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골동품 서점
올리버 다크셔 지음, 박은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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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 저 '골동품'으로부터...
- [기묘한 골동품 서점], 올리버 다크셔, 2022.


1.

둘째가 곧 튀어나올 정도로 배가 부른 마님이 관내를 시찰하던 중 어느 한 집을 점지하고는 자리를 뜨자마자 집안의 마름아재가 군소리 없이 바로 가서 값을 치른다. 3년 전엔 분명 신랑신부 사이였던 것 같은데 어느덧 마님과 머슴 관계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느날 아침에 눈을 뜬 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나는 끓는 물 속 개구리처럼 잘 익어 있었다. 우리 집에 머슴은 나 하나 밖에 없었으니 그나마 나는 머슴 중 서열 1위였다. 치열한 마름 경쟁은 없었다. 모든 계산은 내가 해야 했다는 말이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돈도 마님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다 알아서 내야 한다는 것 정도. 

우리집 역사에서 처음 집을 구입하려던 예산의 세 배가 넘는 주택을 아내가 가리키면서 값을 치르라 지시했던 2007년에는 몰랐다. 은행 대출서류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사랑하는 나의 아내 은미가 아파트를 당장 사내라는 독촉을 이리도 꾸준히 해댈 줄은. 세상에서 제일 이쁘다는 말도 필요없고 탑골공원 할아버지가 예언한 사주팔자 바로 그대로 자식 셋을 안겨줬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모든 귀결은 아파트였는데 금을 깔고 앉았다는 그런 아내에게 칼만 쥐었다던데 지금은 그 무딘 칼을 어디다 뒀는지도 모를 재물에 어두운 내가 해줄 말은 세속의 물욕을 버리라는 말 외에는 없었다. 

주택에 금세 물린 아내는 우리 생애 첫 집을 사서 이사한지 몇 년 되지도 않아 1층 안방의 구석 서재 말고는 죄다 은행 소유였던 시절부터 당장 아파트로 옮기자고 틈만 나면 졸라댔는데, 집안의 유일한 머슴이자 마름으로서 주택 관리 상 할 일이 많은데 할 줄 아는 건 전혀 없음에도 나는 주택을 고집했다. 은행대출 갚으려면 백 년은 걸린다는 명분을 이사의 반대이유로 내세웠지만 사실 마당에서 큰 개를 키우는 게 좋았고, 세상 모든 벌레가 우글대지만 마음만 먹으면 실은 담배를 피우며 밤하늘을 마음껏 볼 수 있는 나만의 옥상이 좋았으며, 무엇보다 아주 오래된 '골동품 서점'처럼 책들을 여기저기 매우 두서도 없이 쌓아놓는 게 싫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당을 지키던 알래스칸 말래뮤트 에코는 급한 약속이라도 있는 것처럼 약속의 강 스틱스강을 카론의 배를 타고 건너 갔고, 옥상은 어느덧 담배를 끊었음에도 나의 주요 임무가 되고 만 음식물 쓰레기를 텃밭에 묻는 과업을 수행할 때 말고는 올라가지 않고 있으며, 아이들의 어릴적부터 쌓여온 오래된 책들이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처럼 흘러넘친 결과 나는 사면초가로 포위된 항우처럼 아내에게 눈물을 짓고는 홀로 책과의 전쟁을 치르고자 분연히 일어서게 되었다.


2.

"충분히 오랫동안 '눈이 잘 띄는 곳'에 숨어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서점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찬장 문 뒷쪽이라든지 책장 꼭대기에는 어김없이 한때 누군가에게 중요한 물건이었다가 이제는 존재가 희미해진 물건들이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이야말로 오래된 서점이 지닌 매력의 본질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하나 '골동품' 아닌 존재가 없다는 것."
- [기묘한 골동품 서점], <2-25. 소서런의 골동품들>, 올리버 다크셔, 2022.


18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부터 있었다는 오래된 고서점 '소서런(Sotheran's Sackville Street)'의 인턴 직원 올리버 다크셔(Oliver Darkshire)가 중고책을 사고 파는 본업은 제쳐둔 채 회사 sns에 일종의 업무일지 비슷한 것을 썼고, 인터넷 보다는 깃털펜에 잉크를 찍어 써야 한다는 과연 고서점스러운 직업적 신념으로 회사 트윗 팔로워 4명을 꾸준히 유지하다가 인턴 직원의 가상공간 업무일지로 팔로워가 천 명이 넘은 걸 보고 깜짝 놀란 직장 상사 매니저 크리스 샌더스의 응원으로 [기묘한 골동품 서점](2022)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원제는 [Once Upon a Tome]인데, 'Tome'은 'Time'의 오타가 아니라 '오래된 두꺼운 책' 또는 누군가 들춰본지 백만년은 되었을 벽돌같은 '학술서'라는 뜻이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Frankly speeking), 'Tome'은 영문학을 전공한 나도 처음보는 단어였는데, 어느 블로거가 '옛날 옛 적에(Once Upon a Time)' 대신 '옛날 옛 책에(Once Upon a Tome)'라고 매우 적절히 번역해 주었기에 나는 한 발 늦었다는 분한 마음에 책상을 쳤지만 그에 군말 없이 따르기로 하고, 'Tome'을 이 책의 키워드 중 하나인 '골동품'으로 나름 이해하기로 한다. 책장을 들출 때 '쩍' 소리가 나면서 수백년 묵은 존재들이 튀어나오는 그런 오래된 책들 말이다.

