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46
칼 구스타프 융 지음, 김양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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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과학으로서, 심리학
- [인간과 상징], 칼 구스타프 융, 1964.


1.

아들이 카톡을 보내왔다.

용돈이 필요하거나 책 읽다가 모르는 단어를 물을 때 가끔 문자를 보내는 아들은 고등학생이 된 작년에 한창 'MBTI' 성격유형 테스트에 빠져있었다. 아들이 공유한 문자를 통해 나도 검사를 해보았더니  'ENJF'인가 'ENJT'인가로 나왔던 것 같다. 나는 '이 무슨 현대식 미신이냐'고 하면서 한 번 훑어보고는 치워버렸고 아들이 'MBTI' 얘기를 할라치면 '너는 아직 변화의 가능성이 무궁하다'며 일축했다.

내가 인간의 타고난 '본성' 보다는 '백지 이론'(tabula rasa/blank slate)을 믿는 대외적이고 공식적인 이유는 내가 세상의 '진보'를 믿기 때문이었고 그 이론적 전제는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이었다. 내 마음에 '심리학'이 들어설 공간은 없었다. 계급투쟁의 역사에서 굳어지고 이어져 온 인류의 사회적 '본성'은 언젠가 도래할 평등의 새 체제에서 다시금 씌어져야 했다. 

아들이 본인은 'INJT'이시라며 내게 보낸 카톡 문자는 그 성격에 관한 유투브 영상의 링크였고, MBTI '전문가'를 자처하는 유투버나 개그맨 출신 유투버의 영상을 통해 아들이 아빠인 내게 하고자 했던 말은, '하라고 하면 더 안 하는' 성격이시니 건드리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와도 같았다. 내 아들이 내 생각보다 공부를 훨씬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재작년부터 세상 스트레스 다 받으며 잔소리가 심해진 아빠에게 공부가 싫은 아들이 보내는 호소이기도 했다. 아들이 슬로건처럼 내건 'INJT'는 '무슨 말인지 이제 알았고 앞으로 알아서 할테니 자꾸 강요하지 말라'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녀석의 아버지이므로 'MBTI' 결과가 거의 비슷하다. 아니 사실은 똑같을 수도 있다. 나도 아들처럼 '직관'적이고 '판단'형인 듯도 하다. 나는 또한 '논리'적이고 싶어하며 '외향'적이기를 지향한다. 한편으로 타고난 대로 한다면 아마 나는 'INJF', 즉 '내향'적이고 '직관'적이며, '판단'형에 '감정'적인 성격에 가깝다. 그러나 성인이 된 나의 '의식'은 'ENJT', 즉 '외향'을 지향하고 '직관'을 믿으며, '판단'형에 '논리'적이고 싶어한다. 

정리하면,
나의 '의식'은 'ENJT'를 표방하고,
나의 '무의식'은 'INJF'로 잠재되어 있다.

아마도 '타고난 본성'을 믿기로 한다면,
나는 나의 '무의식'의 문을 여는 것이리라.


2.

1912년, 서른일곱살의 정신분석 의사 칼 융이 선배 의사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결별했을 때 프로이트는 쉰여섯살이었다. 
두 사람이 '무의식'의 발견과 연구라는 공통분모로 처음 만난지 5년 만이었다.

현대 심리학의 쌍벽인 두 인물의 관계는 '동지'였다. 일곱살 차이였던 조선 태조 이성계와 삼봉 정도전은 철저한 '동지'였지만, 열아홉살 차이의 프로이트와 융은 사실 '부자' 관계와도 같았다. 프로이트는 본인의 이론에 융이 철저히 따르기를 강요하는 '아버지'였고, 융은 자신만의 이론을 발전시키고자 아버지를 결국 떠나고 마는 '아들'이었다. 
신경증 환자들의 '꿈의 해석'의 추상화와 보편화, 나아가 교조화의 징후를 보이고 말기에 성에 대한 집착에 빠져 꿈해석을 이론화하던 프로이트에 반대하여 그 어떤 추상화나 보편화 일체를 경계하면서 철저하게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사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결론을 내리고자 했던 칼 융은 결국 프로이트의 이론대로 아버지를 죽이는 오이디푸스의 운명길을 따라간 것이었다.
아들 같았던 칼 융은 아버지와도 같았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당시에는 세인들에 의해 안 그래도 멸시당하던 '마음의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을 아예 "도덕적 어둠의 쓰레기장"([인간과 상징], <1>)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한다.


