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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전우치전 ㅣ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7
김현양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홍길동과 전우치의 '타협'
- [홍길동전/전우치전], 19세기 경판본.
1.
이십대와 삼십대까지 서양철학사와 현대소설만 알던 내가 사십줄에 들어 동양으로 돌아와 예전부터 존숭하던 여말선초의 혁명가 삼봉 정도전을 따라 '성리학'의 급진성과 '유물론적' 성격을 추출하면서 따라가던 어느 날, [주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려웠지만 복희씨의 8괘와 주문왕의 64괘, 공자와 왕필, 그리고 주희의 해석에 관한 각종 해설서와 대중서들을 통해 나름대로 산가지 점을 쳐보기도 했다. 점 치기 전 정좌한 후 실은 산가지가 아닌 이쑤시개 55개이긴 했지만, "떳떳함이 있는 크나큰 시초를 빌립니다(가이태서유상:假爾泰筮有常)"라고 두 번 외칠 때 자연스레 머릿속에는 어릴적 읽었던 [홍길동전]의 삽화가 떠올랐더랬다.
홍길동이 자기를 죽이려던 자객 특재가 들이닥치기 전 홀로 앉아 주역점을 치던, 지금은 내 머릿속 이미지로만 남은 그 삽화였다.
2.
"한편, 길동은 그 원통한 일을 생각하면 잠시도 머물지 못할 일이지만, 상공(아버지)의 엄명이 중하므로 어찌할 길이 없어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날 밤 촛불을 밝히고 [주역]을 보며 깊이 생각하다가, 문득 들으니 까마귀가 세 번 울고 가는 것이었다. 길동이 괴이하게 여겨 혼자 말하기를,
'이 짐승은 본디 밤을 꺼리거늘, 지금 울고 가니 심히 불길하도다'
하고, 잠깐 '팔괘'를 벌여 점을 쳐보고는 크게 놀라 책상을 물리고 둔갑법을 행하여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 [홍길동전], <길동을 죽여야 하옵니다>, 19세기 경판본.
조선 세종 시절에 이조판서 홍아무개의 서얼자로 태어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을 품고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출사하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던 홍길동은 이미 소년시절에 [주역]에 통달하였단다.
청룡이 천둥벼락과 함께 달려드는 태몽을 꾼 홍판서가 정실부인 유씨를 곧바로 안으려는데 양반가 부인 유씨가 체통을 지키라며 내쳤을 때, 하필 나타난 여종 춘섬을 건드려 나온 자식이 홍길동이었다. 청룡의 기운을 받고 나온 길동은 여덟살에 문무를 겸비하였으나 얼자의 운명에 속박되어 서러워했고 홍판서 또한 안타까워 했지만 세상의 질서는 한 사람만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닐 터, '호부호형'을 못하는 길동을 신원해줄 길이 없어 무시로 길동을 꾸짖기만 한다.
또 다른 첩 초란이 무녀, 자객과 짜고 재주 많은 길동을 암살하려 할 제, 소년 홍길동이 부리는 둔갑술은 [주역]과 같은 '인간'적인 도술이었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길동의 도술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동양적 유불선이 융합된 경학과 도학을 바탕으로 연마한 다분히 '인문학'적인 도술인 것이다.
"... 길동이 이때를 틈타 공중을 향해 진언(眞言)을 외우니, 오방신장(五方神將)이 대군을 거느리고 일제히 에워쌌다. 동쪽은 청제(靑帝) 장군이요, 남쪽은 적제(赤帝) 장군이요, 서쪽은 백제(白帝) 장군이요, 북쪽은 흑제(黑帝) 장군이요, 가운데는 길동이 황금(黄金) 투구에 큰 칼을 들고 거침없이 쳐들어가, 칼 한 번 제대로 부딪치기도 전에 (율도국 철봉태수) 현충이 탄 말을 찔러 엎어지게 하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 [홍길동전], <율도국의 왕이 되다>, 19세기 경판본.
