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1~5 세트 - 전5권 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나카노 교코 지음, 이유라.조사연 옮김 / 한경arte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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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역사'를 읽는 이유
-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부르봉/영국/로마노프/프로이센 역사], 나카노 교코, 2008~2021.


혁명가들을 동경했지만,
그 중 제일은 왕을 암살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종교적으로 공고한 기득권에 도전한 수많은 '이단자'들처럼,
당대 속세의 신격화된 특권에 대한 가장 강력한 현실적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왕의 암살자는 새로운 세상을 외쳤지만 실은 본인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내가 제일 존경하는 14세기 여말선초의 삼봉 정도전 조차도 '인군(人君)', 즉 '신의 아들'은 아니지만 '사람 임금'은 부정할 수 없었다.
18세기 자유와 평등 개념과 함께 민중의 인권이 역사에 등장하기 전 '공공성'은 다수 민중이 아닌 군주정, 즉 '왕조'였기 때문이다.

역사는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 민중이 이끌어간다고 생각하는 나는 사실 조선왕들의 순서를 마흔 넘어서야 다 외웠다. 이전에는 조선왕조실록이고 뭐고 다 쓰잘데기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역사기록과 문헌의 중요성을 알게된 이후로 그토록 싫어하던 '왕조의 역사'도 역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수 '왕조'에서 다수 '민중'으로 전환된 '공공성' 변천의 역사도 인류의 무시못할 역사라는 것을 이제 안다. 
내가 지금 '왕조의 역사'를 읽는 이유다.

일본의 대중 미술사학자 나카노 교코는 2007년 [무서운 그림]이라는 책으로 명화를 통해 인간의 무서움을 묘사하고자 했는데, 책이 잘 팔리지 않아 걱정했단다. 그러다가 이듬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역사를 명화를 통해 설명하는 책을 내고는 비로소 작가로 독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왕조의 역사가 아직까지 여전히 잘 팔리는 아이템이라는 증거다.

그렇게 독일에서 유학한 일본 미술사학자 나카노 교코는 일반 민중이 주인공인 [무서운 그림] 시리즈를 계속 펴내는 한편으로 유럽 왕조의 역사를 연이어 써서 출간한다.

2008년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부터, 프랑스 [부르봉](2010), [영국](2017), 러시아 [로마노프](2014), 독일 [프로이센](2021) 시리즈다.


1. 합스부르크 : 전쟁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 막시밀리안1세

"하지만 달이 차면 이지러지는 법, 최전성기(펠리페2세)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몰락의 예감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 <5장>.

오스트리아에서 시작하여 에스파냐와 헝가리 제국까지, 동양의 중국이나 오스만 투르크 등 최후의 다민족 제국의 한 축이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공식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원래 스위스 한 구석에서 시작한 합스부르크(Habsburg) 일족은 '사냥매'라는 뜻의 '하비히트(Habicht)'와 '요새'나 '성채'를 뜻하는 '부르크(burg)'의 합성어인 '하비히츠부르크(Habichtsburg)'가 그 기원으로 추정된다. 12세기경 이 성을 근거지로 삼은 후손이 합스부르크 백작을 칭했단다. 

13세기 이 가문의 루돌프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는데, 교황이 배후로서 가톨릭 제국을 로마제국처럼 광활하게 열고자 했던 신성로마제국은 실상 명목상 황제였지 실권은 없었다. 실력있는 제후나 왕들은 다들 고사하는 자리에 가톨릭 교황 눈치보기로 허수아비처럼 세운 자리였지만 황제 즉위 당시 55세의 노년이었던 루돌프1세는 1278년 빈의 북동쪽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당대 최고 실력자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2세를 물리치고 합스부르크 왕조를 유럽의 대가로 세웠다. 루돌프1세는 당시의 '기사도'적인 전투규칙을 어기고 매복과 변칙을 통해 승리함으로써 '신군(神君)으로 불렸단다.

이후 15~16세기 막시밀리안1세에 이르러서는 전쟁 뿐만이 아닌 각국과의 혼인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른다지만, "전쟁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는 가훈은 막시밀리안1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미남왕 펠리페가 에스파냐 후아나 공주와 결혼하여 낳은 카를(카를로스)5세부터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조가 시작된다.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조는 16세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무적 함대'의 펠리페2세에서 정점을 찍다가 영국 스튜어트가의 엘리자베스1세에게 패하고 이후 사촌남매간의 폐쇄적 근친혼이 누적되면서 후대가 끊기고 만다. 17세기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2세는 피가 아주 진해진 근친혼으로 인해 후세를 낳을 수 없었고,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명화 [시녀들](1656)의 주인공격으로 중앙에 서있던 다섯살 마르가리타 공주는 나중에 어머니의 친동생이자 아버지의 사촌동생과 결혼 후 난산을 거듭하다가 21세에 죽었다. 

유럽 전역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왕조 또한 모든 제국이 그랬듯 최전성기에 가문의 순혈을 지키려던 시절에 이미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다. 순수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에 집착할 수록 그들의 주걱턱은 더 길어졌고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의 부정교합은 더욱 심해졌단다.