"꿈의 분석이란 한 인간이 배워서 규칙에 따라 적용할 수 있는 일종의 '기술'이 아니라, 두 인격 사이에 이루어지는 '변증법'적 대화인 것이다."
- [인간과 상징], <1. 무의식에 대한 접근>, 칼 융, 1964.


현대 심리학의 기반이 되었으며 지금의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라는 성격유형 테스트의 이론적 토대를 놓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1875~1961)은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악몽도 꾸고 수학을 특히 싫어하며 공부만 하면 발작을 일으켜 열두살에 등교거부까지 했던, 어찌보면 지금 내 아들보다 더 말을 안 들었을 수도 있는 이 천재소년은 타고난 'INJT'였을 텐데 어쨌든 공부발작증을 극복하고 의사가 된다. 당시만 해도 완전 비인기 영역이었던 정신병원에 취직한 융은 어린 시절의 특이한 꿈들과 당시로서는 치료불능의 영역이었던 신경증 환자들의 연구 과정에서 '꿈'과 '상징', 그리고 이들의 원천으로서 '무의식'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1907년 32세에 51세의 프로이트를 만나 5년간 함께 부자지간과 같은 학문적 동지관계를 이어갔고 프로이트와 결별한 융은 꿈의 분석을 교조화하지 않고 인간 무의식의 발로로서 꿈을 절대화하지 않았으며 꿈을 비롯한 갖자기 사례를 통해 발현된 인간의 '상징'에 주목했다. 

융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개인'의 강조다. 꿈의 전형성을 가지고 일률적인 해석을 하는 게 아니라 꿈꾼 자의 성격 유형(외향-내향/감각-사고-감정-직관)을 배경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도 꿈꾼 자의 유아기와 전날 생각들을 토대로 꿈을 사례별로 해석하지만 이를 전형화하고 보편화하려는 학자적 욕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성에 대한 집착을 벗어난 융은 꿈 자체를 무의식의 '상징' 발현으로 보되 이를 보편적 이론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칼 융은 현대 심리학의 대부라는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대표저서가 없는 편이다. 1961년에 세상을 등진 융의 사후인 1964년에 그의 제자들과 공저로 출간된 [인간과 상징]에서 융은 <1장. 무의식에 대한 접근>이라는 프롤로그 개관의 집필을 했는데 융의 최측근 제자였던 루이제 폰 프란츠가 이 책 출간을 실질적으로 총괄했다. 

[인간과 상징]은 처음부터 융에 의해 기획된 작업은 아니었다. 1959년 영국 BBC에서 방영된 한 프로그램에서 칼 융의 인터뷰가 대중들의 호응을 받게 되어 1964년에 출간된 책인데, 처음에는 심리학의 '이론화'를 경계한 융이 출간을 거절했지만 전세계 시청자들의 요청에 따라 작심을 하게 되었고 융 혼자가 아닌 그의 학문적 동지들인 제자들과의 공저를 조건으로 기획된 책이라고 한다.

칼 융은 이 책의 <1장>에서 '무의식에 대한 접근'의 개괄적 내용을 통해 '꿈'과 '상징', 꿈을 꾸거나 분석하는 사람의 성격 '유형'의 문제, 인류진화사에서 유전자와도 같은 '집단 무의식'의 '원형' 문제 등을 소개하고 있다.
아마도 정치경제사회 문제에 섣불리 개입하지 않고자 했을 심리학자 융은 이러한 '원형'과 '유형'을 보편화하지 않고 각 '개인'의 개별성과 구체성에 주목한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근대인(현대인)이 '합리주의'를 앞세워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부하면서 신 또는 자연과의 거리가 멀어졌고 양차례 세계대전 같은 재앙은 이를 증명하는데 근대의 '합리주의'든 고대 및 중세의 '신비주의'든 다시금 소통하고 합일이 되어야 현대적 '단절' 현상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유전자 DNA와 같은 '원형'의 '집단 무의식'과 개인 성격 '유형'은 꿈을 비롯한 각종 행위를 통해 '무의식'의 '상징'으로서 '의식'과 함께 우리들의 심리 현상을 이룬다.

