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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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읽었는지, 들었는지 아리송하게 출처를 알 수 없지만 '80%를 차지하는 하루키의 소설보다 20%를 차지하는 하루키의 에세이가 더 좋다.' 라는 말은 그만큼 글로벌 소설가로서의 위상 못지않게 그의 에세이는 독자적인 인기와 위상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에 열광하는 마니아층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그의 소설 속 세계관은 난해하다는, 그래서 하루키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식자층을 대변하는 척도처럼 가늠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에세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일상 속의 소소하고 자글자글한 소재들을 담백하고 편하게 풀어내고 있어 일반 독자층에게도 어필될 만한 공동 환영구역인 것이다.

 

이번에 이야기할 에세이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에서도 특유의 위트 있는 제목과 안자이 미즈마루의 삽화로 함께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는 가감 없는 순수한 딴지 걸기로 시작해서 끝내 마음을 자잘하게 파고드는 수다로 삶이 지향해야할 목표점 대신 삶에 대한 시선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하는지에 귀결시켜버린다. 청춘이 끝나는 시점에서는 세월이 거둬들여야 하는 몫으로 간주하여 세월이 세월의 기능을 다함으로서 우주의 질서를 바로잡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이 드는 게 딱히 서럽지 않다는 것이 하루키의 주장인 바, 그 점도 괜찮고 어쩔 수 없으니 굳이 개똥철학으로 인생을 논하지 않는다. 그냥 맘 편히 먹고 순리대로 살자는 그 말에 서른을 앞두고 청춘이 끝났다며 절망감에 꺼이꺼이 눈물 콧물 질질 짜던 그때 그 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그 즈음에 이 책을 만났더라면 달관된 마음가짐으로 이십대와의 고별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십년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라는 뒤늦은 결과론도 상상해 본다.

 

지금 있는 것은 지금의 나이지 과거의 내가 아니다. 나는 어떻게든 지금의 나와 잘해보는 도리밖에 없다. 하루키의 청춘고별사는 그런 식으로 막연한 심적 상황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준다. 길지 않은, 결코 호소력이 짱인 문구가 아니더라도 제멋대로인 삶의 방식으로 적당히 애정하고 텅 빈 곳간을 채워놓아 삶을 포용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는 간절함을 넘어 조율된 화음으로 세월을 연주하는 거다. 제목인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은 쌍둥이 여자 친구를 갖고 싶은 하루키의 엉뚱 발랄한 발상을 함축적으로 집대성하고 있는데 쌍둥이 여자 친구가 생겼을 경우 현실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놀이기구를 탈 때나 데이트 약속 날짜 잡는 것까지 발생 가능한 여러 불편사항을 조목조목 나열하면서 진지한 가운데 실소도 자아낸다.

 

하지만 뭐 어쩔건대? 청춘 고별사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과 원칙 및 취향의 잣대에 따라 은밀하게 분열하고 증식하는 것이 그의 영원한 백일몽이다. 그렇게 삶에 결코 좌지우지되지 말고 뒤늦은 대처로 한탄하지 않으면서, 한 번쯤 가까이 다가가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게끔 하는 마력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번 에세이는 한 번에 탈탈 털어 읽을 것이 아니라 시간 날 때마다, 생각 날 때마다 머리맡에 두고서 조금씩 읽으라는 추천사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더니 팥빙수 맛이네. 이거 시원 달달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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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6-1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1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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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혼자 사는 여자 침실에 몰래 들어가 성 폭행하고 배를 갈라 자궁을 꺼냈던 잔혹한 엽기 살인마 '앤드루 캐프라'. 4명의 여자들을 같은 수법으로 살해했던 그는 다음번 희생자로 선택했던 캐서린 코델 박사에게 결국 총에 맞아 죽는다. 그런데 3년의 세월이 지난 후 보스턴에서는 또 다시 자궁이 없어진 채 살해된 여자들의 시체가 연이어 발견되는데 앤드루 캐프라의 솜씨를 재현해낸 것 같은 해부학적 솜씨와 지식을 가진 살인마를 세상은 "외과의사"라고 부른다. 이에 보스턴 경찰서의 강력반 형사 토마스 무어와 제인 리졸리는 캐프라의 마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캐서린 코델 박사를 이번 사건 해결의 실마리로 삼아 풀어가려하는데, 과연 살인마는 앤드루 캐프라의 부활인가? 아니면 모방범의 수법인 것인가?

