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의 비극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서계인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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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로어만으로 입항하던 라비니아D호의 선원들이 바다 위를 떠다니던 한 남자의 시체를 발견한다. 훼손 상태를 감안하면 몇 주 동안이나 방치된 상태로 표류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지난 성탄절 이전에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요크 해터라는 화학자로 밝혀진다. 자살로 판명되었지만 문제는 죽은 남자의 남은 가족들이다. 미치광이 해터가로 세상에 악명을 떨치고 있는 이 후안무치한 가족들은 악명 높고 괴팍했으며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일삼는 문제적 인물들이었다 

 

가장인 요크 해터는 특히 아내인 에밀리 해터 부인의 전제적이며 광폭한 폭압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런데 에밀리 해터 부인이 전 남편 사이에 낳은 딸 루이자 캠피언을 누군가 독살하려는 시도가 발견되면서 경찰이 수사에 나서게 되고 섬 경감은 이들 가족들을 용의자로 의심한다. 집안 식구들이라면 누구나 루이자에 대한 살인동기를 가지고 있었을 터, 섬 경감은 은퇴한 노배우 드루리 레인에게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하여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데 또 다른 살인사건이 이 집안에 발생했다. 루이자를 범인의 범행목표로 추측했건만 어찌된 일인지 고약한 에밀리 해터 부인이 실제로 살해당한다. 드루리 레인은 목격자인 루이자의 오감 중 시각을 제외한 후각과 촉각 등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추리의 천라지망을 펼치는데 그 발상이 실로 대단하다. 수학적 사고를 논리의 축에 둔 채 그가 머릿속에서 짜 나가는 전개는 자신 또한 귀가 들리지 않는 신체적 한계를 넘어선 신중함으로 촉발시켜 명쾌한 관찰과 분석으로 강화시킴으로서 드라마틱한 결말을 완성시켜냈다전신마비인 링컨 라임처럼 정상인들도 해내지 못하는 추리의 완성을.

 

산 자가 죽은 자를 움직인 사건은 냉정한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범인의 미숙한 자질과 착각 때문에 당초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한 것은 합리성에 의구심을 심으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그것조차 간파해낸 드루리 레인이 범인의 정체를 시차를 두고 밝혀낼 수 없었던 이유는 놀랍게도 범인의 정체에 관한 의외성에 있다. 지금까지 추리소설을 수도 없이 읽어왔지만 이토록 충격적인 반전은 볼 수 없었다. 그가 범인이라니.... 마치 감옥이나 정신병동에 갇힌 죄수나 환자같이 광기에 짓눌려 저항과 변화를 포기한채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미치광이 해터가의 유전적 환경이 만들어낸 악이라는 본성 앞에서 드루리 레인이 대처방안을 놓고 고심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이해된다.

 

예상치 못한 범행동기와 트릭, 결말, 범인의 정체 등은 사회에 책임을 묻고 집행을 맡기기에는 너무나 잔혹한 운명이었고 드루리 레인으로써도 알고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안쓰러웠던 셈이다. 앞서 범인을 암시한 대목이 있었는데 설마 하고 넘겨 버렸던 방심을 비웃듯 예리하게 입증시켰기에 당황스럽기도 했고 범인에 대한 뒤늦은 처리를 두고 한동안 이해를 못해 어리둥절하다가 다른 서평들을 읽고서야 무릎을 탁 치게 되니 감탄에 또 감탄.

그런 거 였어 하며.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 속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뭔지 모를 몽롱한 기분이 들면서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스토리가 뒤죽박죽인 황홀한 꿈을 꾸었던 것도 같다. 간만에 단 잠을 그렇게 잤다. 세계 3대 추리소설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고 나니 이런 포만감이 들 줄이야. 나머지 두 작품과 최소한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머리 한 뼘이 더 크다고 느껴지는 이 작품은 정밀함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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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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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적을 만들다>는 열네 편의 칼럼들이 공작새가 날개를 펼쳐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 열네 편의 면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된 주제나 일치하는 스타일이 발견되지 않아 공저가 아닌가라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과연 세계적인 지성이자 석학이라 불릴만한데 방대한 지식의 양과 깊이는 그가 얼마나 많은 공부와 끊임없는 열정과 끈기로 축적한 데이터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부제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는 말 그대로 특별한 기회, 즉 학회나 간담회 등에서 발표한 내용을 위주로 실린 글들인데 철학, 미학, 역사, 기호학, 언어학 등등 다방면으로 사방팔방 뻗어나가며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무한한 상상력과 엉뚱한 호기심, 지적인 고찰로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접근을 도모한다. 어떤 생각으로 글을 써내려갔을지 충분히 짐작 가는 대목들이다