전형적인 꿈(나체꿈, 추락꿈, 비행꿈, 귀신꿈, 위인꿈, 추격당하는 꿈, 목적지가 보이는데 도달하지 못하는 꿈, 움직여야 하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 꿈 등)은 그 자체가 아니라 꿈꾼 자의 성격과 유형, 인간 무의식의 원형 등을 연구하여 종합적이고 개별적으로 분석되어야 하며, 인간 심리의 유형도 비록 '타고난 본성'이기는 하나 그 개인이 살아온 환경의 영향으로 항상 '양면성' 또는 다면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개인이야말로 유일한 현실이다. 개인에서 벗어나 인류라는 추상적인 관념으로 나아갈 수록 우리가 실패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 어디에서 무슨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면 그 변화를 경험하고 이어나가는 것은 결국 개개인이다. 실제로 변화는 '개인'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 [인간과 상징], <1>, 칼 융, 1964.


칼 융이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이고 성격유형 테스트(MBTI)의 기원과도 같지만, 그의 이론은 결코 보편적으로 이론화되지 않는다.
그에게 모든 변화의 주체는 "개인"이어야 하고, 꿈꾼 자와 꿈 분석가는 서로 "변증법적 대화"를 이어가야 하며, 항상 "진리는 구체적"인 것이다.


3. 

"성격은 한 가지로 정해진 게 아니란다."

이게 내가 'MBTI'로 본인의 정체성을 알고자 했던 내 아들에게 해준 말이었다.

칼 융 박사의 말대로 모든 사람은 각자 양면성이 있고, 설령 타고난 본성이 있다고 해서 그 '본성' 그대로가 아니라 자라온 환경에 따라 어느 한 유형이 특출나게 될 수도 있다. 
남성 속에 여성성(아니마)이 있고 여성 속에 남성성(아니무스)이 있듯, 오래전 '내향성'이었던 나는 지금 '외향성'이 더 두드러진 것처럼 행동한다.  또한 '감정'이 앞서던 나는 '이성(사고)'을 더욱 앞세우기도 한다. 

융에 의하면 나는 '의식'의 영역에서 '외향성'과 '이성'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잠재된 '무의식'의 영역에서 '내향성'과 '감정'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의식'이 '무의식'을 억압하고 통제만 한다면 이는 프로이트나 융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콤플렉스'로 나타날 수도 있다. 프로이트에게 꿈은 이 억압된 '무의식'의 '소망충족표현'인 한편, 융에게 꿈은 '의식'에 지배된 '무의식'이 그 인류의 '원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장치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융에게 '꿈'과 '상징'의 기능은 '의식'과 '무의식'이 균형을 이루는 "심리적 평형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이다"([인간과 상징], <1>).


"... '마음'은 '의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 [인간과 상징], <1>, 칼 융, 1964.


'의식'과 '무의식'의 '변증법'을 담는 그릇은 칼 융에게는 인간의 '마음'이다.

내 아들의 'MBTI'라는 '의식'은 아직은 알 수 없는 그 아이의 '무의식'을 억압하고 있을 수도,
나의 '내향'적이고 '감정'적인 '무의식'이 사실 '외향성'과 '이성'을 지향하는 '의식'을 줄곧 괴롭혀 왔는지도,
나와 내 아들 개인이 겪는 자기 성격에 관한 질문들은 결국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누구나 겪어온 공통적인 '심리학'적 현상일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심리학'은 칼 융의 인도에 따라 내게도 '마음'의 과학이 된다.

***

1. [인간과 상징(Man and his Symbols)](1964), Carl Gustav Jung 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16.
2.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1900), Sigmund Freud,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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