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세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ㅣ 무라카미 라디오 3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반열에 아직 올려놓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트렌드가 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가 ‘짠’ 하고 나왔다. 그의 소설은 내겐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이랄까, 어쩐지 굉장히 딱딱하고 난해할 것 같아 이해불가 정도 될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어 몇 번 기웃거리기만 해 보았지 정작 제대로 도전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그의 에세이들은 읽을만하다. "손이 가요 손이 가"라는 과자 CM송처럼 나올 때마다 관심이 간다. 세 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를 접하며 그의 에세이는 읽기에 참 부담 없이 편하고 좋다는 생각이 든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는 일본 잡지 “앙앙”에 연재되었던, 맛깔스러우면서 힘을 뺀 듯한 글과, 유치한 것 같지만 정작 유치하지 않은 담백한 삽화까지 한 몸이 되어있다. 어딘가 뻔뻔스럽고 야하기도 하면서 중년아저씨의 유유자적한 낭만이 깃들어 있어 좋다. 모든 세대를 아우르려는 것도 같지만 기본정신은 “중년 아저씨”니까 거기에 공감하며 낄낄 대며 웃을 수 있다는 건 나 또한 점차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세월의 반증일까?

 

 

그런데 내가 보았을 때 그의 이 에세이는 결코 “감동적이지 않다.” 그냥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기에 정신없는 나에게 잠시 장시간 운전을 멈추고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화장실에서 용변도 보고 커피 한 잔 하며 출출하면 군것질도 챙기면서 여기에 들른 사람들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라는 식과 마찬가지니까. 그러한 행위들이 어떤 특정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지만 피곤한 몸을 추스르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데 있어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니까 그런 여유가 참 좋은 거다.

 

 

무라키미 하루키는 에세이를 쓰다보면 ‘꼭’ 쓰게 되는 토픽으로 고양이와 음악, 채소를 지정한다. 이번에도 채소가 제목 속에 포함되어 있어 그의 유별난 채소사랑을 확인할 수도 있거니와 채식과 육식의 이율배반적인 제목의 배합은 누구도 생각하기 쉽지 않은 유쾌한 상상이 만들어낸 창조물이기도 하다. 일상에서 쉽게 외면하기 쉬운 대목에서도 미묘한 공기와 색감, 질량을 불어넣어 그만의 신선한 수다로 재탄생되기에 언제나 즐거운 만남이다. 그가 내놓은 아이디어를 얼핏 들으면 솔깃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뭐야, 이 아저씨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냐.“며 푸념할 때 이 아저씨도 자신의 아이디어를 누구도 채택해주지 않는다며 덩달아 푸념하는데 그마저도 귀엽고 푸근하다.

 

 

이것도 요전에 한가할 때 문득 생각한 건데 남아도는 성욕 같은 것도 유효하게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성욕 역시 하나의 훌륭한 에너지니까 이걸 그냥 쓸모없이 버리는 것은 아깝다. 예를 들어 건강한 남자 고등학생이 ‘헌욕 수첩’을 만들어 ‘헌욕 센터’에 찾아간다. 그리고 “요즘 성욕이 남아돌아서 헌욕 하고 싶은데요.”라고 한다. 예쁜 간호사 누나는 “예, 고맙습니다. 얼른 도와 드릴게요.”하고 성욕이 그 자리에서 전력화되도록(시스템은 잘 모르겠지만)한다. 마지막으로 그 와트 수만큼 ‘헌욕 수첩’에 포인트를 가산한다. 아주 괜찮은 시스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이것으로 하절기 전력난도 무난히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도 기꺼이 협력할...... 수 있으려나. (본문 중에서)

 

 

