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갇히다 - 책과 서점에 관한 SF 앤솔러지
김성일 외 지음 / 구픽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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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책에 갇히고 만다
- [책에 갇히다] / [책에서 나오다], SF 앤솔러지, <구픽>


1.

내가 '책'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던 건 예닐곱 살 적부터였다. 
그렇다고 그 나이부터 활자 읽기를 좋아했다는 말은 아니다. 내 손에 들려져 있던 건 주로는 공룡이 나오는 어린이 백과사전 같은 책이었다.

어릴적 어머니는 집에 혼자 남을 나를 위해 16절 갱지 한 묶음과 모나미 볼펜 한 다스를 주고는 일을 나가셨고 나는 어두운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들고 다니던 책을 펼치고는 공룡 따위 삽화들을 따라 그렸다. 
어린 시절 내 꿈이 잠시 '고고학자'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룡은 그 나이 때 나만 좋아했던 건 아니었을 테지만, 우연히 우리 집에 공룡이 나오는 생물 대백과사전 비슷한 책이 있었고 글을 잘 몰랐을 취학 전의 나는 그 유일한 어린이책을 들고 다니며 공룡 그림을 들여다 보았을 것이며 그것들을 따라 그려대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내개 종이와 펜을 쥐어주었을 거다. 모자라지 않던 갱지와 모나미 볼펜은 어린 나의 친구였고 그 속에서 노닐던 수많은 공룡들과 얼마전 할머니집에 살 때 텔레비전에 빠져들어서 보던 마징가, 태권브이 같은 로봇들은 나에게 어렴풋이 '고고학'이나 '과학자' 같은 꿈을 막연히 새겼으리라. 

책을 읽게 된 건 그 후로도 한참이나 지난 후였지만 나는 그 덕에 취학 전에 글을 읽을 줄 알게 되기는 했던 것 같다. 지금도 갱지의 냄새와 모나미 볼펜의 촉감은 내가 좋아하는 코드들이다. 

스무살이 되었을 때, 내 손에는 여전히 '책'이 들려져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 전국 각지에서 모인 동기와 선배들을 보며 나도 모를 모종의 위축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게 아마도 '책'이었던 것 같다. 일종의 열등감 극복을 위한 차별전략이었을 텐데, 집안 형편도, 외모도, 말주변도, 그렇다고 지능도 변변치 않던 나는 항상 '책'을 손에 들고 다녔다. 그리고 전철이든 버스든 그 어디서든 읽었는데 어떨 때는 읽는 척도 많이 했다. 의도는 여러 가지였다. 뭔가 있어 보이려는 신비주의 전략이었고, 아무하고나 대화하지 않는다는 자기보호 수작이었으며, 환경을 주체적으로 주도하려는 작전이기도 했다. 타인들은 나를 늘 책을 들고 다니며 읽어대는 녀석으로 인식했고, 내성적인 나는 타인들과 있을 때 눈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내가 뭔가를 하고 싶거나 말하고 싶을 때 내 마음대로 책을 잠시 덮었다. 그러다가 다시 책을 펼치면, 나는 눈과 마음을 둘 곳이 자연스레 생겼고 더 이상 뻘쭘하거나 어색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다보니 한편으로는 네모난 '책' 자체가 주는 물질적 만족감 같은 게 생겼다. 
어릴 때와 달리 성년의 내게 네모진 '책'은 한 손에 딱 들어맞는 악세서리가 되었다. 21세기인 지금은 휴대폰이 들려져 있을 때도 많지만, 휴대폰이 없던 '90년대 초부터는 한 손에 딱 알맞춤한 그립감의 장신구이자 장난감이기도 했다. 

그렇게 지금도 나는 한 손에 잡히는 '책'을 매우 사랑한다.
이 지식을 담은 장신구로서 '책'의 기원은 약 1,700년 역사의 '코덱스'다.

"코덱스의 편리함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서기 400년 경이 되자, 고전적인 형태의 두루마리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대부분의 책들은 사각형으로 여러 장 모은 형태로 제작되었다."
- [독서의 역사], <책의 형태>, 알베르토 망구엘.

서기 4백년대에는 소장하고 읽기 불편했던 두루마리 형태에서 양피지를 접어 지금의 책 형태로 만든 '코덱스'가 발명되었다. 동양의 죽간이나 서양의 두루마리는 원자재 자체가 고급이라 복제가 쉽지 않았을 테니 기원전 1세기 죽간본이었던 사마천의 [사기]만 해도 세 번 베껴서 분리보관했단다. 그러다가 상대적으로 대량보급이 가능했을 원자재인 동양의 종이나 서양의 양피지에 베껴쓰는 '코덱스(codex)',  즉 지금의 '책'은 개인 소장의 편리성과 유용성이 한층 용이한 형태로 변형되어 왔다.

'코덱스' 시대와 함께 '문자'와 '지식'은 비단 외우는 것만이 아니라 소지하고 다니며 그 권위를 인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14세기에는 '안경'도 발명되었고, 드디어 15세기에는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이 [성경]의 대량생산과 대중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한편, 15세기 인쇄술의 대중화는 육필 필사본의 화려한 장식적 필체 또한 대중화했기에 16세기에는 인쇄술의 발전이 육필 필사의 기술도 함께 발전시키게 된다. 
'책'의 주요한 역사다.

전자산업 발달에도 불구하고 '종이책' 고유의 양식과 질감, 냄새는 늘 인류와 함께 해왔다.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 알베르토 망구엘 또한 그랬던 것처럼, 사실 내게도 '독서'란 '문자'나 '지식'을 얻는 행위를 넘어 '책'이란 물질에 대한 일종의 '집착'이기도 하다. 
지금도 한 손에 '책'이란 물질이 없으면 허전하다.

그렇게 나는 오랜 동안 '책'에 갇혔다.


2.

