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인
쓰카사키 시로 지음, 고재운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이미 예감하고 있었던 것일까? 머릿속을 지배하는 불길한 느낌을 감지하고서도 도리야마 도시하루는 결혼하고 처음 맞는 생일에 집에서 아내와 오붓한 저녁약속을 위해 돌아갈 때만 해도 애써 기분 탓이려니 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지하철 개찰구를 빠져 나올 때 아는 척 하던 남자도 무시했다. 그런데 그가 집에 도착하니 기이한 그림이 펼쳐져 있다. 조명 나간 거실은 컴컴한데다 웬 촛불이 열일곱 개씩이나 세팅되어 있질 않나. 결정적으로 아내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뜨악하고 있을 때 걸려온 낯선 이의 전화는 멘붕에 빠진 도리야마의 귀를 의심케 하는 아내 미유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아니, 그럼 아내랑 판박이처럼 닮은 저 시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곧이어 두 남자가 형사라고 신분을 밝히면서 자신을 들쑤시다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도리야마는 좀 전까지 누워있던 아내의 시체가 깜쪽같이 사라진 것에 당황하여 도주하기 시작한다. 도주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방문객의 정체를 폭로하며 도주하라 부추긴 전화가 또 왔고 이에 주저함 없이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만약 나라면 이 상황에 어찌 대처하였을까? 막막하였을 것 같다. 다급히 쫓기는 신세를 보호해줄 바람막이가 변변히 존재하기나 할까, 세상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불확실성의 연속에서 천운처럼 도움을 주는 오쿠무라 지아키는 인생은 예측불가의 변수가 분명 있는 듯하다. 그녀의 정체가 궁금하고 낯선 이를 돕는 의도에 불순물이 섞여 있지는 않는지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 의심했으니 설마가 사람 잡을 확률에 대비했던 것이다.

 

 

 

그녀의 도움을 받으며 도리야마는 과거 자신의 인생이 조작되어 있다는 충격적 진실에 직면하는데 기억의 왜곡이 정말 흥미진진하다. 전형적인 음모론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열심히 앞만 보고 살아온 과정을 헛되게 무너뜨릴 반전이 있다면 얼마나 허무해질까? 반대로 밋밋하고 평범한, 불행한 삶을 살아온 나 자신이 누군가의 기억으로 세뇌당해 왕자가 거지된 것 같은 형국이었다면 이 또한 정체성에 대혼란을 느껴 바로 잡고자 하는 욕구로 발버둥 치며 보상받고자 했을 것 같다. 도리야마는 결국 이중생활은 한 셈인데 축적되어 있던 기억을 싹 밀어내고 다른 기억으로 장착되면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산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론이 무척이나 신선하다.

 

 

 

몸은 하나, 인생은 리필. 그야말로 진시황이 그토록 염원하던 불로불사가 영험한 약초 같은 식이요법의 효능에 기대지 않더라도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건 획기적이다. 발상의 전환이란 이런 것이지. 좋은 기억만 들고 이 몸에서 살다가 몸이 사멸하면 다른 몸으로 이사하면 되니까 무한리필이 가능하다는데 정말 나 자신부터 실현하고 싶은 꿈같은 과학이다. 윤리적 문제는 도외시하고 책 속의 미스터리와 문학적 완성도까지 제외하더라도 그 같은 기술에 입각한 상상만 내내 하는 동안 기분이 업 되는 착각 속에서 읽게 된다. 영화로도 나왔지만 책이 주는 미묘한 기분은 생생하다. 상상력과 추리, SF가 절묘하게 융합하여 재밌는 스릴러로 탄생했으니 칭찬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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