 

적을 만들다에서는 인류역사에서 민족과 인종, 국가와 계급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편을 가르고 증오를 키우며 성벽을 쌓았으며 분리와 차별을 시도했는지 세부적인 사례들로 조목조목 제시한다. 제일 인상 깊었던 사례는 유대인에 대한 지독한 반감이다. 나라가 없어 유목민처럼 떠돌며 방랑했던 민족 유대인은 고대 이집트 왕조로부터 히틀러의 대학살, 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이어지는 고난과 박해, 투쟁이라는 기나긴 여정을 거쳐 왔다. 유대인은 어린 아이들을 살해하고 그 피를 마시는 적으로 규정된 내용에서 이 민족에 대한 지독한 혐오가 묻어난다. 용모는 흉측하면서 말의 억양은 몹시 거슬린다는 "히틀러"의 어조는 적을 만드는 과정들에서 반복되는 모델이다. 마녀신드롬 또한 이성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장벽이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에 대해서는 일단 가장 위대한 프랑스의 시인이라는 앙드레 지드와 자신이 빅토르 위고라고 믿었던 미치광이 장 콕토를 인용한 점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어떠한 경우에도 의심할 바 없는 위대한 작가였다는 의미로 이해시키고 있다. 그러나 위고의 문학을 관통하는 특성으로 과잉의 기술과 등장인물들이 전지적 시점에서 역사를 움직이며 바꾸려는 불굴의 시도를 하고 있음을 강조함에 따라 절대권위를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무수한 결점과 말도 안 되는 허풍쟁이로 둔갑시키려하는 표현은 에코만의 또 다른 독설이다. 그것이 밉거나 거부감 들지 않는 선에서 조근 조근 이야기된다. 충분히 흥미롭다 

 

<위키리스크에 대한 고찰>도 빼놓을 수 없는 칼럼이겠다.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으면서 새로운 형식이자 스캔들인 위키리스크는 사적인 뒷담화가 공공연한 담화가 되어 만천하에 드러남으로서 널리 알려진 사실을 다르게 확인시키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는데 그것은 밝혀진 비밀들을 단순히 기록 전달하기보다 침묵할 것인지, 권력과 협상할 것인지를 독립적으로 결정하는 의결권이 된 것으로 분석한다. 그러면서 기술적 발전이 뒷걸음 칠 수 있다고 하는데 마타하리같은 미녀 스파이가 밀서를 전달하는 상황을 전망하는 이유도 전혀 근거 없지않음을 설명한다. 역시 인상적이었다.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글이 망각 속으로 소멸되기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그래서 계속해서 버티고 살아남는 글쓰기에 주력하려 한다. 결국 “움베르토 에코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폭넓은 유연성을 지님으로서 가치를 측정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일이 사명이기 때문에 능동적인 글쓰기와 능동적인 책 읽기는 명백한 도전이자 즐거운 혼란의 한가운데 지점이란 사실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적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에게 외부의 적은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그 적들이 누구인지 의견의 합일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 싸워 왔기 때문이다. 피사는 루카와 맞서고, 궬피당은 기벨리니당과 맞서고, 북부는 남부와 맞서고, 파시스트들은 파르티잔들과 맞서고, 마피아는 국가와 맞서 싸운다. 그리고 베를루스코니 정부는 사법부와 싸운다. 그러는 동안 로마노 프로디가 이끌었던 두 차례의 정권이 여전히 몰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리어 애석한 일이다. 만약 그러했다면, 나는 그 택시 기사에게 아군의 포격 때문에 전쟁에서 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P.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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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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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뭘 알고 싶소?