출판사 <구픽>은 며칠 전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선'이라는 신예 단편소설 선집(앤솔로지)으로 알게 되었다. 최근 수년 전 놓고 살았던 소설이 땡겨서 몇 권 읽어본 김에 검색해 보니, '책'에 관한 신예 작가들의 단편소설들을 엮은 선집이 두 권 보였다.

한 권은 [책에 갇히다](2021).
전자문명의 발달로 인해 '코덱스' 형태의 네모난 '책'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아직 '책'이라는 물질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세대가 살아있다. 같은 세대라도 신문명 적응이 빠른 사람들은 어느새 빠르게 고전적 '책'을 폐기처분했겠지만, 나 같은 문명 부적응자는 마치 총포 앞에 검을 들고 선 사무라이처럼 무모하게 '책'이란 물질을 한 손에 집고 버틴다.

이처럼, 1,700년 역사와 전통의 '코덱스'로서 '책'을 지키는 건 일종의 문명전쟁의 성격도 있다. 그래서 [책에 갇히다]라는 주제로 모인 신예 소설가들의 영역은 대부분 SF다. 그렇다고 과학적이고 미래주의적이지만은 않다. 기왕에 닥쳐오기 시작한 '코덱스'와 물질적 '책'의 종말 앞에서 진정한 '책'을 찾기 위해 먼 길을 떠나지만 결국 오래전 그대로의 '책'을 찾지는 못하는 내용들이다. 물론 예상하다시피 물질적 '책'을 찾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할 앞으로의 미래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진정한 '책'이 무엇일지 현재에 고민해 보자는 시도들로 가득하다. 전통적 형태의 '코덱스'로서 '책'에 갇혔지만, 그 '책'은 진정하고도 보편적인 '책'으로서 앞으로도 인류와 함께할 진리의 보고를 의미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한, 
'책'은 영원하다.

'책'에 갇혔으니, 이제 나올 시간이다.
[책에서 나오다](2022)는 아예 대놓고 SF다. 주제 또한 'SF 작가의 고전 SF 오마주'로 잡았다. 신예 SF 작가들에게 주제를 던져주고 고전 SF 한 권을 선정하여 이와 관련한 SF 오마주 소설을 쓰게 해서 모았다. 예를 들어 전혜진 작가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을 뽑아 19세기 가부장제가 양산한 억압된 여성이라는 '괴물'을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또는 메리 셸리의 당시 일상으로 재구성하면서 보여준다. [프랑켄슈타인]에서 진짜 '괴물'은 피조물이 아니라 자신을 신문명 창조자로서 '프로메테우스'라고 믿었던 인간들의 확신과 오만이었다.

결국, [책에 갇히다]에서 [책에서 나오다]의 기획 속에서 나는 '책'의 영원성을 본다.

우리가 '갇혔던' 책은 '진리'와 동일자인 보편으로서의 '책'이었다.
한편, 우리가 '나오고'자 한 책은 결코 보편자로서의 '책'이 아닌, 개별적인 고전 SF 소설에서 그린 인류의 기존 문명이었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1,700년 동안 익숙했던 '코덱스'는 언젠가 사라질지라도,
현재 문명의 개별성을 극복하고 '나오면서'  보편적 진리의 담지자이자 전달자로서의 '책'에는 '갇힐' 수 밖에 없는 인류의 운명을 이야기한다.


3.

"스크립타 마네트(Scripta manet),
베르바 볼라트(Verba volat)"

중세 시대만 해도 '독서'는 눈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입으로 소리내어 암송을 동시에 해야 했단다.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라 '신의 말씀'을 함께 읽고 들어야 했기 때문인데, 구텐베르크 인쇄 혁명을 통해 '문자'를 다수가 공유한 이후로 독자들은 어디에서든 혼자서도 조용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글로 쓰여진 것은 영원히 남고, 말로 표현된 것은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Scripta manet, verba volta)"는 라틴어 문구는 원래, 중세 암송 시대에는 "글은 조용히 죽은 것이고, 말은 생생히 날아오른다"는 의미였다지만, 근대 이후 묵독 시대에는 "글은 영원히 남고, 말은 공허히 날아간다"는 뜻이 되어 '지식'을 공유함에 '문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장이 되었다.

[독서의 역사]를 쓴 알베르토 망구엘에 의하면, 책은 '간단한 도구의 상징적 의미보다 훨씬 복잡한 상징적 의미를 독서가에게 부여'함으로써, '무지, 맹신, 지성, 기만, 교활함, 그리고 계몽을 통해 책읽는 사람은 원전과 똑같은 단어로 그 텍스트를 다시 쓰면서도 원본과는 다른 이름으로 재창조'한다고 말한다.
인류의 모든 문명은 문자로 남고 독자들은 다양한 상상력으로 그 문명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퇴행시키기도 하지만 말이다.

인류와 '책'의 관계는 바로 이거다.
다수의 읽기와 쓰기를 통해 다양해지는 진리 추구로 소수의 지식과 정보 독점을 해체해 온 역사.

설령 '책'이라는 네모진 물질이 한 손에 착 감기는 그립감이 결국에 사라지고 말지언정,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온다는 역사에서도 진정한 '책' 찾기는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책'에 갇히고 만다.

***

1. [책에 갇히다], '책과 서점에 관한 SF 앤솔로지', <구픽>, 2021.
2. [책에서 나오다], SF 작가의 고전 SF 오마주, <구픽>, 2022.
3. [독서의 역사(A History of Reading)](1996), 알베르토 망구엘, 정명진 옮김, <세종>,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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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 -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신체적 유물론
테리 이글턴 지음, 전대호 옮김 / 갈마바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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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胃腸)의 유물론(唯物論)
- [철학자의 뱃속], 미셸 옹프레, 1989.