이후 17세기 에스파냐 합스부르크가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정점인 '태양왕' 루이14세에게 마리아 테레사라는 왕비를 보내어 피를 이었고, 18세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 부르봉 왕거 루이16세의 왕비로 보냈다. 

역시, 혼인을 통한 영토와 가문 확장의 대가문이다. 
오죽하면, [성혈과 성배](1982)라는 책은 예수의 '성혈(후손)'을 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도('성배')'가 유럽 합스부르크가까지 흘러가 이어지고 있다는 음모론까지 주장했다. 4세기 고트족의 일족으로 흘러든 '유대왕' 예수와 마리아의 후예들이 이어지고 이어져 합스부르크의 피에도 섞여 있어 결국 '유럽왕'이 되었다는 설이다. 유럽 서구에서 암약하는 '시온수도회'와 '장미십자단' 및 신비로운 '성당기사단'들은 기독교가 지배하는 유럽왕을 계속 꿈꾼단다.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까지 650년간 유럽을 지배했다.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촉발되었다던 제1차 세계대전은 실은 알고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합스부르크, 독일 호엔촐레른, 영국 하노버 왕가 등 오랜 시간 혈연으로 맺어진 '사촌들'간의 전쟁이기도 했다.


2. 부르봉 : 짐이 곧 국가다 - 루이14세

"폐허는 과거의 영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그 영광의 기억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명화로 읽는 부르봉 역사], <9장>.

서로마가 멸망한 5세기 유럽을 '프랑크'라고 불렀다는데, 게르만족의 손도끼를 뜻하는 '프란시스카'가 어원인 '프랑크'는 현재 '프랑스' 국명의 어원이다. 그만큼 프랑스는 유럽의 대표 문명을 이끌었고 18세기까지도 영국이나 독일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였다고 한다. 

한편으로 절대군주제 또는 절대왕정은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대표격이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피가 섞인 발루아 왕조를 끝내고 1589년 앙리4세가 문을 연 부르봉 왕조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16세가 퇴위한 시기까지 200년을 끊김없이 이어갔지만 역시 최전성기였던 '태양왕' 루이14세부터 이미 '폐허'를 암시하고 있었다. 잘생긴 루이15세는 절대권력과 함께 막대한 전쟁부채를 물려받았지만 여전히 사치스럽게 놀고먹을만 했고, 더이상 예정된 폐허를 미룰 수 없었던 루이16세는 합스부르크가와의 결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합스부르크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단두대(기요틴)의 이슬이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근대화는 절대왕정의 '폐허'를 딛고 올라서야 했고, 이 '폐허'는 부르봉 왕가의 사치스러운 영광의 기억을 통해 더욱 굳건하게 존재한다.


3. 영국 :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 빅토리아 여왕

"가혹한 세금에 허덕이던 민중은 왕이 나쁘다는 말에 맞장구를 치며 막연히 동조해 왔지만, 막상 왕이 재판에 회부돼 목이 잘리는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하자 기겁하며 공포에 휩싸였다. 신과 동격인 국왕을 죽이다니! 이 순간 찰스1세는 순교자가 됐다. 사람들은 처형대로 몰려와 흐르는 왕의 피를 천에 적시고 성물로 간직했다."
- [명화로 읽는 영국 역사], <5장>.

폭군 헨리8세와 두 딸 '블러디 메리', 엘리자베스1세의 튜더 가문, 17세기 청교도혁명으로 목이 달아난 찰스1세의 스튜어드 가문, 현재 영국왕실인 독일계 하버가로 이어지는 영국의 왕실은 19세기 사회주의 혁명과 20세기 제국주의 전쟁 통에서도 살아남았다. 

18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영국 산업혁명 시기를 거치며 16세기 엘리자베스1세 때처럼 영국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찰스 디킨스 소설이나 왕족도 용의자 중 한 명이었던 연쇄살인마 잭 사건 등에서 보듯 명암이 함께 극단적으로 존재하던 시기였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1858)의 첫 문장인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은 혁명의 시기가 아니라 혁명을 불러온 빅토리아 시절의 유럽을 묘사한 말이었다. 

전승국이 되어 왕실이 유지되었든, 왕(찰스1세)의 목을 처음으로 날린 경험 때문이었든, 왕실의 목숨이 근근히 붙어있는 영국 하노버 왕가의 가훈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현명함 아닐까. 빅토리아 여왕은 통치하지는 않고 자손만 낳고 퍼뜨리다가 혈우병 유전자를 러사아 로마노프 가문에 전해주면서 라스푸틴이라는 요승의 등장을 부른다.

하긴, 일본은 패전국이면서도 왕실이 살아남았으니 영국보다 더 신기하기도, 한심하기도 하다는 생각도 든다.


4. 로마노프 : 라스푸틴이 없었다면 레닌도 없었다 - 케렌스키

"부르봉 욍조의 예를 볼 것까지도 없이 '왕가는 살아남은 자가 있는 한 아무리 쓰러뜨려도 끈질기게 부활한다', '그들 전부를 말살하지 않는 한 혁명은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 볼셰비키의 생각이었다."
- [명화로 읽는 러시아 로마노프 역사], <12장>.