아! 정말 빵 터진다. 이렇게 길게 인용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토씨하나 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제대로 뒤집어 지게 한다. 이 대목을 읽을 때는 마침 혼자여서 주위의 눈치 따위 신경 쓸 필요 없이 한참을 박장대소 하며 뒹굴었다. 지금도 볼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게 된다. 지극히 일본적인 발상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참 신선하지 않나? 시스템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면서도 실제로 이런 시스템이 구축된다면 혈기왕성한 청춘들의 불타는 욕구불만도 해소하면서 전력난 해소에도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될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앞서 언급한, 길거리의 바이크 머신을 활용한 발전 자원봉사보다는 이 시스템에 동참하고자 하는 자원봉사자들의 대열이 더 끊이지 않을 것 같고 에너지 효율도 엄청나게 고효율이 될 것 같은데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하신지? 청소년들의 봉사활동 점수에도 반영을... 그러면서 “나도 기꺼이 협력할...... 수 있으려나.” 로 능청에 방점을 찍고 있는 하루키의 재치에 일상의 무게가 한순간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그래 이런 식이다. 그의 에세이는 심각하게 고민하며 읽을 필요가 없는 게 정답일지도 모른다. 읽고 나면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말도 맞을 거다. 그렇지만 평소 진지하고 치열한 작품들에 머리를 달구다가도 무라카미 하루키식 수다에 의미를 떠나 계산을 하지 않아도 좋을 때가 많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뭔가 끔찍한 경우를 당했다면 끔찍한 일 정도여서 다행이다며, 비참한 일은 아니어 살았다”는 이 책 속 우디 앨런의 주장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삶을 살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들이 기억에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숲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33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이 걷고 있는 이 숲 말이에요. 메아리는 조금씩 작아지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아요.

지금까지도 그의 일부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거죠. 살인은 항상 그런 메아리를 남겨요.”

 

삽을 든 아버지가 보인다. 열여덟 살이었던 폴 코플랜드가 당시 기억하는 아버지는 울고 계셨던 모습이었다. 그리고 여름캠프에 참가한 많은 아이들 중 네 아이가 사라졌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 기억이전에 말이다. 그 아이들의 부모는 캠프장 주인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거액의 위로금을 받아냈고 사건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점차 세상에서 잊혀지는 듯 했다. 단 한사람만 제외하고서는...

 

카운티 검사보 폴 코플랜드는 여성 성폭행 피해자 사건에 대한 단서를 찾던 중 여동생이 포함된 네 명의 아이들이 실종된 20년 전 사건과 운명적으로 재회하게 된다. 무려 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지나서 그에게 찾아온 나비 한 마리는 당시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 아이들 중 한 명은 성인이 되어 여태 살아있었다는 것, 이 아이의 존재에 대해 누군가는 부인하고 진실을 은폐하려한다는 것, 그리고 여동생의 생사여부까지.

 

그 사건에 연루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는 정체모를 불안과 의문이 점차 증폭되는 가운데r 그날 밤에 있었던 사건의 진실이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난다. 모두가 감추려고만 했던 그 날의 진실에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 여동생의 죽음에 얽힌 진실과 사건에 연루된 다른 아이들,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은 각자의 비밀로 감춰둔 채, 세월이라는 풍화 속에 씻겨 내려가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여동생의 죽음이후 부모님의 죽음까지 겪으면서 가족의 해체를 받아들였던 코플랜드의 입장에서는 우연히 찾아온 단서 앞에서 그냥 수수방관할 수는 없었다. 코플랜드의 미스터리를 해결하고자 하는 욕망이 깊어질수록 사건의 진실도 덩달아 점점 더 깊은 숲 속으로 숨어들어가 길을 잃고 밖으로 나오려고 하질 않는다.

 

인간이 가진 어두운 본성이 여기에 있다. 아이들 실종사건의 이면이 점차 수면 위로 드러나다가도 한순간 뒤 돌아서서 날카로운 비수를 꽂는다.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이 책임져야 할 응분의 몫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알고 있는 진실이 100% 확실하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라며 내기를 걸어오는 것이다. 할런 코벤의 작품들은 언제나 우연한 선택이 최선이 아니었으며, 나중에 후폭풍이 되어 돌아온다. 인생에서 경로 이탈 없이 올곧게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실감나게 그려낸다.