"인간 주체는 항상 어느 정도 자기 자신에게 낯선 자, 자신이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힘들에 의해 구성된 자다. 바로 이것이 유물론의 주장이다."
- [유물론], <유물론들>, 테리 이글턴, 2016.


영국의 문화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현재까지 "마르크스주의가 옳다"는 명확한 당파성을 고수하는 '유물론자'다.
그에 따르면 고전적 유물론의 주장, 즉 '물질'이 '정신'보다 우선한다는 것은 기본 전제이기는 하나, 기계적 유물론을 넘어서야 한다. 

20세기 초 레닌은 '정신' 또한 '뇌'라는 '물질'이 만들어낸 '최고 수준의 물질적 산물'이라는 식의 극단적 주장을 했는데, 사실 엄밀히 따진다면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 여부는 명확하지 않은 주장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철학적 관점으로는 다분히 이분법적이고 기계적인 유물론이다.

테리 이글턴의 '유물론'은 현대 철학에서 니체,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 마르크스 등을 통해 '인간의 생체'가 중심이 되는 '신체적 유물론(Somatic Materialism)'으로 발전된다. 
그의 '철학 전장'에서는 '근본적인 사안들에서조차 합의에 이를 수 없는' 근대성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인해 인간의 욕망과 생체 모두를 아우르는 '신체적 유물론'만이 대안이 된다. 

과장을 섞으면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기독교적 관념론을 다른 편으로 하면서 한편으로는 '육체적, 성적 관계'를 가미한 그리스 신화의 '신체적 유물론' 같다.
과학의 발전을 철학적으로 반영하고자 했지만 뉴턴식의 전통적 물리역학을 초월한 현대적 양자역학에 놀란 전통적 유물론자들의 갈짓자 행보를 보면 그리스 신화의 비일관성과 일면 유사하다.

철학의 동력 또한,
모순과 비동일성 및 비일관성인 것이다.

그럼에도, 복잡한 '철학' 논쟁의 본질은 결국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이며, 그 극단을 이루는 질문은 세계 존재의 기원은 무엇인가'이다.


"음식학은 초월적인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몸이 살고 있는 이 내재적 세계를 설명하는 형이상학이자 실천적 '무신론이 된다. 육체는 이제 지식의 새로운 미학을 위해 나선다. 니체적 미식철학은 이 새로운 대륙(무신론)을 향한 통로가 될 것이다."
- [철학자의 뱃속], <6. 반기독교적 소시지 - 니체>, 미셸 옹프레, 1989.


프랑스 철학자 미셸 옹프레는 니체주의자다.
즉, 무신론자이자, 세계의 근원 같은 객관적 요소에 대한 근본문제 보다는 그 세계 앞에 우뚝 선 인간의 신체와 욕망 같은 주체적 요소가 그들 철학의 계보학적 테마다.

'세계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의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변을 과학이 이어받은지 오래되었으니, 철학은 더 이상 그런 문제에 골몰할 것 없이 인간 사유의 근원인 신체에 주목하자는 현대 서양철학의 흐름이다. 
이러한 철학의 시작은 19세기 말에 망치를 들고 견고한 객관적 세계체제를 깨부수며 세계운동의 필연성을 어떤 식으로든 부여하고자 하는 '신' 자체를 부정한 니체의 '무신론'이었다. 세계의 보편적 '필연성' 또는 그런 거대한 법칙과 모종의 프로그램은 기독교 같은 종교는 물론 종교와 철학의 내용이 동일하다던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 뿐만 아니라 관념론을 거꾸로 뒤집으며 현실적 유물론을 주장한 마르크스주의 또한 끝내 탈피하지 못한 궁극의 패러다임이자 최대강령이었다.

역사 속 사건들의 우연성은 객관적 세계의 물질적 운동의 필연성을 드러내는 변증법적 관계의 실현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의 근간이다. 
19세기 말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지금보다 더욱 강고했을 유럽에서 무신론은 미친놈의 다른 말이었을 텐데, 마르크스주의 유물론보다 한 발 더 나간 니체의 무신론은 당대에는 어떠했을지 몰라도 이후 미셸 푸코나 미셸 옹프레를 비롯한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의 화두가 된다. 
주체적 욕망의 무신론이다.

그 중 한 명의 니체 추종자 미셸 옹프레가 1989년에 출간한 [철학자의 뱃속]은 형이상학으로서의 철학을 거부한다. 
세계를 탐구하는 최고의 학문이라 자처하는 철학의 비현실적인 초월성을 탈피하고 현실에 천착하기 위한 또 하나의 시도다. 
신이라는 보편적 거대 정신이나 개인이라는 개별적 주체가 우선이 아니라 주체 외부의 객관적 물질세계의 일차성을 주장하는 유물론과 다른 방향이기는 하지만 음식과 신체라는 감각적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보면 현대적인 '신체적 유물론'의 일종이기도 하다. 

니체식의 극렬과격 무신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물질운동과 세계역사의 필연성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 무신론은 무신론도 아닐테고,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적 변증법의 입장에서는 세계운동의 경향성과 법칙성을 부정하는 니체의 무신론은 유물론이 아니기에, 
마르크스주의와 니체주의는 섞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영국의 테리 이글턴이나 프랑스의 미셸 옹프레는 '신체적 유물론'이라는 신유물론의 범주 속에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유물론과 현대적 니체주의 욕망철학을 화해시키고 있다. 
물론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하다는 미셸 옹프레와 달리 테리 이글턴은 니체주의자는 아니지만.


"인간은 곧 그가 먹는 것이다. 
감각기관을 따르라! 
감각이 시작하는 곳에서 종교와 철학은 멈춘다."
- 루드비히 포이어바흐, [철학적 선언].


