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대가 없이 건네는 다정 - 어쩌면 내게 꼭 필요했던 위로
하태완 지음 / 빅피시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태완 작가의 글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결핍을 느낄 때 읽으면

이상하게도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따스하게 비추는 햇살 같은 느낌이 든다.

서늘한 가슴을 데워주는 그의 글에서 36.5도의 온도를 느낄 수 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글의 온도 덕분에 읽으면 바로 내 몸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오래, 조금씩, 읽어야 좋다.


겨울만 되면 찾아오는 나의 오랜 고질병인 '겨울 우울증'이 기승을 부린다.

코로나로 인해 일상을 저당잡힌지 벌써 두 해를 넘고 있는터라 '코로나 블루'까지 더해져

한층 힘겨운 겨울을 보내는 나에겐 마음을 따스하게 데워줄 감성 에세이가 약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약을 먹듯 매일 시간을 할애하여 조금씩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그 약효를 톡톡히 보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더욱 예민한 시기에 살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과의 물리적인 거리는 멀리할 수 밖에 없지만,

그럴수록 더욱 사람들과의 훈훈하고 따스한 교류를 그리워한다. 

한때는 사람들에게 치이는 것이 힘들어, 얽히고 섥힌 관계를 좀 정리하고 

홀가분하게 살고 싶었는데, 인간은 참 간사한 동물이라 

거리를 두고 떨어지라고 하니

온기를 찾아 더 옹기종기 모이고 싶어하는 저주받을 간사함이란...


살다보면 그 잘난 사랑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나와의 약속 때문에

위염같은 속쓰림에 시달릴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상대를 약간 추궁하고, 나를 지독하게 닥달하며 지냈다. 

못난 짓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마음을 못 추스린 내 잘못이 제일 클지모르겠지만 

그렇게 매사에 나를 못살게구는 나의 성질머리 때문에 '나'는 지치고 외로웠다.

그런 나를 돌아보지도 않았던 매정했던 '나'를 위해 

저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차분히 경청하듯 읽어내려갔다.


때로는 같은 페이지를 정독한 후, 소리내어 읽어보기도 했다.

내 눈으로 글을 읽고, 내 목소리로 말을 하고, 내 귀로 들으면서

그가 말하는 귀중한 조언을 세심하게 새겨들을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이었다.


사랑이건 일이건 최선을 다했다면 당연히 '잠시 멈춤'이라는 안내 표지판을 

맞닥뜨리기 마련이고, 

그것은 곧 내게 있어 성장의 발판이 되어줄 것이라고..


작가의 말처럼 나는 지금 잠시 멈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달달 볶아대던 

나를 살며시 놓아주기로 했다.

코로나로 인해 엉망이 되어버린 일도, 마음같지 않게 진전없는 애정도,

오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염려하고 걱정하는 '쓸데없이 빠른 미래지향적인'사고를 

내려놓고 지금 현재에 충실하며 요동치는 마음을 토닥이며 숨고르기를 하면서..





완벽하지 않아도, 조금 부족해도, 조금은 모가 나있어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온전히 나를 이해해주는 글들을 만나서 

읽는 내내 몇번인가 뭉클함을 느끼게 된다.


활자가 주는 완벽한 안락함을 느끼며 오래도록 음미해보고 싶은 여린듯 힘있는 글들이

결핌의 시대에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나를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메세지가 

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부디 이 도타운 글에서 힘을 얻어, 모든 생명들이 움츠려드는 시리고 차가운 이 계절을

조금은 덜 힘들어하며 보낼 수 있기를 바래본다.


나는 하태완 작가가 아무런 대가 없이 건네는 '다정'을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서 주머니 속에 챙겨넣고, 내 마음이 시리고 흔들릴때마다

주머니 속의 '다정'을 만지작 거리며 버텨내고자 한다.

몹시도 따뜻하고 고마운 '다정'이다.




