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인재전쟁 - 왜 위나라가 이기고, 촉나라는 패하고, 오나라는 자멸했는가!
와타나베 요시히로 지음, 노만수 옮김 / 더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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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된 '이념'
- [삼국지 인재전쟁],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오늘날에도 흔히 쓰이는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上有政策 下有對策)'라는 유명한 말은 '인맥'에 의해, 또한 '국가권력'에 의해 되풀이되는 강권통치 발동에 맞서온 중국인의 지혜인 셈이다.
이렇듯 '인맥'은 '삼국지' 시절이라는 아주 먼 옛날부터 형성되어 왔다. 그리고 순욱이나 제갈량이 조조와 유비와 대치하는 상황부터, '군주'에 대해 자율적 권위를 가진 '귀족'이라는 유구한 중국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지배층이 형성되기 시작한 때, 그것이 [삼국지]의 시대였다."
- [삼국지 인재전쟁], <에필로그>,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중국의 '꽌시'가 있다.
'관계(關係)'다.
우리의 '인맥'과 비슷하나, 중요한 건 실질적으로 맺어진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연', '지연', '혈연' 등의 실질적 '관계'가 그것일 게다.

중국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민주주의'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천하통일'을 지향하는 강력한 제왕적 국가권력 아래 종속되어 온 지 역시 수천 년이기 때문이리라.

알고보면 천하를 훔친 가장 큰 '도적'인 '황제'가 '하늘'이었고, 고대로부터 '공공성' 그 자체였다. 
다수 민중들은 물론 지배계급들도 이 '천자'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세월이 또 몇 천 년이다.
'민주주의'를 실현한 지 반세기도 안되는 우리 역사 또한 다르지 않았다.

'상유정책 하유대책(上有政策下有對策)'은 중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의 공통사항이다.
강권적인 권력이 '정책'을 내리면 다수 민중들은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운다.
현대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로 표현될 수 있겠다.


1.

"인간관계(인맥)는 '중국의 기본'이다. 그리고 인사는 만사의 기본이다... '인맥 형성 방식'(1장)... '국가의 관료제도 구조'(2장)... 위나라는 '혁신'(3장), 촉나라는 '전통'(4장), 오나라는 '지역'(5장), 진(晉)나라는 '제도화'(6장)에 서술의 중점을 두었다."
- [삼국지 인재전쟁], <프롤로그 : 인재와 인사는 만사의 근본이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일본의 '삼국지' 전문 역사학자 와타나베 요시히로는 중국의 삼국시대 역사 속에서 위-촉-오 삼국을 거쳐 천하통일을 이룬 서진(西晉)의 '인재전쟁'을 분석하였다. 원제가 [삼국지 인사] 정도 되는 듯 한 이 책의 국역본은 [삼국지 인재전쟁](<더봄출판사>,2023)이다.

저자는 중국의 삼국시대 '학연'과 '지연', '혈연(혼인)' 등 '인맥'의 관점에서 당시 국가 시스템과 각국의 '인사'를 분석하는데, 정리하면 조씨의 위나라는 유교적 허위에 대항한 조조의 '혁신' 이념, 유씨의 촉은 한나라를 부흥하려는 제갈량과 유비의 '전통' 이념, 손씨의 오나라는 강동에 웅크린 '지역주의', 그리고 사마씨의 진나라는 귀족서열의 '제도화'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2.

"이처럼 '명사(名士)'가 '문화자본'에서 유래한 권위를 배경으로, 사회통합의 기능을 맡은 경우는 후한 말기에 많이 나타난다. 후한의 관치와 향거리선(관리추천제도)으로 유지되어 온 지역사회의 질서는 후한 말기에 이르러 호족의 지지를 받은 '명사'들이 도맡게 되었다. 조조를 비롯한 군웅들이 '명사'를 데려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이유이다."
- [삼국지 인재전쟁], <2장. 국가 시스템과 출세의 사다리>,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진수의 정사 [삼국지]든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든, 당시의 난세를 헤쳐나가던 영웅들에게는 '명사(名士)', 즉 '세상에 이름난 선생'이 있었다.
후한 말기 환관세력이 국정을 농단하던 시기에 이를 비판하며 유학자 선비들은 [경학]을 근거로 서로의 명성을 빛내주었다. 이들은 깨끗하다 하여 '청류'라 불렸고 반면 환관권력의 청탁으로 출세한 자들은 '탁류'가 되었다. 

