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탈리아 작가 알렉산드로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는 삶이라는 길에서 진정성으로 밀려들었다가 관조하는 마음가짐으로 다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그 때 자동차는 탈 것으로 취급되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귀하디 귀한 신분이었다. 1903년 이탈리아 사람들을 열광시켰던 자동차 경주는 프랑스 파리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기적을 꿈꾸는 유럽 종단 대 경주에서 한계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수백대의 자동차를 구경하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 숨이 턱에 찰 정도로 쫓아 내달리고 우승자를 가리기 위한 레이스는 항상 많은 사고를 불러일으켰다. 통제되지 않는 상태에서 군중 쪽으로 돌진해서 사람을 치는가 하면 레이서 본인조차도 척수를 다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결국 숨을 거두는 비극도 심심찮게 일어났지만 속도경쟁은 아랑곳없이 대중적 인기는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진정한 데스 레이스였던 셈이다.

 

여기 한 부자가 있다. 이탈리아의 어느 시골 마을에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고 있는 리베로 파르리라는 남자와 그의 아들 울티모가 말이다. 어린 울티모는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맞을 정도로 병약했으나 다행히도 살아남았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우리는 자동차를 고칠 거라고 말해주었지만 울티모는 자동차 정비보다 서킷에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만드는 것이 일생의 꿈이 된다. 자동차라는 괴물이 굉음을 울리며 달려오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않고는 두려움 대신 강렬한 욕망과 충동을 느낄 뿐인 울티모는 원점으로 회귀하는 지향성에서 순수와 아름다움을 생각하면서 잊혀지고 놓쳐버릴 것 같은 예감에도 사로잡히는 것이다.

 

두가 자동차를 몽롱한 눈길로 탐닉할 때 울티모가 꿈꾸었던 서킷에는 세상 어디에서 출발하여 갈래길로 나누어져도 결국 하나의 종착역으로 통하는 그 길의 끝이 기다리고 있으니 매혹된다. 자유로운 기분, 모든 중압감에서 완전히 해방된 기분이 느껴진다. 어디로도 통하지 않지만 지상의 모든 길을 하나로 아우른다는 그 원대한 포부로 인하여 길이 통하는 땅은 특별해지니 그것만을 위해 살고 있다는 울티모를 보며 변변한 희망마저 내려놓고 사는 나 자신의 현재가 씁쓸해진다.

 

울티모가 식당 여주인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라든지 마무리 짓지 못한 꿈을 다른 이가 완성 짓는 결말을 보는 것까지 후반으로 넘어갈수록 무엇인가 아련하면서도 뭉클해지고 엇갈리는 인연은 안타까움을 낳는데 단정하면서도 강렬한 여유가 깊게 스며든다. 그래서 아찔할 정도로 기분이 묘했다. 읽으면서 마치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며 굽이굽이 돌아다니는 것만 같은 요상한 리듬감은 또 어찌 이해해야할까? 그 길이 운명이었음을 자각한 이 남자를 보며 우리는, 아니 나 자신은 무엇을 바라고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다시 또 돌아보게 된다. 그 의문에 해답을 던져줄 것만 같은 <이런 이야기>는 진정한 감동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5
우타노 쇼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요 네스뵈의 사인회가 있던 날, 일부러 그를 직접 보기 위해 상경했다가 예상치도 않게 블로그 이웃님들을 만나서 자리 옮겨 수다 떨었던(난 거의 경청) 일이 생각난다. 요 네스뵈의 실물을 코앞에서 목격한 것도 진기했지만 온라인에서의 만남이 오프라인으로 이어질 확률적으로 더 희박했는데 우야동동 이웃님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각자가 추천하는 책들이 있었으니 일단 머릿속으로 저장해두었다. 나중에 읽어야지. 다 알고 있는 책들이지만 평소 그냥 패스했던 책들. 이쯤해서 궁금해졌다. 누군가에겐 강추인 책들 모두 내게도 통할 것인가 라고 말이다. 그래서 먼저 읽게 된 이 책, 우타노 쇼고의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이다.

 

 

지방 소도시의 대형 슈퍼마켓에서 보안책임자로 일하는 히라타는 물건을 훔치다 걸린 이십대 여성 스에나가 마스미를 훈방조치 한다. 대형마트에 밀려 경영악화로 존폐의 위기에 놓인 회사사정을 감안하면 단 한건의 절도도 그냥 인정으로 보아 넘길 수가 없는 중요하고 민감한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증을 확인하고서는 마음이 바뀌었던 것이다. 히라타는 과거 10대였던 딸을 뺑소니로 잃었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충격에 의한 정신분열 증세가 있었던 아내와도 사별한 남자이다. 그때 한때 결혼생활에서 봄 같은 나날이 있었고 가정보다 일을 중시해 미친 듯이 회사일에 매달렸던 적이 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샐러리맨들이 열병 앓듯이 청춘을 불사르니 바야흐로 봄에서 이윽고 여름이라는 절정으로 내닫는다.

