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ㅣ 스티븐 킹 걸작선 1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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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장미꽃은 빨갛다. 제비꽃은 파랗다. 설탕은 달다. 그리고 캐리 화이트는 우리의 밥이다. - 32p -

 

어렸을 때 겁이 무척이나 많았던 나는 공포영화라면 길거리에 부착된 영화포스터만 봐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심장을 콩닥콩닥 거린 채 일부러 먼 거리를 돌아가야 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 귀신영화도 섬뜩했지만 외국 공포영화에는 나 자신을 숨죽이게 하는 또 다른 원초적인 두려움이 어른거렸다. 그 중의 한 편인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74년작 <캐리>는 외국 공포영화의 대명사로 피를 전신에 뒤집어 쓴 여주인공의 모습에 오금저릴 정도의 강력한 공포의 상징물이었다.

 

어쨌거나 결국 영화는 성인이 된 후 비디오를 빌려 공포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귀신이나 유령이 등장하는 영화는 아니었던 것 하며 공포와는 별개로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내재되어 있었던 점이 의외였다. 이 후 스티븐 킹의 원작도 읽어보고 싶단 마음도 있었는데 킹의 소설은 알다시피 분권짜리가 일반적이라 초심자용 입문작으로 단권짜리를 문의했더니 마침 이 소설을 추천받았다. 영화의 공포를 원작에서는 어떻게 잘 살려냈을까 라는 궁금증과 함께 전체적인 줄거리를 이미 인지하고 있다는 익숙함도 감안하며 읽어갔다.

 

캐리 화이트는 광신적이고 가학적인 엄마와 자신을 기형으로 취급해 조롱하고 괴롭히는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는 소위 ‘왕따’ 여고생이다. 그녀의 심적 고통은 체육시간이 끝나고 샤워실에서 몸을 씻는 과정에서 명징화 된다, 이름인 ‘화이트’처럼 희고 순수무결한 이미지 대신 손에서 비누를 놓쳐 떨어뜨리는 순간, 이 소녀의 몸에서는 생전 처음 피가 흘러내린다. 갑작스러운 경험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하는 캐리. 그것은 초경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캐리에게 지금까지 그러한 경험적 지식에 대해 제대로 알려준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 비극의 발단이 된다. 청교도적인 청결만을 강요하는 엄마는 딸의 생리적 현상에 대해 입을 닫고 있었으며, 같이 샤워하던 반 여학생들은 피 묻은 손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가련한 그녀에게 일제히 깔깔대며 조롱한다.

 

다음 순간 욕지기와 경멸과 혐오감에 찬 웃음소리가 끽끽대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바뀌면서 아이들이 캐리에게 탐폰과 생리대를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눈송이처럼 날아왔으며 "틀어막아, 틀어막아, 틀어막아...."하는 소리는 이제 노래처럼 울려 퍼졌다.  -17p -

 

" 이 악마의 자식 같으니라고. 내가 어째서 이런 저주를 받았을까" 엄마가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 73 p -

 

세상에 대한 무지로 몸과 영혼까지 철저히 무시당하는 그녀는 아이들에게 혐오의 대상이며, 장난감에 불과하다. 서서히 지쳐가는 그녀를 보며 같은 반 여학생인 수지 스넬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남자친구 토미에게 자신 대신 캐리를 학교 무도회 파트너로 대신 데려가 달라고 청하고 토미는 그렇게 함으로서 다소나마 간접사과와 보상을 하고 싶어 하는 여친의 마음을 헤아려 승낙한다. 하지만 불행의 씨앗은 잉태하고 있었다. 샤워실에서 캐리에 대한 집단 괴롭힘을 주도했던 여학생 크리스에게 정학 처분이 내려지고 이에 앙심을 품은 크리스는 남친 빌리를 사주해 캐리를 공개 망신 주려고 음모를 꾸민다.

 

캐리는 이러한 음모가 있을 줄을 꿈에도 모르고 드레스도 직접 만드는 둥 부푼 희망 속에 토미와 참석한 무도회에서 뜻밖에도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왕과 여왕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왕관을 쓰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는 순간 머리 위로 돼지 피가 쏟아진다. 빌리와 크리스의 못된 장난이었던 것. 황당한 상황에 놀라 달아나버린 캐리는 이윽고 격분하여 그동안 억눌렀던 세상에 대한 증오를 토해낸다. 그녀에게 염력이라는 초능력이 있었고 그러한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시켜 온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무차별 살해를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참극은 또 다른 비극적 결말로 이어지게 된다.

