하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 [홍길동전], <율도국의 왕이 되다>, 19세기 경판본.

'호부호형'을 하지 못하는 한을 잊을만 하면 끊임없이 소환하며 세상에 제 이름 하나 알리고자 조선왕조 체제에 반란을 일으키던 길동이 결국 세속적 꿈이있던 병조판서 직함을 얻은 후 임금에게 사죄하고 물러났을 때, 길동의 꿈은 또 다른 왕국의 임금으로 이미 높아진 후였다.

조선체제를 속이고 희롱하던 길동은 구름을 타고 공중에 오르며 둔갑술과 변신술은 물론 분신술에 능하다. 율도국을 정벌할 때도 '오방신장'을 부리며 온갖 도술적 반칙으로 현실의 명장을 거꾸러뜨리는데, 유불선의 현실적 도학을 배경으로 한다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도술의 달인이다.


"... 이렇게 하여 후세에 그 재주와 충효를 알게 함이라. 자손들이 대를 이어 태평성대를 누리더라."
- [홍길동전], <홍길동, 세상을 뜨다>, 19세기 경판본.

그렇다 하나, 결국 홍길동 전기의 대단원은 '충효'와 같은 조선왕조 지배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활빈당 같은 도적단의 수괴로 반란을 일으킨 이유도 세상에 자신의 명성과 재주를 알리기 위함이었고, 병조판서라는 현실적 요구사항이 분명했으며, 또 다른 유교 이상적 왕국 율도국왕이 된 후에도 충효를 따르며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명확한 삶의 경로가 있었다.

아마도, '인간'적 도술의 필연적 결말이리라.


"(도적) 염준이 크게 놀라 하늘을 우러러보니 한 때구름 속에서 번개가 일어나는데, 이는 번개가 아니라 운치(전우치)의 칼에서 나는 빛이었다. 염준이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진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앞에서 운치가 칼을 들고 길을 막았다. 뒤에서도 운치가 따르며, 좌우 또한 운치가 에워싸며 들어오고, 머리 위에서는 구름을 타고 칼춤을 추며 염준의 머리를 치려 하니, 염준이 정신이 어지러워 말 아래로 떨어졌다. 이에 운치가 구름에서 내려와 가짜 운치로 하여금 군사들에게 호령하여 염준을 결박해 본진으로 보내도록 했다. 이어 운치는 말을 달려 적진으로 들이치니, 적진의 장수와 병졸들이 염준이 사로잡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손을 묶어 항복했다."
- [전우치전], <염준과의 대결>, 19세기 경판본.

한편, 아마도 [홍길동전]에 영향을 받아 창작되고 구전되었을 [전우치전]은 어쩌면 최초에는 현실적인 [홍길동전]을 비꼬는 일종의 '반(反)홍길동전'이 아니었을까 나는 추측한다.

때는 고려말의 난세로서 [홍길동전]의 '태평성대'로서 조선 세종대왕 대의 배경과 달리, 난세였다.
왕조말 난세를 맞아 속세를 떠나 산중에 은거하던 '운화 선생' 전숙의 아들로 태어난 전우치는 떼구름을 타고 나타난 동자의 태몽을 받고 태어나 본래 이름은 '구름에 다다른다'는 '운치(雲致)', '전운치'였다. 19세기 경성(서울)에서 출판된 '경판본'의 제목도 [전운치전]이었으나 후세로 이어져오며 발음하기 쉽도록 가운데 'ㄴ'이 탈락된 [전우치전]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벼슬을 하지 않고 산속으로 떠난 '산중처사'의 자식이라 그런지 홍길동처럼 특별한 목적이나 현실적 꿈은 없이 고려왕조를 희롱하던 전우치의 도술 또한 홍길동 못지 않게 화려하다. 
이야기의 흐름상 고려왕조를 농락하다가 잠시 '선전관'이라는 무관을 맡아 백성들을 돕고 부패관료들을 혼내주며 도적 염준을 진압하기도 하지만 전우치의 목적은 세상을 가지고 노는 것이지 홍길동과 같은 부귀영화나 태평성대의 거창한 무엇이 아니다. 

전우치도 홍길동처럼 불리하면 공중에 올라 구름을 타고 칼날 같은 번개를 부리며 둔갑술과 변신술, 분신술에 능하다. 
전우치도 홍길동처럼 어려서부터 경학은 물론 검술, 문무를 겸비하였지만 전우치의 도술은 구미호의 정령, 즉 '호정'을 먹고 터득한 것이다.
세상을 가지고 노는 전우치는 예쁜 여자로 변한 구미호를 꼬셔 잠자리를 같이 하고 그녀의 입속에서 굴리던 '호정'을 프렌치 딥키스를 통해 입으로 받아먹기도 하는 당시로서는 음란소설의 요소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미인도의 여인을 부리고 상사병에 걸린 친한 형을 돕기 위해 예쁜 여자를 꼬시는 데도 능수능란하다. 길동의 엄숙함과 진지함이라고는 눈씻고 읽어볼 수 없고 구성도 산만한 게 다분히 '동물'적 소설답다.

유불선의 동양 인문학이 다수 등장하나 '이성'적이지 않은 '감성'과 감각에 충실하니, 역시 '동물'적 도술의 영역이다.


"운치(전우치)가 조상의 무덤에 하직한 후 화담(서화담)을 모시고 구름을 타고 영주산으로 향하니, 그 뒷일은 알지 못하겠다(不知所終)."
- [전우치전], <서화담을 따라 세상을 버리다>, 19세기 경판본.

