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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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의 연금술, 천의무봉의 서술, 칼날 같은 통찰력!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다소 뜬금없지만 피천득 선생의 <인연>에 나오는 이 글귀는 어쩌면 <기나긴 하루>를 대하는 나의 심정이기도 하고, 박완서 선생이 걸어오신 삶을 대변하는 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생전에 그분의 소설을 한 번쯤은 읽어줘야지 하면서도 정작 발길을 돌려 다른 책꽂이를 연신 기웃거리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내내 마음 한 구석에 선생의 존함 석 자를 담아두며 그리워했었다. 그리고 2011122일 선생은 영면하셨다. 세월이 흘러, 타계 1주기에 맞춰 마지막 소설집이 출간되었으니 이름하여 <기나긴 하루>라고 한다.

 

이 작품집은 고인이 작고하기 전까지 발표한 세 편의 소설과 신경숙 외 2명의 작가들이 추천한 세 편의 소설을 합쳐 총 여섯 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 마지막 작품집이다.<기나긴 하루>에는 일제 치하와 6.25 전쟁과 분단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팔십 인생을 사시며, 한국사회에서 겪은 개인의 아픔들을 때론 묵묵히, 때론 오열하며 보낸 감정들을 사실에 허구를 보탠 수기 같은 형식으로 그려낸다.

 

6.25 때 오빠하고, 끝내 자기 자식을 두지 못해 나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었던 삼촌이 비참하게 죽었다. 남들이 다 남쪽으로 피난 가 있는 동안 남아 있던 우리 식구들은 강제로 찢기고 일부는 북으로 끌려가야 하는 고난을 겪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인들 안 당했겠는가.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악인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다.”

- 본문 중에서 -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병석에서도 젊은 후배작가들의 단편들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는 한결같은 의연함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깨뜨리지 않으셨으니 마지막 작품집은 그래서 모든 수록작들이 예사롭지 않으며 읽고 나면 가슴이 진정 먹먹해진다. 그 중에서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아들을 먼저 보낸 어미의 고통을 압도적인 슬픔으로 치환시켜 가슴을 찢어발기는데 모성애를 이토록 극대화시킨 작품을 한국문학에서 이제껏 접해볼 수 있었는지 감히 가늠키 어렵다. 사실에 기반을 둔 수기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소설이며, 고통을 치유하는 기록을 넘어서 위로받고자 하지만 되려 대성통곡을 하고 만다.

 

생때같은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서 소멸했어요. 그 바람에 전 졸지에 장한 어머니가 됐구요.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될 수가 있답니까. 어찌 그리 독한 세상이 다 있었을까요, (중략) 형님 절더러는 어찌 살라고 세상에 형님이 우신대요? (중략) 형님은 저에게 통곡의 벽이었으니까요. 울음을 참고 살 때도 통곡의 벽은 있어야만 했어요. 통곡의 벽이 우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대요.

- 본문 중에서 -

 

친구가 를 뺑소니 사고로 하반신 불구에 치매까지 걸린 아들을 돌보느라 일상이 지옥이 되어버린 어느 여인의 집으로 데려간다. 그렇게 함으로서 타인의 고통으로 자신의 고통을 희석시키고자 한 배려로 풀이되지만 는 그래도 살아있는 아들을 둔 그 여자에게 참을 수 없는 질투를 느껴 대성통곡을 하고 만다는 이야기에서 아들을 완전히 가슴에 묻지 못한 모친의 처절한 고통을 너무나도 뼛속 깊이 전달한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데 감당키 어려운 처절함이다.

 

이렇듯 선생은 한 사람의 손녀로, 딸로, 아내로, 며느리로서 한국사회의 시대적 변혁과 이데올로기의 혼돈을 몸으로 부딪쳐 온 생생함을 가슴 저미는 글의 힘을 빌어 잘 그려내셨다. 그래서일까 신형철 평론가는 해설에서 소설의 가치를 정서적, 미학적, 인식적 가치로 분류하여 좋은 소설이란 이 셋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경우라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서의 연금술, 천의무봉의 서술, 칼날 같은 통찰력!”이라는 글귀는 홍보를 위한 포장이 아니라 한국 소설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과물의 가치가 여기에 담겨 있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찬사이리라

 