 

이번에도 적중했다. 시행착오의 반복 속에서 항상 후회를 반복하는 내겐 이러한 모습들은 낯설지가 않아 바늘이 온 몸을 찌르고 들어오는 것 같은 고통과 연민으로 지켜보게 한다. 스릴러라는 장르는 그래서 특별하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오락적 체험도 짜릿하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이 있고 특별한 트릭과 반전도 즐겁다. 그리고 이야기의 즐거움 못지않게 추악한 인간성과 그것에 대한 반발과 대안으로 제시하는 인간성의 회복까지 상반된 양자를 충돌시키면서 사회적 공감이라는 또 다른 메시지까지 도출해낸다.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코벤이 곳곳에 숨겨놓은 덫을 무사히 피해서 수수께기를 풀어내는 과정을 차근차근 거쳐야만 하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20년 전 사건과도 정서적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재 코플랜드가 검사보로서 담당하고 있는 샤미크 존슨 사건도 진실을 둘러싼 공방전이 무척 흥미진진하면서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겠다는 피고 측 아버지의 행동은 용서받기 힘든 면이 분명 있다. 하지만 20년 전 사건에 대한 코플랜드 부모님들의 진실을 알고 나면,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아버지의 속사정을 알고 나면, 용서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수단이며 때론 수용하게 되리라는 교훈도 얻는다. 그리고 감동 한 웅큼까지도 덤으로 말이다.

 

또한 불행과 행복이 교차되는 마지막 장은 처연함과 위안이라는 조화를 이루면서 숲에서 있었던 사건의 근본적 배경이 지나치게 전통적이었다는 아쉬움을 달래주기에 훈훈한 마무리 라는 점에서 맘에 든다.  물론 그 것을 예상하기는 했다만. 인생은 새옹지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64 ㅣ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요코야마 히데오의 “64”를 정말 기다리고 있었다. 2013년 상반기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의 영예에 빛나는 이 소설은 미야베 미유키나 미쓰다 신조 같은 쟁쟁한 작가들의 작품들과 순위권 경쟁에서 멋지게 제압했다는 점에서 더욱 호기심이 동했던 케이스다. 그런 기대감에 <곤걸>과 더불어 2013년 스페셜리스트로 일찍이 점찍어 둔 이 소설은 실로 경찰소설의 백미라고 감히 추켜 세울만한 대작이었다.

 

쇼와 64년(1989년) 한 소녀가 유괴된다. 경찰력이 총동원되어 사건해결에 총력을 기울이지만 소녀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채, 범인도 놓쳐버린 미제사건은 “64”로 불리면서 14년이 지나 이제 공소시효 만기가 코 앞에 놓여있다. 사건 “64”의 해결을 독려하고 유족을 위로한다는 취지에서 경찰청장의 D현경 시찰 일정이 잡히는데 “64”를 빌미삼아 주도권을 놓고 경찰 내부 조직간의 헤게모니 게임을 그리고 있는 “64”는 7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아니 10년간의 집필기간에 더 놀라야겠지만 단단하고 뜨겁게 탑을 한 층 한 층 쌓아 올라가면서 독자들을 끝내 코너에 몰아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적유희도 속도감도 트릭도 반전도 없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이것들을 상쇄할만란 클라스가 분명 존재한다. 아래에서 다루어보자.

 

경찰과 언론은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인가?

 

주인공 미카미 경정은 예전 D현경의 형사부 소속 형사출신으로 지금은 인사발령에 의해 홍보실 소속의 홍보담당관으로 근무 중이다. 현장에서 잔뼈 굳은 형사로 남고 싶었던 바람은 조직의 원칙 없는 인사에 의해 원치 않는 보직을 맡게 되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홍보실을 개혁하여 소신 있는 홍보행정을 꾸려나가고자 한다. 여기서 중요한 변수가 되는 건 언론과의 관계 설정이다.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관련자들의 실명 공개여부와 내막을 어느 수준에서 조절하여 정보를 기자들에게 제공하느냐는 포인트는 소설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저울의 추를 맞출 수 없는 시소게임의 원동력이 된다.

 

소설에서 가장 핫한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미카미의 보직이 현장이 아니라 홍보라는 점에서 무게가 더 쏠리는 것이다. 수사상의 기밀보안 유지와 국민의 알 권리 사이에서 피칭과 캐칭처럼 왔다 갔다 하는 볼은 누가 보던 쉽사리 결정내리기 힘든 뜨거운 감자일 것이다. 진실을 호도하지 않겠다는 정보제공자와 인권의 보호라는 대명제를 겸허히 수용할 수 있는 현명한 정보 활용자라는 균형 잡힌 관계설정이 미카미의 고뇌와 결단이 수시로 위기에 처했다가 가까스로 타협을 보는 과정과 결과가 대단히 아슬아슬하다.

