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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다크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평점 :
확실히 무라카미 하루키는 에세이보다 소설이 더 취향에 잘 맞는 듯하다. 아직 완전히 녹아들었다, 빠져버렸다고까지 호언장담할 정도까지는 아니나 <도쿄기담집>으로 촉발된 하루키식 감성이 스물 스물 차오르는 문체가 점차 좋아지려한다. 쌉싸름한 그 맛이다. 시작부터가 관찰자적 시점인데 도시의 밤하늘을 날아다니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보는 활강 같은 분위기가 여기저기 탐색을 하다 서서히 한 곳으로 포커스를 둔다.
‘데니스’라는 레스토랑. 자정을 4분 남겨둔 11시 56분이다. 심야임에도 여기는 손님이 제법 차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미칠 때 창가자리에 앉은 마리라는 아가씨에 주목해보자.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그녀를 스쳐 지나가던 한 청년이 문득 알아보더니 뒷걸음치며 그녀에게 말을 걸며 합석을 청한다. 언니의 이름을 어설프게 기억하는 그 청년은 다행히도 방해가 되질 않았고 두 사람은 음악을, 고교시절 그리고 살면서 느끼는 잡다한 추억과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것으로 찰나의 인연으로 끝나버릴 것인가, 청년이 자리를 떠나고 난 후 이번에는 가오루라는 여성이 청년의 소개로 찾아왔다며 그녀에게 중국어 통역 도움을 요청한다. 러브호텔의 매니저인 가오루는 매춘녀를 폭행하고 금품마저 들고 줄행랑을 친 남자의 행방 수소문을 중국인 범죄조직에 의뢰하는 동시에 피해녀의 구호를 위해 마리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그 와중에 피해녀와 마리 사이의 교감이랄까 공감, 연민이 따스하다.
이제 자정을 훌쩍 넘기게 되지만 마리는 볼일을 다보고도 집에 들어가지를 않는다. 가족 중 누구하나 이런 상황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그녀가 쿨 한척 해보지만 이미 외롭다 고독하다는 감정에 상처받을까 지레 거리를 두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백설 공주같이 이쁜데다 우등생으로 살아온 언니에 대한 열등감 속에 체념적 태도로 방어적인 시간을 보냈던 마리의 마음. 불현듯 서서히 그것을 열어 속에 담긴 인연, 사랑 그리고 인생이라는 틀에 대응해나갈 밑천을 마련해주는 청년이 있어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그 과정의 변화가 심심치 않게 다가왔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마리와 그녀의 언니가 교차시점으로 그려지는 구성을 넘나들면 보면 청년의 말처럼 틀을 깨고 나온 것은 동생이요,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되어 계속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언니는 관찰될 뿐 어떠한 개입도 없기에 혼자 방치되고 있었다. 들어 줄 대화상대도 없이 화면의 안과 밖에서 계속 갇혀있는 언니가 얼마나 쓸쓸해보이던지. 내가자는 모습도 관찰하면 저럴까?
결국 시간이 어느 덧 아침 6시 52분을 가리키는 순간 비로소 평행선을 달렸던 자매가 서로의 체온을 느낄 때 안식과 평온이 찾아온다. 하여 간결하면서도 담백한 흐름이 매끄럽게 굴러가며 아름답다 처연하다는 감상을 남기는 <애프터 다크>는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불야성을 이루는 도시의 밤을 자장가로 잠재우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같이 날 밤 깐 것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