*본 포스팅은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남은 지겹고 이별은 지쳤다 (10만 부 기념 리커버 에디션) - 색과 체 산문집
색과 체 지음 / 떠오름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남은 지겹고 이별은 지쳤다. 

이 제목에 공감하는 사람들이라면 단언코 이별의 아픔을 한번 또는 그 이상

겪어봤을 것이다. 

가슴 아픈 이별을 겪어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있는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색과 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고 있는 저자는 

'사랑에 정답은 없지만 조금 더 나다운 사랑은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나다운 사랑..이라는 말에 큰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주변에 이별을 혹독하게 겪고 난후 다시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좋은 사람 만나보라고 권해봤지만 절래절래 고개를 흔든다.

사랑의 크기가 컸던만큼 이별의 상처는 클수 밖에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너는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앓고 있는거야. 치료가 필요해'라고 

말을 건네곤 한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서 멘탈을 강하게 부여잡고 다시 깨지더라도

새로운 사랑 앞에 주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혀 다른 얘기같지만, 나는 유튜브를 통해 유기견에 대한 영상을 자주 시청하고 있다.

사람에게 버림받고, 상처받은 유기견들은 새로 입양되어 새 가정으로 가도

마음을 열지못하고 사람들의 손길을 겁내하고 때로는 공격적인 자세를 보이며

거부하는 것을 보곤 한다.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린 생명체들을 

볼때마다 너무 안타까웠다.

티브에서 자주 보게 되는 유명 수의사나 동물훈련사가 나와 이런 유기견들의 행동을 교정하고 

솔루션을 찾는 것을 보며 감동받곤 한다.

지독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런 전문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이별을 겪으면서 마음을 다쳐, 자신을 사랑하는 이가 내민 다정한 손길조차 

두려워 손을 잡지 못하고 떨고 있는 이들..

이 책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극복하고 이겨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전문가같다.

마치 유기견들의 아픈 마음을 들여다보고 공감하며 두려움을 극복하게 만드는

수의사나 동물훈련사처럼 말이다.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기억을 어떻게 이겨내고, 나답게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낌없는 조언을 하고 있다.

연인에게 내뱉게 되는 모진 말들, 잘못된 행동들, 반복되는 실수들, 

알고는 있지만, 자주 까먹고 잊어버리게 되는 잘못된 말과 행동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고 반성하게 만든다.

글을 읽다보면 마치 나한테 '너도 이러잖아?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럼 안되지.행동 조심해'라고 

품위있게 꾸짖는듯하여 흠칫흠칫하며 읽게 된다.


저자는 다양한 사랑의 방식들을 들여다보며 정답없는 문제에 모범 답안을 제시하며

극복할 수 있도록 아주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언을 해주고 있다. 

읽다보면 글 한줄한줄마다 깊은 공감을 하게 되고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 사랑이 아직 서툰 사람들,

사람에게 상처 입은 마음때문에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길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책이다.




*본 포스팅은 문화충전과 제휴업체와의 협약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 요리 전문가부터 미식가까지 맛을 아는 사람들을 설레게 할 이야기
장준우 지음 / 북앤미디어디엔터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곰곰 생각해보면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리엔 늘 음식이 빠지지 않는다. 

밥을 먹든, 술을 마시든, 커피를 마시든, 그곳엔 우리의 입과 눈을 

즐겁해 줄 음식과 음료가 있어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곤 한다. 

그래서 식사를 하면서, 차한잔 하면서 문득문득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나는 무척 즐기는 편이고, 그런 자리에서는 아는척을 좀 해도 곱깝게 듣는 이들은 없다.

오히려 지금 입으로 들어가고 있는 음식의 유래라든가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는걸 좋아도하고, 이때만큼은 그들의 집중도도 최고치를 찍는다. 


장준우의 푸드오디세이 또한 음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저자인 장준우님의 좀 약력이 특이하다. 