 

"의사라는 경험은 다른 이의 가장 내밀한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유리창과도 같다.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비극을 숱하게 보아왔고 위기에 처한 가족의 최선과 최악의 모습을 모두 목격했다. 의학적 훈련은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안겨 준다." - 테스 게리첸 -

 

<외과의사>는 전직 의사출신이자 메디컬 스릴러의 여왕이라 불리는 테스 게리첸의 리졸리&아일스 시리즈의 1탄이다. 게다가 아 소설은 RHK의 국내 출간작 중 가장 많은 판매부수의 기록을 남겼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정확한지 확인할 방법은 없으나 크나큰 인기와 호평을 얻은 작품임에는 분명한 듯하다. 더군다나 메디컬 스릴러라는 장르는 스릴러라는 큰 뿌리 속에서도 좀처럼 접하기 힘들었던 줄기인지라 강도 높은 표현수위와 문체와 더불어 전인미답의 설레임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소설 속 살인마 외과의사는 피가 가진 원시성과 육체의 해부에 지적 흥미와 쾌감을 느끼는 야만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소설 중간 중간 외과의사의 독백에 의한 시점을 빌려 기괴한 범죄 심리를 엿볼 수 있게 하는데 고대 아즈텍 문명의 희생제의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용, 시험관 속에 담긴 피를 보며 느끼는 변태적 성향, 자신의 롤 모델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 등을 통해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는 살인동기로 변환되면서 대단히 소름끼치는 촉매제 역할을 충실히 재현해낸다.

 

분명히 외과의사는 정상의 범주를 넘어선 인물이다. 그가 선택한 희생자들을 하나같이 사냥감으로 간주하고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생포하고 살인의 유희를 펼친다는 점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통제하고 있는 야만성이라는 최악의 본성을 우리 모두는 대신 관음적인 시선으로 목격하고 있지는 않을까라는 의구심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희생자로서의 억눌린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여성들의 위축된 심리와 아픈 상처를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서 남성 위주의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이 그녀들에게 얼마나 깊은 갈등과 고뇌를 내면깊이 무겁게 짊어져야 하는 것인지 절절한 고통으로 다가오게 하기도 한다.

 

무릇 약자인 여성에게 살아서도 죽어서도 인격체로서의 존중 대신 마구 난도질을 선물하는 외과의사에 의한 희생도 그렇거니와 늘 방어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여 형사 제인 리졸리에게서도 그러한 아픔을 느낄 수 있다. 그녀는 남자 형제들 사이에서 자라 가족들의 무관심과 차별 속에 성장했으며 경찰이 되고 나서는 동료들에게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따돌림당하고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자연히 남성위주의 사회구조에 반감을 가지게 되면서 화장기없는 투박한 얼굴에 공격성향적인 성격까지 갖추고 있는데 내, 외적 갈등을 끊임없이 겪으면서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은 투쟁심으로 똘똘 뭉친 그녀를 보며 많은 여성 독자들이 공감하며 지지를 보내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희생자들을 보나 리졸리를 보나 현재를 살아가는 세상 모든 여성들에게는 지금이 수난의 시대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같은 여성으로서 작가는 문제 제기와 함께 분노와 좌절, 공포를 토해내는데 시종일관 강력한 에너지가 소설 전반에 걸쳐 투영되면서 독자들을 책 속으로 붙들고 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결국 제인 리졸리라는 캐릭터에 있다. 비록 그녀가 처한 현실은 누구라도 동의하게 되는, 불합리하고 억압된 구조 속에 놓여있는 것은 분명하나 모든 원인을 주변 여건에 돌린다면 이 점에 대해서는 반박하게 된다. 자신보다 더 매력적인 여성에게 질투와 시기를 보내는 모습이라든지(사실 그 여성은 아무런 죄가 없다. 오히려 주위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희생자일 뿐이다.) 인격적으로 미성숙하며 치기어린 말과 행동으로 타인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고 만다. 오! 맙소사 이렇게 비호감적인 주인공이라니!

 

게다가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리졸리보다 무어를 더 정감 가는 캐릭으로 설정해놓고 수사의 큰 흐름을 쥐고 있는 역할을 부여하여 사실상 주인공을 무어로 만들고 있는데 변변한 활약조차 없이 징계를 먹어 무관심 속에 방치되던 리졸리. 작가는 "아! 그래 내가 주인공인 너를 깜빡 잊고 있었구나. 미안해." 라고 하듯 갑자기 리졸리를 사건해결의 무대로 소환해낸다. 그것도 사무실에서 입 벌리고 자고 있다가 문득 깨어나 무어가 조사해 온 수사 자료에서 밥에 숟가락만 얹듯 단서를 포착해 범인을 검거하러 납시니 이렇게 어이없는 전개란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아무리 주인공이라지만 너무 한 것 아닌가? 주인공에 대한 애정인지 무관심인지 종잡을 수 없는 작가의 의도가 비호감적인 캐릭과 허술한 전개를 낳으면서 급격한 하강국면으로 인도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치명적인 약점이랄 수 있겠다.