[철학자의 뱃속] 서문격인 <1. 철학의 식생활>에서 저자 미셸 옹프레는 헤겔의 관념론적 절대정신을 뒤집어 인간적 유물론을 처음으로 개시한 근대철학자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의 저서 [철학적 선언]의 문구를 인용한다. 인간의 감각을 우선으로 따르면 기존의 사상이 뒤집어지며, 식생활이라는 감각적 행위가 인간을 규정한다는 유물론적 '선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음식'은 신체적 유물론에서 피해갈 수 없는 주제가 된다. 아마도 식욕은 물론 성욕 같은 인간 주체의 일차적 욕망이 현대적 유물론의 주요한 테마가 되는 것일텐데, 옹프레는 음식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철학자들의 뱃속과 위장을 들여다 본다.


고대 그리스 견유학파 디오게네스나 근대 유물론의 시조격인 루소, 이탈리아 미래주의자 마리네티 등은 지향하는 바는 각자 다를지언정 당대 문명을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디오게네스의 날고기 및 채소 그대로의 생식과 루소의 우유예찬 및 채식주의, 마리네티가 주창한 이탈리안 파스타 전통 식문화 폐지 운동이 그것이다. 
견유학파는 당시 그리스 문명을 부정하는 행위에 집착했기에 길거리에서 성교하고 인간의 내장을 썰어먹는 개같은 철학자가 되었다.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한 소박한 루소는 평화적인 채식주의를 강조했지만 그의 자연주의와 사회계약설은 수백년 후 히틀러식 채식주의를 예견하지 못했다. 육류를 안 먹는 인간도 충분히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마리네티는 이탈리아의 '미래'를 위해 수입밀로 만든 파스타는 이제 그만 좀 먹고 내수품목인 쌀을 장려하자고 주장했지만 운동의 성과는 무솔리니 파시즘의 몫이 되었다.

그 외 간소한 음식을 선호했으나 술을 항상 입에 달고 살았다는 칸트, 현재의 문명국과 미래의 조화국 간 음식전쟁 따위를 쓸데없이 연구하고 장황하게 서술한 공상적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 이야기는 그냥 그 철학자들의 경건했던 주요 사상 외에 이런 개인사도 있다는 식의, 저자 미셸 옹프레의 잡글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그의 잡글은 신체적 욕망을 부정하고 고귀한 사변을 즐긴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의 플라톤적 철학 전통을 설명해주는데, 가재와 조개, 굴 같은 갑각류를 혐오했던 사르트르가 결국 스스로 소설 속에서 갑각류가 되어 죽어갔다는 식의 이야기를 통해 사르트르의 일상과 사상 사이의 모순적 실존주의를 꼬집고자 한 듯 하지만, 글쎄 별 감흥은 없다. 

미셀 옹프레에게 중요한 철학자인 니체의 식생활을 보더라도, 니체가 게르만식의 기름진 식사를 증오하고 가벼운 소시지와 햄을 어머니한테 항상 주문했지만 그래도 실제로는 기름진 고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통해 철학자들의 사상적 관념론과 위장적 유물론 사이에는 모순과 비일관성이 가득하더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닌가 싶다.


이쯤 되면 이제 알 것 같다.
니체주의자 미셸 옹프레가 철학자들의 뱃속을 들여다 보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음식이라는 일차적이고 물질적인 매개를 통해,
신체적 유물론과 인간 주체의 욕망을 혼합하려는 시도.
철학자라는 인간의 뱃속 위장을 열어보며,
초월적 형이상학을 탈피하고자 노력하지만 결국 이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철학의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

이른바,
위장(胃腸)의 유물론(唯物論).

그럼에도,
인류의 철학은 시지프스의 숙명처럼,
다시 굴러내려올 것을 알면서도 계속 운명의 바위를 굴리며 언덕을 오른다.

***

1. [철학자의 뱃속(Le Ventre des Philosophes)](1989), 미셸 옹프레(Michel Onpray), 이아름 옮김, <불란서책방>, 2020.
2. [유물론(Materialism)](2016),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전대호 옮김, <갈마바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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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뱃속
미셸 옹프레 지음, 이아름 옮김 / 불란서책방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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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胃腸)의 유물론(唯物論)
- [철학자의 뱃속], 미셸 옹프레, 1989.


"인간 주체는 항상 어느 정도 자기 자신에게 낯선 자, 자신이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힘들에 의해 구성된 자다. 바로 이것이 유물론의 주장이다."
- [유물론], <유물론들>, 테리 이글턴, 2016.


영국의 문화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현재까지 "마르크스주의가 옳다"는 명확한 당파성을 고수하는 '유물론자'다.
그에 따르면 고전적 유물론의 주장, 즉 '물질'이 '정신'보다 우선한다는 것은 기본 전제이기는 하나, 기계적 유물론을 넘어서야 한다. 

20세기 초 레닌은 '정신' 또한 '뇌'라는 '물질'이 만들어낸 '최고 수준의 물질적 산물'이라는 식의 극단적 주장을 했는데, 사실 엄밀히 따진다면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 여부는 명확하지 않은 주장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철학적 관점으로는 다분히 이분법적이고 기계적인 유물론이다.

테리 이글턴의 '유물론'은 현대 철학에서 니체,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 마르크스 등을 통해 '인간의 생체'가 중심이 되는 '신체적 유물론(Somatic Materialism)'으로 발전된다. 
그의 '철학 전장'에서는 '근본적인 사안들에서조차 합의에 이를 수 없는' 근대성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인해 인간의 욕망과 생체 모두를 아우르는 '신체적 유물론'만이 대안이 된다. 

과장을 섞으면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기독교적 관념론을 다른 편으로 하면서 한편으로는 '육체적, 성적 관계'를 가미한 그리스 신화의 '신체적 유물론' 같다.
과학의 발전을 철학적으로 반영하고자 했지만 뉴턴식의 전통적 물리역학을 초월한 현대적 양자역학에 놀란 전통적 유물론자들의 갈짓자 행보를 보면 그리스 신화의 비일관성과 일면 유사하다.