아름다운 작가 박완서!!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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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무덤 모중석 스릴러 클럽 15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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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극을 다룬 스릴러 중에서는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마지막 카드는 그녀에게>와 더불어 단연 발군의 인기를 얻고 있는 작품이 바로 제프리 디버의 <소녀의 무덤>일 것이다. 핸디, 윌콕스, 보너 이 세 명의 죄수들은 교도관을 살해하고 교도소에서 탈옥한다. 이들은 도주 중에 농아학교의 스쿨버스를 점거하고 열 명의 농아를 인질 삼아 캔자스의 어느 도살장에서 인질극을 벌이게 된다. 그리하여 경찰과 인질범 그리고 인질 사이에는 범인 검거와 인질 석방, 그리고 법의 심판을 벗어난 일탈의 자유를 위한 대가를 놓고 벌이는 심리전의 공방이 오가게 되는데 12시간 동안의 리얼타임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이 소설에는 인질 협상 전문가와 인질범이 벌이는 밀당하는 심리전에서 예전에 보았던 영화 <네고시에이터>에서 보았던 급박한 스토리 전개를 그대로 체험할 수 있으며, 제프리 디버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강력한 반전 또한 절대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또한 인질극 와중에 발생하는 대치상황에서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전시장도 구경시켜 준다. 인생사의 또 다른 압축버전을 등장인물들의 성향에서 관조할 수 있다는 점은 이 소설의 재미를 다른 시점에서도 추출해낼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인질극에서는 최소한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관점에서는 인질들의 털끝 하나 다치는 일 없이 무사하게 사건을 풀어보겠다는 이상주의나 만용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계산을 바탕으로 두고 있는 협상 전문가 아더 포터를 대변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어떠한가? 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알 권리를 당연하게도 들이대는 개념 없는 언론과 무력진압 대신 설득으로 평화적 해결을 시도하는 낭만주의자도 나서서 사건을 진화하기보다 방화 수준으로까지 불씨를 확 살리기도 하지. 정말 어딜 가나 눈치없고 코치없이 물을 흐리는 암적인 존재들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독자들의 분통을 열어준다 

 

 

하지만 시궁창에도 연꽃이 피어나듯 경찰과 인질범의 대치과정에 보이지 않은 틈을 제공하는 농아 교사 멜라니의 활약상도 있으니 무조건 분개할 일은 아닌 듯하다. 인질범들이 인질을 한명씩 석방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포함되지 않음에 절망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각오를 다잡아 인질구출에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데 일조하게 되면서 박수갈채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유일하게 긍정적인 평가를 부여할 수 있는 캐릭터인 것 같다.

 

또한 인질들이 모두 농아이기 때문에 의사소통 불가라는 악조건을 걸어놓은 디버의 착상이 뛰어난 점은 흥미진진하면서도, 제목에서 말하는 <소녀의 무덤>은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는 결말에 도달해서야 어렴풋 판단할 수 있다. 정상인이 아닌 농아 소녀들이 겪어야 했던 불안과 공포의 12시간은 그녀들의 여린 영혼 대신 잠식당해 고갈해버린 황폐한 영혼으로 대체해버렸으며, 차갑고 냉혹한 현실은 소녀의 종말을 고하는 상징적인 비유를 담는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이제 순수의 시대는 찾아오지 않을 거야. 되돌리지도 못하고 막아주지도 못한 어른들의 책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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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미스터리 2012.봄 - 35호
청어람M&B 편집부 엮음 / 청어람M&B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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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 새벽부터 내리던 비가 지금도 그칠 줄 모른다. 봄을 재촉하는 비라는 생각에 마음은 차분해지고 조용한 사무실 분위기 속에서 그 누구의 속박도 없이 종일 책을 읽는다. 바쁜 업무도 당분간 없어 시간의 자유는 전부 책에 투자하는 중인데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독서의 여유로 나는 행복하다. 봄을 맞아 신간의 공세가 이어지고 있으니 밀린 책들을 하루바삐 완독하고 지름신 발동을 준비해야지...

 

방금 읽은 책은 한국 추리작가협회에서 발간한 <계간미스터리 통권35/ 2012년 봄호>이다. 해외에서 발간된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도 소장하고 있지만 이렇게 국내추리·미스터리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전문잡지도 첨 만나본다. 너무 해외로 시선과 관심을 돌린 것에 대해 자아발견 같은 자세로 대하게 되는데 예상보다 분량이 두툼하지는 않다.

 

구성은 내 고장 부산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서 20년째 추리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 추리소설의 대부 김성종 작가와의 대담, 에세이, 추리꽁트, 국내단편, 그림자재판 참가기, 해외단편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동안 몰랐던 국내 추리·미스터리 소설계에 대한 정보와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된 것 같다.