전직이 신문사 기자였던 그는 요리를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를 졸업하고

시칠리아에서 음식을 배우고 셰프가 되었고 그리고 책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정체성이 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는데 이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요리사의 일을 잘 해내기 위해 음식을 탐구하는 푸드 라이터의 일을 

해오고 있고, 푸드 라이터의 일을 더 잘해내기 위해 요리사의 일을 함께 

해오고 있다.

자신이 하는 요리에 대해 더 잘알기 위해서 식재료와 음식에 대해 탐구하고 공부하고

연구하는, 기자출신 푸드 라이터.. 

서울신문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고 하니 왠지 믿음이 간다.


이 책의 목차를 쓰윽 훑어보니 나의 구미를 당길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꽃과 줄기, 잎, 버릴 게 없는 호박의 매력

새콤달콤한 토마토, 그동안 몰랐던 진짜 맛

봄을 유혹하는 아스파라거스의 매력

다양한 맛의 표정을 가지 후추의 세계

한때 금값보다 비쌌던 황금빛 샤프란등 식재료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인도에서 한국까지, 카레의 기구한 운명

추로스와 초콜릿, 그 치명적인 궁합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노동자들이 사랑하는 장어 젤리

피시앤드칩스, 왜 영국 음식의 대명사가 됐을까?

그들이 비둘기 스테이크를 먹는 이유..등 음식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고 있다.


아낌없는 위안, 국밥의 미학

봄이 오면 생각나는 베트남 음식

우리를 닮은 너, 스페인 요리

생돼지고기를 빵과 함께? 독일식 별미 메트..등 낯선듯 익숙한 세계의 맛에 대한 이야기도

담고 있어서 목차를 보고 읽고 싶은 페이지부터 읽어도 재미있을 것이다. 





이 책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동안 저자인 장진우님이 찍은 

음식 사진과 관련된 사진을 많이 싣고 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했는데 덕분에 생경한 요리에 대해 설명할때도 

사진 한번 쳐다보면 입력완료!! 되어서 이해하기가 쉬웠다.

내가 미처 몰랐던 음식에 대한 뒷이야기로 책을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시장에 가면 자주 보게 되는 주키니, 애호박 옆에 놓여있기 마련인데

가격이 애호박의 반가격일때가 많다. 

그러다보니 은연중에 박힌 편견 때문인지 애호박에 비해 주키니는 맛이 좀 덜하고

저렴한 식재료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다.

주키니 호박은 19세기 이탈리아 북부에서 개량된 서양호박으로 한국 애호박과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만 애호박이 수분이 많고 조직이 치밀하지 않아 요리하면 금방 물러지는 것과 달리 

주키니는 익혀도 비교적 형태를 유지하는게 차이라고 하니,

앞으로는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괜찮은 주키니를 자주 식탁에 올려야겠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 '황금보다 비싼 식재료' 이 말은 샤프란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우리에겐 섬유유연제 이름으로 더 친숙한 샤프란은 왜 금보다 더 비싼 대접을 받는걸까?

이유는 재배하는 조건이 까다롭고 어머어마한 노동력에 비해 수확량이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다.

1kg을 얻기위해서는 15만송이의 꽃을 따야하고 한사람이 400시간 이상 노동을 

해야하고, 수확가능한 시기는 딱 2주, 그렇게 어렵게 수확하였지만 정작 맛은 

우리 입맛에 안 맞을거라는게 저자의 이야기다.


푸아그라는 최고급 요리의 대명사이자 동물 학대의 전형이라는 극단의 이미지를

갖는데, 기원전 2,500년쯤 만들어진 이집트 벽화엔 거위에게 억지로 먹이를 

먹이는 모습이 있다. 

이를 근거로 이집트인들이 푸아그라를 발견, 또는 발명했다고 추정한다.

야생거위는 늦가을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먹이를 가능한 한 많이 섭취하는데

이 시기 거위간이 맛이좋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들은 사시사철 푸아그라를 먹기 위해 거위에게 억지로 먹이를 주게 되고,

강제급식이라 불리는 가바주(Gavage)가 탄생하게 된다.



국밥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식문화다. 