이 '명사'들의 '이념'은 공자와 맹자의 '유학'이었다. 한나라 시절 관리 선발제도였던 '효렴'이라는 제도는 조상과 부모를 공경하는 '효'와 청렴한 '렴'의 기준으로 추천받는 제도였기에, 후한 말 부패한 세상에서 '청류' 재야운동권들은 유학이라는 전통적 이념을 다시금 세우고자 했고, 이들이 서로서로 '학연'과 '지연', 나아가 '혈연'을 이어가며 '명사'가 되었다.


"이처럼 조조는 '명사'와의 알력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때마다 인사기준을 '유재시거(唯才是擧)'를 선포하며 '반유교주의'를 명확히 선언했다
...
위나라 문제와 명제는 유교에 대한 조조의 강한 도전을 계승하지 못했다. 유교는 그 정도로 강력하고 강인하고 끈질겼다. 조위가 사마씨에게 권력을 장악당한 것은 문제, 명제가 빨리 죽은 것만이 원인이 아니다. 문제도 명제도 '시대의 변혁자' 조조의 위대함을 이어받거나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삼국지 인재전쟁], <3장. 위나라, 시대를 변혁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조조도 젊어서 이 '청류' 운동권 학생이었지만, 그는 출사하여 직접 세상을 바꾸고 싶었기에 환관이었던 양할아버지 조등의 후광을 활용하여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곧 황건농민반란의 난세를 맞았다. 그 나름의 '혁명'과 '개혁'을 꿈꾸는 과정에서 당대 최대의 세족이었던 '여남 원씨' 원소와 대결하기 위해 조조는 많은 '명사'들의 지지를 모았고 그의 책사 중 최고의 선비 순욱은 역시 당시 강력한 가문이었던 영천지역의 '여남 순씨'였다. 조조에게 후한 황제를 영천군 허현(허도)으로 옮겨와서 황제를 끼고 최고 권력자가 되라는 대책을 낸 순욱이라는 책사가 필요했고 그의 순씨 가문 인맥은 조조에게 더욱 중요했다. 
조조 정권은 조씨와 원래 성인 하후씨 집안의 무력과 순씨 세력의 '이념'을 결합하여 난세에 '혁명'을 하고자 했으나, 한나라 황실 부흥을 바라던 순욱의 '이념'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조조의 '혁명'과 맞지 않았다. 
결국, 조조는 "나의 장자방(장량)"이라 칭하던 순욱을 숙청하고 만다.

위선적인 '효도'와 '청렴'을 부정하고 극복하려던 조조는 순욱과 같은 유학자 '명사'들을 숙청하면서 '오로지 능력 위주로 등용한다'는 '유재시거(唯才是擧)'를 내걸고 인재를 구한다. 
그러나 '창업'과 '수성'은 다르다. 조조(위무제)의 아들 조비(위문제) 이후로는 위나라 제국의 통치 이념으로서의 유학을 극복할 수 없었다.

'혁명'이 끝난 곳에서 '멸망'은 시작된다.


"제갈량을 맞이하기까지의 유비 집단은 이러한 (도원결의) '의리'를 핵심으로 한 강력한 '용병집단'이었다... 이리하여 유비는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책사로 맞이하고, 이를 계기로 '형주 명사집단'에 가입함으로써 자신의 집단을 '의리'로만 결속시킨 용병집단에서 제갈량 등 '명사'를 핵심으로 하는 정권으로 환골탈태시키는, 즉 질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힘겨루기와 대립은 다르다. 제갈량과 유비가 대립하고 있었다면 조조가 순욱을 죽인 것처럼 제갈량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제갈량과 유비는 '한실부흥'이라는 최종목적이 완전히 일치했고, 서로 굳게 신뢰하고 있었다. 다만, 어떻게 한(漢)나라를 부흥 시킬 것인지? 그 수단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
- [삼국지 인재전쟁], <4장. 촉나라, 전통을 계승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유비는 조조와 달랐다.
큰 전공이나 세력 없이 원소와 조조, 유표 등의 군웅들에게 빌붙다가 익주라는 최변방에서 백만명도 안되는 인구로 촉한 황제가 되었으니 전투에는 소질이 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실은 한나라 황실의 후예로서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처럼 다시 한 번 한나라 황실을 부흥한다는 거창한 이념을 뒷받침해줄 배경이나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지, 유비는 진수가 말한 '백절불요', 백 번 꺾여도 주저앉지 않는 불세출의 영웅이며, [삼국지 인재전쟁]의 저자 와타나베 요시히로에 의하면 '전투도 잘했다'고 한다.