 

 

힘든 줄도 모르고 젊음을 믿고 성공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맛보기 위해. 히라타도 능력을 인정받아 회사 내에서도 고속승진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끼어든 불행이라는 먹구름이 승승장구에 제동을 건 셈이다.이제 그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혼자 남았다. 회사 내에서도 입지는 추락한다. 자원해서 여기로 왔다. 절도범 마스미에게서 왠지 모르게 딸을 떠올린다.

 

 

인생의 마지막으로 내달리는 남자와 인생에서 루저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해 미래가 존재 않는 여자의 만남은 주위의 불편한 눈초리와 오해를 넘어서 동병상련의 처지로 가까워졌다. 희망을 놓은 히라타는 호의를 준비하고 그런 호의에 보은으로 답례하려는 두 사람은 어떤 잔인한 인연으로 엮여 들어간다마침내 결말은 비극으로 치닫는데 이런 상황이 과연 반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랬다. 가을도 없이 즉시 겨울에 빠진 남자에겐 그녀의 선택은 마지막 구원이자 정리였을지는 알 수 없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지옥의 불구덩이에 깊이 빠져 억만겁의 고통을 겪게 될 그 남자에겐 모르는 게 약이었을 것이다. 알고 나면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그녀가 당초 의도했던 바에서 시스템이 오버해 폭주하고 만 것은 인생을 믿는 사람에게 불확실한 오류로 되돌아온다는 좌절이다. 의미를 찾는 동안 절망의 끝에는 남자라는 비애가 쓸쓸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틀 드러머 걸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4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수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반목과 상처, 증오를 남긴 채 30이 지난 현재도 끝나지 않은 비극이다. 역사와 국가의 대립은 필연적으로 정보전을 낳게 마련이고 국제 정세의 민감한 흐름 속에서 개인의 존재와 가치가 어떻게 소모되고 희생당하며 잊혀져 가는지에 주목해온 그간의 작품세계와 궤를 같이 하는 작품 <리틀 드러머 걸>은 독일 바트 고데스베르트에서 사제 폭탄사건이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타겟은 이스라엘 노무관의 처삼촌으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성발언으로 주목받아 왔던 탈무드 학자였던 것.

 

 

그러나 애꿎은 희생자만 발생하였고 피가 피를 부르는 보복의 악순환이 반복된다.이에 이스라엘 정보국의 쿠르츠는 이 전쟁의 균형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시키고자 한다. 쿠르츠는 이 비밀 첩보작전의 계획을 짜기 위해 정예요원 3인조를 불러 모았고 3인조의 급조를 통하여 특별한 지위에 올라선 사병조직을 결정한다. 이 첩보작전을 최전선에 수행할 엘리트가 필요하였는데 이 표적으로 영국 여배우 찰리를 물망에 올려놓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것처럼 세심하고 치밀한, 당사자가 자신이 거미줄에 빠져든 줄도 모른 채, 서서히 포섭하여 세뇌시키기 위한 프로젝트에 착수할 필요가 있었다. 자국민이 아닌 제3국의 인물을 첩보원으로 등용하자면 강압이 아닌 자연스런 교육이 효과적이라 판단한 것이다. 적들에게도 의심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교적 마찰과 파장을 피하고 싶었던 이유에서다.찰리라는 여배우를 포섭, 세뇌하는 과정들은 한편의 연극대본을 짜서 사랑에 빠진 여심을 공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었다.

 

 

요제프라는 가명을 가진 요원을 자연스럽게 찰리의 주변에 투입한다. 그리고 조금씩 가까워지지만 직접적으로 이성으로서의 유혹을 섣불리 시도하진 않지만 이것만으로도 확실한 효과가 드러난다. 시크한 듯, 무심한 것처럼 굴다가 결정적일 때에는 밀당을 해서 두 사람  마침내 사랑에 빠진 연인사이가 된다. 사랑에 더욱 눈이 먼 쪽은 당연히 찰리였다. 요제프가 가르치면 귀를 기울였으며, 그가 원하면 무엇이든 할 것이며, 죽으라면 죽겠노라고 맹세하는 가련한 여인이다. 찰리의 마음을 공략하고 조종하는 요제프.

