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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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 나는 기억상실증과 맞먹는 수준으로 기억을 통째로 잊어버리곤 한다.

그리고선 잊고 있는줄도 모르고 한동안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다가

어떤 계기로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쓰나미처럼 거세게 들고 일어날 때가 있다.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런 경험을 했다.


에쿠니 가오리의 특유의 무심한듯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를 이 책에서도

만나게 된다.

짤막짤막하고 간결한 그녀의 글에서는 등장 인물들의 복잡하고 불안한 심리도 

담백하게 묘사되어지고 있다.

덕분에 등장 인물들의 단순치 않은 심리를 헤아려야 하는 것은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이 된다. 

마치  대사없이 눈빛으로만 연기하는 실력파 연기자의 연기를 보는 듯해서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듯 숨을 들어마시고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에쿠니 가오리만의 특색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는 10명의 여고생들이 등장한다.  

교실 안에서는 다들 평범해보이는 그 또래의 소녀같지만

교실 밖의 그녀들은 모두 한가지씩 나름대로의 사연들을 가지고 있다. 


지방으로 발령을 받은 아버지와 떨어져, 엄마와 둘이 살고 있는 기쿠코.

가끔 만나는 아버지를 대할때면 뭔가 좀 어색하다.

그러던 어느날 등교하던 전철 안에서 치한을 만나게 된 기쿠코.

처음의 당황스러움도 잠시 기쿠코는 자신의 몸을 만진 그 여자의 손길이

불쾌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불감증이 아닌가 하고..


문득, 등에 사람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것도 재킷 안쪽에, 화들짝 놀라 몸이 굳었다.

(중략)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손은 오른쪽에서 내 재킷 안으로 침입하여 재빨리 등을 스치고 지나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주 꽉.

가늘고 싸늘한 손가락. 남자의 손이 아니었다.

금방 알 수 있었다.

-손가락 중에서-




에미와 모에코는 교실에서 단짝 친구이다. 

매일 등교를 같이하고 귀가도 같이하는 사이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에미가 이상하다. 

정신이 어딘가 먼데를 헤매고 있는것 같은 이상행동을 보이던 에미를 

같은 반 아이들은 병균 취급을 한다.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더니 학교도 휴학을 하게 되고, 모에코는 외톨이가 된다.


10월말쯤, 에미는 반에서 외톨이였다.
모두들 에미를 피했고, 에미가 손을 댄 것은 만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에미의 책상과 교과서에 저질스런 낙서를 갈겨 놓기도 했다.
'노이로제'니 '비정상'이니, '세균'이라고,
에미는 그런 낙서를 보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상하다는, 
그러나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암울하고 쓸쓸한 표정으로..
-초록 고양이 중에서-


그나이 또래의 친구들과는 달리 유즈는 엄마와 함께 쇼핑을 하고,

브런치도 함께 먹고 까페도 함께 간다.

어느날 같은 반 친구인 다케이로부터 남자친구를 소개 받게 된다.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잘 모른체 이성간의 감정에 몹시 서툰 유즈..


그런데도 나는 계속 요시다를 만났다.

어찌된 셈인지 만나는 날에는 늘 비가 내렸고,

걸어만 다니는 데이트가 넌더리가 나기도 했지만.

발이 젖어 시려지면 처량한 기분이 든다.

그런 때 나는 곧잘, 엄마의 르노가 쌩하고 데리러 와 주면 좋겠는데,

라고 생각하곤 했다.

-천국의 맛 중에서-




성격 밝고 활발한 카나는 중도 비만이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이쁘다는 말대신 성격좋다는 말을 한다.

가족들은 심한 말로 카나의 외모를 비하하며 자존감을 사정없이 꺾기도 한다.

그녀는 매일밤 사탕일기를 쓴다. 

그 일기에는 말이나 행동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색깔별 사탕을 준다.

사탕으로 독살하는 상상을 하면서..


카나는 성격도 명랑하고 일도 잘하니까, 결혼하면 잘 살거야,라고

아줌마는 말한다.

그렇죠, 라고 동의를 구하면 단골 손님들은 대개 암, 그렇고말고

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날이면 나는 아줌마와 단골손님에게 검정 사탕을 잔뜩 선사한다.

사탕은 독약, 지금은 그저 수첩에다 달아 놓을 뿐이지만 

-사탕일기 중에서-



교실에서 아무하고나 얘기하는데 친한 친구는 없는 다카노 미요는 

반 아이들로부터 이름이 아닌 다카노씨라고 성으로 불린다. 

그건 너와는 친하지 않다는 명확한 뜻의 표현이다.

남다른 발육으로 육체의 쾌락에 눈을 뜬 그녀는 원조교제를 하고 있다.


몸이 목적이라고는 여기고 싶지 않아 나는 미요와 함께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옷을 사주려고도 해보았고, 쉬는 날에는 드라이브를 하자고도 해 보았다.

미요는 모두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헤실헤실 웃으며 다가와 방까지 따라오는 것이었다.

-머리빗과 싸인펜 중에서-


 

이렇듯 이들 소녀들은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길목에서 성장통을 겪고 있었다.

누구는 그 시기를 다시 경험하지 못할 꿈 많은 시절이라고 한다.

누구는 갈수만 있다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도 한다.

그건 그 시절을 한참이나 지나 기억조차 잘 안나는 사람들의 사치스러운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에게 여고 시절을 어땠지.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 보기로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시절은 표면적으로는 즐거웠지만 내면적으로는 

진학에 대한 부담, 냉엄한 경쟁으로 내몰린 불안감과 초조로 

내심 버거웠던 것도 같다.


17살 여고시절, 한껏 멋을 내었지만 어딘가 꽤나 촌스러웠던 나와 내 친구들.

스킨로션 냄새와 쉬는 시간 누군가 몰래 까먹은 도시락 반찬 냄새가 뒤섞인 교실.

독사, 늙은여우 같은 살벌한 별명으로 불렸던 선생님들.

친구들과 몰려다니던 방과 후 분식집과 학교 앞 골목길.


가만있어도 눈에 띄는 여학생도 있고, 존재감조차 희미한 여학생들도 있다.

교우관계가 좋아 인기있는 친구도 있고, 은근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도 있다.

학업 성적이 좋아 선생님께 칭찬듣는 학생들도 있고, 

저번보다 성적이 떨어지거나 칠판에 적힌 문제를 풀지 못해서 

손바닥을 맞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교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세상 모든 것 같았던 그 시절.

시험 성적에 울고 웃고, 친구관계 때문에 괴로워하고, 이성문제로 설레고 힘들어하던

세상을 다 가진듯 하다가, 당장 죽고 싶을만큼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며

치열하게 보냈던 그 모든 일들이 시간이 지나고 이 나이쯤되니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다는게 오히려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그때의 우리들처럼, 소설속의 열명의 소녀들은 꽤나 진지하게 

그 시절을 보내고 있다.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청소년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그때..

때로는 화사하게, 때로는 우중충하게, 때로는 비를 맞고, 때로는 폭풍우를 맞으며

매일매일 아픈 성장통을 겪으면서 말이다.


왜곡된 기억은 그때를 아름답고 찬란하였다고 포장하기도 하고,

모든 촛점이 입시에 맞춰져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만큼 괴로웠다고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중년이 되어 그 시절을 지나온 모든 감정들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오랫만에 다시 들춰볼 수 있었던 소중하고 멋진 경험을 하였다.




*본 포스팅은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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