 

전 한국 추리작가협회장인 이상우 작가를 통해 한국 추리소설의 원조격인 김내성 작가와 방인근 작가에 대한 소개에서 추리의 불모지인 한국 추리문단의 척박한 토양에서 현재의 수준에 올라설 수 있도록 자양분 역할을 한 두 사람의 공로에 작은 지지를 보내면서 선구자가 지나간 길이 후학들에게 반면교사의 좋은 교훈이 되길 빌어본다. 그런데 최근 <김종서를 누가 죽였을까>를 최근 내놓은 이상우 작가의 단편도 실려 있는데 타작들에 비해 많이 평범하면서 성의가 부족해 보여 일말의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지만 향후 독자층이 기대하는 수준을 뛰어넘을 수 있는 깊이 있는 작품으로 다시 재회할 날이 오겠지.

 

국내단편 중에서는 오현리 작가의 <팔선연회투안>이라는 작품이 있다. 한중수교 20주년을 기념하여 문득 중국에서는 셜록 홈즈와 콜롬보, 필립 말로우를 각각 어떻게 부를까에 착안하여 신조어를 만들어낸 것이 미스터리가 아닌 미스토리(Mis-Story)라는 작가의 변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 시작된 이 단편은 중국 고대의 서로 다른 시대를 산 8명의 신선이 생일파티를 맞아 모인 가운데 일어난 절도사건을 현대적 해석과 절묘하게 접목시켜 포복절도할만한 유머를 터뜨려 주신다.

 

외래어와 현대문명 이기들을 한자로 풀어 설명하는 형식으로 가령 위스키를 위사기로 옮기는 건 약과에 불구하며, 삼편주(샴페인)가 도난당하는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계에서 명탐정과 경찰들이 등장하시는데 그때 술술 나오는 이름들이 정말 대박이다. 사락극 곽모사(셜록 홈즈), 옥삼(왓슨), 과륭박(콜롬보), 비리보 마락(필립 말로) 과남(코난), 아가사 격리사체(아가사 크리스티), 애륵리 규은(엘리러 퀸) 등등 변환된 한자어 표기와 발음은 작가가 동원할 수 있는 아이디어의 집대성으로 끊임없이 웃음을 자아낸다. 정말 머리가 잘 돌아가는데 ㅋㅋㅋ

 

그런데 사단이 발생한다. 삼편주 절도사건의 범인이 보여준 범행 수법이 애륵리 규은의 <하란피혜적비밀(Dutch Shoe Mystery)>에서 사용된 트릭과 일치하는 걸로 밝혀진다. 원작의 내용을 정말 친절(?)하게 풀어 설명해주는데 그렇게 드러난 범인의 정체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 중요한 점은 애륵리 규은의 <하란피혜적비밀(Dutch Shoe Mystery)>은 대기목록에 있던 소설인데 이렇게 적나라하게 해부해주는 친절 덕에 트릭을 이미 알아버렸으니 국명 미스토리와는 결국 이렇게 멀어지게 되는 운명이란 점이다. 스포를 마구마구 퍼뜨리면 난 어쩌라구, 그래 안 읽을거야 .

 

여기서 나의 좌절은 끝나지 않았다. 해외 단편으로 <실낙원 살인사건>이란 작품이 실려 있는데 차근차근 내용을 추적해가던 내게 화학, 의학, 생물학, 역사, 종교까지 경계를 허문 재료의 과감한 파괴 작업이 혼돈의 구렁텅이로 밀어버렸고 그렇게 헤매이다가 영문도 모른 채 마감하고 말았다. 작가가 보여주는 전개과정과 트릭이 당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두 손 두 발 모두 들게 하는데... 이건 현학의 극치가 아니던가! 그래서 작가가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기이한 작품을 썼나 싶어 확인해보니 <흑사관 살인사건>을 남긴 오구리 무시타로였다. 일본 탐정소설 3대기서 중 하나인 <흑사관 살인사건>을 쓴 작가라서 그런지 이 단편 또한 정말 해독불가 수준으로 포장해버렸다. 이 작품도 그런데 아직 구경도 못한 <흑사관>은 오죽 하겠는가! 원래부터 읽을 생각이 전혀 었었던 이 작가는 나랑 진짜 인연이 없다니까. 또 한 번 급 좌절 .