그러면서 호흡이 절로 가빠지도록 설정한 작가의 탁월한 시놉시스가 돋보인다. 박수 짝짝!

 

경찰의 혁신은 무엇에서 기인하는가?

 

D현경의 양 축인 경무부와 형사부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은 조직의 인사관리와 현장수사를 맡고 있는 부서 간의 대의명분이라는 밥그릇이 한 그릇 밖에 없다는 공급의 원칙에서 출발한다. “64” 사건을 해결 못했으니 이에 책임을 물어 중앙이냐 지방이냐는 별개로 능력 있는 인사정책만이 경찰조직의 동맥경화를 방지하고 효율적인 조직으로 쇄신 가능하다는 경무부는 중앙이라는 막후의 인사권을 등에 업고 화이트컬러의 정책을 실현하려 한다.

 

이에 반해 현장에서 민생치안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형사부는 블루컬러를 대변하여 중앙 집권식 통치에 반발, 자주적 경찰인사라는 기치를 내걸고 반기를 든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전직 형사부 출신이라는 경력은 미카미의 운신의 폭을 제한하게 되는 것이다. 양 측 어느 쪽도 확실한 명분의 우위를 점하고 있지 못해 박쥐, 심지어는 경무부의 개 취급당하면서 무엇이 D현경을 위해 최선의 선택인지 고민하여 끊임없는 혼 란 속에서 불협화음을 봉합하고자 동분서주하는데 어느 조직에서도 볼 수 있는 라인은 있다.

 

어디에 줄을 서느냐에 따라 역적도 되었다가 충신도 되었다가 하는 식의.... 앞서 언론과의 관계에서도 그랬지만 경무부와 형사부의 갈등 사이에서 힘겹게 버티고 선 미카미의 행보는 여러모로 애처롭고 안타까우며 예측 불가능한 미스터리를 서스펜스화하여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연민과 대작 경찰소설의 품격을 제대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64”라는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아버지라는 이름만으로

 

14년 전 유괴범에게 딸을 희생당한 아마미야가 선택할 수박에 없었던 일련의 행보들은 또한 어떠한가? 수사의지를 천명하고자 하는 경찰청장과 D현경에 대한 불신에서 모든 것을 상실한 아버지가 보여준 반전(반전은 분명 없지는 않다.)은 세상 모든 것을 바꿔서라도 억울한 죽음을 보상받고 싶은 절절함이 폭풍이 휩쓸고 가듯 맘을 쥐어짰다가 결국 현실의 한계에 부딪혀 열린 결말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애절한 부정 앞에서 그 누가 눈물짓지 않을 수 있으랴?

 

마키미도 자신을 못난 외모를 닮은 딸이 절망해 가출하고 만 작금의 고통 앞에서 아버지라는 이름만으로도 통하게 되는 서글픔에 따라 오열하지 않던가 말이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항상 수퍼맨이 되어야하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자화상을 떠올리면서 문득 과거 일본 후쿠오카를 여행했던 기억도 중첩된다. 동료들과 파친코에 들렀던 일, 물론 나는 룰을 몰라 잠시 구경만 했는데 그 파친코 장의 여자 직원이 무척이나 추했다. 여자의 외모엔 관대한 나로서도 도저히 정면으로 응시 못하고 외면해야만 할 정도의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는데 그 당시 저런 외모로 살아야만 하는 그녀와 그녀를 낳은 부모는 어떠한 심정일까라는 혼자만의 상상을 해보았다.

 

외모지상주의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 중 한 사람인 나는 그녀의 활짝 피지 못한 미소를 기억하면서 미카미와 어린 딸 아유미를 연관 짓게 되더라. 파친코의 그녀도 아유미도 분명 지금 어딘가에서 열심히 살고 있으리라. 집 나간 아유미도 아버지가 보고 싶어 집으로 돌아 올 것이고. 그러면서 멀게만 느껴졌던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하는 미카미의 심경변화는 미스터리 소설에서도 소중함의 가치는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는 것에서 소설 “64”는 경찰소설의 최고봉이자 인생의 경륜을 오롯이 써내려간 올해의 미스터리가 될 것 같다.