 

 

찰리가 처음부터 테러전의 첩보원으로 발탁된 진정한 이유는 그녀의 성격 때문이었다. 상당히 영리하고 배우로서의 재능도 갖춘 그녀지만 타고난 반골 기질은 임무수행에 더 없이 적합한 캐릭이었으니 유대인도 팔레스타인도 아닌 제3자로서 그나마 팔레스타인 측에 상대적인 호의와 지지를 보낸다는 정치적 성향을 다소 고려해야만 했다. 요제프는 그런 그녀를 아주 천천히 세뇌시킨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먼저 이용한 후 그녀의 직업적 특성인 연기라는 측면을 비집고 들어간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연극은 사적인 고백이 아니라 실용적이어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의식화 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더불어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이 논리를 그들은 대테러에 대항하는 선전선동으로 감화시키고자 했고 완전히 말려든 찰리를 보면서 이데올로기라는 맹목적 신념 앞에서 마치 무대에 캐스팅된 배우가 생과 사를 연기하는 것과 과연 다를 바 없는 것인지에 대한 회색빛 공허감이 밀려든다. 그런 만큼 배우에게 중요한 무대에서의 연극을 보다 더 큰 현실이란 공간에서 펼치는 그 연기란 행위를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이고 만 찰리와 그녀를 지켜보는 나 자신이 소속에 대한 정체성에 상당한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그녀는 과연 이스라엘의 편에서 일하고 있는 지, 아니면 팔레스타인의 편에서 일하고 있는 것인지 마지막 페이지에 다가가면서도 끝내 확신할 수 없었다.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닐 것이다.

 

 

확신할 것은 단 하나, 비정한 세계에서 사랑 하나만을 믿고 전선을 누비고 다닌 그녀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객관적 시각에서 재조명할 기회를 던지고 무대 뒤로 쓸쓸히 사라지는 순간 그토록 역설했던 사랑의 고귀한 가치는 묵직한 감동과 여운을 남겼다는 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물리학자의 비행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히스토리 팩션계의 거봉 로버트 해리스의 <어느 물리학자의 비행>은 금융경제와 IT산업과 스릴러가 크로스 오버하는 형식의 작품으로 스위스 제네바의 증권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쩐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 알렉산더 호프만은 천재 물리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로, 스위스의 CERN(유럽 원자핵 공동 연구소)에서 일했던 천재이다. 강입자 충돌기 분야에서 6년 있었고 인공 지능의 알고리듬을 연구하다 파트너 휴고 쿼리를 만난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호프만 투자 테크놀로지를 창립하여 헤지 펀드를 내놓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해지를 헤지로 잘못 표기한 것 아닐까 할 정도로 생소한 용어였다.

 

 

헤지 펀드는 주식시장에서 투자심리 위축을 미리 예상하여 주가가 하락할 때 매입하여 수익을 올리는 방식인 듯 한데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호프만 투자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사고능력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방대한 정보와 각종 변수들을 대입하여 컴퓨터의 알고리듬이 주가를 분류, 판단하도록 하는 인공지능시스템을 통해 투자자들을 불러 모으려던 참이었다.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호프만은 자신이 주문한 적도 없는 찰스 다윈의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이란 고가의 고서가 자택으로 배달되어 온 것이다. 인간의 다양한 감정 상태를 흑백사진 속에 묘사하여 동물적 반응을 그려낸 연구서였다. 특히 두려움이 극한에 이르면 어떠한 변화에 도달하게 되는지 관심을 둘 것을 암시하는 것 같은 메모의 삽입이 들어있어서 더욱 께름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보냈는지, 무슨 이유로 보냈는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보안이 철저하다고 자부했던 그의 자택에 괴한이 침입하여 습격을 하고 사라지는 일까지 일어난다.

 

 

신변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세계증권가의 주가 등하락을 실시간 체크하며 헤지펀드가 가져다줄 부의 창출에 혈안이 되어있는 호프만은 돈 앞에서 냉혈한이 되어버리는 남자였다. 수익에 좀 더 집중하고자 했지만 자신의 신분을 도용한 누군가가 선물로 보낸 이유는 정신세계를 분열시켜 미치도록 만들고자 하는 음모가 아닐까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요새는 뜸해 보이기는 한데 예전에 주식열풍이 불 때 퇴직금 중간정산을 받아 주식에 몽땅 투자했다가 쪽박 찬 사람들을 많이 목격하였다.

 

 

그 방면에 완전 무지했던 나는 주식은 마약과도 같다고 생각하였고 간혹 수익을 낸 사람들을 보며 군침 흘리며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한번 주식에 빠지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고 오로지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일이 만사가 되어버린 폐인들의 대박 꿈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때를 돌이켜보면 이 소설 속에서 돈이 돈을 낳는 황금알에 감히 눈길 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전인미답의 세상이다. 전 세계의 돈은 그렇게 흘러 들어가고 있다. 돈을 물어다주는 전설적인 창업자 호프만의 복음은 신도들에게 신화가 되어가려던 참인 것이다.