'호부호형'을 하지 못하는 한을 잊을만 하면 끊임없이 소환하며 세상에 제 이름 하나 알리고자 조선왕조 체제에 반란을 일으키던 길동이 결국 세속적 꿈이있던 병조판서 직함을 얻은 후 임금에게 사죄하고 물러났을 때, 길동의 꿈은 또 다른 왕국의 임금으로 이미 높아진 후였다.
조선체제를 속이고 희롱하던 길동은 구름을 타고 공중에 오르며 둔갑술과 변신술은 물론 분신술에 능하다. 율도국을 정벌할 때도 '오방신장'을 부리며 온갖 도술적 반칙으로 현실의 명장을 거꾸러뜨리는데, 유불선의 현실적 도학을 배경으로 한다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도술의 달인이다.
"... 이렇게 하여 후세에 그 재주와 충효를 알게 함이라. 자손들이 대를 이어 태평성대를 누리더라."
- [홍길동전], <홍길동, 세상을 뜨다>, 19세기 경판본.
그렇다 하나, 결국 홍길동 전기의 대단원은 '충효'와 같은 조선왕조 지배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활빈당 같은 도적단의 수괴로 반란을 일으킨 이유도 세상에 자신의 명성과 재주를 알리기 위함이었고, 병조판서라는 현실적 요구사항이 분명했으며, 또 다른 유교 이상적 왕국 율도국왕이 된 후에도 충효를 따르며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명확한 삶의 경로가 있었다.
아마도, '인간'적 도술의 필연적 결말이리라.
"(도적) 염준이 크게 놀라 하늘을 우러러보니 한 때구름 속에서 번개가 일어나는데, 이는 번개가 아니라 운치(전우치)의 칼에서 나는 빛이었다. 염준이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진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앞에서 운치가 칼을 들고 길을 막았다. 뒤에서도 운치가 따르며, 좌우 또한 운치가 에워싸며 들어오고, 머리 위에서는 구름을 타고 칼춤을 추며 염준의 머리를 치려 하니, 염준이 정신이 어지러워 말 아래로 떨어졌다. 이에 운치가 구름에서 내려와 가짜 운치로 하여금 군사들에게 호령하여 염준을 결박해 본진으로 보내도록 했다. 이어 운치는 말을 달려 적진으로 들이치니, 적진의 장수와 병졸들이 염준이 사로잡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손을 묶어 항복했다."
- [전우치전], <염준과의 대결>, 19세기 경판본.
한편, 아마도 [홍길동전]에 영향을 받아 창작되고 구전되었을 [전우치전]은 어쩌면 최초에는 현실적인 [홍길동전]을 비꼬는 일종의 '반(反)홍길동전'이 아니었을까 나는 추측한다.
때는 고려말의 난세로서 [홍길동전]의 '태평성대'로서 조선 세종대왕 대의 배경과 달리, 난세였다.
왕조말 난세를 맞아 속세를 떠나 산중에 은거하던 '운화 선생' 전숙의 아들로 태어난 전우치는 떼구름을 타고 나타난 동자의 태몽을 받고 태어나 본래 이름은 '구름에 다다른다'는 '운치(雲致)', '전운치'였다. 19세기 경성(서울)에서 출판된 '경판본'의 제목도 [전운치전]이었으나 후세로 이어져오며 발음하기 쉽도록 가운데 'ㄴ'이 탈락된 [전우치전]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벼슬을 하지 않고 산속으로 떠난 '산중처사'의 자식이라 그런지 홍길동처럼 특별한 목적이나 현실적 꿈은 없이 고려왕조를 희롱하던 전우치의 도술 또한 홍길동 못지 않게 화려하다.
이야기의 흐름상 고려왕조를 농락하다가 잠시 '선전관'이라는 무관을 맡아 백성들을 돕고 부패관료들을 혼내주며 도적 염준을 진압하기도 하지만 전우치의 목적은 세상을 가지고 노는 것이지 홍길동과 같은 부귀영화나 태평성대의 거창한 무엇이 아니다.
