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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지음, 이용대 옮김 / 한겨레출판 / 2003년 1월
평점 :
'네미'로 돌아왔을 때 이미 그곳에 '왕'은 없었으나
- [황금가지], 제임스 프레이저, 1890~1915.
1.
'목생화(木生火)'
아버지는 삼형제 중 둘째였다. 아버지 삼형제의 성함은 모두 '동(東)'으로 끝난다. 삼형제로부터 나온 아들은 큰아버지댁 외아들인 사촌형과 둘째네 외아들인 나, 이렇게 둘 뿐이다. 사촌형 이름에는 '찬(燦)'이 있고, 내 이름에는 '용(容)'이 들어가 있다.
어렸을 적 산소를 같이 둘러보시던 큰아버지께서 내 이름 '용(容)'의 가운데 부분에 불 '화(火)'가 들어있다 하셨는데, 오행의 원리에 따라 지은 이름이라고 하셨다. 아버지들의 '동(東)'을 관통하는 건 나무 '목(木)'인 것이고, 그들의 아들 둘의 이름에 '화(火)'가 들어간 것은 '나무가 불을 낳는다'는 '목생화(木生火)'의 원리였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냉큼 더 위로 올라가 할아버지들의 비석을 둘러보았다. 아버지들의 아버지들인 나의 할아버지들은 물 '수(水)'가 있는 '태(泰)'자 돌림의 성함들이었으니, 과연 '수(水)'가 '목(木)'을 낳은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나온 나의 세 자녀들에게 아들딸 구별없이 흙 '토(土)'가 들어간 '규(奎)'를 넣어 직접 이름을 지었다. 이제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내 자식의 자식을 쇠 '금(金)'으로 작명하면, 우리 집 5대는 '목-화-토-금-수'의 '오행상생설'을 한 순배 완성하게 된다.
2.
"고대사회에서 왕은 흔히 사제이면서 동시에 주술사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종종 사술이나 법술에 능란해 보인 덕택에 왕권을 획득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왕권의 발달과정과 미개인이나 야만인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직책의 신성한 성격을 이해하자면 '주술'의 원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며, 또 고대의 미신 체계가 모든 시대, 모든 나라에서 인간 정신에 미친 비상한 지배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나는 그 주제를 약간 상세하게 검토해 보고자 한다."
- [황금가지], <1-2. 사제의 왕>, 제임스 프레이저, 1890.
영국의 민속학자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James George Frazer : 1843~1941) 평생의 역작은 [황금가지(The Golden Bough)]인데, 1890년 2권짜리 초판으로 나온 후 1900년에 3권으로 엮은 재판, 1906~1915년에 총 12권으로 편집된 3판으로 알려져 있단다.
고대의 세계 각지 원시 문명과 미개인들 사회로부터 전해내려온 미신과 '주술'의 사례들을 '사회과학'적 방법으로 수집하고 분류하여 인류 문명에서 미신과 주술의 지대한 영향력을 증명하고 있는 '민속학'의 고전이다.
아마도 초판 이래 기독교 사회였던 유럽사회에서 강한 비난과 반발을 받은 듯, 재판과 3판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형'(같은책, <3-5>) 이야기와 같은 민감한 논쟁적 사안은 부록처리 되었고, '신성한 매춘'(<2-7>)이나 '모계근친제'(<2-14>) 같은 내용들은 편집되거나 했던 것 같다. 아마도 프레이저 집안의 후대 학자로 추정되는 로버트 프레이저가 1994년 '옥스포드판 서문'을 쓰고 낸 판본은 총 4권(1. 숲의왕 / 2. 신의 살해 / 3. 속죄양 / 4. 황금가지)으로 편집되었다.
내가 최근에 읽은 책은 <한겨레출판사>에서 2003년에 번역한 '옥스포드판'인데, 방대한 미신 사례집과 같이 온갖 잡다하게 수집된 세계각지 미신주술 사례들을 또 다시 편집한 작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근현대 과학의 진보시대를 목격하기 시작했을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의 '서설'과도 같은 <1권. 숲의왕>에서 인간 사상이론의 흐름에서 그 기원과도 같은 '미신'과 '주술'의 상세한 검토를 연구의 목적으로 명시하고 있다([황금가지], <1-2>).
