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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특별판)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20년 9월
평점 :
'판타지'라니
- [보건교사 안은영](2015), 정세랑 / [종의 기원](2016), 정유정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 [보건교사 안은영], <돌풍 속에 우리 둘이 안고 있었지>, 정세랑, 2015.
1.
소설을 쓰고 싶다 생각한 건,
1995년 가을 군입대를 앞두고서였다.
대학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나 나는 철학학회 활동을 하며 문학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설에 관한 책들을 찾아읽고 공부하게 된 것도 대학 3학년 1학기부터였다. 군대를 다녀온다는 건 왠지 모르게 '어른'이 된다는 기점 같기도 했고 그러니 왠지 나도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선택과 결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스물두살,
나의 선택은 '리얼리즘' 소설이었다.
불평등한 사회체제를 묘사하고 그 속에서 '혁명'을 부르짖다가 어느새 사라지는 사람들의 '부재(不在)'. 그럼에도 끊임없이 세상을 변혁하려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 그 과정에서 90년대 초반 청춘들의 '부재성'의 경험.
내 소설의 주제는 뭐 그런 것들이었다.
1995년 대학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에 빗소리를 들으며 학교 PC실에서 나의 첫 단편소설 습작 '담배 세 까치'를 썼다. 그리고는 그 해 10월 군입대 전 학교 '심산문학상'에 응모하고는 결과는 보지 못한 채 군대를 갔다.
이듬해 첫 휴가를 나와 군복을 입고 학교를 찾아 90학번 선배 대훈이 형과 술을 마시며 물었더니 내 소설이 심산문학상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기대는 안 했지만 실망은 조금 했다. '입대를 앞둔 한 젊은이의 넋두리'라고 한 줄 심사평을 전하던 대훈이형의 말에 나는 더욱 실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오기로 찾아본 1995년 심산문학상 당선작은 공교롭게도 나와 같은 과 후배의 작품이었다. 학생회에서 오며 가며 한 번은 본 듯한 창백한 인상의 남자 후배였던 것 같았는데 이듬해 등단했던 소설가 김영하의 소설과도 비슷하게 싸가지 없던 그 후배의 소설에는 귀신이 등장했다. 나의 '리얼리즘' 목록에는 있을 수 없는 귀신과 환영, 개인주의와 '판타지'.
1970년대 황석영과 80년대의 방현석, 90년대의 김소진으로 연결시키던 나의 '리얼리즘' 소설계보에서는 볼 수 없는 소설 작풍의 시작이었다. 사회를 고발하는 '리얼리즘' 소설을 쓰고 싶던 나는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미친 듯 팔짝 뛰다가 툭 쓰러지는 심정으로 심산문학상에 승복할 수 없었다.
이런 세상에 '판타지'라니.
2.
20세기를 마감하던 해에 신문사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나의 마지막 단편소설 습작 '제4의 점령'에는 '귀신'이 등장한다.
정확히는 귀신이라기 보다 일제시대 카프시인 임화에 빙의된 청춘이다. 시대의 '부재'를 은유하던 어느 복학생의 미친 영혼 또는 그를 바라보던 화자인 나의 환영(幻影)이었다.
나 나름대로 세상과 '타협'한 판타지였다.
대학교 정문을 마지막으로 나오기 전 학교 우체국에서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두 군데 신문사에 보낸 등기에는 결국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기대는 조금 했지만, 실망은 조금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라 사회에 홀로 독립해야 했기에 조급한 마음이 일었다.
21세기가 열린 이듬해 초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으며 '리얼리즘' 소설가 지망생인 나는 또 다시 혀를 찼다.
쯧, '판타지'라니.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이있을까~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지 아않을까~"
노래로만 부르던 삼십대에 접어들기 전 '4차원'을 의미하는 임화의 '제4의 점령(占領)'을 얘기하던 나의 습작 소설도 다름아닌 '판타지'였지만 정작 나는 그걸 인정할 수 없었다. 나의 소설은 '리얼리즘'이어야 했다.
그런 내게 '판타지'라니.