 

이 소설에서 ‘피’의 이미지는 죄악과 수치, 저주로 상징화된다. 캐리의 초경은 아이들에게는 조롱거리로 엄마에게는 순결을 깨뜨린 죄악으로 간주되어 학대와 멸시로, 마지막에는 생애 처음으로 찾아온 소녀의 행복을 무참히 산산조각 내는 돼지피로 각각 돌아오면서 캐리에게는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 몸이 내던져져 삶이 곧 지옥인 일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 속 캐리를 따라가다 보면 왕따란 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었으며 억압적이고 왜곡된 청교도적인 전통과 천박하고 타락한 시선이 인간성을 어디까지 극단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게된다. 결국 인과응보의 교훈을 남기며 모두에게 응분의 처벌을 받게 하면서 미국 사회의 어둡고 부정적인 상황이 빚어낸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현실에 냉엄한 경고장을 던져주는 것이다.

 

'너희들은 날 속인 거야.속임수가 있었지 속임수 아 더러운 속임수 말야.'

'더러운 수작들을 보라고 내 삶 전체가 하나의 더러운 장난이었단 말야.'

'아 엄마 엄마가 무서워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오오오오오 오오오오오'

'엄마 미안해'

- 276, 278, 279p -

 

 

다른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소박한 행복을 꿈꾸었던 캐리의 불행은 십대 시절의 철없는 장난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또 다른 방식으로 약자를 괴롭히고 있다는 점에서 간과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게 한다. 평범한 여고생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이렇듯 무심코 던진 돌에 무시무시한 분노로 되 뱉어주는 캐리의 상실감을 통해 인간심리의 두려움을 건드리면서 암울하고 처절한 통찰로 묘사해냈으니 십대 소녀가 주인공인 소설 중에서 그 아픔이 단연 으뜸이 아닐까 한다. 과연 스티븐 킹이다.

 

슬픈 공포가 뼈져리게 다가오는 소설 <캐리>. 기다려라 캐리의 저주와 분노가 불벼락으로 떨어져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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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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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20회 야마모토슈고로상을 수상하였으며, 나오키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는 모리미 토모히코의 청춘소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집과 사무실을 지하철로 통근할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한참 책을 빌려 읽던 시절에 동행했던 책 중에 하나였다. 모 블로거의 추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책 제목에서 풍기는 낭만적이면서도 유머스러한 느낌이 기대하게 만들었다. 책 표지에는 한 손에 홍시 같은 과일을 들고 오른쪽 어깨엔 대어 한 마리를 맨 새침한 아가씨가 앞장 서 걷고 있고, 뒤에는 유약한 인상의 범생이 청년이 운동화 끈이 풀린 줄도 모른 채 쭈삣 쭈삣 따라가는 모습이다.

 

전반적인 내용은 남자주인공인 대학생 ‘나’는 동아리 여자후배를 남몰래 짝사랑하게 되고 세상 물정 모르는 그녀와 몽롱하고 예측할 수 없는 모험담을 상상력이 가미된 판타지로 그려낸다는 것이다. 선배의 짝사랑에 대해 전혀 눈치 못 채는 그녀와 주변 인물들의 엉뚱 발랄한 이야기들은 귀엽고 풋풋하다. 물론 그녀는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호감을 가질 만한 매력적인 아가씨이기도 하다. 한번 쯤 사귀어 보고픈.....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인생의 지침이 될 만한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니니 무료한 일상에 가벼이 활력소를 불어넣어줄 피로회복제 쯤으로 생각하고 읽으면 될 듯하다. 단 가닥이 잡히지 않아 수시로 맥을 놓쳐버리게 될 구성과 전개는 좀 감안해야겠고.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다는 점은 좀 그러네. 솔직히 그 정도 수준의 완성도인지는 의문이 든다.

 

그런데 좀 전에 알게 되었는데 작가 모리미 토모히코가 남자였단 사실, 이름도 여자인줄 알았고 작풍도 남자가 쓴 글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뜻밖이다. 흐흠, 보기보단 감성이 풍부하고 섬세한가 보다. 이런 소설이라면 당연히 여성작가겠지 라는 믿음은 일단 산산히!! 게다가 만화로도 리메이크되었군. 솔직히 소설보다 만화가 더 재밌을 것 같다.