 

그런만큼 뜨겁고 단단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겨울잠, 봄꿈
한승원 지음 / 비채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는 흔히 수레바퀴 같아서 흥했다 망했다 하는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일련의 과정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나라는 망국의 길을 필연적으로 걸었고 미래를 준비한 나라는 부국강국의 길을 역시 필연적으로 걷게 된다. 이것은 수천 년 인류역사를 통해 확인한 진리이자 교훈이다. 그렇다면 한국 근대사에 있어 동학혁명은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 걸까? 올해로 혁명 발발 119주년을 맞이하는 현 시점에서 말이다. 

 

나 자신도 간과했던 그리고 우리들도 결코 그 의의에 스스로 빛을 가렸던 동학혁명은 의외로 세계사에 있어 보다 큰 의의와 가치가 부여되고 있음을 뒤늦게 알 수 있다. 19세기 중 일어난 세계 민중혁명 중 최대 규모이고 프랑스 시민혁명, 독일 농민혁명, 중국 태평천국의 난과 함께 세계 4대 근대시민혁명의 하나로 당당히 꼽힌다는 역사적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정도였던가? 그래서 동학혁명이 내건 '보국안민'과 '제폭구민' 같은 기치를 필두로 외세 배격과 신분제도 철폐를 주창하면서 우리나라 근대 민주주의의 출발을 알렸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우리는 동학혁명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참담한 실패라는 결과를 낳았는지 이미 역사시간에 배웠으니 이 소설에서 정말 그려내고 싶었던 시간적 배경은 봉기과정도 우금치 전투에서의 패전도 아니요, 탄압 속에서 전국에 퍼져 나갔던 동학 이념을 구체적으로 설파하고 있지도 않는다. 단지 패전이라는 참담한 겨울잠 이후 얼어붙은 이 땅에 봄이 찾아들기를 갈망했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일대기를 봄꿈이라는 상징성을 빌어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은 쓰리고 눈물이 나려 한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녹두장군을 그리는 노래도 참 애달프지만 왜 녹두장군이라고 불렸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새삼 부끄러운 역사인식 앞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콩 중에서도 작은 녹두는 체구가 남달리 작지만 다부졌던 전봉준을 일컫는 별칭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이 노래를 부르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니 약소국의 설움이 아니었겠는가? 그러한 배경을 뒤로 한 채, 녹두장군 전봉준이 우금치 전투의 패전으로 거사에 실패하고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한양까지 압송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의 마지막 119일에 대한 고난의 기록이 여기 있다.

 

당시 조선인으로 태어났지만 일본인으로 귀화해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가 되어 일본인보다 더 뼛속 깊이 일본인이 되어버린 이토 겐지의 회유는 그야말로 마지막까지 귓속을 간질이고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고 질었다. 이미 저물어가는 동방의 나라 조선의 백성으로 살다 죽을 것인가? 새로운 개화문물을 받아들여 강국으로 새로이 거듭나고 있는 일본을 제2의 모국으로 감아 이 더러운 세상을 갈아엎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직 죽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다. 전봉준은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면서 한양으로 압송되는 와중에 일본군들이 수시로 부상당한 가마꾼들과 백성들을 기밀유지를 빌미로 무참히 학살하는 만행을 목격할 수밖에 없는 암담한 현실에 좌절하고 치를 떨며 그들에 하늘의 천벌이 내리기를 소망한다. 그러면서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야한다. 이토 겐지의 말 대로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로 입적되어 또 다른 방식으로 구국운동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자신의 피를 뿌려 조선민중들에게 화약심지에 불을 붙일 도화선이 될 수만 있다면 기꺼이 한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결심은 더없이 숭고하다. 무엇을 주저하랴? 늦으면 늦을수록 후회만 있을 뿐이다. 그것이 비록 한낱 봄꿈일지라도

 

밥이 하늘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밥을 만들려고 산다. 밥을 쟁취하려고 싸운다. 더러운 밥이 있고, 깨끗한 밥이 있고, 떳떳한 밥이 있고, 부끄러운 밥이 있다. 내가 일어선 것, 고부 사람들이 관아로 몰려가 사또에게 대든 것, 아버지가 사람들의 소두로서 항거하다가 곤장을 맞고 장독으로 죽은 것, 호남 일대의 사람들이 죽창을 들고 일어선 것이 다 이 밥 때문이었다. 일본 사람이 조선 땅에 들어온 것도 조선 사람의 밥을 빼앗아 가려고 온 것이다. 나는 죽을 때 죽더라도, 그 슬픈 밥에 대하여 모두 말하고 나서 죽어야 한다.(본문 중에서) 