 

 

알고리듬에 바탕을 둔 특별한 투자펀드를 앞세워서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두려움에 빠지는 순간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행동하며 공황을 먹고 사는 알고리듬은 이익 창출 가능한 데이터로 수정한다는 그 이론과 논리 앞에 다수는 철저히 무력하다. 자본주의 시대는 철저히 돈이 매긴 가치에 지배당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배제한 디지털 머니가 변동성 수준이 위험한 수준에까지 폭주하는 후반부는 대공황을 불러 올 수 있을 정도의 가공할 위협이었다. 이야기의 그 흐름을 쫓아가기 위해서라도 분명히 이번에도 공부해가며 읽어야 할 스릴러임에는 틀림없다.

 

 

자상하게 설명해 준다고는 하나 기초적인 지식이 없으면 계속 돌파해 나가는 데에 무리가 뒤따르는 것도 사실이니까. 그래서 염려도 된다. 과연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연출할 영화는 스릴러적 감성 외에 관객들을 어떻게 이론무장을 시킬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는 점에서. 덧붙여 이 소설의 한글제목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The Fear Index>가 어떻게 <어느 물리학자의 비행>이 되었는지를... ! 그러고 보니 호프만이 원래 물리학자였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명인
쓰카사키 시로 지음, 고재운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이미 예감하고 있었던 것일까? 머릿속을 지배하는 불길한 느낌을 감지하고서도 도리야마 도시하루는 결혼하고 처음 맞는 생일에 집에서 아내와 오붓한 저녁약속을 위해 돌아갈 때만 해도 애써 기분 탓이려니 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지하철 개찰구를 빠져 나올 때 아는 척 하던 남자도 무시했다. 그런데 그가 집에 도착하니 기이한 그림이 펼쳐져 있다. 조명 나간 거실은 컴컴한데다 웬 촛불이 열일곱 개씩이나 세팅되어 있질 않나. 결정적으로 아내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뜨악하고 있을 때 걸려온 낯선 이의 전화는 멘붕에 빠진 도리야마의 귀를 의심케 하는 아내 미유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아니, 그럼 아내랑 판박이처럼 닮은 저 시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곧이어 두 남자가 형사라고 신분을 밝히면서 자신을 들쑤시다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도리야마는 좀 전까지 누워있던 아내의 시체가 깜쪽같이 사라진 것에 당황하여 도주하기 시작한다. 도주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방문객의 정체를 폭로하며 도주하라 부추긴 전화가 또 왔고 이에 주저함 없이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만약 나라면 이 상황에 어찌 대처하였을까? 막막하였을 것 같다. 다급히 쫓기는 신세를 보호해줄 바람막이가 변변히 존재하기나 할까, 세상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불확실성의 연속에서 천운처럼 도움을 주는 오쿠무라 지아키는 인생은 예측불가의 변수가 분명 있는 듯하다. 그녀의 정체가 궁금하고 낯선 이를 돕는 의도에 불순물이 섞여 있지는 않는지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 의심했으니 설마가 사람 잡을 확률에 대비했던 것이다.

 

 

 

그녀의 도움을 받으며 도리야마는 과거 자신의 인생이 조작되어 있다는 충격적 진실에 직면하는데 기억의 왜곡이 정말 흥미진진하다. 전형적인 음모론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열심히 앞만 보고 살아온 과정을 헛되게 무너뜨릴 반전이 있다면 얼마나 허무해질까? 반대로 밋밋하고 평범한, 불행한 삶을 살아온 나 자신이 누군가의 기억으로 세뇌당해 왕자가 거지된 것 같은 형국이었다면 이 또한 정체성에 대혼란을 느껴 바로 잡고자 하는 욕구로 발버둥 치며 보상받고자 했을 것 같다. 도리야마는 결국 이중생활은 한 셈인데 축적되어 있던 기억을 싹 밀어내고 다른 기억으로 장착되면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산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론이 무척이나 신선하다.

 

 

 

몸은 하나, 인생은 리필. 그야말로 진시황이 그토록 염원하던 불로불사가 영험한 약초 같은 식이요법의 효능에 기대지 않더라도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건 획기적이다. 발상의 전환이란 이런 것이지. 좋은 기억만 들고 이 몸에서 살다가 몸이 사멸하면 다른 몸으로 이사하면 되니까 무한리필이 가능하다는데 정말 나 자신부터 실현하고 싶은 꿈같은 과학이다. 윤리적 문제는 도외시하고 책 속의 미스터리와 문학적 완성도까지 제외하더라도 그 같은 기술에 입각한 상상만 내내 하는 동안 기분이 업 되는 착각 속에서 읽게 된다. 영화로도 나왔지만 책이 주는 미묘한 기분은 생생하다. 상상력과 추리, SF가 절묘하게 융합하여 재밌는 스릴러로 탄생했으니 칭찬하고 싶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