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문자 - 중국의 시간을 찾아서 걸작 논픽션 27
피터 헤슬러 지음, 조성환.조재희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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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세계'의 문화투쟁
- [갑골문자], 피터 헤슬러, 2006.


"황제(黃帝)의 사관 창힐(倉頡/蒼頡)은 새나 짐승이 뛰어다니는 발자국을 보고 그 자국이 서로 같고 다른 것을 깨달아 처음으로 서계(書契)를 만들었다... 창힐이 처음으로 만든 서계는 대개 유사함을 따라 형상을 본떴는데 그래서 '문(文)'이라고 한다. 그 뒤에 모양과 소리에 따라 서로 합쳐지게 되었고, 그래서 '자(字)'가 생겨났다. '문'은 물체를 나타내는 요체이고, '자'는 거기서 더 늘어난 것이다. 그것을 대나무와 비단에 쓴 것을 '서(書)'라고 하는데, 서로 닮음을 의미한다."
- [설문해자(說文解字)], <후기>, 기원후 100년.
([갑골문자], <3부. 유물H : 글자>에서 재인용)


어린 내가 한자를 좋아하게 된 건 아마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였을 거다.

취학 전 잠시 어딘가로 출근을 하시던 어머니는 집에 혼자 남을 나를 위해 16절 갱지 한 묶음과 모나미 볼펜 한 다스를 사주셨고, 예닐곱살이었던 나는 어두운 방에 홀로 배를 깔고 엎드려 그림책을 펼치고는 그림들을 따라 그렸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앉은뱅이 책상에 있던 작은 한자책을 펼쳐서 따라 그리기도 했다. 
다양한 모양들이 글자로 변하는 과정이 신기했다.

나중에 학교에 들어가서 배우게 되었다.
우리 한글이나 영어 같은 서양 언어는 소리를 쓰는 '표음(表音)' 문자였던 거고, 내게 그림과 같았던 한자는 '표의(表意)' 문자였던 거다.


1990년대 말부터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각지 답사와 인터뷰를 통해 중국의 문화를 묘사한 피터 헤슬러(Peter Hessler)는 일종의 '자유기고자'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처음에는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중국 쓰촨의 푸링이란 벽지에서 영어교사로 일했던 피터 헤슬러는 베이징으로 와서는 신문사 지부에서 기사 스크랩 일을 하다가 사설 독립기자로 허가받아 글을 썼다. 사무실이나 사무기기는 일하던 신문사 지부로 유령등록하고 미국의 각 잡지사에 중국 관련 글을 보내 단어당 보수를 받는 일종의 기자이자 르포작가다.

그가 2006년 출간한 책, [갑골문자]는 제목만 보면 기원전 2천 년 이전부터 이어져 온 은(상)나라에서 시작되는 중국역사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미국인의 시각에서 본 중국문화 이야기다. 모티브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표의문자' 한자이고 그 기원인 은(상)나라의 '갑골문자'인 것이다. 주요 소재는 냉전 후 미-중 관계와 고고학자 및 중국 각지로 퍼진 저자 자신의 푸링 시절 영어 제자들, 그리고 몇몇 중국 인민들과의 인터뷰다.


"근본적인 문제는 왜 '문자체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느냐가 아니다. 관건은 이러한 문자의 안정성이 어떻게 중국세계를 빚어냈는가에 있다... 그러나 한자는 다른 장점이 있다. 한자는 제국의 통일에 강력한 요소를 제공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통일은 일종의 민족집단과 언어의 혼합이다. '문자(文字)'는 탁월한 역사의 연속성을 창조했다. 계속되는 서사는 역대의 혼란을 무마시켰다. 한자 자체가 아름다워 서예가 기본적인 중국예술이 되었다. 서구의 문자와 비교할 때 한자의 중요성은 훨씬 크다. '문자'는 어디에나 있다."
- [갑골문자], <4부. 유물K : 잃어버린 알파벳>, 피터 헤슬러, 2006.