이토록 경직된 조선의 '이성'적이고 '인문학'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반항하던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전우치는 당시 조선 유학자들이 한문판으로 '반(反)전우치전'을 지어 유학자 선비 '서화담(서경덕)'에게 끝내 굴복당하고 마는 결말까지도 지어냈단다.

19세기 경성(서울) 을지로에서 출판된 경판본 [전우치전]의 결말 또한 까불던 전우치가 결국 서화담의 도학적이고 '인문학'적인 도술을 뛰어넘지 못하고 결국 서화담과 함께 세상을 버리고 영주산으로 떠나 신선 같은 존재가 되는 것으로 끝맺는다.

[전우치전]의 마지막 문장은,
내가 좋아하는 '부지소종(不知所終)'이다.


3.

[홍길동전]과 [전우치전] 모두 '사회소설'이자 '반역소설'이지만, 당대의 대중의식과 시대정신을 뛰어넘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한다.

홍길동은 애초부터 '인간'적이었고 결말도 현실의 '외부'인 율도국에서조차 현실 체제의 '내부'를 벗어나지 못한다.
전우치는 '동물'적이고 반항적이지만 엉성한 이야기구성으로 연명하다가 결국 황진이한테 넘어가고 말았다던 유학자 선비 서화담(서경덕)에게 굴복하고 만다.
고려말에 조선 중종조의 서경덕이라니, 엉성하고 어색한 판타지다.

이십대 시절의 나는 '타협'을 몰랐다.
그 시절의 나에게 기성세대의 타협이란, '배신'이고 '기회주의'였다.
그러던 내게 나이가 든다는 건 세상과 제도에 편입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나도 이 세상과 체제에 철저히 종속되면서 어느덧 중년에 들었다.
그리고 지금껏 수많은 '타협'을 하고 살아왔다.

나이 먹을 수록 수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적이라는 인간사 모든 게 밉든 곱든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그 거대한 세상과의 타협이라는 것을 우리의 고전소설 또한 보여주고 있다.

'인간'적이든 '동물'적이든,
그 어떤 '도술'로도 뛰어넘을 수 없는 타협의 인간사다.

나 자신의 나이 들어감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현재의 최대강령인 민주주의의 근원 또한 '타협', 바로 그것 아니겠는가, 하고 말이다.

***

1. [홍길동전/전우치전](19세기 경판본), 김현양 옮김, <문학동네>, 2010.
2. [파격의 고전 :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 이진경, <글항아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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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자 - 중국의 시간을 찾아서 걸작 논픽션 27
피터 헤슬러 지음, 조성환.조재희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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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세계'의 문화투쟁
- [갑골문자], 피터 헤슬러, 2006.


"황제(黃帝)의 사관 창힐(倉頡/蒼頡)은 새나 짐승이 뛰어다니는 발자국을 보고 그 자국이 서로 같고 다른 것을 깨달아 처음으로 서계(書契)를 만들었다... 창힐이 처음으로 만든 서계는 대개 유사함을 따라 형상을 본떴는데 그래서 '문(文)'이라고 한다. 그 뒤에 모양과 소리에 따라 서로 합쳐지게 되었고, 그래서 '자(字)'가 생겨났다. '문'은 물체를 나타내는 요체이고, '자'는 거기서 더 늘어난 것이다. 그것을 대나무와 비단에 쓴 것을 '서(書)'라고 하는데, 서로 닮음을 의미한다."
- [설문해자(說文解字)], <후기>, 기원후 100년.
([갑골문자], <3부. 유물H : 글자>에서 재인용)


어린 내가 한자를 좋아하게 된 건 아마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였을 거다.

취학 전 잠시 어딘가로 출근을 하시던 어머니는 집에 혼자 남을 나를 위해 16절 갱지 한 묶음과 모나미 볼펜 한 다스를 사주셨고, 예닐곱살이었던 나는 어두운 방에 홀로 배를 깔고 엎드려 그림책을 펼치고는 그림들을 따라 그렸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앉은뱅이 책상에 있던 작은 한자책을 펼쳐서 따라 그리기도 했다. 
다양한 모양들이 글자로 변하는 과정이 신기했다.

나중에 학교에 들어가서 배우게 되었다.
우리 한글이나 영어 같은 서양 언어는 소리를 쓰는 '표음(表音)' 문자였던 거고, 내게 그림과 같았던 한자는 '표의(表意)' 문자였던 거다.


1990년대 말부터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각지 답사와 인터뷰를 통해 중국의 문화를 묘사한 피터 헤슬러(Peter Hessler)는 일종의 '자유기고자'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처음에는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중국 쓰촨의 푸링이란 벽지에서 영어교사로 일했던 피터 헤슬러는 베이징으로 와서는 신문사 지부에서 기사 스크랩 일을 하다가 사설 독립기자로 허가받아 글을 썼다. 사무실이나 사무기기는 일하던 신문사 지부로 유령등록하고 미국의 각 잡지사에 중국 관련 글을 보내 단어당 보수를 받는 일종의 기자이자 르포작가다.

그가 2006년 출간한 책, [갑골문자]는 제목만 보면 기원전 2천 년 이전부터 이어져 온 은(상)나라에서 시작되는 중국역사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미국인의 시각에서 본 중국문화 이야기다. 모티브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표의문자' 한자이고 그 기원인 은(상)나라의 '갑골문자'인 것이다. 주요 소재는 냉전 후 미-중 관계와 고고학자 및 중국 각지로 퍼진 저자 자신의 푸링 시절 영어 제자들, 그리고 몇몇 중국 인민들과의 인터뷰다.