철학의 동력 또한,
모순과 비동일성 및 비일관성인 것이다.

그럼에도, 복잡한 '철학' 논쟁의 본질은 결국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이며, 그 극단을 이루는 질문은 세계 존재의 기원은 무엇인가'이다.


"음식학은 초월적인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몸이 살고 있는 이 내재적 세계를 설명하는 형이상학이자 실천적 '무신론이 된다. 육체는 이제 지식의 새로운 미학을 위해 나선다. 니체적 미식철학은 이 새로운 대륙(무신론)을 향한 통로가 될 것이다."
- [철학자의 뱃속], <6. 반기독교적 소시지 - 니체>, 미셸 옹프레, 1989.


프랑스 철학자 미셸 옹프레는 니체주의자다.
즉, 무신론자이자, 세계의 근원 같은 객관적 요소에 대한 근본문제 보다는 그 세계 앞에 우뚝 선 인간의 신체와 욕망 같은 주체적 요소가 그들 철학의 계보학적 테마다.

'세계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의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변을 과학이 이어받은지 오래되었으니, 철학은 더 이상 그런 문제에 골몰할 것 없이 인간 사유의 근원인 신체에 주목하자는 현대 서양철학의 흐름이다. 
이러한 철학의 시작은 19세기 말에 망치를 들고 견고한 객관적 세계체제를 깨부수며 세계운동의 필연성을 어떤 식으로든 부여하고자 하는 '신' 자체를 부정한 니체의 '무신론'이었다. 세계의 보편적 '필연성' 또는 그런 거대한 법칙과 모종의 프로그램은 기독교 같은 종교는 물론 종교와 철학의 내용이 동일하다던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 뿐만 아니라 관념론을 거꾸로 뒤집으며 현실적 유물론을 주장한 마르크스주의 또한 끝내 탈피하지 못한 궁극의 패러다임이자 최대강령이었다.

역사 속 사건들의 우연성은 객관적 세계의 물질적 운동의 필연성을 드러내는 변증법적 관계의 실현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의 근간이다. 
19세기 말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지금보다 더욱 강고했을 유럽에서 무신론은 미친놈의 다른 말이었을 텐데, 마르크스주의 유물론보다 한 발 더 나간 니체의 무신론은 당대에는 어떠했을지 몰라도 이후 미셸 푸코나 미셸 옹프레를 비롯한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의 화두가 된다. 
주체적 욕망의 무신론이다.

그 중 한 명의 니체 추종자 미셸 옹프레가 1989년에 출간한 [철학자의 뱃속]은 형이상학으로서의 철학을 거부한다. 
세계를 탐구하는 최고의 학문이라 자처하는 철학의 비현실적인 초월성을 탈피하고 현실에 천착하기 위한 또 하나의 시도다. 
신이라는 보편적 거대 정신이나 개인이라는 개별적 주체가 우선이 아니라 주체 외부의 객관적 물질세계의 일차성을 주장하는 유물론과 다른 방향이기는 하지만 음식과 신체라는 감각적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보면 현대적인 '신체적 유물론'의 일종이기도 하다. 

니체식의 극렬과격 무신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물질운동과 세계역사의 필연성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 무신론은 무신론도 아닐테고,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적 변증법의 입장에서는 세계운동의 경향성과 법칙성을 부정하는 니체의 무신론은 유물론이 아니기에, 
마르크스주의와 니체주의는 섞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영국의 테리 이글턴이나 프랑스의 미셸 옹프레는 '신체적 유물론'이라는 신유물론의 범주 속에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유물론과 현대적 니체주의 욕망철학을 화해시키고 있다. 
물론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하다는 미셸 옹프레와 달리 테리 이글턴은 니체주의자는 아니지만.


"인간은 곧 그가 먹는 것이다. 
감각기관을 따르라! 
감각이 시작하는 곳에서 종교와 철학은 멈춘다."
- 루드비히 포이어바흐, [철학적 선언].


[철학자의 뱃속] 서문격인 <1. 철학의 식생활>에서 저자 미셸 옹프레는 헤겔의 관념론적 절대정신을 뒤집어 인간적 유물론을 처음으로 개시한 근대철학자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의 저서 [철학적 선언]의 문구를 인용한다. 인간의 감각을 우선으로 따르면 기존의 사상이 뒤집어지며, 식생활이라는 감각적 행위가 인간을 규정한다는 유물론적 '선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음식'은 신체적 유물론에서 피해갈 수 없는 주제가 된다. 아마도 식욕은 물론 성욕 같은 인간 주체의 일차적 욕망이 현대적 유물론의 주요한 테마가 되는 것일텐데, 옹프레는 음식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철학자들의 뱃속과 위장을 들여다 본다.


고대 그리스 견유학파 디오게네스나 근대 유물론의 시조격인 루소, 이탈리아 미래주의자 마리네티 등은 지향하는 바는 각자 다를지언정 당대 문명을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디오게네스의 날고기 및 채소 그대로의 생식과 루소의 우유예찬 및 채식주의, 마리네티가 주창한 이탈리안 파스타 전통 식문화 폐지 운동이 그것이다. 
견유학파는 당시 그리스 문명을 부정하는 행위에 집착했기에 길거리에서 성교하고 인간의 내장을 썰어먹는 개같은 철학자가 되었다.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한 소박한 루소는 평화적인 채식주의를 강조했지만 그의 자연주의와 사회계약설은 수백년 후 히틀러식 채식주의를 예견하지 못했다. 육류를 안 먹는 인간도 충분히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마리네티는 이탈리아의 '미래'를 위해 수입밀로 만든 파스타는 이제 그만 좀 먹고 내수품목인 쌀을 장려하자고 주장했지만 운동의 성과는 무솔리니 파시즘의 몫이 되었다.