주재료인 고기를 기준으로 보면 설렁탕, 곰탕, 육개장등의 소고기국밥과,

순대국밥, 돼지국밥 같은 돼지고기국밥으로 나뉜다.

국밥의 미학은 식재료의 낭비없는 활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외면받는 잡뼈, 

머리, 꼬리등으로 국물을 낸다.

선호부위를 제외한 부속고기로 맛을 내어 푸짐하게 내어놓은 

따뜻한 국밥 한그릇이 주는 든든함.


이 밖에도 흥미 진진한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읽다보면 없던 식욕마저

살아나는 느낌이다.

읽어두고 알아두면 어딜 가든지 아는척 할 수있는 인문지식 서적이다.

음식에 관심이 있거나 요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흥미로워할 내용이 많으니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본 포스팅은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0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 나는 기억상실증과 맞먹는 수준으로 기억을 통째로 잊어버리곤 한다.

그리고선 잊고 있는줄도 모르고 한동안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다가

어떤 계기로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쓰나미처럼 거세게 들고 일어날 때가 있다.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런 경험을 했다.


에쿠니 가오리의 특유의 무심한듯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를 이 책에서도

만나게 된다.

짤막짤막하고 간결한 그녀의 글에서는 등장 인물들의 복잡하고 불안한 심리도 

담백하게 묘사되어지고 있다.

덕분에 등장 인물들의 단순치 않은 심리를 헤아려야 하는 것은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이 된다. 

마치  대사없이 눈빛으로만 연기하는 실력파 연기자의 연기를 보는 듯해서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듯 숨을 들어마시고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에쿠니 가오리만의 특색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는 10명의 여고생들이 등장한다.  

교실 안에서는 다들 평범해보이는 그 또래의 소녀같지만

교실 밖의 그녀들은 모두 한가지씩 나름대로의 사연들을 가지고 있다. 


지방으로 발령을 받은 아버지와 떨어져, 엄마와 둘이 살고 있는 기쿠코.

가끔 만나는 아버지를 대할때면 뭔가 좀 어색하다.

그러던 어느날 등교하던 전철 안에서 치한을 만나게 된 기쿠코.

처음의 당황스러움도 잠시 기쿠코는 자신의 몸을 만진 그 여자의 손길이

불쾌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불감증이 아닌가 하고..


문득, 등에 사람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것도 재킷 안쪽에, 화들짝 놀라 몸이 굳었다.

(중략)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손은 오른쪽에서 내 재킷 안으로 침입하여 재빨리 등을 스치고 지나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주 꽉.

가늘고 싸늘한 손가락. 남자의 손이 아니었다.

금방 알 수 있었다.

-손가락 중에서-




에미와 모에코는 교실에서 단짝 친구이다. 

매일 등교를 같이하고 귀가도 같이하는 사이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에미가 이상하다. 

정신이 어딘가 먼데를 헤매고 있는것 같은 이상행동을 보이던 에미를 

같은 반 아이들은 병균 취급을 한다.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더니 학교도 휴학을 하게 되고, 모에코는 외톨이가 된다.


10월말쯤, 에미는 반에서 외톨이였다.
모두들 에미를 피했고, 에미가 손을 댄 것은 만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에미의 책상과 교과서에 저질스런 낙서를 갈겨 놓기도 했다.
'노이로제'니 '비정상'이니, '세균'이라고,
에미는 그런 낙서를 보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상하다는, 
그러나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암울하고 쓸쓸한 표정으로..
-초록 고양이 중에서-


그나이 또래의 친구들과는 달리 유즈는 엄마와 함께 쇼핑을 하고,

브런치도 함께 먹고 까페도 함께 간다.

어느날 같은 반 친구인 다케이로부터 남자친구를 소개 받게 된다.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잘 모른체 이성간의 감정에 몹시 서툰 유즈..


그런데도 나는 계속 요시다를 만났다.

어찌된 셈인지 만나는 날에는 늘 비가 내렸고,

걸어만 다니는 데이트가 넌더리가 나기도 했지만.