우리의 한글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언어들은 '알파벳'을 기본으로 하는 '표음문자'로서 수십 개의 자모를 통해 다양한 말들과 방언들까지 받아적을 수 있다. 반면 글자 자체가 뜻을 상징하는 '표의문자'는 해당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이미지를 익혀야 한다. 수천 또는 수백 개의 한자를 알아야 한다. 
표음문자는 말과 음성이 먼저고, 표의문자는 '문자(文字)'가 우선이다.

피터 헤슬러가 만난 많은 고고학자들은 은(상)나라의 수도 부근 안양에서 갑골문을 발굴한 사람들인데, 그 중 징즈춘이라는 젊은 고고학자는 갑골문자로부터 시작한 거대한 '문자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강조한다(같은책, <1부. 유물A : 지하도시>).

은나라는 지금의 통일중국 같은 영역이 아니라 대륙의 일부 지역에 존재했던 소수 지방정권이었지만 갑골문자에서 보듯 '문자'를 남겼고, 이 독특한 한자 '문자체계'의 문화, 즉 중국만의 '문자세계'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다수의 민족들이 대륙을 지배하면서 수용하고 적응하며 확장시키고 발전시킨 거대한 문화와 역사 자체가 된다.

동쪽의 룽산문화였던 은(상)나라를 서쪽 앙소문화의 주나라가 멸망시킨 후에도, 주나라의 봉건왕토들이 쟁투하던 춘추전국시대에도, 진시황의 최초 통일과 한나라의 '한(漢)'족 문화는 물론 다양한 유목민족들과 몽골 및 여진까지도 이 '문자체계'에 동화되었다. 아마도 우리 한반도에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 또한 그 문화에 그대로 종속되어 오지 않았을까. 요동과 한반도의 고대문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금의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의 주요 근거가 바로 이 '문자체계' 문화일 수 있겠다. 

영토는 실질적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부차적이다. 
독립적인 '문자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젊은 고고학자 징즈춘이 말한 '문자세계'다.

1949년에 혁명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중국의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1970년대의 '문화혁명'이라는 고전과 전통에 대한 광기어린 대숙청 이전에 이미 한자문명을 개조하려고 시도했단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마오쩌둥이 추앙하던 소비에트의 권력자 스탈린의 조언을 듣고는 안 그래도 다른 할 일도 많았던 상황인지라 문자혁명은 포기했단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중국은 큰 나라이므로 단순히 라틴 자모를 쓰지 말고 고유의 문자를 쓰라고 충고했단다.

피터 헤슬러가 이 길고긴 이야기 내내 추적하는 고고학자는 '천멍자'라는 인물이다.
그는 은나라 안양의 갑골문자 해독에 능했고 마오쩌둥의 문자혁명에 반대하여 오랜 한자체계를 옹호했다. 이후 '문화혁명' 기간에 천멍자는 '극좌파' 권력으로부터 '우파'로 낙인찍혔고, 은나라 갑골문 해석과 청동기 도록에 관한 자신의 학술적 업적까지도 부정당했다. '문화혁명' 당시 천멍자를 비난했던 동료학자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의 어용적 비난행위를 후회하거나 아예 언급을 자제했다는데,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천멍자의 갑골문자와 청동기문화에 관한 학문적 성과는 현재까지도 유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리랜서 글쓰기의 핵심은 자신의 이름으로 쓰인 이야기들과 스스로를 분리하는 것이다. 갑자기 기절한 사람의 의식이 바닥에 엎드려 있는 자기 몸을 내려다보듯 말이다. 어떤 글쓰기든 어느 정도는 이와 비슷하다."
- [갑골문자], <2부. 5장>, 피터 헤슬러, 2006.


피터 헤슬러의 이 책은 중국역사 이야기는 아니다. 저자가 중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기록한 '비교문화' 이야기에 가깝다. 
1940년대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일본문화를 연구할 때 그녀와 연구자들이 일본에 가보지도 못했다면, 1999년에서 2002년까지 피터 헤슬러는 중국 현지를 돌아다니면서 생생한 인터뷰를 이어간다.
이제 21세기에도 한참 들어선 지금, 어느 서양인들은 한반도를 누비며 조선의 역사를 동아시아 문화의 일부로서 묘사하고 있지 않을는지.