 

물론 시리즈의 출발점이다 보니 여러모로 부족했던 점은 왠만큼 용인이 필요하겠다. 리졸리도 불평불만 대신 실력을 키워 당당히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성숙함을 보여주는 전개가 후속 시리즈에서 분명 보여줄 것이라 예상해본다. 또한 의사라는 과거경험을 되살려 생사를 넘나드는 의료현장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윤리와 의학 윤리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설계를 시작한 캐서린 코델의 앞날에 축복하고 싶다는 점에서도 소중한 갈채를 보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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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난 시체의 밤
사쿠라바 카즈키 지음, 박재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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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무지무지 덥다. 찌는 무더위에 잠이 좀처럼 오질 않아서 책과 함께 긴긴 밤을 사투 속에 보내고 있는 상황,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사무실에서 이 책을 수령하였다. 여직원이 무슨 책이냐며 호기심을 비치면서 책을 문득 들어보더니 단박에 기겁을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시무시한 책의 제목에 대한 거부반응이었으니, 나를 한심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어찌 이런 극악무도한 책을 읽느냐며, 게다가 목이 뎅강 잘려나간 인형의 표지그림까지 지적하며 혀를 끌끌 차기까지 하네. 음지에 숨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장르소설 독자의 고충을 또 한 번 되씹게 되는 현실에 한탄하면서 이 계통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며 따져들고 싶었지만 참고 넘어가 버렸다. 게다가 난 남자라구, 쯧.....

 

그렇게 섬찟한 포스의 제목을 보여주는 사쿠라바 가즈키의 이 이야기는 우리네 일상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소비자금융, 즉 사채지옥의 끔찍함과 벌린 입 속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의 피폐하다 못해 나락의 구덩이로 떨어져버린, 파괴된 삶을 몸서리치게 다룬다. 소설 속 이야기를 간단히 해보자면 중년의 번역가 요시노 사토루는 고학생 시절 하숙했던 고서점에 들렀다가 자신이 지냈던 방에 하숙하고 있는 묘령의 여인 시로이 사바쿠를 알게 된다. 사토루는 대학 강사와 번역가로 남 보기엔 번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사채 빚에 내몰리고 있는 채무자 신세이다. 사바쿠도 요란한 대출광고에 현혹되어 결국 다중 채무자로 전락하고만 신세로 둘의 관계는 처음에는 사토루의 성적 욕망에 의해 육체적인 관계로 시작하지만 이윽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사토루에게서 본능적으로 돈 냄새를 맡게 된 사바쿠는 그가 번역에 대한 인세를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아채고 돈을 달라고 보채기 시작한다. 비디오로 둘 만의 정사를 녹화, 이를 협박용으로 쓰려고 했고 이를 눈치 챈 사토루는 외딴 오두막으로 그녀를 유인해 토막 살인해 버린다. 그녀의 손가락을 잘라 병 속에 수집품처럼 지니고 다니는 사토루는 그녀가 자신처럼 사채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게다가 성형수술에 가명까지 써서 위장된 신분을 쓰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은 사바쿠의 행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화차" 속의 그녀랑 무척이나 닮아있다. 내가 본 "화차"는 소설이 아니라 한국 영화이고 사바쿠는 본인의 무분별한 소비행태에서, 영화 "화차"의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아버지의 빚이 족쇄처럼 대물림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비참한 현실과 죽음이라는 엔딩은 끝내 둘 다 피해가지 못했다.

 

그렇게 돈이라는 것은 말이지. 우리가 땀 흘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면 성취의 열매로 뚝 떨어져 손에 쥐게 될 만큼 그리 눅룩치 않다. 화사한 돈 꽃을 피우고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 우리들 소망이지만 이 소설에선 순진한 믿음이 아니냐며 독자들을 맘껏 조롱하는 거 같다. 현실에서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소득은 없고 카드 빚은 날로 늘어 사채에까지 손을 대고 마는 많은 사람들, 사채란 것은 금전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튼튼한 동아줄인 것처럼 미소 띈 가면으로 '돈은 얼마든지 가져다쓰세요' 라며 선심 베풀 듯 한다.