  그리고 뭘 차라리 모르고 싶소?“ 

 

두 번째로 만나게 된 아멜리 노통브의 책이다. 앞서 읽었던 <오후 네시>는 그야말로 눈부시다 못해 휘황 찬란한 토크 배틀 이었으니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롭고 신선한 문학적 형태이자 시도였던 셈이다. 그랬던 그녀가 풀어놓은 이번 재료는 사랑이다. 사랑을 낭만적으로 간주하며 모든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하고, 사랑에 오래 동안 머물고자 하며 더 의존적인 쪽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속설을 기반으로.

 

그 사랑을 찾기 위해 무던히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던 남자가 있다. 이름은 "돈 엘레미리오". 마흔네 살로 에스퍄냐 귀족이다. 그는 에스파냐 사람이란 자부심이 상당하다. 세상 어떠한 품격도 자신을 따라올 자 없다 호언장담하면서 계란을 신격화하는가 하면 집도 크고 방이 많은 재벌이다. 18년 동안 완벽한 사랑을 꿈꾸며 8명의 여자들을 만났고 그녀들에게 방을 세놓았었다. 

 

 

하지만 성에 차지 않은 사랑이었나보다. 생각만큼 원하던 결말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평범한 벨기에 아가씨 "사튀르닌""엘레미리오"의 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집에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암실이 있고 누누이 들어가지 마라는 그의 경고를 무시한 8명의 젊은 여자들은 모두 실종되었다. 이번에도 세놓은 방에 입주할 여자를 구한다는 공고에 지원자들이 몰리지만 그녀들은 처음부터 입주할 생각은 없었고 다만 그 소문에 대한 진실이 궁금해서 이 집을 찾아왔을 뿐. 

 

허나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사튀르닌"은 사실상 무상이나 마찬가지인 입주조건과 호사스런 환대에 혹해 입주를 결정한다. 이제 그녀에게 돌아오는 건 사랑에 무지했고 결혼에 관심 없던 일상을 뒤흔들 아홉 번째 희생자라는 월계관이다. 머리에 씌워주며 사랑한다 말하는 "엘레미리오". 그는 장기간 외출한 적도 없어 외부사람을 만난 적도 없고 관계에 서툴다. 그래도 사랑을 꿈꾼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금단구역을 침범한 여자들이 치러야할 대가는 잔인했으니 각자 지켜야 할 자리와 위치를 넘어갈 때 산산 조각난 믿음과 불편한 호기심이 남는다.

 

아홉 번째 사랑 "사튀르닌""엘레미리오"와 티격태격하다 어느 순간 사랑에 빠진다. 단지 지낼 방을 구하기 위해 이 집을 찾았을 뿐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 큰 소리쳤지만 "엘레미리오"의 말대로 되어버렸다. 이제 사랑은 그녀가 지금까지 믿었던 가설에 안대를 씌운다. 이 남자는 거짓됨이 없이 진실 되며 여자들이 알아서 자진퇴장을 했을 것이라 믿게 된다. 사랑에 의심이 싹트는 순간 그 때부터 더 이상 사랑은 아니다 

 

샤를 로페의 동화를 원작으로 한 <푸른 수염>은 여전히 아멜리 노통브만이 창작해낼 수 있는 매력적인 유머와 속사포 같은 두 남녀의 대화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상황설명이나 행동보다는 대화에서 시작하여 대화에서 끝장을 보는 동안 잠시도 한눈을 팔 여유란 애시 당초 없다. 전혀 지루하지 않고 끊임없이 지적이고 철학적이며 호기심과 유쾌함까지 단정한 상태로 끝까지 달려간다. 그 힘의 원천이 대단하다. 정말 홀리듯 읽어 내려갔다. 중도에 멈출 수 없어. 그러면서 두 남녀의 구애와 사랑이 어떤 결말로 치달을지 궁금증은 증폭되는 구조를 유지하다가 마침내 그를 위해 금이 되는 그녀. 또 다른 의미의 연금 술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전 당신의 여자가 아니에요."내 여자요. 오늘 아침부터는.」 「천만에요. 전 계약서를 조목조목 읽어 보고 서명했어요.」 「그건 계약서에 담기에는 너무나 미묘한 문제지.」 「좋을 대로 말씀하세요. 전 당신한테 조금도 끌리지 않으니까.」 「나 역시 그렇소.」 「그럼 왜 절 당신의 여자라고 하시죠?」 「운명이니까. 오늘, 방을 얻기 위해 열다섯 명의 여자가 왔었소. 당신을 보는 순간, 난 즉시 당신과 함께라면 운명이 완수될 수 있으리라는 걸 알았소.」 「내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완수되지 않을 거예요.」 「그렇긴 하오.」 「따라서 아무것도 완수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이해하오. 당신이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건 당연하오. 난 매력적인 남자가 아니니까.」 「사람들에게 염증을 느꼈다고 하셨는데, 남자들에 대해 그렇다는 얘기였군요.」 「여자들도 지겹긴 마찬가지요. 하지만 그중 몇몇하고는 사랑이, 결코 싫증나지 않는 사랑이 가능하지. 거기에 미스터리가 있소.p.2425 