그러면서 당대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그림 [황금가지]로부터 시작되는 모티브를 소개한다.
즉, 터너 그림의 배경이 되는 '네미'라는 호숫가에서 일어나는 '숲의왕' 살해의식이 이 장대한 연구의 단초였다는 건데, 사실 이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토너 그림의 배경은 전설속 아베르누스 호숫가를 그린 것으로, 프레이저가 모티브로 삼은 로마 동남쪽 18km 거리의 '네미'와는 무관했다고 한다.
그래도 어쨌든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고, '네미'의 사제왕 또는 숲의왕은 호숫가에 서 있는 참나무 가지인 '황금가지'가 꺾이면서 동시에 살해당하게 된다는 그 전설은 시공간을 초월하며 그리스신화의 '아도니스' 신화로, 프리지아의 '아티스' 신화로,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로 접속된 후였다.
프레이저의 '미신'과 '주술' 연구는 이미 '네미'의 전설을 떠나 겉잡을 수 없게 되었다.
"요컨대 인류문화의 물질적 측면에서 석기시대가 보편적으로 존재했듯이, 지적 측면에서는 '주술의 시대'가 보편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 [황금가지], <1-3. 주술과 종교>, 제임스 프레이저, 1890.
프레이저 [황금가지]의 결론은 인류사에서 미신과 주술은 석기시대만큼 분명한 역사이며, 주술의 그 숱한 오류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고체계는 이후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앞으로 "진보의 희망"을 이끌어낼 "과학의 운명"(같은책, <4-6>)으로까지 오는데 필수적이었던 과정이었다는 이야기다.
자연적 현상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던 인류에게 고대의 '주술'은 '오류적 질서'였고 중세의 '종교'는 그 가교 역할을 하고 있으며 현대의 '과학'은 '엄밀한 질서'를 끊임없이 지향하는 바, 인류 사고체계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진부하지만, 미신과 주술이 인간 사상사의 기원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프레이저의 위대함은 당대 유럽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 사상과 제국주의 사상에서 탈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레이저에게 그리스도 십자가형은 고대 이교도의 인간제물 희생의식의 연장된 이벤트였고, 미개인과 문명인의 차이는 없다.
"그러므로 내가 아주 조심스럽게 고려의 대상으로 제기하는 가설은 이렇다. 짐작컨대 유대인은 부림절 또는 때때로 유월절에 그 제전의 중심적 특색을 이루는 수난극에서 죄수를 두 명 고용하여 각기 '하만'과 '모르드개'역을 맡기는 것이 관례였다. 두 남자는 모두 짧은 기간 동안 왕의 상징물을 걸치고 행진을 벌이지만, 운명은 각기 달랐다. 행사가 끝나면 하만역을 맡은 한 인물은 교수형이나 십자가형을 당하고, 대중들이 '바라바'라고 부르는 '모르드개'역을 맡은 인물은 자유롭게 풀려났다. 빌라도는 예수를 고발한 내용이 하찮은 것을 깨닫고 유대인들더러 그에게 '바라바'역을 맡기도록 설득해서 그의 목숨을 구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선의의 시도는 실패하고, 예수는 '하만'의 대역으로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러한 임시왕 중 한 사람이 어째서 '바라바', 곧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주목할만한 칭호를 사용했는지 묻는다면, 단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 칭호가 어쩌면 진짜왕, 곧 신격화한 인간이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대신 죽게 하던 시대의 유물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황금가지], <3-5. 그리스도의 십자가형>, 제임스 프레이저, 1890.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서 아마도 가장 논쟁적이었을 부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이었을 것이다. 기독교 사상이 주류였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예수의 신성한 대속행위로서 십자가형을 고대 '이교도'들의 인간제물 희생제례의 연속으로 보는 '불경함' 자체가 프레이저를 '이단'시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네미' 숲의 사제왕은 공동체의 풍요와 안녕을 지키는 권위자로서 그 기력이 노쇠해지기 전에 젊은 후대 권위자에 의해 살해당할 운명이었다. 한때의 권력자는 자연사하면 안되고 꾾임없는 견제 속에 끝내 폭력적으로 살해당해야 했다. 그래야 권력은 노쇠하지 않고 생생함을 유지하게 된다.