 

'빌려 쓴 돈 곧 갚아야지'라며 다짐하건만 사바쿠처럼 지옥은 입을 벌려 어느새 집어삼키기 시작하고 정신차려보면 자신의 몸뚱이는 이미 토막 나 버리게 되는 것이다. 다시는 못 되돌릴 과거의 핑크빛 삶은 책장을 넘길수록 막막한 한숨으로 갈기갈기 찟겨 다가오는데 불안, 절망, 공포가 한데 섞여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게서 마구 휘둘리면서도 끝내 읽는 것을 중단할 수 없는 이유는 각각의 등장인물의 개별적 시점이 하나의 틀을 완성해나가는 구성에서 흥미를 느끼는 동시에 썩어 문드러진 삶의 냄새에서 경각심을 느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매일같이 사채광고는 전화로도 걸려오고, 휴대폰 문자로도, TV에서도 돈이 넘쳐흐름을 주체 못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지만 그것을 살아가는 동안 끝내 피해갈 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장담 못한다. 그냥 어둡고 무겁고 비참한 이야기들에서 교훈을 반추하고 현재의 힘든 삶을 헤쳐 나가며 고집스럽게 앞만 보고 나아가자고 밖에 내 놓을 결론은 없겠다. 그렇다면 돈에 지배받지 않고 우리네는 멀지않은 미래에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 왔는지는 사토루의 노년에서 해답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

 

"본래, 돈이라는 것에는 폭력성이 있네."

돈이란 말이지, 없으면 사람을 곤궁하게 만들고.

있으면 있는 대로 질투나 원망을 사게 만드는,

굉장히 성가신 물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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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동서 미스터리 북스 52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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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의 진정한 묘미는 완전범죄라는 튼튼한 벽돌을 보기 좋게 깨 부시는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범인이 누구냐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심증은 있되, 물증은 없어 범인으로 단정할 수 없는, 만약 지목한 대상이 범인이라면 그야말로 천재적인 발상과 트릭으로 완벽하게 무장하여 빈틈을 조금도 내보이지 않는 철옹성을 구축해 놓고 공권력의 무기력함을 가면 속에서 비웃고 있을게다. 세상은 그를 완전무결한 존재로 둔갑시켜 놓았고 추적자는 몇 번의 좌절 속에서도 끈질긴 집념과 상식을 뒤집는 새로운 관점으로 마침내 깨뜨리고 들어가 공든 탑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순간, 독자는 말할 수 없는 희열 속에 빠지고 만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점과 선>이 그러한 케이스에 해당된다. 대단하다고 인정하고 싶은 추리소설의 수작이란 이런 것이다. 이 소설은 어느 추운 겨울 바닷가 바위에서 한 쌍의 남녀가 동사한 채 발견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독극물을 마시고 나란히 情死(정사)한 것으로 추정,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어 종결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죽은 남자의 옷에서 열차에서 이용한 1인분 식사영수증이 발견되면서 누군가는 의혹을 품게 된다. 같이 열차를 타고 간 남녀가 왜 혼자서만 식사를 했을까?

 

얼핏 별일도 아닌 것처럼 비치던 사건에 다른 관점이 불을 지피는데다 출발역에서 이들이 같이 열차를 타고 있는 것을 목격한 남녀가 있었다. 평소 각 플랫폼은 출발하는 열차와 정차 중인 열차가 한데 뒤섞여 다른 폼에서 해당열차를 볼 수 있는 것은 특정시간대의 단 4분뿐. 그 시간대외에는 다른 열차에 가려 보이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4분간의 목격자는 우연이 아니면 작위의 냄새를 풍긴다.

 

미하라 경부는 당시 목격상황을 만든 야스다를 범인으로 점찍고 그의 알리바이를 집요하게 캐기 시작하지만 그는 사건 전후에 살인 장소와는 반대인 훗카이도로 출장 중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게다가 목격자까지 있다. 헛 다리를 짚은 것일까? 아니다 직감은 그를 범인으로 강력히 가리키고 있다. 동기만 추축할 수밖에 없는 기묘함 속에 정밀한 치밀함과 숨 막히는 진실공방이 허를 찌르고 이야기가 전개되면 사건은 실마리도 없이 미궁 속으로 깊숙이 빠져드니 세상에 완전범죄란 가능하단 말인가?