 

이제 그녀의 선택은 빗장을 열고 숨겨진 비밀을 연다. 그 남자는 자신의 욕망을 노란 색이란 색채의 완성을 통해 꿈꾸었으니 금이 된 것은 완벽한 실현이다. 하지만 그녀는 광기 대신 이성을 끝내 놓지 않았고 마침내 어둠의 심연과 마주하게 된 남자의 이상에 기꺼이 동참해준다. 어딘지 모르게 슬프고 쓸쓸한. 이것은 <오후 네시>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볼 수 있다. 벽으로 둘러싸인 자신만의 성에 갇혀있는 타자를 성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대화를 통해 설득하며 이미 단단해진 껍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대를 위해 족쇄를 풀어 해방시켜주는 시도야말로 최대의 미덕이다. 관용과 화해. 이미 늦어버려 안타까운 마음만은 금치 못하겠다. 너무나 숭고하다. 그리고 영원불멸의 수수께끼는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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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그릇 2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9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병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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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메다는 지금도 여전하지요?”  

 

솔직히 처음에는 의아했었다. 왜 문동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 마쓰모토 세이초의 모래그릇이 포함된 것일까? 라고 말이다. 같은 문동의 블랙펜 클럽시리즈로 미미 여사의 솔로몬의 위증이 때마침 내 수중에 같이 들어오다 보니 그러한 의문점은 뭉게뭉게 피어올랐던 거다. 세계문학전집에 일본 추리소설이라니.... 아마도 그 이유로 인하여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호기심이 커졌으리라.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새벽, 전차 조차장에서 한 남자가 얼굴이 뭉개진 시체로 발견된다. 전차가 이를 모르고 출발했었더라면 시체의 훼손이 어떠했으리라 불을 보 듯 뻔했다. 시체의 훼손 상태를 두고 보더라도 잔혹하기 그지없으며 피의자의 원한이 상당했으리라 짐작될 뿐이다. 경찰은 전날 밤 인근 술집에서 죽은 남자와 또 다른 남자 일행을 보았다는 목격담으로 수사를 시작하지만 실마리의 가닥은 잡히지 않는다. 겨우 알아낸 단서라고는 불확실하지만 도호쿠 지역 사투리를 쓴 것 같았으며 대화중 가메다라는 단어가 있었던 것 같았다는 증언뿐. 사건은 그렇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미제로 남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마니시 형사만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긴 수사를 계속해 나간다. 하지만 관련된 인물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최초의 단서인 가메다도호쿠 사투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공간적 변수를 드러내며 도달한 진실에는 "그것"이 숨어 있었다.

 

이 소설 모래그릇은 드라마와 영화로 수차례 방영되었다니 일본에서의 대중적 관심과 인기는 상당했었던가 보다. 지금의 시점에서 본다면 속도감도 과학수사와도 거리가 먼 그 당시의 수사방식은 몰입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지 특산품으로 주판을 선물 받는 장면에서는 시대의 초침을 거꾸로 돌려버린 것 같은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분명 이마니시 형사의 집념과 끈기만은 인정해 줄 한데 수차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먼 길을 돌아 돌아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심정으로 결승점까지 당도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맥이 빠지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릴 것 상황에서 찰나적 단서포착으로 다시 시동을 거는 그의 방식은 좋게 말하면 창의적 수사일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우연의 남발, 작위적이라고도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런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어떠한 사실에 담긴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단순히 지식의 나열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각도에서 수사에 필요한 지식을 추출하고 응용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공부 머리가 아닌 일 머리라고 봐야겠지. 그래서 내가 소설에서 설명하는 백과사전식 지식에 멍해 있을 때 그만은 어느 순간 출구를 빠져나온다결국 그가 밝혀낸 범인의 정체도 놀랍지만(개인적으로 범인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의심하도록 만든다.) 그 동기가 중요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가답게 동기에 승부수를 걸었다. 그것이 살인의 동기였단 말인가? 그런 이유로 그토록 잔혹하게 살해하였더란 말이냐? 정말 인간이란 존재의 살의에는 몇 가지로만 단정지울 수 없는 다양한 동기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읽었던 우치다 야스오의 헤이케 전설 살인사건을 읽고 난 뒤의 우울한 기분이랄까, 소감이 똑같이 느껴진다 