왕을 살해하려는 자가 들고 가는 것이 바로 '황금가지'로 불리는 참나무 가지다. 여기에는 원시적 기원이 있다. 고대 아리아인 또는 유럽의 선조는 참나무 같은 크고 강한 나무를 섬기는 '나무정령' 신앙이 있었는데, 이는 세계각지 원시사회의 '토템' 중 하나를 의미한다. 단군의 어머니는 웅녀, 즉 곰이었으니 동북아의 어느 종족은 곰의 정령을 믿었을테고, 지금까지도 그 부족이 남아있다면 그 '토템'을 신성시하거나 '터부'시하고 있을 게다.
'터부'는 [황금가지]에 따르면 바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적극적 주술'과 달리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피하려는 소극적 주술"(같은책, <1-3>)을 이른다. 수많은 사례 중 동북아 코략크 족이나 에스키모 또는 시베리아 사람들에게 곰은 신성하여 범접하면 안되기도 했고(터부), 한편으로는 일용할 공동체의 양식과 옷의 형태로서 사람과 영혼을 나누기도 했는데, 북유럽의 늑대와 나무, 아메리카의 독수리 등이 그렇다.
또 한 때는 '인간제물'이 횡행했던 시기도 있었는데 이들은 공동체의 풍요와 안녕을 위해 바쳐지던 활력있는 '왕'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원시 풍습이 권력관계의 정치적 확정 과정에서 왕 대신의 희생제물을 바치는 문화로 변형되었다. 이 시기의 절대권력을 바라던 왕들은 다른 '임시왕' 또는 자신의 아들을 희생제믈로 바치면서 자신의 권세를 유지했단다.
신성한 예수의 죽음도 바로 이런 공동체의 희생제의 중 하나였다.
프레이저는 책의 마지막 장(<4-6>)에서 '황금가지'의 비밀을 알려준다. 즉, 태양이나 불을 숭배한 유럽인의 조상이 본, 참나무의 큰 몸체에서 꺾어져 분리된 후에 황금색으로 노랗게 시든 참나무 가지를 보고는 불의 영혼을 담은 신성한 영성체로 믿고는 왕의 영혼을 그 나무에 가두어 보존하고자 했던 '토템'의 일부였던 것이다. 현재 '숲의왕'은 폭력적인 죽음을 당하지만, '황금가지'의 '토템'을 통해 그 활력있는 영혼이 부활하여 미래로까지 이어진다는 믿음이다.
여담으로 현대식으로 빗대자면, 민주사회의 대통령은 '국민주권'이라는 '토템'을 통해 결국 노쇠하기 전에 죽게 된다는 정도 아닐는지.
결국 현대 민주주의의 '토템'은 '국민주권' 아닌가.
3.
'불'을 담은 '나무'인 '황금가지'는,
과연 우리 아시아의 '목생화(木生火)'였다.
'네미' 숲 호숫가로부터 장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제임스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의 마지막 장에서 다시 '네미'로 돌아온다.
그때는 이미, 윌리엄 터너의 그림 속 배경이 더 이상 '네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상관은 없다.
[황금가지]의 첫 장과 달리 마지막 장에 이르면 더 이상 '숲의왕'의 운명 같은 것도 없다.
'주술'은 오래된 이야기일 뿐, 이제 인류 '진보의 희망'은 '과학의 운명'이 된 지 오래다.
'주술'의 역사를 오랫동안 둘러보았고, 예수의 신성에 불경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성베드로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퍼질 때 프레이저는 "아베 마리아"를 읊으면서 책을 마치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황금가지'는 우리의 사상체계에서 영원하다.
자연현상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던 인류사상사에서 '주술'은 그 오류성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현대적 방식으로 줄기차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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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가지(The Golden Bough)](1890~1915), James George Frazer, Robert Frazer 엮음(1994), 이용대 옮김, <한겨레출판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