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인간 - 중세 후기 유럽의 식자들 숲속의 숲
자크 베르제 지음, 문성욱 옮김 / 읻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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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연속', 그리고 '매개적 지식인' 또는 '유기적 지식인'
- [공부하는 인간], 자크 베르제, 1997.


"'식자(識者;gens de savoir)'는 근본적으로, 일단 동시대인들의 눈에는 '책'과 '글'의 인간이었으며, 바로 그것이 다른 모든 사회 집단과 비교해볼 때 '식자'들의 가장 뚜렷한 특유성 중 하나였다. 따져보자면 결국 그들이 지식을, 그리하여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 자체에 대한 정당화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책'으로부터였다."
- [공부하는 인간 - 중세 후기 유럽의 식자들], <1-3. 책>, 자크 베르제, 1997.


프랑스 역사학자 자크 베르제(Jacques Verger:1943~)는 '중세' 전문가다. 서구 중세 문화의 교육, 특히 '대학' 역사 전문가로서 1973년 [중세의 대학]이라는 책을 썼고, 1997년에 중세, 특히 14~15세기 중세 후기의 '지식인'들에 관해 저술한 책이 [중세 후기 유럽의 식자들(Les Gens de Savoir dans l'Europe de la fin du Moyen Age)]이다.

이 책은 중세 초기인 13세기 초 이탈리아 볼로냐와 프랑스 파리 및 몽펠리에, 영국의 옥스퍼드 등의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대학 이야기를 중심으로 시작하는데, 그에 앞서 <서론>에서는 '식자(識者)'의 정의로부터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사실,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정립된 '지식인(intellectuels)'이라는 말은 저자 자크 베르제에 의하면 '시대착오적'이다. 중세의 고급 문자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아는 '문사(vir litteratus)'나 '선생(magister)'이라는 중세적 용어도 있지만 자크 베르제가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지식인' 계층은 더 넓은 개념이다. 그의 개념은 대학의 학사나 박사 같은 학위에 국한되지 않고 교회 '성직자(clericus)'도 넘어선다. 교회와 세속적 왕정에 복무하던 사법과 행정 관리까지 포괄하는 이 '지식인' 계층은 중세 당시로서는 매우 귀했던 '책'을 소유 및 독점하던 '독서가(gens du livre)'에 가장 가까운 개념이지만, 베르제는 왕이나 귀족 같은 무식한 엘리트도 재력을 기반으로 장서만 갖춘 채 '독서가'를 자처할 수 있으므로 굳이 중립적인 '식자(識者;gens de savoir)'라는 개념을 쓴다(같은책, <서론>).
국역판은 이 '식자'를 '공부하는 인간'으로 번역하여 한국어판 제목은 [공부하는 인간]이 되었다.
부제인 '중세 후기 유럽의 식자들'이 실은 원서의 제목이다.

15세기를 넘지 않는 1,500년까지를 임의의 경계로 삼은 이 책 [공부하는 인간(식자)]은 '라틴어'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주의적 '논리학' 및 '변증론'에 기초한 중세의 지식([공부하는 인간], <1-1>), '문법-수사학-변증술'의 3과 및 '산술-음악-기하학-천문학'의 4과로 구성된 중세 대학의 학부로서 '자유 학예'(같은책, <1-2>)를 둘러본 후 '철학-신학-법학'과 '의학' 등을 전공한 박사들의 귀족화를 논증한다. 중세의 필경사와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 후 유통이 점차로 늘고 비싸던 가격이 다소 낮아진 '식자'의 표상으로서 '책'(같은책, <1-3>)에 관한 내용이 자연스레 뒤따른다. 
중세 후기 '식자'들의 특징으로서 책이 사치품이던 당시로서는 적지 않았을 수십 또는 수백 권의 '장서'를 보유한 '독서가'의 등장이다.
14~15세기 '중세'와 '르네상스'라는 '연속'과 '혁신'의 경계적 시공간의 중심에 바로 인문주의 '식자'들과 '책'이 있다.

사회사를 근본으로 하는 역사학자 답게 자크 베르제는 중세 후기 '식자'들의 배경으로 중세 당시 교회와 국가의 '근대화' 또는 '현대화'를 상정한다.
세속 왕정이 근대화되면서 구조적인 관료체계를 갖추게 되고 교회 또한 동일 체계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대학 학위를 취득한 학사나 박사가 교회 또는 국가권력에 편입되고 복무하게 된 것이다. 교회법이나 로마법에 정통한 '법학' 전공자들이 이미 서양 중세 시대부터 우대받기 시작한 것이다.
대학에서 '법대' 우세의 기원이 대학이 최초로 설립된 중세부터였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 중세 말에 이르러 '식자(識者)'들, 적어도 그 중 몇몇이 통상적인 사법, 행정 기능 수행을 넘어서는 '지적 형태의 정치적 참여'를 개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
... 개인의 능력과 국가에 대한 헌신적 봉사 덕분에 신분상승을 이루었던 '율사와 변호사의 시대' 다음에는 왕으로부터 신입선출 권한을 획득하고 서로가 서로를 도우면서 자녀들의 결혼으로 화합을 다지는 '인척 시대'가 오고, 마지막 '상속자의 시대'는 기세등등한 가문들의 시대로서 일단은 '양도' 이후에는 매관매직을 통해 대대로 직분을 전승하는 것이 점차 규칙으로 자리 잡는다."
- [공부하는 인간], <2-5. 지식과 권력>, 자크 베르제, 1997.