"근본적인 문제는 왜 '문자체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느냐가 아니다. 관건은 이러한 문자의 안정성이 어떻게 중국세계를 빚어냈는가에 있다... 그러나 한자는 다른 장점이 있다. 한자는 제국의 통일에 강력한 요소를 제공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통일은 일종의 민족집단과 언어의 혼합이다. '문자(文字)'는 탁월한 역사의 연속성을 창조했다. 계속되는 서사는 역대의 혼란을 무마시켰다. 한자 자체가 아름다워 서예가 기본적인 중국예술이 되었다. 서구의 문자와 비교할 때 한자의 중요성은 훨씬 크다. '문자'는 어디에나 있다."
- [갑골문자], <4부. 유물K : 잃어버린 알파벳>, 피터 헤슬러, 2006.


우리의 한글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언어들은 '알파벳'을 기본으로 하는 '표음문자'로서 수십 개의 자모를 통해 다양한 말들과 방언들까지 받아적을 수 있다. 반면 글자 자체가 뜻을 상징하는 '표의문자'는 해당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이미지를 익혀야 한다. 수천 또는 수백 개의 한자를 알아야 한다. 
표음문자는 말과 음성이 먼저고, 표의문자는 '문자(文字)'가 우선이다.

피터 헤슬러가 만난 많은 고고학자들은 은(상)나라의 수도 부근 안양에서 갑골문을 발굴한 사람들인데, 그 중 징즈춘이라는 젊은 고고학자는 갑골문자로부터 시작한 거대한 '문자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강조한다(같은책, <1부. 유물A : 지하도시>).

은나라는 지금의 통일중국 같은 영역이 아니라 대륙의 일부 지역에 존재했던 소수 지방정권이었지만 갑골문자에서 보듯 '문자'를 남겼고, 이 독특한 한자 '문자체계'의 문화, 즉 중국만의 '문자세계'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다수의 민족들이 대륙을 지배하면서 수용하고 적응하며 확장시키고 발전시킨 거대한 문화와 역사 자체가 된다.

동쪽의 룽산문화였던 은(상)나라를 서쪽 앙소문화의 주나라가 멸망시킨 후에도, 주나라의 봉건왕토들이 쟁투하던 춘추전국시대에도, 진시황의 최초 통일과 한나라의 '한(漢)'족 문화는 물론 다양한 유목민족들과 몽골 및 여진까지도 이 '문자체계'에 동화되었다. 아마도 우리 한반도에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 또한 그 문화에 그대로 종속되어 오지 않았을까. 요동과 한반도의 고대문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금의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의 주요 근거가 바로 이 '문자체계' 문화일 수 있겠다. 

영토는 실질적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부차적이다. 
독립적인 '문자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젊은 고고학자 징즈춘이 말한 '문자세계'다.

1949년에 혁명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중국의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1970년대의 '문화혁명'이라는 고전과 전통에 대한 광기어린 대숙청 이전에 이미 한자문명을 개조하려고 시도했단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마오쩌둥이 추앙하던 소비에트의 권력자 스탈린의 조언을 듣고는 안 그래도 다른 할 일도 많았던 상황인지라 문자혁명은 포기했단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중국은 큰 나라이므로 단순히 라틴 자모를 쓰지 말고 고유의 문자를 쓰라고 충고했단다.

피터 헤슬러가 이 길고긴 이야기 내내 추적하는 고고학자는 '천멍자'라는 인물이다.
그는 은나라 안양의 갑골문자 해독에 능했고 마오쩌둥의 문자혁명에 반대하여 오랜 한자체계를 옹호했다. 이후 '문화혁명' 기간에 천멍자는 '극좌파' 권력으로부터 '우파'로 낙인찍혔고, 은나라 갑골문 해석과 청동기 도록에 관한 자신의 학술적 업적까지도 부정당했다. '문화혁명' 당시 천멍자를 비난했던 동료학자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의 어용적 비난행위를 후회하거나 아예 언급을 자제했다는데,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천멍자의 갑골문자와 청동기문화에 관한 학문적 성과는 현재까지도 유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리랜서 글쓰기의 핵심은 자신의 이름으로 쓰인 이야기들과 스스로를 분리하는 것이다. 갑자기 기절한 사람의 의식이 바닥에 엎드려 있는 자기 몸을 내려다보듯 말이다. 어떤 글쓰기든 어느 정도는 이와 비슷하다."
- [갑골문자], <2부. 5장>, 피터 헤슬러, 2006.


피터 헤슬러의 이 책은 중국역사 이야기는 아니다. 저자가 중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기록한 '비교문화' 이야기에 가깝다. 
1940년대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일본문화를 연구할 때 그녀와 연구자들이 일본에 가보지도 못했다면, 1999년에서 2002년까지 피터 헤슬러는 중국 현지를 돌아다니면서 생생한 인터뷰를 이어간다.
이제 21세기에도 한참 들어선 지금, 어느 서양인들은 한반도를 누비며 조선의 역사를 동아시아 문화의 일부로서 묘사하고 있지 않을는지.

어찌보면 논픽션 소설 같기도 하고, 르포르타쥬 같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엔 중국문화에 관한 생계형 잡지기사의 모읍집에 가깝다. 자신이 실제 겪고 인터뷰한 실존인물들의 증언이지만 저자로서 최대한 객관화시키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를 '프리랜서 글쓰기의 핵심'이라 정의한다.
4부에 걸친 길고 긴 인터뷰 이야기는 다소 지루하다. 그럼에도 갑골문과 청동기, 문자세계와 중국의 각종 유물에 관한 내용을 담은 중간중간의 13개 삽입장들은 흥미롭다.


