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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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적을 만들다>는 열네 편의 칼럼들이 공작새가 날개를 펼쳐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 열네 편의 면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된 주제나 일치하는 스타일이 발견되지 않아 공저가 아닌가라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과연 세계적인 지성이자 석학이라 불릴만한데 방대한 지식의 양과 깊이는 그가 얼마나 많은 공부와 끊임없는 열정과 끈기로 축적한 데이터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부제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는 말 그대로 특별한 기회, 즉 학회나 간담회 등에서 발표한 내용을 위주로 실린 글들인데 철학, 미학, 역사, 기호학, 언어학 등등 다방면으로 사방팔방 뻗어나가며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무한한 상상력과 엉뚱한 호기심, 지적인 고찰로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접근을 도모한다. 어떤 생각으로 글을 써내려갔을지 충분히 짐작 가는 대목들이다

 

적을 만들다에서는 인류역사에서 민족과 인종, 국가와 계급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편을 가르고 증오를 키우며 성벽을 쌓았으며 분리와 차별을 시도했는지 세부적인 사례들로 조목조목 제시한다. 제일 인상 깊었던 사례는 유대인에 대한 지독한 반감이다. 나라가 없어 유목민처럼 떠돌며 방랑했던 민족 유대인은 고대 이집트 왕조로부터 히틀러의 대학살, 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이어지는 고난과 박해, 투쟁이라는 기나긴 여정을 거쳐 왔다. 유대인은 어린 아이들을 살해하고 그 피를 마시는 적으로 규정된 내용에서 이 민족에 대한 지독한 혐오가 묻어난다. 용모는 흉측하면서 말의 억양은 몹시 거슬린다는 "히틀러"의 어조는 적을 만드는 과정들에서 반복되는 모델이다. 마녀신드롬 또한 이성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장벽이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에 대해서는 일단 가장 위대한 프랑스의 시인이라는 앙드레 지드와 자신이 빅토르 위고라고 믿었던 미치광이 장 콕토를 인용한 점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어떠한 경우에도 의심할 바 없는 위대한 작가였다는 의미로 이해시키고 있다. 그러나 위고의 문학을 관통하는 특성으로 과잉의 기술과 등장인물들이 전지적 시점에서 역사를 움직이며 바꾸려는 불굴의 시도를 하고 있음을 강조함에 따라 절대권위를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무수한 결점과 말도 안 되는 허풍쟁이로 둔갑시키려하는 표현은 에코만의 또 다른 독설이다. 그것이 밉거나 거부감 들지 않는 선에서 조근 조근 이야기된다. 충분히 흥미롭다 

 

<위키리스크에 대한 고찰>도 빼놓을 수 없는 칼럼이겠다.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으면서 새로운 형식이자 스캔들인 위키리스크는 사적인 뒷담화가 공공연한 담화가 되어 만천하에 드러남으로서 널리 알려진 사실을 다르게 확인시키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는데 그것은 밝혀진 비밀들을 단순히 기록 전달하기보다 침묵할 것인지, 권력과 협상할 것인지를 독립적으로 결정하는 의결권이 된 것으로 분석한다. 그러면서 기술적 발전이 뒷걸음 칠 수 있다고 하는데 마타하리같은 미녀 스파이가 밀서를 전달하는 상황을 전망하는 이유도 전혀 근거 없지않음을 설명한다. 역시 인상적이었다.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글이 망각 속으로 소멸되기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그래서 계속해서 버티고 살아남는 글쓰기에 주력하려 한다. 결국 “움베르토 에코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폭넓은 유연성을 지님으로서 가치를 측정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일이 사명이기 때문에 능동적인 글쓰기와 능동적인 책 읽기는 명백한 도전이자 즐거운 혼란의 한가운데 지점이란 사실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적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에게 외부의 적은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그 적들이 누구인지 의견의 합일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 싸워 왔기 때문이다. 피사는 루카와 맞서고, 궬피당은 기벨리니당과 맞서고, 북부는 남부와 맞서고, 파시스트들은 파르티잔들과 맞서고, 마피아는 국가와 맞서 싸운다. 그리고 베를루스코니 정부는 사법부와 싸운다. 그러는 동안 로마노 프로디가 이끌었던 두 차례의 정권이 여전히 몰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리어 애석한 일이다. 만약 그러했다면, 나는 그 택시 기사에게 아군의 포격 때문에 전쟁에서 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P.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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