 

그렇게 거듭된 좌절 속에서 잡지를 다 읽고 나면 드는 첫 생각은 작품들마다 편차가 너무 심하다는 것과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 작품이 일부 불필요하게 실려 있다는 점이다. 또한 초반에 실려 있는 내용들은 문맥 연결이 매끄럽지도 않으며, 하려던 말을 서둘러 정리하는 것 같은 성급한 구성과 전개가 눈살을 찌푸리게도 한다. 아직 우리는 한참 멀었다는 뼈저린 반성을 요하는 점은 이 잡지를 구태여 다시 찾아 읽게 만들 매력을 상실하고 있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좀 더 각고의 분발한 치밀한 연구로 한국 추리·미스터리계의 앞날을 열어갈 시금석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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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간 후 너는 죽는다 밀리언셀러 클럽 9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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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에게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예지능력이 있다면? 아니면 누군가가 당신에게 미래를 사전에 알려준다면? 다카노 가즈아키의 <6시간 후 너는 죽는다>는 이러한 초능력을 지닌 한 청년과 그로부터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되면서 인생의 위기를 대처해나가려는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는 이색 단편집으로 도발적인 제목에서 연상되는 추리극의 형식을 빌려 초현실적인 전개 속에서 희망, 좌절, 추억 등 다양한 느낌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읽는 동안 등장인물들에게 강한 감정이입에 빠져들게 된다.

 

6편의 단편들 중 <6시간 후 너는 죽는다>에서는 말 그대로 6시간 후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살해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하라다 미오가 살아남기 위해 예지자인 야마하 케이시와 협업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범인의 정체가 설득력대신 억지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3시간 후 너는 죽는다>에서 다시 재회하여 인연으로 이어진 케이시와 미오의 이야기는 충분히 만회하고도 남을 재미를 안겨준다.

 

자신의 죽음을 예지하게 된 케이시가 자신 외에 행사장의 많은 군중들이 불의의 사고로부터 희생된다는 미래도 같이 보게 되면서 제한된 시간동안 사고의 발화를 밝혀내기 위한 고군분투로 가슴 졸이는 다이내믹함도 일품이었지만 미오를 살리고자 하는 배려심과 희생정신에 마음이 정말 짠했다. 죽음에 초연해버린 한 남자의 진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생사고락을 같이 헤쳐나간 두 사람이 소중한 인연으로 맺어지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단편을 꼽자면 <돌 하우스 댄서>를 들 수 있겠다. 프로댄서로서의 꿈을 키우며 오디션에 응시했던 여주인공이 우연히 미래를 보게 된다. 그것은 자신은 낙방하여 울게 되고, 같이 응시한 친구는 합격하며 기쁨을 맛보는 장면인데, 이 무슨 가혹한 운명의 장난인지 친구는 때마침 경미한 부상을 입는다. 간단한 응급조치를 친구에게 해준다면 그 장면대로 자신은 그대로 낙방이, 친구는 회복하여 합격이라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미래가 기다리는 것이다.

 

이대로 모른 채 외면하여 자신이 기쁨을 누릴 것인지 아니면 양심대로 친구의 치료를 도와 정해진 수순을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고민 끝에 결국 친구를 돕는데 역시나 예견된 미래는 바뀌지 않았던 것. 불합격의 고배를 마신 여주인공이 울면서 숙소를 나오게 되는데 진심 울컥해버렸다. 과거 나 자신의 참담한 실패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던 거다. 그 당시 얼마나 비참했던가! 몇날 며칠을 방안에 틀어박혀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끊임없이 자학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이 단편 속의 주인공들이 겪게 되는 배고픈 현실과 기약 없는 암담한 미래 속에 좌절해버린 청춘의 꿈들을 같이 심정적으로 동정하며 싸구려 감상주의에 젖어들었다. 오호 통재라~~~

 

그렇게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우리네 인생살이는 어쩌면 운명이라는 끈에 묶여 정해진 길을 이탈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거기에 순응하여 평범한 일상으로 살지 않고 변화를 꾀한다면 나비효과가 되어 또 다른 진흙길을 질퍽거리며 밟게 되어있을 것만 같다. 아니면 자신의 노력을 보태 약간의 경로 수정을 할 수 있는 선택받은 소수도 분명 존재하겠지.

 

마지막 단편에서 미래라는 여백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은 개개인의 몫이라는 식으로 저자는 피폐해진 마음을 달래주려고 하지만 그래도 내게 이러한 예지능력이 있다면 인생이라는 큰 도화지 전체를 가득 채우지는 않더라도 당장 눈앞의 문제점과 고민들을 가까운 미래를 알게 됨으로서 조금이나마 수정해나가고 싶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때 그렇게 하지 않은 데에 대해 후회하며 피눈물을 닦아내지 못할 것 같다. 산다는 것은 동일 선상에 발을 올려놓은 공정한 레이스가 결코 아니며, 후회 없는 삶이란 때론 위선과 기만을 적당히 첨가해야만 굴러갈 수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여기 등장인물들의 속 터지는 선택 대신에 타인의 피와 땀에 대한 부분 담보와 그리고 기회박탈을 통해서라도 말이다. 젠장 부러운 건 그냥 부러운 거다.