"만일 한자체계의 기원을 찾고자 할 때, 자연모방적인 도상을 찾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해요. 찾아야 할 것은 다이어그램, 즉 추상화하고 성문화하는 구조입니다. 종교적 영역에서 발휘되는 동일한 욕망이 문화영역에서도 발휘될 수 있어요... 이집트에서는 초기의 국왕이나 고급관리의 초상을 볼 수 있지만, 중국에서는 그러한 것을 볼 수 없어요. 분명 중국인은 중요한 권력과 위력, 존재를 추상적인 방식으로 묘사하기를 즐깁니다."
- [갑골문자], <3부. 유물G : 금 가지 않은 뼈>, 피터 헤슬러, 2006. (미국 고고학자 키틀리 인터뷰)


고대 서쪽의 이집트 설형문자나 동쪽의 중국 상형문자 모두 '표의문자'였지만, 이집트 문자는 로제타석이 발견된 19세기나 되어서야 해독된 반면, 중국의 한자는 그들 주장에 의하면 5천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왔다.

피터 헤슬러의 [갑골문자]에서 유일하게 가명으로 등장하는 폴라트는 중국 서부 및 중앙아시아와 인접한 신장 위구르인이다. 한자문명에 포섭되지 않은 돌궐인의 후예 위구르인은 서방과의 교류 및 혼혈로 인해 동방의 한족 및 소수민족들과 다른 생김새다. 또한 오랫동안 중국문명에 대항해왔다. 흡사 지금까지 중국본토에 저항하는 타이완과도 같고 티베트나 몽골과도 같다.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독립된 역사와 문화, 특히 고유의 문자를 가진 우리가 종속되기를 부정하는 것은 중국이라는 '대륙'의 특정권력이라기보다는 '문자체계'로 상징되는 '문화'인 것이다.

이 책에서 위구르인이 주요 등장인물인 이유 중 하나도, 중국이 자랑하는 '상형문자' 문화가 어쩌면 중국 주변에서 명멸해간 수많은 지역민들의 문자체계가 흡수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일텐데, 사료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역대로 중원을 장악하고 대륙을 통일했다고 생각한 왕조나 정권이 다른 문화를 제거해버린 결과가 지금의 한자 문자체계일 수도 있다. 중국역사 속 각기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후세들로부터 결국 비슷하게 묘사된 '추상'적 중국문화권력의 힘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찌보면, 
강대국으로서 닮은꼴인 중국과 미국의 대립은,
표의문자와 표음문자 사이 '문자세계' 간의 문화투쟁일 수도 있겠다.

한글이라는 표음문자를 지녔으나 표의문자체계에서 오래 살아 온 우리 한반도 '문자세계' 문화의 위치는 어디쯤일지 사뭇 궁금해진다. 

***

1. [갑골문자 - 중국의 시간을 찾아서(Oracle Bones : A Journey Through Time in China)](2006), Peter Hessler, 조성환/조재희 옮김, <글항아리>, 2023.
2. [불변과 만변(不變與萬變)](2021), 거젠슝, 김영문 옮김, <역사산책>, 2022.
3.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1946), Ruth Benedict, 김윤식/오인석 옮김, <을유문화사>, 1974~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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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의 고전 -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
이진경 지음 / 글항아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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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知所終" :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 [파격의 고전], 이진경, <글항아리>, 2016.


"수많은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不知所處)'나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不知所終)'는 말은 이 '은거'라는 선택을 표현한 것인데, 대부분의 해석자는 이 말을 현실을 등지는 소극적인 도피나 심지어는 현실에서 패배한 자들의 소외로 이해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은거'란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게 아니라... '다른 세계'('외부')를 찾아가는 것, '다른 세계'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외부'란 누구에겐 가까이 있어도 더없이 멀고, 누구에겐 멀리 있는 듯 보여도 더없이 가까이 있는 것,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 [파격의 고전], <11장. '금오신화'와 '최고운전' : 이계와의 만남, 혹은 외부를 본 자의 고독>, 이진경, 2016.


1.

내가 소설을 쓰고 싶었던 이십대에,
당시 나의 주제는 '부재(不在)'였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허생전'의 마지막처럼 한바탕 놀다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 그 '부재'의 현장을 멍하니 쳐다보는 어영대장 이완처럼.

불평등한 세계를 뒤집어 엎겠다며 한바탕 소란을 피우다가 '90년대라는 세기말에 들어서자 갑자기 '변신술'을 부리며 '부재'하던 자들이 '허생'이었다면, 그들을 쫓다가 어느 순간 그 '부재' 앞에서 멍때리고 있는 나는 '이완'이었다.

여기서도 나는,
언제나 그래왔듯,
주인공이 아닌 구경꾼이었다.


2.

"특히 현실에 '부재'하지만 강력한 능력을 갖는 기이한 동물은 인간 자신에게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며, 그런 동물의 형상으로 자연에 투영된 인간적 '소망의 표현'입니다... 홍길동의 도술과 박씨 부인의 도술 모두 국가나 임금에 대한 도덕적 충실성, 가정에 대한 도덕적 충실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와 달리 유희적인 방식으로 쓰였던 전우치의 도술이 오히려 통치에 반(反)하는 '반(反)국가적' 도술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적 성격의 도술과 동물적 성격의 도술이라는 차이가 이와 무관하지 않음도 다시 한 번 말해두고 싶습니다."
- [파격의 고전], <5장. 전우치 대 홍길동 : 변신술과 도술의 상이한 유형들>, 이진경, 2016.