유비는 본질적으로 소규모 '용병집단'의 대장이었다. 푸틴에게 도전했다가 비명횡사한 프리고진처럼 애초에 조조, 원소, 유표나 심지어 여포에게 조차도 비할 수 없었지만, 제갈량의 형주 지역 '명사' 집단을 만나면서 '촉한정통론'의 이념을 비로소 구체화할 수 있게 된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는 삼국의 정립이 아니라 이를 통한 천하통일이 목표였기에, 유표 사후 형주를 차지한 유비는 본격적으로 천하통일을 도모한다.

물론, '의리'로 뭉친 난세의 용병대장으로서 유비의 최후 또한 관우의 복수에 바쳐졌지만, 제갈량은 조자룡과 달리 유비의 오나라 정벌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단다. 아마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책의 저자 요시히로의 말처럼 유비의 전투력을 믿은 당시까지는 전투실전 초보자 제갈량의 형주 탈환 도박이었을 수도, 아니면 내가 보기에는 유비라는 걸림돌 없이 제갈량이 촉한의 전권을 장악하여 북벌을 이루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제갈량은 조조 같은 대군벌의 휘하에서는 자신의 이념을 실현시킬 수 없음을 알았고, 자신의 고향은 아니지만 '학연'으로 엮인 형주 지역 '명사'들과 '지연' 및 '혈연'을 맺고 '와룡'이 되어 영웅을 기다렸다. 여기에 걸린 게 유비였을텐데, 어쨌든 유비와 제갈량의 '천하통일 이념'은 같았던 것이다. 제갈량은 유비가 '천하삼분지계'의 요충지였던 형주를 딛고 서쪽 파촉 지역의 익주로 가서 황제가 되기까지 '형주 명사'를 주력으로 '익주 명사'까지 조율하며 죽을 때까지 분연히도 북벌을 시도했다.

유비가 조조와 달리 '명사'를 탄압하지 않았거나 하지 못했던 배경이다.


"보통은 그곳(남방)에서 발달한 한민족 문화가 북방민족(5호)이 건국한 북조문화와 다르기에 '육조(손오-동진-송-제-양-진)' 문화라고 부른다... 지역에서 생존한 손오의 존재형태가 이렇게 손오를 기원으로 간주하는 '육조(六朝)'라는 개념을 형성해 갔다.
...
(손오는) 군주권력 강화로 이어질 법한 조조와 같은 혁신적 정책이나, 제갈량처럼 조씨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통해 한(漢)나라를 지키는 정책을 제시한 적은 없었다. 즉 육손은 '강동'이라는 지역을 위해 살았다."
- [삼국지 인재전쟁], <5장. 오나라, 지역과 함께 생존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강동의 손씨 오나라는 그냥 '지역주의'다.
한참 후 '5호'라는 이민족들이 다채롭게 교차하던 북조 문화에 밀려 남조가 비로소 '중화'의 일부로 인정되기까지 이 남방 '6조'의 기원이 손오라고 한다. 하지만 삼국시대 강동의 오나라는 변방의 지역 소국에 머물고자 했지 위나라와 촉나라처럼 천하통일을 꿈꾸지 않았다. 강동지역 '명사' 사회는 물론 군부의 주축인 적벽대전의 주역 주유와 육손도 장강 이북을 넘을 생각이 없었고, '원조 천하삼분지계'를 주장했던 강동의 지식인 노숙의 목적도 '삼분'이었지 '천하통일'은 아니었다.

결국, 손권 사후 서진이 강동을 쳐들어온 후에야 '지역'을 넘어서고자 깨달았던 오나라 '지역' 인재들은 대부분 그냥 남방 '6조'의 원조로서 남고 말았다.


