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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 꽃잎보다 붉던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품절
당신 가슴속을 좀 들여다보구려. 평생에 걸쳐, 거기, 당신 가슴속에 내가 집 하나를 지었소. 고대광실로다가. 죽은 다음에도 들어가 살 집. 당신 가슴속인데 당신 허락을 받지 않고 몰래 지어서 미안해요. 미웠던 적은 있었지만, 당신과 헤어지고 싶었던 순간은 한 번도 없었소. 그런 점에서 나는 성공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참, 아무것도 후회하진 말아요. 후회하면 당신 가슴속에 지은 내 집이 무거워질 거요. 아이고, 그 집이 무거워지면 당신, 무슨 수로 걷고 춤출 수 있겠소. 당신은 춤출 때가 가장 아름다운데. ( p.266~267)
박범신 작가의 <당신-꽃잎보다 붉은>이다. 시작은 2015년, 한 할머니가 시체를 집 마당에 묻고 있다. 일흔여덟 살의 윤희옥 할머니가 묻는 사람은 막 죽어 경직이 시작된 남편 주호백이었다. 아주 담담하게,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윤희옥 할머니는 몰래 처리하고서는 경찰에게는 남편이 실종되었다고 신고한다. 그리고 남편의 일기를 우연히 집안에서 발견하는데, 아! 평소 아내를 죽이고 싶어 했다는 고백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남자의 속마음이 이럴 줄이야. 이 이상한 풍경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주호백이란 남자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사망신고 대신 실종신고를 택했던 윤희옥은 주호백과의 사이에 딸 주인혜를 두었지만 두 사람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었다. 윤희옥과 주호백의 인연은 코흘리개 꼬마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때부터 이미 연상이었던 윤희옥을 누나라 부르며 언제나 곁에서 사내아이는 맴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데서 슬픔은 시작되고 마는데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윤희옥을 사랑했던 주호백과는 달리 윤희옥의 삶은 다른 남자의 등을 해바라기처럼 하염없이 쳐다보기 때문이다.
김가인의 등을 보는 윤희옥, 그런 그녀의 등만 보는 주호백. 윤희옥이 김가인의 아이를 배어 그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주호백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출산하는 순간에도 주호백은 묵묵히 그녀를 받아들인다. 그러면 뭐하겠나? 김가인을 찾아 나선다고 딸을 내팽개친 후 집을 나간 아내, 딸 인혜는 친아빠가 아니란 사실에 반항만 하는데... 주호백은 속이 썩어문드러질 상황에서도 내색 않고 두 여인을 헌신으로 아끼고 또 인내했다.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온 주호백이 노인이 되어 뇌출혈에 치매까지 걸려 아내와 딸을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이 되자, 아내 윤희옥은 뒤늦게 남편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용서를 구하게 된다. 누나라 부르며 순종했던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 시대를 감안하면 파격적이었으니 수직적인 관계가 비로소 수평을 이루면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던 남편 주호백은 마음속에 억눌러왔던 한을 아내에게 퍼부을 때 가슴이 저릿하고 슬픔이 치밀어 오르게 한다.
“당신”이란 호칭을 평생 못 부르다 이런 상태에서 부른다는 게 얼마나 애달픈 것인가, 이제 50대로 들어선 딸아이와 함께 실종된 남편의 자취를 찾아 떠도는 여정에서 마음의 짐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한 남자의 순애보는 그 어떤 그릇으로 담을 수가 없었으니 감정 선을 톡톡 건드리며 밀고 들어오는 뭉클함에 마음으로 울어버렸다. 그렇게 우리들은 사랑이 영원하기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균형을 이루지 못한 채 누군가는 감내해야 하는 슬픔 속에서 일생을 고통 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호백, 이 남자처럼. 그래서 노회한 작가는 아무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저 넓은 눈 속의 들판처럼 가슴 한켠에 그리움을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당연히 올해 가장 빛나는 소설.
그를 품고 선 매화나무가 가끔 흔들렸다. 괜찮아. 아빠는 네 곁에 있어.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날이 저무는 중이었다. 나는 손바닥 두 개를 가만히 내 가슴에 얹었다. 인혜와 내가 공통으로 가진 회한이 있다면 사랑이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자기희생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는 그 점일 터였다.(p.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