'80년대 '사구체 논쟁', 즉 남한체제의 '사회구성체'에 대한 논쟁을 정리하고 유행시킨 철학자 이진경 선생은 운동권의 전통과 같은 'NL'식 '식민지반봉건' 체제론에 대항한 'PD'식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론의 선봉이었다. 그러다가 한때의 남한체제 변혁론이 사그라진 '90년대 초반에 '사구체 논쟁'은 갑자기 사라지고 혁명의 '부재'로 남았다. 

이진경 선생은 '90년대 중후반에 철학의 '탈주'를 통해 '외부'를 돌다가, 21세기에 들어서자 칼 마르크스의 '고전' [자본론]을 다시 들고 자본주의 '너머'인 '외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2004)이다.

한때 '부재'한 듯 했던 철학자 이진경의 주제는 '외부'다.

그런 그가 2016년에는 우리의 고전소설들을 대상으로 두고 텍스트의 '내재적' 의미를 중심으로 한 구조주의적 독해를 했는데, 이 작업을 정리한 책이 [파격의 고전](<글항아리>, 2016)이다.

책의 서문에서 그는 "'파격(破格)'이란... 평가의 척도를 깨는 것이며, 사물을 보고 '바로잡는' 틀을 깨는 것이다. 사물과 '겨루는' 대신 '틀(格)'과 겨루는 것이다"(같은책, <머리말>)라고 정의하면서 시작한다. 즉, 일반적인 통념을 깨는 우리의 '고전' 읽기다.

이 책의 부제는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이다.
통념적으로 조선의 '반역자' 허균이 쓴 최초의 한글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은 적서자 차별에 대항한 '사회소설'로 알려져 있다. 이진경 또한 여태 그렇게 생각했지만 '파격'의 눈으로 다시 독해하니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다.

홍길동이나 전우치나 도술을 익히고 국가권력에 대항한 '반(反)국가적' 변신술을 부리지만 이 둘의 변신술은 다르다.
'호부호형',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얼자의 한을 반복적으로 소환하며 국가를 상대로 '주역' 등을 통해 익힌 도술과 변신술을 부리는 홍길동은 자신의 꿈이었던 병조판서에 제수되자 마자 도망쳐 남경 제도와 율도국 건설의 '외부'로 이탈하지만, 결국 서얼자 차별의 신분제의 체제 '내부'를 벗어나지 못하고 율도국의 원주민 학살을 통해 '왕'이 되고 마는 체제 '내부' 종속자에 불과하다.
반면, 구미호 같은 암컷 여우와 동침하고 도술을 배운 전우치는 끊임없이 체제 '외부'로 탈주하고 이탈한다. 국가권력에 대한 전우치의 도술과 변신술은 다분히 '동물'적이고 체제 '내부'에는 없는 다분히 유희적인 어떤 것이다. 홍길동처럼 체제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호부호형'의 몸부림과는 다르다. 전우치의 변신술은 목적이 없다. 억압적 권력에 대항한 한없는 조롱이다. 이에 대항하여 당시 조선 후기의 선비들은 서화담에 의해 사로잡히는 전우치를 그린 한문판 '반(反)전우치전'을 지어서 퍼뜨리기도 했단다.

홍길동의 도술과 변신술은 '인간적'이기에 체제 '내부'에 철저히 종속되고,
전우치의 그것은 '동물적'인만큼 언제까지나 체제 '외부'로 탈주하고 있다.


"... '심청전'은 통상적으로 이해되듯이 목숨을 건 '효(孝)'를 설파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효라는 도덕적 명령에 대한 지나친 복종을 통해 그 명령 자체를 당혹 속으로 모는 역설적 비판의 텍스트이고, 효로 되돌아가지 않는 비인칭적 죽음을 통해 거기서 열리는 다른 잠재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텍스트요, 그럼으로써 아버지나 맹인들, 눈먼 도덕적 명령을 '집'에서 벗어나 '밖'('외부')으로, 다른 넓은 세계로 끌어내는 텍스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심청전'은 '효'라는 잘 알려진 '답'을 엽기적 사례로써 설파하고 강권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효이기를 중단한 효, 집 밖으로 끌려 나간 효를 통해 효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텍스트, 효에 대한 다른 관념을 제안하는 텍스트라고 해야 할 겁니다."
- [파격의 고전], <1장. 심청, 마조히스트? : 윤리적 소설과 '반인륜적' 독서>, 이진경, 2016.


율도국이라는 체제 '외부'를 향했음에도 실질적으로는 '내부'를 벗어나지 못한 '홍길동전'은 역시, 체제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는 '심청전'과도 대비된다.

보통 우리는 '심청전'이 '효(孝)'를 강조하는 소설 또는 판소리로 알고 있다. 그러나 텍스트를 '파격'적으로 독해하면, 정반대의 '반윤리적' 이야기가 된다.
심청의 아버지 심봉사와 심청은 마을 공동체의 '부조'를 통해 살아간다. 여기서 '동냥'이 아니라 공동체의 적극적 시주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에 의하면 '공동체(community 또는 commune)'는 '선물(munus)'을 '공유(com-)'하는 단위의 어원을 갖는다고 한다(같은책, <6장>). '공동체'는 '선물 의해 결합된 관계'(같은책, 같은곳)라는 것이다.
조선 말 우리의 동학혁명 소단위로서 상부상조하는 바로 그 마을 공동체다. 마르크스가 만년에 주목한 러시아의 '미르공동체'나 게르만의 '마르크공동체' 같은 유럽의 시골공동체와 같은 '생태적' 공동체인 것인데, 근대적 자본과 화폐적 교환관계 이전에 모두가 '함께 살자'는 가치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던 그런 삶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조선왕조의 권력은 부모에게 허벅지살 고기나 손가락뼈 사골국을 바치는 극단적 '삼강행실'의 유교적 윤리를 강조하면서 이 민중적 공동체의 자율성을 통제하고 억압한다.