발이 젖어 시려지면 처량한 기분이 든다.

그런 때 나는 곧잘, 엄마의 르노가 쌩하고 데리러 와 주면 좋겠는데,

라고 생각하곤 했다.

-천국의 맛 중에서-




성격 밝고 활발한 카나는 중도 비만이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이쁘다는 말대신 성격좋다는 말을 한다.

가족들은 심한 말로 카나의 외모를 비하하며 자존감을 사정없이 꺾기도 한다.

그녀는 매일밤 사탕일기를 쓴다. 

그 일기에는 말이나 행동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색깔별 사탕을 준다.

사탕으로 독살하는 상상을 하면서..


카나는 성격도 명랑하고 일도 잘하니까, 결혼하면 잘 살거야,라고

아줌마는 말한다.

그렇죠, 라고 동의를 구하면 단골 손님들은 대개 암, 그렇고말고

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날이면 나는 아줌마와 단골손님에게 검정 사탕을 잔뜩 선사한다.

사탕은 독약, 지금은 그저 수첩에다 달아 놓을 뿐이지만 

-사탕일기 중에서-



교실에서 아무하고나 얘기하는데 친한 친구는 없는 다카노 미요는 

반 아이들로부터 이름이 아닌 다카노씨라고 성으로 불린다. 

그건 너와는 친하지 않다는 명확한 뜻의 표현이다.

남다른 발육으로 육체의 쾌락에 눈을 뜬 그녀는 원조교제를 하고 있다.


몸이 목적이라고는 여기고 싶지 않아 나는 미요와 함께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옷을 사주려고도 해보았고, 쉬는 날에는 드라이브를 하자고도 해 보았다.

미요는 모두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헤실헤실 웃으며 다가와 방까지 따라오는 것이었다.

-머리빗과 싸인펜 중에서-


 

이렇듯 이들 소녀들은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길목에서 성장통을 겪고 있었다.

누구는 그 시기를 다시 경험하지 못할 꿈 많은 시절이라고 한다.

누구는 갈수만 있다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도 한다.

그건 그 시절을 한참이나 지나 기억조차 잘 안나는 사람들의 사치스러운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에게 여고 시절을 어땠지.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 보기로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시절은 표면적으로는 즐거웠지만 내면적으로는 

진학에 대한 부담, 냉엄한 경쟁으로 내몰린 불안감과 초조로 

내심 버거웠던 것도 같다.


17살 여고시절, 한껏 멋을 내었지만 어딘가 꽤나 촌스러웠던 나와 내 친구들.

스킨로션 냄새와 쉬는 시간 누군가 몰래 까먹은 도시락 반찬 냄새가 뒤섞인 교실.

독사, 늙은여우 같은 살벌한 별명으로 불렸던 선생님들.

친구들과 몰려다니던 방과 후 분식집과 학교 앞 골목길.


가만있어도 눈에 띄는 여학생도 있고, 존재감조차 희미한 여학생들도 있다.

교우관계가 좋아 인기있는 친구도 있고, 은근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도 있다.

학업 성적이 좋아 선생님께 칭찬듣는 학생들도 있고, 

저번보다 성적이 떨어지거나 칠판에 적힌 문제를 풀지 못해서 

손바닥을 맞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교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세상 모든 것 같았던 그 시절.

시험 성적에 울고 웃고, 친구관계 때문에 괴로워하고, 이성문제로 설레고 힘들어하던

세상을 다 가진듯 하다가, 당장 죽고 싶을만큼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며

치열하게 보냈던 그 모든 일들이 시간이 지나고 이 나이쯤되니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다는게 오히려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그때의 우리들처럼, 소설속의 열명의 소녀들은 꽤나 진지하게 

그 시절을 보내고 있다.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청소년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그때..

때로는 화사하게, 때로는 우중충하게, 때로는 비를 맞고, 때로는 폭풍우를 맞으며

매일매일 아픈 성장통을 겪으면서 말이다.