 

야스다의 용의주도함이 낳은 난공불락의 성, 그 성을 함락하려고 하는 미하라 경부하의 치열한 공성전은 제목 그대로 전혀 상관관계가 없을 것 같던 무수한 점들이 어느 지점, 어느 시점에 만나 하나의 선을 그으며 마침내 끝자락에 도달하게 되는데 진실에 가 닿기까지 비장의 카드인 시간표를 이용한 트릭을 퍼즐 짜 맞추듯 엮어 나가는 작가의 솜씨가 발군이요, 명불허전이다. 그렇게 무릎을 일순 탁 치게 만드는 그런 소설, 오랜만에 추리소설다운 추리소설을 만나는 순간, 진실을 쫓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는 그 어떠한 검은 의혹도 결코 비켜갈 수 없다는 결말에는 손가락이 절로 치켜세워진다. 그러니까 사소한 단서들을 토대로 트릭을 밝혀내는 천재적인 추리야말로 추리소설 본연의 쾌락이 아니겠는가? 진심으로 인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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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53-1960 환상문학전집 30
아서 C. 클라크 지음, 고호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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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클라크는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과 함께 과학소설의 3’로 불리는 명실상부한 과학소설의 거장으로 출중한 과학 기술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미래를 철학적인 세계관으로 접근하는 관점의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작가보다 오히려 미래를 족집게 같이 예언한 미레학자로 더 유명하고 현재 우리가 이용하고 있는 인터넷, 통신 위성, 우주 정거장 같은 것들 모두 작품에서 미리 예견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작두 타는 무당 정도로 오해해선 곤란하지. 아서 클라크가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것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던 날카로운 통찰력에 있다고 한다. 아서 클라크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로 가장 유명하지만 평소 그의 작품들을 쉽게 접할 기회가 자주 있는 것은 아닌데 시대 순으로 발간된 단편 전집은 우주여행의 시작부터 최고 정점에 이른 후대까지 순서대로 즐기면 된다는 이점이 있고 우주에 대한 인간의 동경이 위트와 진한 감수성이 한데 섞여 진국을 자랑한다. 물론 단편별로 각기 다른 개성을 선보여 이해정도도 천차만별이지만 이거야말로 진정한 과학소설의 표본임은 구 누구도 부인 못할 것이야. 퐈이야!!

 

<백일몽>에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상상력이나 더 적은 상상력이 아니다. 상상력 그 자체다.”라는 멋진 명언을 작가는 남긴다. 절대 공감이다. 어디 과학소설에서만 통용되는 명언일까? 세상의 모든 대중문화가 개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튀는 것만 좆을 때 그 어떤 것도 새로운 것은 없노라는 명제는 진짜 중요한 것은 상상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든지 창작 대신 변형된 산물로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도 마찬가지로 기존작에 아이디어만 더 해도 혁신은 가능하다. 그것이 발전의 원동력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뼛속 깊이 재밌는 단편은 1937년에 발표된 <유선전송>이 되겠다. 이해도 쉽거니와 유머에 대한 공감도 놀랄 만큼 일치한다. 일단의 과학자들이 수차례 실험의 장고를 거듭한 끝에 세계최초의 유선전송장치를 개발해내는데 성공한다. 이제 이 기술은 돈벌이 사업으로 이용되는데 처음에 사람을, 이후에는 하루에 수천 톤의 화물을 전송하는 혁신적인 시스템이다. 신간 구입 시 이 시스템을 이용하면 온라인에서 결제 즉시 바로 책을 받아보게 되는 기쁨 두 배의 혁신이 될 터인데 실제로 이 기술의 개발이 시급하다, 그러면 택배아저씨는 더 이상 볼일이 없겠지. 또한 이 시스템은 여러 가지로 장점과 단점을 고루 보여주시는데 차량이동이 줄어드니 교통사고 사망자도 덩달아 줄어드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있지만 사람을 전송하던 중에 택배 분실처럼 600만명 중에 한 명 꼴로 실종되는 치명적 오류도 있으니 무조건적인 맹신은 금물일 듯싶다. 때때로 회로의 저항이 높아져 전송 고중 승객의 몸무게가 빠지는 기상천외한 결과도 나와 뚱뚱한 사람들의 다이어트용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수록작들 모두 맘에 든다. 고립된 우주공간에서의 고독함부터 외계문명에서 바라보는 우매한 인간세상까지, 이 모든 것이 상상력의 극대화가 이루어낸 산물이다. 그 누가 감히 예측하겠는가? 소설 속의 상상물들이 미래에 현실로 탄생할지 말이다. 이러한 상상력이야말로 과학발전에 지대한 영감을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기술의 폐해 또한 잊지 않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다. 앞만 보고 달리는 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아량마저 품에 넉넉히 안는 아서 클라크의 현명함이 서정적인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하는 보석 같은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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