그 외 간소한 음식을 선호했으나 술을 항상 입에 달고 살았다는 칸트, 현재의 문명국과 미래의 조화국 간 음식전쟁 따위를 쓸데없이 연구하고 장황하게 서술한 공상적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 이야기는 그냥 그 철학자들의 경건했던 주요 사상 외에 이런 개인사도 있다는 식의, 저자 미셸 옹프레의 잡글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그의 잡글은 신체적 욕망을 부정하고 고귀한 사변을 즐긴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의 플라톤적 철학 전통을 설명해주는데, 가재와 조개, 굴 같은 갑각류를 혐오했던 사르트르가 결국 스스로 소설 속에서 갑각류가 되어 죽어갔다는 식의 이야기를 통해 사르트르의 일상과 사상 사이의 모순적 실존주의를 꼬집고자 한 듯 하지만, 글쎄 별 감흥은 없다. 

미셀 옹프레에게 중요한 철학자인 니체의 식생활을 보더라도, 니체가 게르만식의 기름진 식사를 증오하고 가벼운 소시지와 햄을 어머니한테 항상 주문했지만 그래도 실제로는 기름진 고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통해 철학자들의 사상적 관념론과 위장적 유물론 사이에는 모순과 비일관성이 가득하더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닌가 싶다.


이쯤 되면 이제 알 것 같다.
니체주의자 미셸 옹프레가 철학자들의 뱃속을 들여다 보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음식이라는 일차적이고 물질적인 매개를 통해,
신체적 유물론과 인간 주체의 욕망을 혼합하려는 시도.
철학자라는 인간의 뱃속 위장을 열어보며,
초월적 형이상학을 탈피하고자 노력하지만 결국 이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철학의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

이른바,
위장(胃腸)의 유물론(唯物論).

그럼에도,
인류의 철학은 시지프스의 숙명처럼,
다시 굴러내려올 것을 알면서도 계속 운명의 바위를 굴리며 언덕을 오른다.

***

1. [철학자의 뱃속(Le Ventre des Philosophes)](1989), 미셸 옹프레(Michel Onpray), 이아름 옮김, <불란서책방>, 2020.
2. [유물론(Materialism)](2016),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전대호 옮김, <갈마바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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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24-05-12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eatrice1007님, 이 책 처음 알게 된 책인데, 재미있어 보이는데 별 두 개밖에 안 주신 이유는 beatrice1007님께서 니체를 별로 안 좋아하시기 때문인가요? ^^

beatrice1007 2024-05-26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니체는 별로라서가 맞습니다. ^^;;
 
어느 노동자의 모험 -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선
배명은 외 지음 / 구픽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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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프롤레타리아 장르'라니.
- [어느 노동자의 모험], 이서영 외, 2024.


그림 하나를 보았다.

미술사학자 이진숙 선생의 [시대를 훔친 미술](2015)을 읽다가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펠리차 다 볼페노가 1901년에 그린 '제4계급'이라는 미술 작품을 우연히.

수많은 노동자 군대가 서서히 걸어오는 장면인데 카라바조 풍의 명암대비법인 '키아로스쿠로' 같은 효과 속에서 선두의 대열은 어둠으로부터 광명깃든 역사의 무대로 서서히 걸어나오는 장면이라는 해설을 읽었다.

'제4계급'이라는 말을 나는 처음 들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을 이끈 부르주아가 왕족 또는 귀족의 '제1계급'과 성직자의 '제2계급'에 상대적인 '제3계급'으로 불렸고, 당시 다수였던 농민과 소수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혁명의 배경에 불과했다는 말은 익히 들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최종적으로 농촌에서 쫓겨난 도시 노동자들이 다수가 되면서 산업혁명의 토대 위에서 생산의 주역이 되었고, 마르크스는 이 대다수 산업노동자 계급에게 혁명의 주체로서의 역사적 사명을 부여했다. 이제 다수 노동계급은 인류 역사에서 계급 자체를 철폐해야 할 주인공이 된 것이다.
아마도 자본주의를 끝으로 계급사회에 종말을 고하는 혁명의 주체가 되었기에 노동계급은 오래전 부르주아 혁명을 선도한 '제3계급'에 대비되는 이른바 '제4계급'이 되었을 게다.

어둠에서 밝은 광장으로 나오는 선두 대열에는 노동 지도자 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 같은 어머니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 같은 어린아이도 있다. 이는 이 세계의 미래를 선도하리라 믿었던 20세기 초 혁명적 열망의 아이콘이기도 하단다.

'20세기 소년'이면서 노동자의 아들인 내게도 '프롤레타리아'로 규정되던 노동계급은 불평등한 자본주의를 변화시키는 주역이었다.


페이스북을 보다가 우연히 알게 된 소설이 있다.

[어느 노동자의 모험]이라는 모호한 제목이지만, 부제가 무려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선'이라는,
내게는 어마무시한 영감을 주는 소설집이다.

이 정도 되면, 둘 중 하나로 감이 오게 마련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 만연한 비정규/불안정 노동 현실을 고발하는 참혹한 르포르타주이거나, 아니면 아예 현실배경을 잠시 떠나 판타지로 현실을 비꼬는 유쾌발랄한 도발이거나.
책의 표지 그림을 보면 유쾌발랄 '노동판타지'로 추정되는데, 나 또한 페이스북에서 이 책을 소개한 어느 페친처럼, '프롤레타리아 장르'라는 과감한 선언 뿐만 아니라 이 20세기적 포스터에도 강렬하게 끌리게 되었다.