"후한에서 삼국 시대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연결되었던 '인맥'은 이렇게 해서 '혼인' 관계를 통해 고착화되었다. 바꿔 말해서 '인맥이 귀족제라는 제도로 조직화'되어 갔다고 해도 좋다. '명사'의 시대였던 삼국 시대와 '귀족제'의 시대가 된 서진 시대의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
요컨대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는 다가올 서진의 성립을 위해 '공-후-백-자-남'이라는 계층제로 이루어진 '오등작(五等爵)'의 수여를 통해서 귀족과 군주권력의 긴밀성을 표현하고, '귀족'을 국가 신분제로 서열화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국가 신분제를 '귀족제'라 부른다... 사마소는 '귀족제'를 형성함으로써 군주권력과의 거리를 통해서 '귀족'들을 서열화하고, 그 '자율성'을 박탈하려고 했던 것이다."
- [삼국지 인재전쟁], <6장. 서진, 조직을 제압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사마의는 어릴적 난세의 피난길에서도 유학 경전을 공부하며 자란 '명사'였지만, 난세에 태어난 그는 조조와 순욱, 유비와 제갈량 같은 선배들과 달랐다. 사마의에게 유학적 혁신이나 전통 따위는 자기 가문 생존의 부속물이었다. 그는 출세와 가문의 생존을 위해 주로 '혼인 관계'를 이용했다. 아들의 배우자는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갈아치웠고, 이후 사마사와 사마소라는 아들 둘을 거쳐 손자 사마염이 건국한 진나라는 이 가문들을 황제의 절대권력 아래 '귀족제'로서 서열화시켰다. 

지방 호족의 '지연'이나 '명사'의 '학연'의 시대는 가고, 사회계급은 귀족들의 혼인과 '혈연'으로 '제도화'되었다.

그냐마 수천 수백 년간 군주의 절대권력에 대하여 할 말은 하고 견제도 하며 '자율성'을 유지해 온 '명사'들의 이념이 사마씨 서진의 '귀족제'로 인해 절대권력에 수렴되었다.

이후 유학에 노장사상을 버무린 추상적인 '현학'을 논하며 부채들고 화장이나 하고 다니다가 술이나 약에 취해 픽픽 쓰러지기나 하던 동진의 남조 귀족문화는 사마씨 일족의 서진 정권이 확립한 강권적인 '제도화'의 결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3.

"이처럼 '한(漢)'이라는 나라는 '한족(漢族)의 나라' 중국에서 특별하고, 제갈량은 그 '한'이라는 고전 중국의 최후의 지킴이였다.
이 '한나라 이념'의 지평 위에서 촉한을 정통으로 내세우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가 탄생하고,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관제묘가 세워진 것이다."
- [삼국지 인재전쟁], <4장. 촉나라, 전통을 계승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진수의 [삼국지]는 서진시대에 지어졌는데 위나라를 찬탈했으나 중원의 전통을 잇고자 했던 진나라 권력에 의해 삼국 중 '혁신'의 위나라를 중심으로 서술된다. 여기에 한나라 '전통'을 잇는 촉한의 유비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다가 약 천 년 후 원나라 말기 한족의 민족해방 투쟁 시기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는 대놓고 유비의 '촉한정통론'을 일관되게 고수한다.

대중적인 소설에 따르면 한족 부흥을 위해 평생을 바친 유비와 제갈량 외에는 조조를 필두로 다들 '난세의 간적'일 뿐인데, 삼국지 시대의 치열한 '인재전쟁'과 함께했던 '혁신'과 '전통' 등의 '이념'은 흥미로운 소설 속에서 '신화'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역사 속에서 명멸했던 영웅들과 인재들이 목숨걸고 추구했던 그 치열한 '이념' 자체가 본래는 한낱 '신화'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

***

1. [삼국지 인재전쟁](2019), 와타나베 요시히로, 노만수 옮김, <더봄>, 2023.
2. [난세의 리더, 조조](2013), 친타오, 양성희 옮김, <더봄>, 2022.
3. [조조 평전](2000) / [유비 평전](2004), 장쭤야오, 남종진 옮김, <민음사>, 2010 / 2015.
4.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 제갈량],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2.
5. [자기통제의 승부사 - 사마의],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3.
6. [결국 이기는, 사마의](2017), 친타오, 박소정 옮김, <더봄>, 2018.
7.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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