 

더없이 일본 전후 시대의 사회적, 구조적 차별과 편견이 낳은 모순에 통렬한 비판과 저항이 담겨 있다. 그러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 시대정신에 대한 가차 없는 메스를 들이대어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야말로 세이초가 의도했던 방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죽어도 될 존재는 뻔뻔하게 살아남고 죽어서는 안 될 존재는 보호받지 못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기에 슬프다. 살생부는 누구의 허락 하에 기록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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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맨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6
오리하라 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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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랜드맨션이라는 단어와 결합하면 럭셔리 아파트화 되지만

실상은 4층짜리 공동주택일 뿐. 입주민도 들어온 지 30년도 더 되는

고령자가 다수를 차지하는데 분양받아 나갈 능력이 안 되거나

얼마 남지 않는 노후를 마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웬만해선 나가려 않고 눌러앉으려 한다.

여기서는 60대면 청춘이다. 80대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저렴한 임대료만 내고 살던 1관 도로 건너편에는

10층짜리 현대식 2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여기서 민원의 소지가 발생하는데 바로 일조권 침해다.

제대로 굴러가는 대표자회의나 반상회 같은 거라도 있다면

입주민들이 궐기하고 나서겠지만 여기는 이웃끼리 살갑게 교류

하는 편이 아니라 옆집에 누가 사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대체로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하나. 한 사람만 빼고.

 

닭장 속의 닭들 마냥 문을 걸어 잠그기만 하고

이웃이 나한테 피해만 안주면 개의치 않겠다는 사람들이다.

단체행동에 들어가는 일이 없어서 2관은 순조롭게 올라간다.

그동안 이 볼품없는 맨션에 현대 사회의 병폐가 고스란히 농축된다.

층간소음, 살인, 절도, 스토킹, 사체유기

공공의 선을 잃어버린 지독한 개인주의가

범죄를 양산하고 이것은 다시 무관심했던 자신에게도

비수가 되어 돌아올 때, 아뿔싸 진즉에 도움을 청할 걸,

진즉에 잘할 걸, 같은 후회막심이 생긴다.

 

소설이나 뉴스가 아니라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해질 때가 많다.

일곱 편의 에피소드들은 연작의 형식을 띄고 있으며

각 에피소드별로 호실별로 입주민이 화자로 등장하다가

다음 편에서는 다른 입주민으로 화자로 변경된다.

그러면서 이전 에피소드의 각 화자들은 담장을 넘어가듯

주변인으로 재등장하여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연결고리로 구축되는 것이다.

 

결국 순서대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곳곳에 복선이

숨어있고 서술트릭의 대가답게 각 에피소드의 결말에서

움찔하게 만드는 소소한 반전들이 놀랍다.

그래서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말고 꼼꼼히 읽기를 권장한다.  

 

또한 특별히 눈길을 끄는 요인은 단순히 사회 고발적 성격을

뛰어넘어 미스터리 팬들을 잔잔히 매료시킬 밀실과 시점을 이용한 트릭,

그밖에 다양한 재간 등으로 이 소설이 장르소설임을 상기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각개 격파했을 때는 그리 대단치 않아 보일 수도 있지만

각 호실이 하나 둘 모여 공동주택을 구성하듯이 이야기의 힘과 기술은

전부를 위한 하나였음을 뒤늦게라도 간파할 수만 있다면

진정한 재미를 깨닫는 즐거움을 얻게 될 것 같다.

성패는 거기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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