1970년대의 황석영,
1980년대의 방현석,
1990년대의 김소진,

오래전에 소설을 쓰고 싶던 내가 매달린 '사실주의' 형식이나 '노동전위' 내용 같은 것들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황석영과 방현석, 그리고 김소진 같은 소설가들을 우리 소설사에서 최고의 '리얼리스트'들로 꼽았고 지금도 그 판단에는 변함이 없지만, 세기말을 지나 21세기 벽두에 선 나는 그들처럼 글을 쓰지 못했다. 서른살 중반까지도 매년 초 찾아 읽던 각종 문학상 수상작들은 더 이상 지금 이 현실을 그대로 배경삼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된지 오래였다.
그렇게 '소설'은 내게서 멀어져 갔다.

중년인 지금 아주 오랫만에 읽은 소설들도 대부분 가상의 '판타지'였다.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선] 또한 이를테면 일종의 '노동판타지'다.

배명은 작가의 <삼도천 뱃사공 파업 연대기>는 조선소 파업에 참여한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가 사고로 바다에 빠져 죽어 저승 가는 길에 착취당하는 카론 같은 뱃사공들의 파업을 돕는 이야기.

은림 작가의 <카스테라>는 제빵 노동자를 갈아먹은 거대한 괴물기계의 산재사고가 배경이지만, 어쩌면 열악한 노동환경에서도 꿈을 쫓는 어느 제빵사의 소소한 이야기.

이서영 작가의 <노조 상근자가 여주 인생 파탄 내는 악녀로 빙의함>은 로맨틱판타지 여주인공의 신데렐라 이야기를 노동판타지로 뒤바꿔 버리려다가 종국의 반전을 맞는 일본식 '라이트 노벨(Light Novel)'류의 이야기.

구슬 작가의 <슈퍼 로봇 특별 수당>은 근미래의 반체제 변혁운동가 이야기로 가는 듯 하더니 결국은 성소수자 퀴어 이야기.

전효원 작가의 <살처분>은 전북 김제의 시골마을 살인사건 추리소설 같이 시작하더니 결국 이주노동자 이야기.

다섯 종의 이야기 모두 노동과 인권, 소수자 이야기를 무려 '프롤레타리아 장르'로 잘 엮어내었다.

그 중 백미는 이서영 작가의 <노조 상근자가 여주 인생 파탄 내는 악녀로 빙의함>인데, 
읽는 내내 나도 저런 소설 한 번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얼리즘'이 꼭 팍팍한 지금의 현실을 배경으로 한 르포르타주일 필요는 없다는 정도는 이제, 나도 안다. 언젠가 나도 나만의 '프롤레타리아 장르' 소설을 써보고 싶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직 지금 이 현실을 벗어나 가상현실로 나아갈 엄두가 나지는 않는다.

언제쯤 나도 주세페 다 볼페노의 '제4계급'처럼 '리얼리즘'의 어둠으로부터 '판타지'의 환하고 발랄한 광장으로 나올 수 있을까.

소설이란 결국 '이야기'인 것이고,
모든 '이야기'는 결국 다 '판타지'일텐데 말이다.

***

- [어느 노동자의 모험 :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선], 배명은/은림/이서영/구슬/전효원, <구픽>,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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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훔친 미술 -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
이진숙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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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 담긴 '인문학'적 서사의 힘
- [시대를 훔친 미술], 이진숙, 2015.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든 인간적인 것에 대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인간적인 것',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힘들어졌어도 우리는 해야 한다. 이 사고를 멈추는 순간, '인문학'적 성찰이 소멸하는 순간, 우리는 그저 '인간'이라는 이름의 동물이 될 뿐이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 결국 우리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 [시대를 훔친 미술], <'세계의 살'을 다루는 예술, 인간 자취로서의 예술사>, 이진숙, 2015.


미술사는 내게 '놀이터'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별다른 취미나 특기가 없는 나는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글쓰기 행위를 일종의 혼자서도 잘 노는 '놀이'로 규정하게 되었는데, 그 중 그림을 좋아해서 '미술사'는 읽고 또 읽어도 물리지 않는 분야이기에 '미술사'가 나에게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뛰어노는 '놀이터'가 된 것이다.

인류에게 문자가 정착되기 전에는 태초에 '말', 즉 언어가 있었다. 수백만년 인류 역사에서 문자의 역사가 5천년이라면 나머지 그 이전의 더 길고 긴 시간은 말로 전해지는 '이야기'의 시간이었다. 그 중 또 몇 만년은 아마도 그림으로 이야기를 전하고 남긴 시간이었으리라.

미술의 역사, 즉 미술사에 담긴 이야기들이 수만년 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미술사 또한 여느 인문주의적 행위와 같이 '이야기'의 역사다. 지금껏 그림과 의미, 나아가 '문자'와 '문헌'을 통해 해석되는 미술사를 이끈 것은 '서사'의 힘이다.

미술사에서도 또한 '인문주의'는 필수 불가결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구텐베르크의 활자혁명 덕분이었다. 개신교가 문자를 선택했다면, 가톨릭은 미술의 강력한 힘을 다시 불러냈다. 가톨릭의 '반(反)종교개혁'은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교회의 권위와 영광을 드높이는 화려한 '바로크 미술'이 꽃피게 된 것이다."
- [시대를 훔친 미술], <5. 反종교개혁과 바로크 미술>, 이진숙, 2015.


미술사학자 이진숙 선생은 [시대를 훔친 미술](2015)에서 미술 작품들이 담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전한다.

미술 작품은 '시각 예술'로 분류되는데, 예술은 인류의 언어나 이론만이 아닌 실제 삶 자체를 포괄한다는 의미에서 미술은 '세계의 살'을 다룬다고 저자는 말한다. 언어 외의 다른 방식으로 인류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미술 작품들의 이야기는 중세의 신학적 세계관을 깨고 신 앞에 홀로 서게 된 근대적 '개인'의 발견으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전에 15세기 구텐베르크의 문자적 인쇄혁명이라는 '인문학'적 배경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 중세 가톨릭의 억압에 대항하면서 중세적 세계관에 균열을 냈던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등 대규모 농민반란과 함께한 종교개혁운동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루터가 교황의 면벌부(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95개조 반박문'과 성경의 독일어 번역을 통해 종교개혁에 성공한 배경에는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이라는 강력한 동력이 있었다. 라틴어 독점이 아닌 독일어와 각종 언어로 성경이 인쇄되었을 때, 신은 성직자와 귀족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도 다가왔다. 