여기서 굳이 임당수에 몸을 던지지 않아도 공양미 3백석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보란듯이 선원들과의 '교환' 또는 '계약' 관계를 들먹이며 결국 목숨을 내던지는 심청의 행적은 '효도'가 아니었다는 거다. 오히려 반대로 극단적 '삼강행실' 윤리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다. 부모가 '나가 죽어'라 한다고 '네. 알겠습니다'며 진짜로 즉시 나가 죽는 게 효도일 수 없는 것처럼. 심봉사의 초반 실수로 공양미 3백석에 몸을 판다고 진심 팔려가는 것이 결코 효도일 수는 없다. 강단있는 심청의 저항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용왕이라는 '다른 세계'('외부')를  만나 부활한 심청은 가정이라는 체제로 다시는 복귀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높은 귀한 신분이 되어 아버지 심봉사를 찾는 게 아니라 전국 봉사모임을 개최하여 그들을 밖으로 나오게 한다.
심청은 끝까지 자기를 죽음으로 내몬 가정의 체제 '내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심청은 체제 '외부'의 힘으로 '내부'를 끌어낸다.

[파격의 고전]의 부제가 말하는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은 바로,
체제 '너머', 즉 체제의 '외부'인 것이다.


"홍길동이 자신에게 없는 '귀함'을 찾아 아버지와 임금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고 그들이 줄 수 있는 인정의 기호를 얻고자 자신을 버린 체제의 '내부'로 들어가고자 했던 것과 달리, '허생전'에서 허생은 '내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외부'를 향해 나아가며, '외부'적인 것의 작동을 실험하고, '외부'적인 것의 세계를 만들고자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언행은 앞서 말한 '이탈의 정치학'이라는 개념에 부합합니다."
- [파격의 고전], <12장. 홍길동의 분신들과 허생의 '잉여'들 : 상징적 전쟁과 탈주의 정치학>, 이진경, 2016.


이제 다시, [파격의 고전]에서 제일의 비판적 텍스트, '홍길동전'은 '허생전'과도 비교된다.

일반적으로 연암 박지원의 한문소설 '허생전'은 근대적 자본 증식 또는 화폐 교환 체제에 대한 실학적이고 긍정적 소설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도 그렇게 배운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파격'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허생전' 텍스트는 근대로의 전환에 대한 비판적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과거시험도 보지 않고 주구장창 글이나 '충분히' 읽으려는 몰락양반 선비 허생에게 아내는 '도둑질이라도 해서 돈이나 벌어오라'는 지극히 생계적이고 현실적인 요구를 하는데, 알고보니 근대적 경제관념의 천재 허생은 조선 경제에 폐해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점매석을 통해 수백배의 이익을 얻고 군산의 도적단을 찾아가 도적질의 근원인 생계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작은 섬을 얻고는 체제 '외부'의 대안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한다.

여기서 홍길동과의 차이점은 허생이 '외부' 체제의 권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점이다. 허생은 그 작은 섬에서 통용되지도 못할 50만냥을 바다에 버리고 '글줄 아는 선비들'을 데리고 나온다. '잉여'는 계급 차별을 낳는다는 점을 간파했고 '문자'는 권력의 생성과 강화에 복무하는 주요기제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체제 '외부'에서 '내부'로 돌아와 애초 1만냥을 빌린 변씨에게 매점매석과 나카사키 구휼의 '해외투자' 등으로 불려서 남은 돈을 전부 되갚는 과정에서, 원리금만 받겠다는 변씨에게 했던 그 유명한 일갈은 매우 인상적이다. "내가 장사치인 줄 아는가?"라는 바로 그 말이다.

허생의 비범함에 놀란 부자 변씨가 연결해준 어영대장 이완에게 관직을 추천받았지만, 허생은 당시 조선 관료사회에서 관철될 수 없는 요구사항을 제안하면서 예상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골방의 뒷문으로 '탈주'한다. 

'허생전'의 결말인 '부지소종(不知所終)'이 그의 '부재'를 표현한 방식이다. 즉, 허생이 '부재'를 남기고 사라진 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사라진 허생이 간 곳은 아마도 체제 '너머'인 체제의 '외부' 어딘가로 추정되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 만큼 우리가 체제를 넘어서 멈추지 않고 찾아야 할 미지의 대안세계이자 '외부'일 것이라는 변함없는 결론만이 대대로 이어진다.


3.

젊었던 내게 '부재(不在)'는 무책임한 체제 '내부'의 변신술로만 보였을지 모른다.
그랬기에 지금껏 나는 어영대장 이완처럼 멍때리고 있었던 거였을 지도.

이제 이진경 선생을 따라 '파격'의 관점에서 본 우리의 고전은 '부재'로 남은 그 선배들이 '부지소종(不知所終)'을 통해 체제 '외부'로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중년이 된 나의 사고를 확장케 한다.

아니,
모르겠다.
어느새 기성세대가 된 내가,
더 이상 멍때리는 어영대장 이완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부재'를 남기는 허생이 되고 말았을는지도.