 

소설은 그래, 단순히 받아들이면 청춘의 밤은 짧다. 이 여자 저 남자 만나 기웃거리며 이야기도 하고 사랑도 나누기에 밤의 시간은 짧다. 그래서 고민하지 말고 계속 걸어야 한다. 계속 걷다보면 작업의 성취감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단 으슥한 밤길을 조심해야 함도 잊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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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포 킬러 - 본격 야구 미스터리
미즈하라 슈사쿠 지음, 이기웅 옮김 / 포레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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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다. 누군가는 잔인한 달이라고도 하지만 내게는 설레임과 흥분으로 충만한 기쁨의 달이다. 그것은 내가 열렬한 야구광이라는 이유때문이고, 4월은 프로야구가 개막하는 출발점 때문이기도 하다. 프로야구 관중 700만이 목표로 설정되고 연초 승부조작 파동으로 한 바탕 홍역을 치르는 등 우여곡절이 많은 이 때에 야구를 소재로 한 미스터리 소설이 나왔다. 일본 미스터리 작가의 등용문인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 소설은 우연의 일치인지 홍보효과를 노린 마케팅 전략인지 알 수 없으나 타이밍이 절요하다. 바로 프로야구 승부조작 스캔들을 모티브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 팀 팬들에겐 잊고 싶은 아픈 기억을 되살려내는 이 소설은 야구와 추리의 만남을 통해 야구가 보여 줄 수 있는 다양한 이면을 끄집어내며 즐거움과 씁쓸함이 만감처럼 교차된다.

 

일본 내 최고의 인기구단 오리올스 소속의 좌완 투수 사와무라는 시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초면의 남자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며 뜬금없이 폭행당한다. 차마 경찰에 신고도 못한 상태에서 선배투수의 150승 달성 기념파티에서도 다시 그 남자와 그의 패거리와 마주치면서 또 다시 당해버린다. 도무지 정체도 알 수 없고 이유로 모른 채 폭행당해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승부조작에 가담했다는 투서가 날아들면서 억울한 누명에 빠지게 된다. 사와무라는 의혹의 눈초릴 좀처럼 걷지 않는 세상에다 직접 결백을 증명하고자 홀로 배후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과연 선수생명과 결백을 걸고 벌이는 사투의 결말과 숨겨진 진실은?

 

이 소설 제목에서 말하는 “사우스포”는 좌완 투수를 일컫는 말이고 우완 투수보다 더 상대적인 희소가치를 인정받는 야구계에서 하루아침에 승부조작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여론의 뭇매 속에서 팀 내 위상도 위협받게 되었으니 이건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닌거다. 더군다나 일본 최고의 인기구단 소속이다 보니 구단고위층과 관계자는 스캔들로 인한 구단 이미지 악화차단에 우선하다보니, 장작 선수의 진심을 들어주는 것에 는 무척이나 인색하다. 진퇴양난의 위기에 옷 벗을 최악의 상황까지 내몰리는 비정한 프로의 세계가 그만큼 실감나게 그려진다.

 