어찌보면 논픽션 소설 같기도 하고, 르포르타쥬 같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엔 중국문화에 관한 생계형 잡지기사의 모읍집에 가깝다. 자신이 실제 겪고 인터뷰한 실존인물들의 증언이지만 저자로서 최대한 객관화시키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를 '프리랜서 글쓰기의 핵심'이라 정의한다.
4부에 걸친 길고 긴 인터뷰 이야기는 다소 지루하다. 그럼에도 갑골문과 청동기, 문자세계와 중국의 각종 유물에 관한 내용을 담은 중간중간의 13개 삽입장들은 흥미롭다.


"만일 한자체계의 기원을 찾고자 할 때, 자연모방적인 도상을 찾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해요. 찾아야 할 것은 다이어그램, 즉 추상화하고 성문화하는 구조입니다. 종교적 영역에서 발휘되는 동일한 욕망이 문화영역에서도 발휘될 수 있어요... 이집트에서는 초기의 국왕이나 고급관리의 초상을 볼 수 있지만, 중국에서는 그러한 것을 볼 수 없어요. 분명 중국인은 중요한 권력과 위력, 존재를 추상적인 방식으로 묘사하기를 즐깁니다."
- [갑골문자], <3부. 유물G : 금 가지 않은 뼈>, 피터 헤슬러, 2006. (미국 고고학자 키틀리 인터뷰)


고대 서쪽의 이집트 설형문자나 동쪽의 중국 상형문자 모두 '표의문자'였지만, 이집트 문자는 로제타석이 발견된 19세기나 되어서야 해독된 반면, 중국의 한자는 그들 주장에 의하면 5천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왔다.

피터 헤슬러의 [갑골문자]에서 유일하게 가명으로 등장하는 폴라트는 중국 서부 및 중앙아시아와 인접한 신장 위구르인이다. 한자문명에 포섭되지 않은 돌궐인의 후예 위구르인은 서방과의 교류 및 혼혈로 인해 동방의 한족 및 소수민족들과 다른 생김새다. 또한 오랫동안 중국문명에 대항해왔다. 흡사 지금까지 중국본토에 저항하는 타이완과도 같고 티베트나 몽골과도 같다.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독립된 역사와 문화, 특히 고유의 문자를 가진 우리가 종속되기를 부정하는 것은 중국이라는 '대륙'의 특정권력이라기보다는 '문자체계'로 상징되는 '문화'인 것이다.

이 책에서 위구르인이 주요 등장인물인 이유 중 하나도, 중국이 자랑하는 '상형문자' 문화가 어쩌면 중국 주변에서 명멸해간 수많은 지역민들의 문자체계가 흡수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일텐데, 사료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역대로 중원을 장악하고 대륙을 통일했다고 생각한 왕조나 정권이 다른 문화를 제거해버린 결과가 지금의 한자 문자체계일 수도 있다. 중국역사 속 각기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후세들로부터 결국 비슷하게 묘사된 '추상'적 중국문화권력의 힘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찌보면, 
강대국으로서 닮은꼴인 중국과 미국의 대립은,
표의문자와 표음문자 사이 '문자세계' 간의 문화투쟁일 수도 있겠다.

한글이라는 표음문자를 지녔으나 표의문자체계에서 오래 살아 온 우리 한반도 '문자세계' 문화의 위치는 어디쯤일지 사뭇 궁금해진다. 

***

1. [갑골문자 - 중국의 시간을 찾아서(Oracle Bones : A Journey Through Time in China)](2006), Peter Hessler, 조성환/조재희 옮김, <글항아리>, 2023.
2. [불변과 만변(不變與萬變)](2021), 거젠슝, 김영문 옮김, <역사산책>, 2022.
3.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1946), Ruth Benedict, 김윤식/오인석 옮김, <을유문화사>, 1974~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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