***

1. [파격의 고전 :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 이진경, <글항아리>, 2016.
2.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1987), 이진경, <그린비>, 2008.
3. [자본을 넘어선 자본], 이진경, <그린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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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박물관 순례 2 - 백제, 신라, 그리고 비화가야 국토박물관 순례 2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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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 [국토박물관 순례 2], 유홍준, 2023.


"삼국과 가야는 제각기 다른 고분군을 남겼다. 같은 죽음의 공간이건만 그 정서 표현은 다 다르다. 만주 집안에 있는 고구려 돌무지무덤에는 굳센 기상이 넘쳐흐른다. 공주 송산리와 부여 능산리의 백제 고분에는 단아한 아름다움이 있다. 경주 대릉원의 신라 고분에는 화려함이 있다. 이에 비해 가야 고분군에서는 뭐랄까 아련한 그리움의 감정이 일어난다."
- [국토박물관 순례 2], <가야 1>, 유홍준, 2023.


1.

취향이 구식인 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은 부러 피해 다닌다.

소위 말하는 '힙한' 곳을 찾지 않거나 또는 그러지 못하는데, 그러다 보니 유행이 이미 지난 후에야 찾아가게 되는 편이다.
성정이 그러하니 나는 스스로 역사 '유물'이나 '유적지', 특히 오래된 사찰 등을 좋아하게 된 거라고 위안을 삼기도 한다. 이십대에는 관심없다가 서른 넘어 갑자기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를 찾아본 이유이기도 하다. 왁자지껄한 대규모 답사라기 보다는 중장년 또는 노년의 학자가 홀로 역사 유물과 유적을 돌아보는 쓸쓸한 서정 같은 그런 분위기에 크게 동감했다.

2023년에 [국토박물관 순례] 시리즈를 새로 시작하는 노학자의 글을 읽으며, 이 역사 선생님의 아련한 뒷모습을 떠올린다. 이제 유홍준 선생께서 오랜 시간 이어온 그의 답사기를 우리 역사의 통사적 편년에 따라 마무리하시려나 보다 하면서.


2.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문화의 꽃이다. 백제문화가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말해주는 물증이다. 이 향로의 발견으로 우리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의 미학을 지녔다는 백제 아름다움의 진수를 만날 수 있다."
- [국토박물관 순례], <백제 1>, 유홍준, 2023.


그런데 막상 [국토박물관 순례] 1권의 <구석기>와 <신석기>, <청동기>와 <철기>를 거쳐 만주 환인(졸본성)과 집안(국내성)의 <고구려>를 지난 후, 2권을 펼치니 내가 그 동안 몰랐던 신기술과 역사 유물의 현대적 융합이 펼쳐진다.

물론, 경기 연천과 전곡리 구석기 박물관의 첨단성을 1권에서 잠시 소개하고는 있지만, 백제와 신라를 다루는 2권에서는 신기술과 접목된 역사적 유물과 유적지가 본격 등장한다.

지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백제' 편을 통해 배운 말이 있다. 
유홍준 교수가 백제의 문화를 정리하며 인용한 하나의 문장, 바로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다. 뜻은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인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권 '시조 온조왕'편 15년조에서 김부식이 한 말이다. 
나는 이보다 더 백제를 잘 설명해주는 감명깊은 문장을 떠올리지 못한다. 

퇴직 후 부여에 터를 잡고 15년간 백제문화를 설명해주고 있다는 유홍준 교수는 백제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물로 1993년에 발견된 금동대향로를 꼽고 있다. 백제문화 전성기였던 6세기 위덕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능사터에서 발견된 금동대향로는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신기술을 통해 향 피우는 모습도 볼 수 있단다. 가상현실(VR) 구현의 기술로 실제 유물에 향을 피우지 않고도 6세기 당시의 백제문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세계에서 1천년간 수도를 지낸 이른바 천년고도(千年古都)로는 경주 외에 이집트의 카이로, 이탈리아의 로마, 프랑스의 파리, 중국의 서안(西安,시안), 일본의 교토 등이 있다. 그러나 많은 천년고도들이 왕조를 바꿔가며 수도의 지위를 유지한 것임에 반해 경주는 오직 한 왕조의 수도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각별하다."
- [국토박물관 순례 2], <신라 1>, 유홍준, 2023.


'신라'편은 역시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가 무대다.
'백제'편도 '한성백제 5백년, 웅진(공주)백제 60년, 사비(부여)백제 120년'(같은책, <백제 1>) 중 마지막 수도 부여(사비)의 능산리 고분군을 중심으로 돌아보았다.
세계적으로 이집트 카이로나 이탈리아 로마, 중국 시안과 일본 교토 등에 비견할 만한 1천년의 수도 경주에서 또한 고분군을 중심으로 신라를 둘러본다.

여기서 또한 금관을 비롯한 금속 유물이 발굴된 4~6세기 돌무지덧널무덤들을 배경으로 한다. 
박-석-김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이었다는 고대 신라(서라벌)로부터 경주 김씨 왕은 의외로 13대 미추왕(이사금)부터였다는데, 김씨의 시조 김알지는 이사금은 못했단다. 이후 17대 내물왕부터는 '왕'이 '마립간'으로 불렸는데, '높다(宗)'는 뜻의 '마루'가 어원인 '마립'과 '칸(Khan/干)'과 같은 '간'의 합성어다. 이렇게 박혁거세의 '거서간'과 이후 2대 '차차웅', 3대부터 16대까지 이빨(연령)이 많은 '이사금'('님금' 또는 '임금'의 어원)을 거쳐 경주 김씨가 세습왕조를 이룬 17대 내물왕부터 불려진 '마립간'은 22대 지증왕대에 이르면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틀을 구축하고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면서 '마립간' 대신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아마도 기병을 앞세워 남쪽의 고대 서라벌로 남하한 북방 숙신의 후예였을지도 모르는 '김'씨들이 북방의 문명을 무기로 신라를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만들었을 수도 있는데, 실제로 숙신의 일파인 여진족이 수백년 후 중원에 세운 나라 이름이 '금(金)나라'인 기원을 여기에서 찾기도 한다.