오십줄에 접어든 올해 오로지 제목에 이끌려 우연히 집어든 소설가 정유정의 [종의 기원]도 '판타지'다. 미국의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The Blank Slate / tabula rasa)]을 읽다가 진짜 인간은 '백지'로 태어난 게 아니라 '본성' 자체가 아로새겨져 있는 걸까 궁금하던 차에 살인자의 본성을 타고난 정유정 소설 속 악인 한유진을 만났다. 작가는 단순한 살인자 DNA 소유자가 아니라 살인의 인류 진화사에서 가장 최상위 '포식자(프레데터)'로서의 악인(惡人)의 개인적 기원(The origin)을 추적한다. 인간 본성에 관한 '보편적' 기원, 즉 '종의 기원'이라는 근대 진화생물학의 본좌 찰스 다윈의 주저에서 제목을 차용했지만 내용은 결코 '보편적' 종(種)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 살인의 오랜 진화사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의 무의식에 잠재된 '살인'과 '폭력'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특정한 사이코패스 포식자의 이야기다. 작가는 굳이 꼭 존속살해의 과정을 세밀하게 써야 했을까. 결국 살인누명을 씌운 친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존속살인 현장을 정리하는 과정 자체도 결코 현실적이지 않았다. 거실과 방청소만 해도 모자랄 두어시간에 어머니의 피로 온통 칠갑된 그 넓은 집을 락스로 말끔히 치우는 게 가능한가. 친구에게 자기 죄를 누명씌워 죽게 한 과정과 목포에서 원양어선을 타고 한참 떠돌다 돌아오는 과정 자체도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다. '종의 기원'이라는 거창한 제목이 무색할 정도의 극단적 살인 '판타지'였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은 내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과 함께 또 한 번 혀를 내둘렀다.
저런, 극단적 '판타지'라니.
아예 '판타지'의 세계에 들어온 김에 소설 한 권을 더 펼쳤다. 몇해 전 드라마로 유명해진 [보건교사 안은영]이다. 소설가 정세랑의 이 작품은 그냥 대놓고 '판타지'라 읽기가 훨씬 편했다. 우리 사회 고등학교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에서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소재와 에피소드를 만화처럼 묘사하고 있어 재미지게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비비탄 권총과 장난감 무지개 칼로 귀신들을 물리치는 고등학교 보건교사(우리 시절의 양호선생님) 안은영의 발랄한 활약 속에서 '친절한 사람들'과 '악귀들'의 전쟁터인 이 현실을 보여주는 '판타지'임에도 인간사의 '리얼리즘'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명랑발랄 퇴마사 안은영 쌤의 다음 활약은 아마도 또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책을 덮었다.
꼭 악당들에게 이기지는 못할 수도 있고 그대로 도망칠 수도 있겠지만 항상 '친절'을 잊지 말자고 강조하는 이야기에 나는 또 혀를 놀린다.
이런, 만화같은 '판타지'라니.
3.
나의 20세기 마지막 단편소설 습작 '제4의 점령'도 나의 바램과 달리 이미 '판타지'였다.
소설가 김소진의 초기 단편소설처럼 쓰고 싶었지만 나의 경험과 필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빈 서판(tabula rasa)'의 백지이론을 믿는 나는 나보다 작가의 본성을 더 많이 받고 태어난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그들보다 노력과 근성이 부족함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도 내 소설습작에 '귀신'을 불러들였지만 역시 실패였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은 원래 '백지'와 '빈 서판' 또는 '빈 공책'을 들고 나왔으니, 50년 간 이리 쓰고 저리 써서 얼마 남지 않은 내 노트 구석에라도 계속 적어댈 것만은 안다.
나의 평생 꿈 '리얼리즘'이나 '판타지'나 결국 모든 건 작가의 머릿속 '환영'일테고 그 환상들이 결국 세상을 어떻게 그려내고 묘사하느냐에 따라 '리얼리즘'도 될 수 있고 '판타지'도 될 수 있겠기에, 나는 나의 앳된 소설관을 좀더 친절하고 너그럽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친절한 시선으로 '리얼리스트' 나를 돌아보며 나는 혀를 낼름 또 내민다.
저런, 나 역시 결국 '판타지'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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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민음사>, 2015.
2. [종의 기원], 정유정, <은행나무>,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