 

그렇다. 중요한 것은 밥이다. 백성들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건 없다.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든 민씨 일파가 정권을 잡든, 탐관오리가 부정부패를 저지르든, 열강이 조선의 국권을 집어삼키든, 그런 거창한 대의명분보다 굶지 않고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더 절실했다. 그것을 위정자들은 허울좋은 이념을 앞세워 눈 가리고 아웅하고자 할 뿐이다. 누가 알아주기만 바랄 세월의 넉넉함이 없었기에 분기탱천했다. 전봉준의 삶은 그렇게 불꽃같이 피어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한승원 작가가 전봉준의 고뇌를 따라가는 과정들은 그래서 고통스럽다. 결말을 알지만 그의 목숨을 구명하고 싶은 안타까운 열망을 한 폭의 수묵화처럼 구슬프게 그려낸다. 그 빼어난 서정성을 무엇에 비유할까?

 

역사는 굴러가는 수레바퀴라고 서두에서도 밝힌 바 있다. 이 뜻 깊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아직도 기념일로 제정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잊지 않기 위해서도 역사에 대한 오판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한시바삐 기념일이 제정되어 현재를 바삐 살아가느라 옛 일을 돌아다 볼 겨를이 없는 우리 후손들에게 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 차원에서 한승원 작가의 "여름잠, 봄꿈"은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필독서가 될 것이다. 아니 되었으면 한다. 전기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한 인물의 삶을 흐드러진 봄내음으로 담아내며 문학성이라는 빈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탁월한 소설이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작자미상, 미스터리 작가가 읽는 책 - 상 ㅣ 미쓰다 신조 작가 시리즈 2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수수께끼의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추리하는 사람이 시점을 어디에 놓느냐애 따라,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해석은 천차만별로 바뀌어. 따라서 내가 밝혀낸 진상은 어디까지나 어떤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해석에 불과해. 아무 증명도 되지 않는다고." (P.341)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작자미상, 미스터리 작가가 읽는 책"을 읽었다. 올해 들어 세 번째로 읽게 되는 '미쓰다 신조'의 작품이니 내게는 확실히 대세 중의 대세이며 그 흐름은 하반기에도 주욱 이어질 것 같다. 앞서 방랑 환상소설가 '도조 겐야' 시리즈랑 현대물을 읽었는데 작가 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가 시리즈'는 이번이 처음이다.

 

'미쓰다 신조'의 친구 '아스카 신이치로'는 나라 현 안라 시의 안라 초라는 마을에 들렀다가 '후루혼도'라는 헌 책방에서 "미궁초자"라는 동인지를 구입하게 된다. 그 후에 '미쓰다 신조'와 '아스카 신이치로'는 "미궁초자"를 함께 읽으면서 기괴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 기억의 봉인을 풀기라도 하 듯 첫 번째 수록작 "안개 저택"을 읽은 후 엄청나게 짙은 안개의 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안개는 오로지 두 사람만 겪게 되는 초자연적 현상이었고 소설 속 살인사건에 얽힌 수수께끼를 해결하자 이제야 안개는 종적을 감춘다. 이건 무슨 현상이지?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두 번째 수록작 "자식귀 유래"를 읽으니 이번에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주위를 맴도는데....

 

이제 두 사람은 알게 된다. "미궁초자"의 수록작을 읽게 되면 어떤 괴이 현상이 발생하고 수록작의 수수께끼를 해결하지 못하면 둘의 생명은 장담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을... 이미 먼저 이 정체모를 동인지를 입수해서 읽었던 사람들 모두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행방불명되었단 사실에 더욱 두려움이 커지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목숨 건 독서가 논스톱으로 진행되는데, 마지막에 도달할 때까지 멈출 수 없다. 괴이 현상의 근원은 무엇이며 동인지를 발간한 '미궁사'란 어떤 곳이며. 일곱 작품의 작가들은 당췌 누구란 말인가?