저자는 미술사 이야기를 다루지만, '예술사조'를 테마로 삼지는 않는다. 
미술 비전공자인 나는 처음에는 예술사조의 도식을 통해 미술 작품들을 분류했다. 아마도 일반인이 예술사를 이해하기에는 도식적이기는 해도 간편한 방법이겠다. 

그렇게 나는,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통해 '모더니즘'의 승리를 보았고,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통해  '낭만주의'적 혁명을 읽었으며,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를 읽으며 '인상주의'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미술 작품을 보면 어느 시대의 어느 사조로 분류될 수 있는지 혼자 가늠해 보고는 한다.

[시대를 훔친 미술]은 예술사조를 강조하지는 않지만 14~16세기 근대 르네상스로부터 17세기 '바로크'와 18세기 '로코코' 양식, 19세기 고대 그리스의 재발견을 통해 등장한 '신고전주의' 아카데미즘과 이에 반발한 '인상주의' 및 이후 20세기 초 현대 미술 이야기를 유럽의 세계사 이야기와 함께 엮으면서 이어간다.

16세기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1536~1541)은 신교에 맞서 구교를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이후 17세기에 등장한 '바로크'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이어가던 신교의 '문자'에 대항한 구교의 '미술'적 무기였다. 
19세기의 '인상주의'는 기교의 혁명을 통해 시각 예술의 범주를 넓혔다. 
이제 인류는 이상적으로 고정화된 이미지 뿐만 아니라 빛의 움직임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변화하는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19세기 말, 미술사는 '인상주의'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세잔의 후기 인상주의와 야수파, 미래파, 피카소의 입체파 등의 모티브는 바로 '인상주의'다.


"인상주의는 젊은 세대에게 큰 교훈을 남겼다. 방법론적 혁신이 성공의 필수요소라는 점이었다. 방법의 다양화는 피할 수 없는 덕목이 되었다."
- [시대를 훔친 미술], <14. 인상주의가 그린 장미빛 인생>, 이진숙, 2015.


[시대를 훔친 미술]이 '사실주의'나 '낭만주의' 같이 예술사조에서 중요한 계기들을 언급하지 않은 점은 저자의 미술사가 예술사조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증거다.

미술이 훔친 시대의 역사는 '예술사조'의 '도식'이라기 보다는, "좋은 시대에도 나쁜 미술이 나올 수 있고 나쁜 시대에도 좋은 미술이 나올 수 있다"(같은 책)는 우리 삶 속 미술의 이야기다.


"르네상스 이후 발전해 온 회화의 핵심 개념은 세계의 '재현'이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완벽하게 캔버스 위에 구현하는 것이 그림의 목표였다... 인상주의와 그것을 넘어서려는 피카소의 도전,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포착하려는 미래파 모두가 이 목표에 봉사하고 있었다."
- [시대를 훔친 미술], <17. 들끓는 친부 살해의 욕망들>, 이진숙, 2015.


구상주의적이고 추상주의적인 현대 미술은 더 이상 사진 같이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사진 없던 시절 사진 같던 '트롱프뢰유'나 명암대비 배경의 연극 같은 '카이로스쿠로' 같은 기법은 사실의 재현이 아닌 극적인 기법일 뿐이었다. 그저 우리가 사실이 그러할 것으로 바라는 이상적 기대에 불과했을는지 모른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얀 페르메이르가 그린 그림은 얼핏 보면 매우 사실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실은 평범한 일상을 최대한 이상화한 개신교적 접근에 불과할 수 있다. 더 이상 종교화가 아닌 일반 민증의 일상이 최초로 예술화되는 근대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시대를 훔친 미술] 이야기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현대 미술은 여기서 더 나아가 그래도 세계를 그대로 재현해보고자 했던, 심지어 피카소의 기괴한 입체주의 조차도 벗어나지 못했던 '정통 미술'이라는 '아버지'를 '살해'하고자 했다. 예술 또한 역사 일반과 같이 자기를 낳은 '친부'를 죽이고 넘어서면서 혁신된다. 
[시대를 훔친 미술]은 이러한 역사를 '친부 살해의 욕망'(같은책, <17장>)이라 표현한다.

인류 역사의 모든 서사를 담고 있는 미술사 또한 '혁신'을 빼고는 이어질 수 없는 이야기다. 

미술사 이야기를 통해서도 새삼 다시 읽게 되는 서사의 힘이다. 
이야기로 이어지는 미술사 또한 '인문학'인 것이다.

그렇게,
무궁무진한 미술사 이야기는 언제까지나 '주간 문사철'의 놀이터'가 된다.

***

1. [시대를 훔친 미술], 이진숙, <민음사>, 2015.
2.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1950), 에른스트 곰브리치, 백승길/이종숭 옮김, <예경>, 2003.
3.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Social History of Art)](1951), 아르놀트 하우저, 백낙청/염무웅 외 옮김, <창비>, 1974~2016.
4. [서양미술사], 진중권, <휴머니스트>, 2008~2016.
5. [시각예술의 의미(Meaning in the Visual Arts)](1955), 에르빈 파노프스키, 임산 옮김, <한길사>, 2013.
6. [미술사의 기초개념(Kunstgeschichtliche Grundbegriffe)](1915), 하인리히 뵐플린, 박지형 옮김, <시공사>, 1994~2016.
7. [뜻밖의 미술관], 김선지, <다산북스>, 2023.
8. [루터, 브랜드가 되다(Brand Luther)](2015), 앤드루 페트그리, 김선영 옮김, <이른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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