자신에게 승부조작의 누명을 씌운다고 해서 누군가가 금전적인 이득도 취할 리 없거니와 어떤 대가를 노리고 이런 짓을 벌였을지 알 도리 없는 의혹 속에 도달한 진실에는 이기심과 질투 시기가 낳은 어떤 “악의”가 조종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정통 추리의 결말을 원했던 독자들에게는 많이 실망스레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겠다. 동기에 대해서는 야구팬들조차 깊이 공감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아니, 야구팬에 따라 다른 반응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작가도 인정했듯이 트릭은 커녕 살인조차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애초부터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형식을 답습할 일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추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논리와 물증 대신 심증과 정황증거에 의존한 사건해결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어디까지나 이 소설은 야구가 주재료이고 추리는 주재료를 요리하기 위한 보조역할에 지나지 않음을 감안하여 읽어야 흥미를 붙들 수 있다. 그러니까 추리보다 야구에서 즐길 수 있는 아기자기한 요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단 것이다, 그 중 한 가지는 사와무라의 소속구단인 오리올스가 실제 인기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쉽게 연상하게 한다는 점이다. 오리올스 구단의 모기업이 신문사이며, 거대한 재력을 등에 업고 자체 유망주 육성보단 거액을 들인 FA영입, 잦은 트레이드, 성적 지상주의에 발목잡혀 우승이 아니면 감독 자리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운영방침과 횡포 등을 풍자하고 있어 실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는 이 소설을 무척이나 불쾌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라커룸에서 벌어지는 뒷이야기, 투수교체 타이밍, 볼 배합, 타자의 수 싸움, 2군 강등 등 실제 야구시즌 중 발생하는 일들이 해박한 야구지식과 생생한 현장감으로 인해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만큼 흥미롭게 전개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백미는 후반부에 사와무라가 선수생명을 걸고 등판한 블레이저스와의 시합이다. 결과에 따라 마지막 등판이 될지도 모를 이 중요한 시합에서 사와무라는 부상과 거대한 중압감을 정신력으로 극복하고 1구 1구 혼신의 힘을 다한 일생 최고의 투구를 하는데 끊임없는 위기상황을 아슬아슬하게 넘기는 긴박감 속에서 한 남자의 자존심과 명예를 건 분투의 땀방울이 진정 뜨겁다 못해 울컥해진다. 야구팬이라면 박수를 보낼 명장면으로 기억될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래, <사우스포 킬러>는 2004년 제3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 수상작답게 충분히 대중적인 야구소설이다. 야구에 대한 열정과 누명을 벗고자하는 과정들이 정직한 직구로 스트라이크를 던지듯 시종 호쾌하면서도 쓸쓸한 것에서 야구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겐 흥미가 다소 반감될 수 있겠지만 야구를 진정 아끼고 사랑하는 팬들이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행복한 선물이겠다. 더러운 세상 속에서도 700만 팬들을 위한 야구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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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보스 문도스 ㅣ 밀리언셀러 클럽 62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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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집 참 요상한 것이 책을 덮고 나서 천정을 보고 누워 있으면 알 수 없는 망상들이 찰싹 달라붙어 흐물흐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기분이 든다. <얼굴에 흩날리는 비>는 솔직히 별다른 감흥도 없이 평범하게 넘어갔었는데 이 책은 기리노 나쓰오 여사의 작품 스타일에 대한 세간의 평이 그냥 허언이 아니었음을 제대로 실감하게 한다. 여자가 쓴 글 같지 않다는 둥, 같은 여자를 비하한다는 둥, 어딘가 불편하고 께름칙하다는 둥 그동안 들어왔던 말들은 다 맞는 말이었네.

 

<식림>, <루비>, <괴물들의 야회>, <사랑의 섬>,<부도의 숲>, <독동>,<암보스 문도스>까지 총 7편의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어느 것 하나 범상치 않은 포스를 내뿜어주신다. 역시 <사랑의 섬>이 가장 후끈하다. 회사에서 여직원 셋이서 해외여행을 간다는 줄거리는 얼핏 봐선 흔한 일로 볼 수 있다. 여자들끼리의 여행은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별다른 차이는 없겠지.... 그런데 쓰루코, 요시에, 나오코 세 여자가 상하이로 여행을 떠나는데, 각각 나이 차도 좀 있고 이전에는 별달리 친하지도 않았는데도 여행가자고 의기투합하는 걸 보면 여자들끼리는 가능한 교류인가 보다. 단지 그 점만 좀 특이하다.

 

그렇게 상하이에 도착해서 쓰루코, 요시에만 따로 에스테틱 숍에 가서 얼굴 마사지를 받으러 간다. 아! 그런데 이게 뭐람. 얼굴 마사지만 받기로 했는데 뜻밖에도 은밀하면서 야릇한 마사지를 받게 되면서 일순 당황, 그리고 아찔한 체험을 온 몸으로 즐기는 두 사람, 내가 다 민망하여 혼자 있는 방에서 주위를 괜시리 잠시 의식했다가 순간 강력한 몰입에 빠져버렸다. 예상치 못한 서비스체험을 계기로 세 여자는 자신들이 이제껏 겪었던 은밀한 성적 경험담을 털어놓는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하나, 엽기와 변태가 상호 경쟁하는 노골적인 이야기들이 여자들의 솔직한 욕망으로 대입되는데 방 안 공기가 열기로 상승하는 것 같았다. 휴, 덥군 더워!!! 마치 여탕을 훔쳐보는 사춘기 소년의 심정이 이러할까? 암튼 표현수위가 파격적인 것이 야설이 따로 없다.