[기묘한 골동품 서점]에서 저자 올리버 다크셔는 단 한 순간도 결코 진지하지 않다. 
빅토리아 시대부터 존재했던 만큼 21세기 인턴 급여도 18세기 수준으로 받고, 골동품 같은 책과 물품들을 열심히 사고 파는 게 직업이지만 정작 마흔아홉 가지 에피소드 중 저자가 정상적으로 사거나 판 골동품은 없다. 가히 주식만 빼고 다 잘 하는 증권회사 직원이나 합의만 아니면 뭐든 뒤지지 않는 보험회사 보상직원과도 같다. 저자의 글만 읽다보면 런던 새크빌가(Sackville St.)의 고서점 '소서런(Sotheran's)'은 영원히 팔리지 않을 골동품과 함께 푹 썩어 통째로 그 외진 골목길 땅 속에 아무도 모르게 묻힐 참이다. 사실 저자의 글이 시종일관 진지함은 0도 없고 농담이 아닌 문장이 진짜로 단 한 줄도 없어서 독자인 나는 대체 저자가 이 고서점에서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책을 덮고 나서야 알 것 같았다. 
그만큼 책은 온통 개그로 시작하여 개그로 끝난다. 
그리고 그만큼 재미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고서점과 골동품, 그 곳을 4백년(18~21세기) 동안 골동품처럼 지켰을 법 하던 서점의 선배동료들(제임스/앤드류/크리스 등)에 관한 이야기들과, 특히 마지막 49장 에필로그에서 매니저 제임스의 죽음을 언급한 한 단락을 뜬금없이 갑자기 읽게 되면 문득 깨닫게 된다. 올리버 다크셔의 끊임없는 개그가 실은 오래된 골동품을 시공간적 매개로 하여 그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삶과 죽음", 그리고 사라지는 것들에 관한 "기억"(같은책, <금정연 작가의 추천사>)을 이야기하고자 했음을. 
마지막에 저자 또한 고서점 '소서런'을 떠나게 되는데 글쎄, 그건 무슨 인위적이고 주체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그렇다고 외부적 요인은 더더욱 아닌, 일종의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냥,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존재했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둘러보면 더 이상 내 곁에 없는,
어쩐지 슬프기도 하고 어딘가 애잔한 듯 하지만 예외없는 자연스러움에 오히려 잔잔하게 무언가를 남기는.

나의 오래된 집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동안,
삶의 외로움 같은 것이 웃고 즐기던 중 어느 순간 마음 한 구석에 싸한 바람을 일으킨다.

그렇게,
세상 모든 것은 애줄없이 사라질 운명이지만,
한편으로 오래오래 어딘가에 남게 되는,
'골동품'이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제 '원스 어폰 어 터움(Once Upon a Tome)'을 나 나름대로 번역해 본다.

"옛날 옛 저 '골동품'으로부터 남는 것은..."


3.

어둑하고 음침한 고성과도 같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20세기의 주택에서 유령처럼 내가 버티는 이유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사시사철 주택의 하자보수를 도맡으셨던 부지런했던 정비공 출신의 부친께서는 이미 2년 전 '천 개의 바람'이 되셨다. 
옥상의 텃밭에서 각양각색의 무성한 채소와 그보다 더 다양한 벌레를 함께 키우시던 모친께서는 이제 더 이상 호미를 들 수 없도록 어느새 어깨도 빠지고 늙으셨다. 
북극의 알래스카 대신 폭염의 마당을 질주하고 호령하던 말래뮤트 썰매개 에코는 썰렁한 마당과 뒷골목만 남겨둔 채 나의 세 자녀들의 어린 시절 추억들과 함께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매일매일 습관적이고 인공적으로 퍼부어지는 남편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집값 더 떨어지기 전에 얼른 팔아치우고 새 아파트로 뜨자는 아내의 쌍꺼풀 수술한 인위적으로 매서운 눈빛 뿐이다.

물욕 가득한 아내의 그윽한 눈빛에 대고,
사라지는 것들의 애잔함과 그 오래된 것들이 남기는 잔상, 그리고 가끔 심장에 폭행을 가하는 추억을 이야기할 만한 이유들 자체가 '골동품'이 되고 있다.
은미는 나의 골동품 'Tome'의 책장을 펼쳐볼 생각이 전혀 없다.

20세기 소년인 나의 20세기 저택은,
한없이 쌓여가는 오래된 것들과 함께,
그 자체로 거대한 '골동품'이다.

***

- [기묘한 골동품 서점(Once Upon a Tome)](2022), Oliver Darkshire, 박은영 옮김, <RHK>,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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