경주 시내 대릉원 일대의 미추-내물-지증왕이 수도 안 무덤에 묻힌 이유는 수도 경주 자체가 '사자(死者)의 도시'인 '네크로폴리스(nekropolis)'였다는 의미다. 고구려 수도 집안(국내성)의 태왕릉(광개토대왕)과 광개토대왕릉비, 장군총(장수왕)이 그랬듯, 신라 고대국가 초기 경주 김씨 왕조는 죽어서까지 수도의 민중들을 지배하고자 했던 것이다. 4~6세기 '마립간' 시기를 지나 지증왕의 뒤를 이은 법흥왕이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죽음'에 관한 관념의 변화가 있어 법흥왕 이후로는 경주 외곽의 산에 묻혔단다. 

[국토박물관 순례] 2권의 '신라'편은 이처럼 4~6세기의 경주 김씨 '마립간' 정권의 고분들을 배경으로 한다. 
고구려는 5세기 장수왕, 백제문화는 6세기 위덕왕, 신라는 7세기 선덕여왕 시기가 문화적 전성기로 구분된다지만, 이 책은 4~6세기 경주 '네크로폴리스' 시기 대릉원을 통해 화려한 신라문화의 진면목을 본다.

신라금관을 비롯한 금세공품들은 같은 시기 중앙아시아의 양식과 비슷한 점도 있는 점을 보면 북방에서 문명교류의 힘을 가지고 내려온 '김'씨 또는 '금(金)'씨들의 '신문명'을 추정케 한다. 대릉원의 '돌무지덧널무덤' 유적 또한 이를 증언한다. 가야문명을 시작한 김수로 집단도 북방기마민족의 후예로 추정되며, 옆 동네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 또한 고구려에게 밀려 남하한 북방 부여국의 잔존세력으로 추정될 수 있다.


"... 학자마다 견해를 달리하여 대단히 복잡하고 일반인은 그 많은 학설을 다 옳게 알아들을 수도 없다. 이럴 경우는 어느 한 명의 견해에 먼저 의지하고 다른 사상을 참고하면서 자기 견해를 갖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비결'이다."
- [국토박물관 순례 2], <신라 3>, 유홍준, 2023.


[국토박물관 순례] 2권의 마지막은 '비화가야'다. 고대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가야소국 연맹체로 머물다 신라에 의해 멸망하는 과정에서 신라와 접경에 해당하는 '비화가야'가 선택된 이유는 아마도 유홍준 교수에게 가야가 "잃어버린 왕국"의 "애틋하고 애잔한 서정"(같은책, <가야 1>)으로 회상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문헌상 기록이 거의 없다는 가야는 [일본서기]의 기사에 따라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지배설로서 '임나일본부설' 따위의 논쟁도 있으나, 유홍준 교수는 일부 극우세력을 제외한 대부분 양식있는 일본 역사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고 있다고 간단히 일축한다(같은책, <가야 1>). 매우 타당한 시각이지만, 실은 [일본서기]가 [삼국사기]보다 더 오래된 문헌이라는 이유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멋대로 해석한 '임나일본부설'이 '실증적'인 '정설'이라 믿는 듯한 우리 주류 실증사학계 일부가 더 문제이기도 하다.

역사학자는 아닐지라도 미술사학자이자 역사답사 전문가인 유홍준 교수가 알려준 "역사를 공부하는 비결"(같은책, <신라 3>) 또한 내가 알게 모르게 배우고 써먹는 바로 그 방식이기도 했다.


3.

미술사학자로서 오랜 시간 역사에 대한 겸손함과 경외심으로 유물을 바라보고 유적지를 답사하며 대중들에게 감명을 주는 노학자는, 혹시나 마지막 답사기 시리즈일 것만 같은 [국토박물관 순례]를 통해 'VR(가상현실)'과 'AR(증강현실)'로 구현되는 유물과 유적지의 신기술에 감동하고 새롭게 단장된 유적지 고분군 사이에서 사진찍고 노니는 젊은 세대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계신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 노학자의 '답사기'를 따르던 구석기 시대 취향을 가진 나는 그의 자상한 할아버지 같은 따뜻한 시선을 따라 멀지 않은 때를 잡아 국립부여박물관과 경주 신라고분정보센터 등을 찾아 신기술과 융합된 역사 유물과 유적을 다시금 만나볼 요량이다.

구식이든 신식이든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서든,
역사는 유물을 낳고 그 유물은 역사를 언제나 증언해 준다.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 [국토박물관 순례 1], <책을 펴내며>, 유홍준, 2023.


유홍준 선생님에 의하면,
"역사가로서 김부식의 중대한 실책은 '가야'와 '발해'의 역사를 기술하지 않은 것"(같은책, <가야 1>)이라고 하는데,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이야기를 담게 될, 
아직 출간되지 않은 [국토박물관 순례] 3권을 기대한다.

***

1. [국토박물관 순례 2 - 백제, 신라, 그리고 비화가야], 유홍준, <창비>, 2023.
2. [국토박물관 순례 1 - 선사시대에서 고구려까지], 유홍준, <창비>, 2023.
3. [삼국사기(三國史記)](12세기),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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