 

각자의 경험담에서 도출된 결론은 당당한 즐기기를 벗어나 피학적인 성적 욕구와 호기심이 분출되는 것으로 결말지으면서 손가락질하면서도 맛보고 또 맛보고 결국 중독되고 싶은 성인여성들의 욕망을 판타지화 했다. 물론 도덕적 판단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란 교훈도 남기지 않는다. 요 단편만큼은 여자들만 읽어야 해! 누가 너 뭐 읽고 있냐고 물으면서 페이지의 내용을 확인한다면 화들짝 놀라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고갤 숙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밖의 다른 단편들에서도 공통적으로 찌질한 여자 주인공들이 나와 왕따, 노숙, 불륜, 살인 등 어두운 소재를 바탕으로 죄의식도, 양심도, 자존심도, 체면도 내팽개치고 남자에 의존적이면서 비루한 인생을 보내고 있어 그야말로 여자 루저들의 퍼레이드라고 할 수 있다. 하나같이 어딘가 나사 빠진 모습에 제대로 된 여자들이 단 한 명도 없고 나쓰오 여사의 괴이한 정신세계와 한데 어울려 별나긴 하다. 한 편으론 안쓰럽기도 하고.

 

같은 여자들을 비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통해 나쓰오 여사가 말하고 싶었던 화두는 속마음이 썩어 문드러진 그녀들을 맘껏 조롱하며 내숭떨지 말라고 가차없이 채찍이라도 휘두르고 싶었던 것인지... 어쨌든 상식으론 판단할 수 없으며, 한계를 초월한 스토리에 항시 매료되는 내게 그래서 별미같은 소설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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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 사라진 릴리를 찾아서,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4 ㅣ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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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헨리 피어스는 분자회로와 분자메모리 분야에서 여러 개의 특허를 갖고 있으며, 최근 분자컴퓨터 개발경쟁에 가장 먼저 뛰어든 애미디오 테크놀리지라는 회사의 CED이자 천재과학자이다. 최근 서먹해진 연인 니콜과 결별하고 호텔에서 아파트로 이사한 첫 날 자꾸 이상한 전화가 계속해서 걸려온다.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모두 남자들로 웹사이트에 나와있는 번호로 걸었다며 릴리라는 여자를 찾는 것이다. 전화를 새로 설치한 지 겨우 15분밖에 안 되었는데 잘못 걸린 전화가 왜 이리도 많이 오는 걸까? 계속되는 전화에 짜증도 나지만 차츰 호기심이 발동한다.

 

  

릴리라는 여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예전에 이 전화번호를 사용했음이 분명했다. 아마도 릴리라는 여자는 전화를 건 남자들로 봐선 에스코트이거나 매춘부일 것이라며 추측할 뿐. 무시하고 전화번호를 변경하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었건만 그녀 ‘릴리’의 정체를 조사하러 나서게 되면서 그녀가 짐작대로 에스코트 걸이었음을 알게 된다. 조금만 더 알아보자며 이 미지의 여인에 대해 더 깊이 파고 들어가던 헨리 피어스는 정체불명의 세력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봉변을 겪는다. 이제 지속적인 생명의 위협으로 이어지고 회사의 프로젝트와 웹사이트, 살인· 폭력 같은 범죄와 숨겨진 비밀에 얽힌 이야기에는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 뜬금없는 위험의 정체는 무엇일까? 릴리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실종: 사라진 릴리를 찾아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히 쉽게 겪을 수 있는 경험담을 소재로 그려내고 있다. 왜? 다들 한 번 이상은 겪지 않나? 잘못 걸려온 전화 말이다. ‘아닙니다. 잘못 거셨어요.’ 요즘엔 보이스 피싱 사기도 극성이라 피해자도 종종 발생하는데 단지 귀찮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린 대체로 그냥 수화기를 내려놓고 만다. 헨리 피어스만은 달랐다. 호기심이 창의의 원천이라도 되는 듯 묘령의 여인에 대한 불필요한 관심이 화근이 되는 것이다. 적당히 끝냈으면 될 일을 위험한 수렁 속으로 깊이 발을 담그면서 인간의 못 말리는 호기심이 어디까지 악용될 수 있는지 리얼하게 보여준다.

 

단지 한 여인의 실종에 그치지 않고 이면에 놓인 진짜 덫을 생각하면 인간만큼 사악하고 무서운 존재가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불안한 심리를 부추겨 계획된 음모와 배신을 절체절명의 기지로 돌파하는 한 남자의 사투가 짜릿한 서스펜스와 스릴로 긴장감 있게 잘 그려진다. 마이클 코넬리가 언제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있던가! 한 방에 빵 터뜨려주는 센스있는 반전은 당연지사이며, 마이클 코넬리의 여전한 저력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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