 

“6시간 후 당신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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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바라는 기도 밀리언셀러 클럽 48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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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제 이 시리즈도 서서히 종착역을 향해 한걸음씩 내딛는 중이다. 마지막 편이 될 <문라이트 마일>이 아직 국내에 출간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비를 바라는 기도>는 루헤인의 차기작을 제목처럼 가뭄에 단비 내리길 바라는 심정으로 읽었고 역시나 재미있다. 이번에는 인간의 심리를 조종하는 정체불명의 살인마와의 대결이다.

 

한 여성이 켄지를 찾아와 자신을 스토커하는 남자를 처리해달라는 의뢰를 한다. 의뢰대로 켄지와 부바는 그 남자를 찾아가 먼지 나듯 털고서는 두 번 다시 의뢰인의 삶에 태클 걸지 말 것을 경고한다. 그런데 그 의뢰녀는 얼마 후 자살하게 되고 켄지를 그녀의 행적을 탐문한 결과 그녀의 자살을 유도한 미지의 살인마가 배후에 있다는 걸 밝혀낸다. 그 수법은 표적을 공황상태로 몰아붙여 세상과의 단절을 이끌어내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였던 것. 나중에서야 살인마의 정체는 물론 직업까지 드러나는데 우리가 일상에서 거리낌 없이 만날 수 있는 직업군이라 별다른 신분을 예상했던 당초의 생각을 살짝 넘어서버렸다.

 

그러면서 살인마가 갱 조직을 사주하여 켄지를 위협하지만 이전에 가슴 아픈 사연으로 불의의 이별을 고했던 파트너 앤지의 도움을 받아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는 점은 읽으면서 '그래 다행이구나'라는 안도와 함께 두 사람은 공생공사라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음을 확실히 상기하게 된다.

 

그런데 처음 이 시리즈를 읽고 무엇보다 나를 흡족하게 했던 폭죽같은 유머는 확실히 유효펀치가 줄어들면서 점차 건조해지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액션만큼은 여전히 새끈하다. 한정적인 동선 내에서 짧고 강렬하게 폭발하는 그 순간만큼은 아찔하다 못해 호흡마저 멎는 듯하다.

 

내가 스릴러에서 제일 좋아하는 액션 묘사는 항상 이 시리즈에 다 있다고 인정할 만큼 최고라 생각해오면서 이번 화약고의 심지에 불을 붙이는 역할은 부바가 제대로 맡았다. 오해인지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부바의 생사에 먹구름을 암시하는 듯한 서평들을 예전에 접하면서 혹시나 하고 걱정했지만 역시 부바는 부바였다. 살인마에 대한 켄지의 분노를 발판삼아 마지막 처단은 정말이지 피도 눈물도 없이 지옥행 특급열차에 탑승시키는 괴력이 생생하게 부딪혀온다. 앞에서 견인하는 것은 켄지와 앤지이겠지만 부바가 없다면 누가 이 시리즈를 뒤에서 제대로 받쳐줄 것인가? 그런 평소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종살인병기 부바 로고프스키는 서포터즈 역할 대신 숨겨진 매력과 능력을 강렬하게 발산했다. 격하게 아낀다면서~~~~

 

그런데 마지막에 모든 것이 마무리되려는 순간 드러나는 배후의 진실은 앞서 읽었던 모 스릴러의 결말전개와 선택에서 여러모로 닮았는데 세상에는 법으로, 정의로도 어쩌지 못한 채 단지 덮어두어야만 하는 결정이 분명 존재한다. 굳이 구덩이를 파내어 들춘다면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을 잉태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심판은 하늘에 맡길 수 밖에.... 어차피 정의실현이라는 미명 또한 목적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취했던 비합법적인 조치에 대한 심판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타협 받았던 것은 주지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피장파장으로 셈해야 할지도 모를 이런 결말은 예전이라면 못마땅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서 와서는 부분 수긍하게 되는 까닭은 세상 속에 기생하는 어두운 인간심리를 완전 공감하긴 힘들어도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이라는 루헤인만의 필치로 설득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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