1917년 2월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 정부의 총리 케렌스키는 라스푸틴이라는 괴상한 인물을 부른 차르체제가 레닌주의 같은 사회주의 혁명을 가능하게 했다는 말을 했단다. 맞는 말이다. 시대착오적인 차르체제는 19세기까지도 17~18세기 프랑스 절대왕정 같은 억압적 체제를 고수하다가 다수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에 의한 폭력혁명을 야기했다. 시대정신을 모른채 억압만 일삼는 정권에게는 폭력혁명 단 한 길 밖에 없다.

로마노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2세 일가족의 암살과 그 와중에 살아남았다고 전해진 아나스타샤 공주 이야기 등은 오랜 세월 비밀과 음모, 진짜와 가짜가 난무했던 러시아와 로마노프 왕실의 역사 자체다.

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마지막 황태자 알렉세이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인 알렉산드라 황후의 자녀로서 박토리아 여왕의 혈우병 유전자를 물려 받았다. 그 고질병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홀연히 나타난 괴승 라스푸틴의 등장 또한 러시아 차르체제의 필연적 결과였다.


5. 프로이센 : 군주는 국가 제일의 심부름꾼이다 - 프리드리히 대왕

"... 만약 프랑스가 왕정복고하지 않으면 유럽의 모든 군주가 가만있지 않겠다는 내용... 이른바 '필니츠 선언'은 프랑스 혁명 정부를 향한 단순 경고 차원의 선언문이었지만, 오히려 쌍방의 긴장감을 높여 왕과 왕비의 처형을 재촉했고, 혁명전쟁의 원인이 됐다. 또 나폴레옹이라는 악당이 세상에 나오는 계기가 된 셈이니 거센 부메랑이 되어 프로이센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명화로 읽는 독일 프로이센 역사], <5장>.

앞서 보았듯, 유럽 왕실은 합스부르크가를 시작으로 20세기까지도 서로 '사촌친적'이었다. 그러니 유럽 각국 왕실간에 서로 선전포고를 해댔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은 '사촌전쟁'이었고, 그만큼 이들은 이미 한참이나 오래전부터 서로 혈연지간이었으며, 1789년 근대 프랑스 대혁명부터 그 이후 1848년으로 시작된 민주주의 또는 사회주의 혁명을 맞을 때마다 유럽 각국의 왕실들은 굳게 단결했다.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에 대항한 '필니츠 선언', 1848년 민주주의 혁명의 물결을 막으려는 '신성동맹' 등의 실질적 배후는 귀족과 대지주 또는 산업자본가 등의 각 시기 지배계급이었지만, 공식적 후원자는 서로 '사촌지간'이었던 유럽의 왕가들이었다

그러나 다수 민중들의 저항이 부각되지 않은 시절에는 영토분할을 위한 사촌간 집안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프로이센 호엔촐레른가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군주는 국가 제일의 심부름꾼"이라며 프로이센의 부국강병을 이끌었지만, 어쨌든 왕실의 유지가 최우선 임무였고 이에 대항한 '3각 페티코트(여성속옷) 연대'인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와 러시아 엘리자베타, 프랑스의 퐁파두르(루이15세 애첩으로 신흥자본가 계급출신)의 3자 동맹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을 지켜내고 이후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졌다.

프리드리히 대왕 이후 나폴레옹 전쟁으로 잠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독일 호엔촐레른 왕조는 사치와 향락 보다는 검소와 부국강병으로 제국의 기반을 다지면서 이윽고 19세기 불세출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 이르러 독일제국으로 확장된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1918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 되면서 마지막 황제 빌헬름2세는 왕가의 문을 닫고 망명지에서 천수를 누리다 죽는다.

13세기 교황이 프로이센 지역 가톨릭 수호를 위해 튜턴기사단(독일기사단)의 일파로 파견한 호엔촐레른 일족이 오히려 루터의 종교개혁 세력과 결탁하여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면서 프로이센 일대를 점령한 역사는 아마도, 실용적이고 검소한 독일 민족성의 시작일 수도 있겠다.

이왕에 '왕조의 역사'도 역사라고 인정한 이상,
그 동안 미뤄왔던 오스트리아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베르사유의 장미]를 이제 읽어보려 한다.

***

1.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2008), 나카노 교코, 이유라 옮김, <한경arte>, 2022.
2. [명화로 읽는 부르봉 역사](2010), 나카노 교코, 이유라 옮김, <한경arte>, 2023.
3. [명화로 읽는 영국 역사](2017), 나카노 교코, 조사연 옮김, <한경arte>, 2023.
4. [명화로 읽는 러시아 로마노프 역사](2014), 나카노 교코, 이유라 옮김, <한경arte>, 2023.
5. [명화로 읽는 독일 프로이센 역사](2021), 나카노 교코, 조사연 옮김, <한경arte>, 2023.
6. [성혈과 성배](1982), 헨리 링컨/마이클 베이전트/리처드 레이 지음, 이정임/정미나 옮김, <자음과모음>, 2005.
7. [마리 앙투아네트 - 베르사유의 장미](1932), 슈테판 츠바이크, 박광자/전영애 옮김, <청미래>,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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