왜곡된 기억은 그때를 아름답고 찬란하였다고 포장하기도 하고,

모든 촛점이 입시에 맞춰져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만큼 괴로웠다고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중년이 되어 그 시절을 지나온 모든 감정들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오랫만에 다시 들춰볼 수 있었던 소중하고 멋진 경험을 하였다.




*본 포스팅은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웨하스 의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서점을 들리면 유독 자주 눈에 띄는 일본작가가 있다.

바로 에쿠니 가오리다.

요시모토 바나나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여류작가 중의 한명으로 꼽힌다.

웨하스 의자는 쓸데없는 미사어구는 생략되어진 매우 객관적인 시선으로 

매우 주관적인 ''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에서 바싹하지만 왠지 축축한 느낌을 받는다

객관적인 시선에만 포인트를 맞춘다면 그녀의 소설이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듯하다.

문체가 주는 간결함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주인공인 ''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면

눈물같은 습기를 가득 담고 있어서 금방이라도 주루루 눈물이 쏟아질듯한 

주인공인 ''의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된다

바싹 뽀송한듯하지만 실제는 그가 없는 밤, 애써 아닌척 하지만 입을 쩍벌린

외로움이란 녀석에게 집어삼킨 채 그 안에서 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는 그림을 그리며 독신 생활을 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애인이 있고 그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있다.

그녀는 애인이 있어야 행복하고, 애인이 오지 않는 날은 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니라는 듯.. 거리로 나가 무심히 산책을 하기도 한다

외로움과 그리움을 내딛는 발끝마다 흘리면서 말이다.



나는 애인 덕분에 이 세상에 겨우 발을 붙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것은 기묘한 감각이다.

애인이 전부라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애인과 있는 내가 전부라고 느낀다.

나는 그것을, 외롭다고 해야 하는지 충족돼 있다고 해야 하는지 몰라 혼란스럽다.

옳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옳지 않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몰라,

그만 생각을 포기한다.



그랬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애인은 와이프와 딸이 있는 중년의 남자다.

왜 하필 가정이 있는 사람이냐고 묻지 않기로 했다.

그녀 또한 도덕과 이성사이에서 수 많은 밤을 힘들어 했을것이고 

머리를 비우고 생각을 포기하는게 그녀가 견딜 수 있는 방법이었으리라.

사랑은 항상 사고처럼 부지불식간에 찾아온다.

그녀는 유부남을 사랑한게 아니라 사랑했던 그가 유부남이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모양새를 가진 '사랑'들이 있다.

그녀가 택한 사랑은 책 제목인 웨하스 의자처럼 

달콤하지만 이쁘지만 무너져버릴 것을 알기에 앉을 수 없는 

위험하지만 치명적인 사랑이었다.



나는 애인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애인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고 있으니까.

내게 그림을 그리는 것과 살아 있다는 것은 비슷한 일이다.

결국은 애인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셈이다.

언어는 아무 소용이 없다.

언어로 사고하려 하면, 늘 같은 자리를 맴돌고 만다.


그녀를 지탱하고 살아나가게 하는 것은 애인이고, 그런 그를 사랑할수록 

자신은 외로움과 절망에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녀 또한 알고 있다.

그를 떠나기로 마음먹지만 그건 그녀에겐 죽음을 뜻한다.

그녀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이건 책을 읽는 분들이 확인하시도록 남겨놓겠다.


세상의 잣대로 들이대면 질타를 받을게 자명한 사랑을 선택한 그녀.

깨지고 무너지기 쉬운 웨하스 과자로 만든 의자같은 그녀의 사랑을

보태지도 빼지도 못하고 지켜볼뿐이다.

결국 선택을 각자의 몫이고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행복하든 불행하든

그것 또한 자신들이 감내해야 할 몫이므로..



가볍게 읽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바닥을 훑으며 읽어내려간 듯한 묵직함이 남는 

소설이었다.

내친김에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서 읽어볼까 한다.





 
* 포스팅은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