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테두리 없는 거울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박현미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설령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게 되어도
그딴 건 어차피 단순한 허물일 뿐이야. 안은 텅텅 비었어.
이야기 속에 나오는 녀석은 그런 거에 매달리지 말고
속이 꽉 찬 아이랑 친하게 지내야 할 것 같은데.” <303쪽 중에서>
<테두리 없는 거울>은 두 번째로 만나는 “츠지무라 미즈키”의 단편입니다.
‘나오키상’ 수상작인 <열쇠 없는 꿈을 꾸다>에서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를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했었는데 이번에 나온 이 단편집은 장르성격이 ‘노스탤직 호러’라고 하기에 군말 없이 선택하게 되었어요. 사실 ‘노스탤직’이란 의미가 옛것에 대한 향수라고 했을 때, 다섯 편의 단편들은 누구나 어렸을 적 들어봤음직한 괴담들이 줄지어 나오는데요, 분명 공포를 맛보리라 하고 들어왔는데 페이지가 줄어들면서 ‘어랏’ 하는 순간 전혀 다른 정서로 다가옵니다. 슬프고 애처로운 느낌들이 뒷맛으로 남는 것 같아요.
가령 “계단의 하나코”에서 “아이카와” 선생이 과학실에 들어갔을 때 “지사코”양은 그대로 복도에 서 있다든지, “아빠, 시체가 있어요.”에서 집안에서 시체가 줄줄이 발견되는데도 의외로 의연하게 대처하는 아버지와 마치 자원봉사 온 것 같은 남친을 보며 이 사람들 비현실적으로 용감한 게 아닌가 싶었죠. 게다가 시체매장 현장에서 여주와 남친은 화기애애하기까지 합니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식의... 그런 쿨한 분위기엔 어떤 복선을 암시하고 있었던 거죠.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무언가 있다고 운을 띄우는 전개에 빠져들면 참 묘하단 말입니다.
하지만 정작 대박이었던 단편들은 따로 있습니다. 네 번째 단편인 “테두리 없는 거울”과 마지막 단편인 “8월의 천재지변”입니다. “테두리 없는 거울”은 일종의 연애주술 같은 것으로 간주해야 할 듯한데, 심야에 촛불을 켜두고 거울을 등지면 미래의 남편감이 비쳐진다는 식의, 좀 많이 들어본 단골괴담이라서 친숙하더라구요. 10대 시절에 이런 괴담을 들을 때면 실제로 이런 또래 여자아이들이 있기는 하는 걸까? 있다 치면 정해진 애정운을 믿으려드는 걔네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물론 재미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런 시도가 무모해보였던 겁니다.
그래서 여학생인 “가나코”가 남학생 “도야”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거울 점에 일희일비하다가 그 끝이 어디를 향할 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었던 반전!!! “아비코 다케마루”의 모 작품의 그 반전을 연상케 하는, 그러면서도 씁쓸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평범할 뻔 했던 이야기를 교묘하게 잘 뒤집어 놓은 솜씨가 인상적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단편은 왕따 소년과 그 소년을 감싸다 어느 새 같이 왕따로 내몰린 또 다른 소년에게 나타난 구세주같이 등장한 친구 “유짱”이야기입니다. “유짱”은 친구가 없다며 놀림 받던 “신지”가 욱하는 마음에 가상의 친구로 만들어냈던 아이죠. 실제로 그런 친구가 있다고 우겨보지만 결국 거짓말로 들통 난 후에 더욱 심하게 괴롭힘을 당할 때 혜성같이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신지”와 “교스케”의 소중한 친구가 되어주는데 원래는 없었을 존재였기 때문에 어디서 온 누구인지? 그 정체가 수상쩍습니다.
중간에 오두막이던가, 셋이 같이 놀러 갔다가 “유짱”이 바닥에 떨어진 그 무엇을 바라보던 장면에서 혹시나 했었는데... 으음 결론은 의외로 현실적인 끝맺음이었어요. 그지만 “유짱”의 정체와 운명이랄까 하는 대목은 끝내 감정이 북받치면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어요. 시간이 지나 이젠 웬만큼 정리했지만 아직 코끝이 시큰하군요. 마음을 뒤흔들 줄 몰랐거든요 ㅠㅠㅠ
그렇게 10대 시절의 아픈 성장통을 겪는 동안 우정의 참 의미를 깨닫는 바람에 방황하지 않고 올곧게 나아가는 “신지”와 “교스케”, 두 친구를 보면서 참 따뜻하고 훈훈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호러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우리가 미처 의식할 새도 없이 지나버린 그 시절에 대한 향수와 추억, 연민과 따뜻한 위로가 담겨있어 슬픔과 애처로움이 상쇄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서 읽었던 단편집보다 진일보한 정서로 예상치 못한 재미를 안겨준 “츠지무라 미즈키”의 얼굴이 평소보다 정감 있어 보입니다. 비록 미의 기준으로 판단할 문제는 아니지만...
이제 그녀의 장편은 또 어떤 느낌일지 상상하면서 다음 작품으로 만날 날을 기약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