이들 중세 '식자'들은 근대화된 교회와 국가권력에 복무하면서 정통 귀족은 아니지만 귀족화되었고, 왕족과 귀족 등 엘리트 또는 식자들끼리 인척 관계를 맺으면서 지배계급으로 공고화되었으며, 대대손손 상속하면서 더더욱 귀족화되었다. 
이를 자크 베르제는 법학 학사와 박사가 우대받는 '율사와 변호사의 시대'에서 정략결혼의 '인척 시대'로, 다시 계급세습의 '상속자의 시대'로 변천되는 과정으로 묘사한다.

우리 역사로 보면,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문명 교체기와 비슷할 수 있겠다.
고려말 부패한 왕조와 권문세족이 신진사대부의 급진적 정파에 의해 패퇴되면서 건국된 성리학 이념국가 조선의 선비들은 과거시험을 통해 출사하여 국가를 이끌어가는 '사대부'가 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그러나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이 사대부 계층이 지배계급화되면서 국가의 계급모순을 유교의 예법 강화로 은폐하려던 조선 후기에는 '세도정치'와 같이 극단적으로 문벌귀족화되었고 결국 국가전복을 꿈꾸는 '지식인'들을 양산한다. 
홍경래가 그랬고 최제우나 전봉준 같은 동학의 '지식인'들이 그러했다. 시대의 장벽에 막혀 대학 학위도 없고 사대부도 되지 못했지만 그들 '식자'들은 민중의 편에서 세상을 뒤집으려던 '유기적 지식인'이었다. 

중세 후기의 '식자'들도 그렇게 변모한다.
물론 중세 말까지 대부분의 '식자'들은 그들의 지식을 전문화하면서 국가권력의 근대화를 이루는 정치적 실천을 최우선 목표로 했지만, 한편으로 일부 변경의 '식자'들은 다수 민중 반란의 이데올로그로서도 기능한다. 
종교개혁의 루터도, 영국의 존 위클리프나 프라하의 얀 후스도 모두 '식자'들이었다.

'지식인'이나 '식자'의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나 정치적 실천을 통해 '공공성'을 담보한다. 교회나 왕족이 자기 마음대로 권력과 조직을 농단하지 못하도록 이론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식자' 계층의 역할이었다. 근현대는 '민주주의'가 '공공성'이지만, 중세에는 어쩔 수 없이 교회와 군주가 '공공성'이었다. 
역사의 진보는 다수 민중의 혁명적 동력이 근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대의 '공공성'을 담지하면서 사회 변혁을 읽고 실천하는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이 인류의 역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하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개념인 '유기적 지식인'을 자크 베르제는 다소 모호하기는 하나 '매개적 지식인'이라고 부르며 수구적인 '전통적 지식인'과 구분한다.


자크 베르제에 의하면 중세 후기 '식자'의 특유성은 다음과 같다(같은책, <3-8>).

1. 도시화 : 교회 또는 왕족, 도시군주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려야 권력에 복무할 기회가 생길 수 있기에, 식자들은 '도시화'를 그 첫번째 특징으로 한다.

2. 전문직업화 : 지위가 보장되는 전통적 귀족처럼 권력에 파트타임이나 아마추어식으로 자문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직업 관료로서 보수를 받고 지식을 권력에 파는 '전문지식인'이다.

3. 정치화 : 그로 인해 국가권력의 '근대화' 또는 당시로서는 '현대화'에 기여하는 궁극의 '정치화'를 이룬다. 군주의 의지와 '식자' 개인의 야망이 교차하면서 정치적 '공공성'이 발전한다.

4. 실천적 문화 : '식자'들의 정치적 지식은 자연을 음미하며 시를 쓰는 것 같이 흡사 무사무욕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전문직업적 '노동'으로서 다분히 '실천적인 고유한 문화'를 지닌다.


"'중세'와 '르네상스' 사이의 급진적 단절이라는 낡은 낭만주의적 관점은 오래전부터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 새로운 사회 범주로까지 학업이 확장되는 것... 이 지식 문화는 근본적으로 원칙에 있어 중세의 기원에 충실하다. 
그러나 박사 시대에서 인문주의자 시대로 넘어오는 동안 단절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서구 사회가 추상적 지식에, 또한 그 지식의 보존과 전파를, 경우에 따라 실제 활용을 책임지는 일을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기꺼이 마련해 주던 자리는 이미 중세말 수세기 동안 그려진 것이었고, 이 그림은 아주 오랫동안 남을 것이었다."
- [공부하는 인간], <3-9. 박사에서 인문주의자로 : 연속과 혁신>, 자크 베르제, 1997.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혁신'적이지만 '연속'을 기반으로 흐르던 장기적인 시대에 '유기적 지식인' 또는 '매개적 지식인'으로서 인문주의적 '식자'들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러나 근대적 르네상스는 그냥 오지 않았다. <옮긴이의 말>대로 '중세'인에게 당시는 '현대'였다. 현재의 우리 시대 또한 지금은 '현대'로 불리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미래에도 여전히 '현대'로 불릴 수는 없을 게다.
'중세'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현대적 지식인'으로서 '식자'들은 역사의 '연속성'을 이어가며 '혁신'을 가능하게 했다.

'중세'에서 근대적 '르네상스'로,
'혁신' 속 깊은 '연속'을 본다.

그리하여 이제,
'장기(long) 중세'를 다룬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
자크 베르제의 선학인 자크 르 고프를 읽을 때가 되었다.

깊고 깊은 [서양중세문명](1964/1984)에 빠져들 시간이다.

***

1. [공부하는 인간 - 중세 후기 유럽의 식자들](1997), 자크 베르제, 문성욱 옮김, <읻다>, 2024.
2. [서양 중세 문명](1964/1984), 자크 르 고프, 유희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2.
3. [사대부시대의 사회사 - 조선의 계급,의식,정치,경제구조], 유승원, <역사비평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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