전우치도 홍길동처럼 불리하면 공중에 올라 구름을 타고 칼날 같은 번개를 부리며 둔갑술과 변신술, 분신술에 능하다.
전우치도 홍길동처럼 어려서부터 경학은 물론 검술, 문무를 겸비하였지만 전우치의 도술은 구미호의 정령, 즉 '호정'을 먹고 터득한 것이다.
세상을 가지고 노는 전우치는 예쁜 여자로 변한 구미호를 꼬셔 잠자리를 같이 하고 그녀의 입속에서 굴리던 '호정'을 프렌치 딥키스를 통해 입으로 받아먹기도 하는 당시로서는 음란소설의 요소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미인도의 여인을 부리고 상사병에 걸린 친한 형을 돕기 위해 예쁜 여자를 꼬시는 데도 능수능란하다. 길동의 엄숙함과 진지함이라고는 눈씻고 읽어볼 수 없고 구성도 산만한 게 다분히 '동물'적 소설답다.
유불선의 동양 인문학이 다수 등장하나 '이성'적이지 않은 '감성'과 감각에 충실하니, 역시 '동물'적 도술의 영역이다.
"운치(전우치)가 조상의 무덤에 하직한 후 화담(서화담)을 모시고 구름을 타고 영주산으로 향하니, 그 뒷일은 알지 못하겠다(不知所終)."
- [전우치전], <서화담을 따라 세상을 버리다>, 19세기 경판본.
이토록 경직된 조선의 '이성'적이고 '인문학'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반항하던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전우치는 당시 조선 유학자들이 한문판으로 '반(反)전우치전'을 지어 유학자 선비 '서화담(서경덕)'에게 끝내 굴복당하고 마는 결말까지도 지어냈단다.
19세기 경성(서울) 을지로에서 출판된 경판본 [전우치전]의 결말 또한 까불던 전우치가 결국 서화담의 도학적이고 '인문학'적인 도술을 뛰어넘지 못하고 결국 서화담과 함께 세상을 버리고 영주산으로 떠나 신선 같은 존재가 되는 것으로 끝맺는다.
[전우치전]의 마지막 문장은,
내가 좋아하는 '부지소종(不知所終)'이다.
3.
[홍길동전]과 [전우치전] 모두 '사회소설'이자 '반역소설'이지만, 당대의 대중의식과 시대정신을 뛰어넘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한다.
홍길동은 애초부터 '인간'적이었고 결말도 현실의 '외부'인 율도국에서조차 현실 체제의 '내부'를 벗어나지 못한다.
전우치는 '동물'적이고 반항적이지만 엉성한 이야기구성으로 연명하다가 결국 황진이한테 넘어가고 말았다던 유학자 선비 서화담(서경덕)에게 굴복하고 만다.
고려말에 조선 중종조의 서경덕이라니, 엉성하고 어색한 판타지다.
이십대 시절의 나는 '타협'을 몰랐다.
그 시절의 나에게 기성세대의 타협이란, '배신'이고 '기회주의'였다.
그러던 내게 나이가 든다는 건 세상과 제도에 편입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나도 이 세상과 체제에 철저히 종속되면서 어느덧 중년에 들었다.
그리고 지금껏 수많은 '타협'을 하고 살아왔다.
나이 먹을 수록 수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적이라는 인간사 모든 게 밉든 곱든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그 거대한 세상과의 타협이라는 것을 우리의 고전소설 또한 보여주고 있다.
'인간'적이든 '동물'적이든,
그 어떤 '도술'로도 뛰어넘을 수 없는 타협의 인간사다.
나 자신의 나이 들어감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현재의 최대강령인 민주주의의 근원 또한 '타협', 바로 그것 아니겠는가,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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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길동전/전우치전](19세기 경판본), 김현양 옮김, <문학동네>, 2010.
2. [파격의 고전 :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 이진경, <글항아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