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슬퍼하지 말고 더 사랑하기


김진영 저, '아침의 피아노'를 읽고


"김진영 선생님은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병상에 앉아 메모장에 '아침의 피아노'의 글들을 쓰셨다." 

이 책의 첫 문장이다. 한 장을 더 넘기면 차례가 나온다. 2017년 7월부터 2018년 8월까지의 시간이 덩그러니 적혀있다. 1952년생인 저자 김진영은 2017년 7월 암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2018년 8월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난다. 암 선고를 받았을 때 그의 간은 이미 암덩어리가 장악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공식적인 진단을 받았던 그날 그는 암 환자가 되었다. 그 후, 1년 하고도 1개월. 비록 건조한 문자로 적혀 있지만, 이 책의 차례는 저자가 암 환자가 되고 암에게 육체를 내어주기 직전까지 그의 숨과 그의 정신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내 마음은 편안하다." 

'작가의 말'을 제외한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읽고 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마음이 다시 무너졌다. 나는 죽기 3일 전에 과연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암 환자로 지낸 1년 1개월간 저자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였던 것 같다. 총 234편의 짧은 일기 가운데 수 차례 언급되기도 했고, 이 책의 부제도 같은 제목이기 때문이다. 아직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읽어보지 않은 나로선 면밀한 비교가 불가능하겠지만, 저자가 스스로 바르트와 비교한 바에 따르면, 바르트의 일기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글인 반면, 저자의 일기는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글이다. 즉, 바르트는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린 상황을 애도한 반면, 저자는 '사랑하는 주체'를 잃어가는 상황을 애도한 것이다. 요컨대, 사랑의 객체와 주체의 차이. 저자는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느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은 바르트보다 지극히 행복한 처지라고. 자신은 죽어가고 있지만, 사랑의 대상들은 생생하게 현존하기 때문이라고. 그것들을 사랑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고. 


아, 이런 사유라니! 죽음을 앞둔 철학자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감정은 벅찬 가슴을 무너뜨리고, 이성은 맑은 상태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타자의 상실을 저울에 올려놓을 수는 없겠지만, 사랑하는 주체의 상실보다 사랑받는 객체의 상실이 내게도 더 묵직하게 다가온다. 나는 나를 잃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는 싫은 마음. 공감이 된다. 특히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라는 존재자로서 나는 이 마음을 더 공감하게 된다. 죽음이라는 존재론적 불안의 근원 앞에 단독자로 서게 되면 사람은 이타적이 되는 걸까. 


이어령 선생님은 88세로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에 사랑을 언급한다. 복막에서 시작된 암세포가 맹장과 대장, 간으로 전이되어 두 번째 수술을 받은 후 치료 중단을 선언하고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친필로 쓰신 글의 요지가 '사랑'이었다. 마지막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하자고 했다. 김진영 선생님 역시 이 책에서 사랑을 언급한다. 이 세상을 마지막까지 사랑할 거라고, 그것만이 자기의 존재이고 진실이고 의무라고. 그런데 가만히 다시 보니, 이 다짐이 적힌 204번째 일기는 "병원에 다녀왔다. 결과가 안 좋다."로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이 여전히 아름답다고 하면서 그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아, 나는 나의 미래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사랑을 노래할 수 있을까.


이것 말고도 이 책에 담긴 문장들은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깊다. 활자보다 여백이 더 많은 이 책의 바른 독법은 여백을 읽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시간이 더는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질량이고 무게이고 깊이로 다가간 순간들을 살아내는 저자의 일상도 활자가 아닌 여백에 더 많이 담겨있을 것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 가운데 매일 같이 도래한 아침의 숭고함을 알고 그 하루를 정중하게 환대하는 저자의 몸과 마음도 활자로 쓰인 문장이 아닌 쓰이지 않은 문장들에 훨씬 더 많이 녹아있을 것이다. 책을 덮었지만 여운이 오래 남을 듯하다. 그러나 죽음을 깊은 묵상한 자로서 나는 다가오는 '오늘 하루'를 더 감사하며 더 소중하게 살아내리라. 슬퍼하지 말고 더 사랑하리라.


#한겨레출판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