 

제1화 "안개 저택"이 죽은 소녀의 정체성 문제와 착시로 추정되는 괴이를 '도조 겐야'식으로 풀어내었다면 제2화 "자식귀 유래"부터는 난이도와 호러가 본격적으로 상승되는 구조로 진행되는데 마지막 단편까지 읽고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다면 두 사람은 실종될 수도 있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또 다른 독자가 될지도 모를 시점의 변화 가능성이 공존한다는 점이 신선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작품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갈 때 마다 독자들은 또 하나의 사실을 눈치 채게 된다. 탐정과 조수의 관계처럼 수수께끼의 단서를 찾아 실마리를 풀어내는 일은 전적으로 '아스카 신이치로'의 주도하에 진행되고 '미쓰다 신조'는 괴이 현상을 직접 체험하거나 '아스카 신이치로'의 추리과정에 독자의 의문사항을 개입시켜서 논리적 모순의 해결을 돕는 보조적 역할로 각각 분담되고 있다.

 

또한 사건현장에 직접 출두하여 단서를 포착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로지 동인지라는 기록의 근거에서 추론해야만 하기에 이 모든 것이 진실인지 허구인지 그 경계마저 불명확하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의한 논리적 해결은 어느 단계까지는 가능하지만 초자연적 현상까지 완벽하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그러한 설정은 '미쓰다 신조'의 작품들을 읽을 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가 발생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미쓰다 신조'와 '아스카 신이치로'가 각 수록작들의 수수께끼를 풀어야만 하는 이유는 직업적 소명도 아니요, 지적 호기심 충족은 더욱 더 해당되지 않으며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점에서 "제5화 슈자쿠의 괴물"을 가장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옛날에 한 여행자가 산을 넘으려고 언덕을 오르고 있는데 문득 한기가 들어 돌아보니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다. 말을 시켜도 대꾸하지 않자 그냥 무시한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데 어디선가 "어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남자의 뒤에서 들려오고 있지만 그 남자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으로 나아갈 때 마다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참다못한 여행자가 "누구냐?"고 외쳤더니 뒤돌아선 남자의 뒤통수가 괴물로 변해 이 남자를 삼켜버렸다는 게 "슈자쿠의 괴물" 이야기이다.

 

여기서 재밌는 건 '미쓰다 신조'식 호러에는 혼자 산길을 걸으면 뒤에서 누군가가 "어이"하고 부르며 쫓아온다는 방식이 자주 차용된다는 점이다. 그것이 "산마"이거나 "슈자쿠의 괴물"일 때도 있지만 익숙하고 반복적인 설정임에도 항상 그 점이 등골을 오싹하게 할 만큼의 기묘한 공포가 배어있다. 그리고 좋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나오셨군요."라고 말이다. 게다가 이 수록작은 슬래셔 무비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스타일리시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분신사바"에 해당되는 "곳쿠리상"을 불러내는 의식 또한 무척 긴장감 있으면서 즐거운 게임(?) 한 판을 구경하는 재미까지 모든 것이 신선했다.

 

"곳쿠라상, Y를 죽인 사람은 누구입니까?"

...... 고요한 거실에.

"너야........."

나직한 목소리가 흘렀다. (P.49)

 

차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열 꼬마 인형 미스터리'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같이 기본적으로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살해당한다는 플롯의 고전도 해당된다. 그래서 "슈자쿠의 괴물"에 대한 대입은 물론이거니와, 다수의 인물이 등장했다면 각자가 사건에 대해 독자적 거리를 두는 일이 가능했겠지만 한정된 두 사람의 등장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싫든 좋든 "미궁초자"가 펼쳐놓은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밖에 없는 운명적 상황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새삼 고전은 영원불명하고 시대를 초월해 통용되기에 무척 인상 깊은 설정이다.

 

이제 '미쓰다 신조'의 추리소설에서 호러의 역할은 싱거운 음식의 간을 맞춰주는 조미료나 향신료 같은 역할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어 그 맛에 점차 중독되는 과정에 놓여있다. 그러한 요소들이 정신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길 없으나 들어가 있지 않으면 얼큰한 맛이 살지 않는다. 오죽하면 역자는 후기에서 양화대교에 만난 괴이 현상을 언급하겠는가? 그것이 진실이든 허구이든 아무런 상관은 없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라 '미쓰다 신조'의 수수께끼를 제대로 풀지 못했으니 그 괴이가 나 자신을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그것의 습격이 계속 기다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